명혜공주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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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공주 묘(明惠公主 墓)
서삼릉 왕자공주 분묘 집장지 명혜공주 묘
식별자 RT007
분류 분묘
한글명 명혜공주 묘
한자명 明惠公主 墓
영문명 Tomb of Princess MyongHye
피장자 명칭 명혜공주(明惠公主)
피장자 이칭 미상
피장자 부 현종(顯宗)
피장자 모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
피장자 생년월일 1662.12.04
피장자 몰년월일 1673.04.27
초장 연월일 미상
초장지 기록 광주군 중부면 탄동 능원묘천봉안
초장지 기록1 능측(陵側, 헌릉(獻陵) 옆) 숙종실록
초장지 기록2 광주(廣州) 탄동(炭洞)(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선원계보기략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장 연월일 1936.05.24
이장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장지 좌표(위도) 37°66'49.51"N
이장지 좌표(경도) 126°85'95.20"E
지문 明惠公主之墓
지문 찬자 이왕직 예식과(李王職 禮式課)
지문 소장처 조선왕릉 서부지구관리소



목차

내용

조선의 제18대 왕인 현종(顯宗)과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차녀인 명선공주(1662~1673) 묘 이다.

명혜공주는 신정(申晸)의 아들인 신요경(申堯卿)과의 혼인이 결정되어 신요경은 동안위(東安尉)로까지 봉해졌으나, 1673년(현종 14) 4월 가례를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명혜공주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1675년(숙종 1) 사당을 세웠다. 이후 사당은 수진궁(壽進宮)에 속하게 해서 관리하였다.

초장지는 현재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일대로 추정된다. 1718년(숙종 44) 숙빈 장씨의 장지를 명선공주의 묘산 내 청룡 터에 입장(入葬)하려는 일이 있었으나 이를 금지시켰다.

김만기, 김석주가 찬술한 만사(輓詞)가 전한다.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1673) 4월 27일 병인(丙寅)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명혜 공주(明惠公主)가 죽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금 명혜 공주가 뜻밖에 죽으니, 애통한 나머지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다만 부마(駙馬)에 대하여 생각하면 비록 위호(尉號)를 정했으나 아직 납채(納采)의 예를 행하지 않았으니 이미 정혼하여 길례(吉禮)를 행한 것과는 다른 점이 있다. 고사(故事)의 유무와 위호(尉號)를 그대로 두느냐의 여부를 즉시 예조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니, 예조가 회계(回啓)하기를, "이는 국조(國朝)에 없었던 변례이고 또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습니다.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장가드는 데는 반드시 길일을 정하는데 여자가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사위가 자최복으로 조상을 하고 장사지내고는 벗는다.’고 하였습니다. ‘길일을 정한다.’고 한 것은 납채(納采)할 날을 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 명혜 공주는 납채한 일이 없었으니 길일을 정한 것과는 차이가 있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부마가 봉작(封爵)이 이미 정해진 뒤라서 여러 차례 금중(禁中)에 드나들었으니, 또한 고례(古禮)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처럼 더없이 중대한 변례를 신들이 감히 경솔하게 정할 수 없으니 유신(儒臣)을 시켜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게 하여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즉시 전례를 상고하여 품의하라." 하였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예기》의 증자문 한 조목은 근거할 수 없는 예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경(禮經)》을 두루 상고해 보아도 이번 경우와 근사한 것이 없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예관(禮官)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좌상 이경억(李慶億)이 의논드리기를, "제왕가의 혼례가 비록 사대부의 혼례와 다른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합근(合巹)을 하고 방을 함께 쓴 다음에 비로소 부부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혼례를 행하지 않았으면 부부가 될 수 없는데, 이는 귀천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번 공주의 죽음이 육례(六禮)를 행하기 전에 났으니, 부마의 봉작은 그대로 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체가 중대하므로 병들고 정신이 혼미한 신의 견해로는 단정하지 못하겠으니 삼가 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위호를 정한 뒤라 은의(恩義)가 있었으므로 그 봉작을 환수하려 하니 참혹하고 애통함을 견디기 어렵다. 다만 생각건대 오륜(五倫) 속에 부부(夫婦)가 한 조목을 차지했다. 그러므로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지금 불행하게도 공주의 초상이 뜻밖에 났는데, 고기(告期) 등의 예를 미처 행하지 못했으니 예에 이른바 ‘아내가 되지 못했다.’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부마에 대해서 그대로 위호를 두어 죽을 때까지 부부간의 즐거움을 갖지 못하게 하는 일은 인정으로 볼 때 더욱 차마 못할 일이다.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부마는 바로 동안위(東安尉) 신요경(申堯卿)인데 신정(申晸)의 아들이다.

明惠公主卒。 上敎于政院曰: "今此明惠公主之喪, 出於不意, 哀慟之餘, 他不暇及。 而第念駙馬, 雖定尉號, 時未行納采之禮, 與巳定婚吉禮者有異。 故事有無, 尉號仍否, 卽問禮曹以啓。" 禮曹回啓言: "此是國朝所未有之變禮, 又無文籍可考。 而《禮記》 《曾子問》, 有曰: ‘娶必有吉日而女死, 如之何?’ 孔子曰: ‘壻齊衰而弔, 旣葬而除之。’ 有吉日云者, 納采定日之謂也, 今此明惠公主, 旣無納采之事, 似當與有吉日云者, 有間。 而駙馬封爵, 旣定之後, 累度出入於禁中, 亦與古禮有異。 莫重莫大之變禮, 臣曹不敢率爾斷定, 令儒臣, 博考典禮, 稟定何如?" 上曰: "卽令考稟。" 弘文館啓曰: "《禮記》 《曾子問》一條, 不可謂無可據之禮。 而遍考禮經, 俱無近似於今日所遭者, 敢啓。" 上曰: "更令禮官稟處。" 禮曹請議大臣, 上許之。 左相李慶億獻議: "帝王家婚禮, 雖與士夫婚禮有異, 至於合巹共牢而後, 方成夫婦之義。 未行婚禮, 則不成爲夫婦, 此則無貴賤之殊。 況此公主之喪, 出於六禮未行之前, 則駙馬大封爵, 似不可仍存。 而事體重大, 病昏之見, 不可斷定, 伏惟上裁。" 上曰: "旣定尉號之後, 已有恩義, 故欲收其爵, 慘慟難堪。 而第念五倫之中, 夫婦居一。 故子思曰: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今也不幸, 公主之喪, 出於意外, 而告期等禮, 旣未及行, 則與禮所謂: ‘未成婦者無異。’ 仍存尉號, 終身使不得有室家之樂, 則揆以人情, 尤所不忍。 依議施行。" 駙馬卽東安尉 申堯卿, 晸之子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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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1673) 4월 27일 병인(丙寅) 1번째 기사



『숙종실록』2권, 숙종 1년(1675) 2월 3일 신묘(辛卯)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명혜 공주(明惠公主)·명선 공주(明善公主) 두 공주의 사당을 세울 때에 내사(內司)와 해조(該曹)는 제구를 관(官)에서 장만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命建明惠、明善兩公主祠堂, 內司及該曹, 官庀諸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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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2권, 숙종 1년(1675) 2월 3일 신묘(辛卯) 4번째 기사



『숙종실록』6권, 숙종 3년(1677) 4월 1일 정미(丁未)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지사(知事)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황해도의 내수사(內需司)에서 쌓는 둑은 비록 내수사의 종[奴]이 일을 한다 하지만 둑 하나에 역군이 거의 3천이나 들어가는데 백성들이 어찌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듣건대, 이는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 두 공주를 위해 전장(田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데 두 공주가 모두 출합(出閤)하기 전에 세상을 버렸으니 전장을 설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뒤에 마땅히 금지하겠다." 하였다.

知事吳挺緯曰: "黃海道內司築堰, 雖以內奴使役, 而一堰役軍, 幾入三千, 民安得不怨乎? 聞此爲明善、明惠兩公主設庄, 而兩公主皆未出閤而棄世, 安用設庄爲哉?" 上曰: "後當禁止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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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6권, 숙종 3년(1677) 4월 1일 정미(丁未) 2번째 기사



『숙종실록』14권, 숙종 9년(1683) 4월 26일 무술(戊戌)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인경궁(仁慶宮) 담장쪽 15간(間)을 떼어서 명선(明善)·명혜(明惠)·두 공주(公主)의 사당으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割仁慶宮墻垣十五間, 命給明善、明惠兩公主祠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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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14권, 숙종 9년(1683) 4월 26일 무술(戊戌) 3번째 기사



『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1684) 12월 25일 병진(丙辰)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지평(持平) 이두악(李斗岳)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단을 없애고, 위를 덜어서 아래에 보태주는 정치를 강구하고, 명선(明善)·명혜(明惠) 두 공주(公主)의 사우(祠宇)를 수진궁(壽進宮)에 옮겨 세워서 제사를 받들게 하되, 저축한 재물과 곡식은 모두 유사(有司)에게 돌려서 내년 봄 진구(賑救)하는 데 쓰게 하고, 각 아문(衙門)의 둔전(屯田)은 소재(所在)한 고을로 하여금 그 곡물(穀物)의 수량을 기록해서 진휼청(賑恤廳)에 일체 위임하여 주관하게 하되, 본 아문(衙門)의 1년 비용을 아울러 적당하게 주고, 그 나머지를 계산하여 진제(賑濟)에 대비하게 하고, 전관(銓官)에게 밝게 타일러서 수령(守令)을 신중히 택용(擇用)하게 하고, 감사(監司)를 칙려(飭勵)하여 거듭 고과(考課)를 밝히게 하고, 어사(御史)가 염문(廉問)하였을 때에 혹시 수령으로서 불법(不法)이 가장 많은 자가 있으면 감사도 아울러 죄주게 하고, 별도로 추천한 사람이 적당하지 못하면 이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또한 거주(擧主)693) 도 잘못 천거한 율(律)로 다스리게 하소서. 김중하(金重夏)는 죄가 이미 환히 드러났는데 양사(兩司)에서 번갈아 다투어도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최석항(崔錫恒) 등은 당직(戇直)694) 함이 숭상할 만한데 도리어 최절(摧折)함을 더하시니 마땅히 사랑하고 미워하심이 치우친 데 얽매여 있음을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가(可)하다. 의논하여 처리할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두 공주(公主)의 궁장(宮庄)을 그대로 두고 따로 사우(祠宇)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선조(先朝)의 유의(遺意)로서 하교가 정녕(丁寧)하여 아직까지 귀에 생생한데, 사헌부에서 혁파할 것을 청한 논의에 이 뜻을 자세히 갖추어 말하였는데, 미처 들어 알지 못한 것이 아닌가? ‘사랑하고 미워함이 치우친 데 얽매었다’는 등의 말은 마땅한지 알지 못하겠으나, 극진하게 말하고 숨김이 없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하였다.

持平李斗岳上疏: 請蠲除傷財病民之弊, 講究損上益下之政, 明善、明惠兩公主祠宇, 移建於壽進宮, 使奉祭祀, 所儲財穀, 盡歸有司, 以爲明春賑救之用, 各衙門屯田, 令所在邑, 錄其穀物之數, 一委賑廳, 使之主管, 本衙門一年之用, 竝令量宜以給, 而計其贏餘, 以備賑濟, 明諭銓官, 愼擇守令, 飭勵監司, 申明考課, 御史廉問之時, 或有守令不法之最多者, 竝與監司而罪之, 別薦不得其人, 則不徒斥退, 且繩擧主以誤薦之律。 金重夏罪旣彰著, 而兩司交爭, 竝不允, 崔錫恒等戇直可尙, 而反加摧折, 宜以愛惡偏係爲戒。答曰: "可以議處事, 令廟堂稟處。 兩公主之仍存宮庄, 別立祀宇, 實先朝遺意, 下敎丁寧, 尙今在耳, 頃於憲府請罷之論, 備悉此意, 無乃未及聞知乎? ‘愛惡偏係等說。’ 未知其得當, 而盡言無隱, 予用嘉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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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1684) 12월 25일 병진(丙辰) 2번째 기사



『숙종실록』19권, 숙종 14년(1688) 2월 26일 기사(己巳)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관원(官員)을 보내어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明安)·숙정(淑靜) 네 공주(公主)의 묘(墓)와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모두 광주(廣州) 지역(地域)에 있다. 임금이 명선·명혜 두 묘가 길 곁에서 가장 가까우므로 두루 보고 싶다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아뢰기를, "군주는 사묘(私墓)에 친히 가서 보는 일이 없으며, 길도 험하고 좁아서 행차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중지하였다.

遣官祭明善、明惠、明安、淑靜四公主墓及永昌大君墓, 皆在廣州地也。 上以明善、明惠兩墓, 最近於途傍, 欲爲歷臨, 問於諸臣。 皆曰: "人君無親臨私墓之事, 而路且險隘, 不可行。" 上遂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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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19권, 숙종 14년(1688) 2월 26일 기사(己巳) 4번째 기사



『숙종실록』23권, 숙종 17년(1691) 4월 2일 정사(丁巳)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이때 광주(廣州) 봉국사(奉國寺)에서 명선(明善)·명혜(明惠) 두 공주(公主)의 원당(願堂)에 그 목주(木主)를 봉안하고 해마다 봄·가을에 궁인(宮人)이 나가서 제사를 지낸다 하였는데, 대사헌(大司憲) 심단(沈檀)이 그것이 옳지 않음을 말하고, 민암이 말하기를, "예전에 봉선사(奉先寺)·봉은사(奉恩寺)에 열성(列聖)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는데 유생(儒生)의 상소 때문에 폐지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持難)하는 까닭을 경(卿)들이 스스로 알거니와, 이것은 갑자기 폐지할 일이 아니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드디어 힘껏 청하지 않고 물러갔다.

時廣州 奉國寺, 稱以明善。 明惠兩公主願堂。 奉安其木主, 每年春秋, 宮人出往行祭。 大司憲沈檀, 陳其不可。 閔黯曰: "昔年奉先、奉恩兩刹, 奉列聖位版, 因儒疏革罷矣。" 上曰: "予所持難者, 卿等可自知之。 此非倉卒革罷之事, 諸臣遂不力請而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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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23권, 숙종 17년(1691) 4월 2일 정사(丁巳) 4번째 기사


『숙종실록』26권, 숙종 20년(1694) 2월 26일 갑오(甲午)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임금이 제사를 지내고 또 친히 제문을 지어 명선(明善)·명혜(明惠) 두 공주(公主)에게 제사지내고, 관원을 보내어 영창(永昌)·평원(平原)·제안(齊安) 세 대군(大君)의 무덤에 제사지내게 했으니, 무덤이 모두 헌릉(獻陵)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上行祭, 且親製文祭明善、明惠兩公主。 遣官祭永昌、平原、齊安三大君墓, 墓皆在陵側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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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26권, 숙종 20년(1694) 2월 26일 갑오(甲午) 1번째 기사



『숙종실록』61권, 숙종 44년(1718) 4월 20일 무술(戊戌)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임금이 하교하기를, "숙빈(淑嬪)의 장지를 간심(看審)할 때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가 범연히 광주(廣州)의 경내에서 묘산(墓山)을 얻었다고 진달(陳達)함으로써 은연중 법금을 무시하고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의 묘산(墓山) 내의 청룡(靑龍)의 터에 입장(入葬)하려는 계책을 세웠으니, 일이 해괴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파직시키고 관원을 더 정하라. 그들로 하여금 우선 들어오도록 하고 다른 산을 바꾸어 구하게 하라."하였다.

上下敎曰: "淑嬪葬地看山時, 內官張厚載, 泛以得山於廣州境內陳達, 隱然爲冒禁入葬於明善、明惠兩公主墓山內靑龍之計, 事之可駭, 莫此爲甚。 罷職加定官, 使之姑爲入來, 改求他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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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61권, 숙종 44년(1718) 4월 20일 무술(戊戌) 1번째 기사



『숙종실록』61권, 숙종 44년(1718) 4월 29일 정미(丁未)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이때 숙빈(淑嬪)의 장지(葬地)를 택하였는데 호상 내사(護喪內使)와 본방(本房)의 직임을 맡은 자들이 처음에는 명혜 공주(明惠公主)와 명선 공주(明善公主)의 묘산(墓山) 근처에 택점(擇占)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명하여 다른 곳으로 바꾸어 정하게 하였다. 또 선릉(宣陵) 근처로 택점하였는데, 임금이 그 곳이 선릉과 서로 바라보는 곳이란 말을 듣고는 예조에 명하여 적간(摘奸)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계달(啓達)하기를, "사성(沙城)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능소(陵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니, 세자가 이것으로 임금에게 품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사성은 하나인데 전에는 왕후의 능이 바라보였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혈처(穴處)는 한가지인데,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장사지내는 것을 금하고 후정(後庭)에 있어서는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조정의 처분(處分)이 심히 공정하지 못하다. 다른 산으로 바꾸어서 택점하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時, 擇淑嬪葬地, 護喪內使及本房任掌輩, 始占明惠、明善公主墓山近處, 上不許, 命改卜他處。 又占於宣陵近處, 上聞其與陵相望, 命禮曹摘奸。 禮曹啓言: "升望於沙城之上, 不見陵所。" 世子以稟, 上下敎曰: "沙城一也, 而前則望見王后陵, 今則不見云, 已未可知。 穴處則一也, 而任他人則禁葬, 在後庭則許葬, 朝家處分, 甚不公正。 不如改占他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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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61권, 숙종 44년(1718) 4월 29일 정미(丁未) 1번째 기사



『경종실록』3권, 경종 1년(1721) 2월 21일 임자(壬子)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정소(李廷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이어 아뢰기를, "수진궁(壽進宮)은 곧 무후(無後)한 대군(大君)·왕자(王子)·공주(公主)·후궁(後宮)의 제사를 받드는 곳인데, 명선 공주(明善公主)와 명혜 공주(明惠公主)의 두 공주방(公主房) 및 소의방(昭儀房)도 또한 무후한 궁방(宮房)입니다. 만약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두 공주방 및 소의방을 수진궁에 이속(移屬)한 뒤 전결(田結)과 노비(奴婢)로서 파(罷)할 만한 것은 파하고 둘 만한 것은 둔다면 일분(一分)의 폐단이라도 없앨 수 있으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소서."하였다.

憲府 【持平李廷熽】 申前啓, 仍啓曰: "壽進宮, 乃無後大君、王子、公主、後宮奉祭之所, 而明善、明惠兩公主房及昭儀房, 亦無後宮房也。 若以明善、明惠兩公主及昭儀房, 移屬於壽進宮後, 田結、奴婢可罷者罷之, 可存者存之, 則庶除一分之弊。 請令廟堂, 劃卽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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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종실록』3권, 경종 1년(1721) 2월 21일 임자(壬子) 2번째 기사



『영조실록』83권, 영조 31년(1755) 2월 1일 을사(乙巳)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임금이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 두 공주의 사당에 나아갔다가 지나는 길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집에 들렀다. 명선 공주·명혜 공주는 바로 현종(顯宗)의 따님으로 출가하기 전에 일찍 죽었다. 임금이 그 묘우(廟宇)가 황폐하고 쓸쓸하다고 여겨 직접 임어(臨御)하여 경계시켰다.

上幸明善、明惠兩公主廟, 歷臨錦城尉 朴明源第。 明善、明惠卽顯廟出, 未及下嫁而殀。 上以其廟宇荒涼, 親臨而飭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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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83권, 영조 31년(1755) 2월 1일 을사(乙巳) 1번째 기사



『정조실록』8권, 정조 3년(1779) 8월 9일 경신(庚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온조왕 묘(溫祚王廟)와 현절사(顯節祠)와 영창 대군(永昌大君)·명혜 공주(明惠公主)·명선 공주(明善公主)·숙정 공주(淑靜公主)·숙경 공주(淑敬公主)·명안 공주(明安公主)·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묘(墓)와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사당과 험천(險川)·북문(北門)·쌍령(雙嶺)의 전망(戰亡)한 곳과 왕십리(王十里)에서 신해년에 굶어 죽는 사람에게 치제(致祭)하였다.

致祭溫祚王廟、顯節祠、永昌大君、明惠、明善、淑靜、淑敬、明安公主、忠獻公 金昌集墓、完豐府院君 李曙、文忠公 閔鎭遠祠、險川、北門、雙嶺戰亡處、王十里辛亥餓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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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83권, 영조 31년(1755) 2월 1일 을사(乙巳) 1번째 기사



『정조실록』49권, 정조 22년(1798) 9월 7일 정묘(丁卯)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가 아뢰기를, "내수사(內需司)가 보고해 온 데 따라 인성 대군(仁城大君)의 묘소에 한식(寒食) 제사를 드릴 때의 제품(祭品) 기수(器數)를 마련하여 별단(別單)으로 들입니다. 그런데 수진궁(壽進宮)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보건대, 병신년 4월 전교하신 데 따라 본궁(本宮)에서 각 사판(祠版)에 대한 시향(時享)과 묘제(墓祭)를 행할 때의 찬품(饌品) 및 의절(儀節)을 고루 나누어 규정으로 만든 뒤 지금까지 준행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판에 대한 시향은 2월과 8월 중순의 정일(丁日)에 행하고 묘제는 매년 한식에 행하는 등 모두가 예(禮)의 뜻에 맞았고, 제품의 기수를 정해놓은 것도 늘리거나 줄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명선 공주(明善公主)와 명혜 공주(明惠公主)의 경우 사판에 대해 시향을 드릴 때와 묘제를 올릴 때의 찬품에 약간 차이가 있는 만큼 한 가지 예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만, 이것이 어디까지나 전교하신 데 따라 준행해 온 것인 이상 아래에서 감히 바꾸자고 경솔하게 의논드릴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향(祀享)하는 의절(儀節)을 궁속(宮屬)에게 상세히 물어 보았더니, 대군(大君)·왕자(王子)·공주(公主)·옹주(翁主)의 사판에 시향을 드릴 때는 애당초 내시(內侍)가 제사 일을 맡는 예가 없이 본궁의 궁인(宮人) 스스로가 거행해 왔고, 대군·왕자·귀인(貴人)의 묘제를 행할 때는 내시가 그곳에 나아가 제사 일을 맡았다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사향인데 내시가 어떤 때는 맡고 어떤 때는 맡지 않는 것은 예제(禮制)에 흠이 되는 일인 듯싶고, 또 정해진 규정도 없으니, 이 뒤로는 사판에 대한 시향이든 아니면 묘소에서 지내는 절향(節享)이든 간에 모두 내시를 차정(差定)해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수진궁에서 담당하는 궁내의 사판 및 산소(山所)의 제품(祭品)·제의(祭義)·제일(祭日)에 관한 별단은 다음과 같다. 1. 5묘(廟)에서 15위(位)의 사판을 봉안(奉安)하고 있는데, 평원 대군(平原大君)·강령 부부인(江寧府夫人)·제안 대군(齊安大君)·상산 부부인(商山府夫人)·영창 대군(永昌大君)·용성 대군(龍城大君) 이상 6위를 1묘에 봉안하고, 의창군(義昌君)·양천 군부인(陽川郡夫人)·평선군(平善君)·동원 군부인(東原郡夫人) 이상 4위를 1묘에 봉안하고, 숙신 공주(淑愼公主) 1위를 1묘에 봉안하고,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 이상 2위를 1묘에 봉안하고, 귀인(貴人) 김씨(金氏), 소의(昭儀) 유씨(劉氏) 이상 2위를 1묘에 봉안하고 있다. 이상은 모두 봄 가을의 가운데 달 가운데 정일에 시향을 거행한다. 2. 묘소에 20위를 봉안하고 있다. 평원 대군·강령 부부인·제안 대군·상산 부부인·영창 대군·명선 공주·명혜 공주 이상 7위의 묘소는 광주(廣州)에 있고, 용성 대군·의창군·양천 군부인 이상 3위의 묘소는 풍양(豊壤)에 있고, 낙선군(樂善君)·동원 군부인 이상 2위의 묘소는 청송(靑松)에 있고, 숙신 공주의 묘소는 서산(西山)에 있고, 귀인 김씨의 묘소는 망우리(忘憂里)에 있고, 소의 유씨의 묘소는 진관(津寬)에 있는데, 매년 한식에 묘소에서는 한 번만 제사를 지낸다. 대군 아지씨(大君阿只氏)의 묘소는 광주에 있고, 숙의(淑儀) 나씨(羅氏)의 묘소는 서산에 있고, 숙원(淑媛) 장씨(張氏)의 묘소는 연서(延曙)에 있고, 명빈(明嬪) 김씨(金氏)의 묘소는 아차산(峩嵯山)에 있고, 증 경빈(慶嬪) 이씨(李氏)의 묘소는 풍양에 있는데, 이상은 매년 한식에 제사를 설행한다.】

禮曹啓言: "因內需司所報, 仁城大君墓寒食祭祭品器數, 磨鍊別單以入。 而取見壽進宮謄錄, 則丙申四月因傳敎, 本宮各祠版時享墓祭饌品儀節, 分排定式, 至今遵行。 祠版時享, 則行於二八月中丁, 墓祭行於每年寒食, 儘合禮意, 而祭品精約, 無可增損。 至於明善、明惠兩公主祠版時享墓祭饌品, 略有同異, 似宜一例, 而此是因傳敎遵行, 自下有不敢輕議變改。 祀享儀節, 詳問宮屬, 則大君、王子、公主、翁主祠版時享, 初無內侍將事之例, 而自本宮宮人擧行, 大君、王子、貴人墓, 則內侍進去將事云。 同是祀享, 而內侍將事, 或行或否, 似欠禮制, 亦無定規, 此後則無論祠版時享及墓所節享, 請皆以內侍差定擧行。 【壽進宮所在宮內祠版及山所祭品、祭儀、祭日別單。 一, 五廟奉安十五位祠版, 平原大君、江寧府夫人、齊安大君、商山府夫人、永昌大君、龍城大君以上六位一廟奉安, 義昌君、陽川郡夫人、平善君、東原郡夫人以上四位一廟奉安, 淑愼公主一位一廟奉安, 明善公主、明惠公主以上二位一廟奉安, 貴人 金氏、昭儀 劉氏以上二位一廟奉安。 以上春秋仲朔中丁日設行。 一, 墓所奉安二十位。 平原大君、江寧府夫人、齊安大君、商山府夫人、永昌大君、明善公主、明惠公主以上七位墓在廣州, 龍城大君、義昌君、陽川郡夫人以上三位墓在豐壤, 樂善君、東原郡夫人以上二位墓在靑松, 淑眞公主墓在西山, 貴人 金氏墓在忘憂里, 昭儀 劉氏墓在津寬, 一只祭每年寒食墓所。 大君阿只氏墓在廣州, 淑儀 嚴氏墓在西山, 淑媛張氏墓在延曙, 明嬪 金氏墓在峩嵯山, 贈慶嬪 李氏墓在豐壤, 以上每年寒食祭設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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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49권, 정조 22년(1798) 9월 7일 정묘(丁卯) 2번째 기사



『고종실록』4권, 고종 4년(1867) 9월 10일 경신(庚申)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또 전교하기를, "명혜 공주(明惠公主)와 명선 공주(明善公主)의 묘에도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청연 군주(淸衍郡主)의 묘에도 지방관(地方官)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又敎曰: "明惠公主、明善公主墓, 遣內侍致祭; 淸衍郡主墓, 遣地方官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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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4권, 고종 4년(1867) 9월 10일 경신(庚申) 4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218책 (탈초본 11책) 현종 11년(1670) 1월 16일 갑진(甲辰) 15/16 기사

Quote-left blue.png 觀象監官員, 以領事提調意啓曰, 次知內官, 招致地官韓必雄分付內, 壬寅年十二月初四日丑時生明惠公主阿只氏藏胎事, 傳敎矣。問于術官, 則閏二月三月吉朔云。胎峯可合處, 備三望以入, 落點後, 擇日, 何如? 傳曰, 允。以上禮曹謄錄。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18책 (탈초본 11책) 현종 11년(1670) 1월 16일 갑진(甲辰) 15/16 기사



『승정원일기』 218책 (탈초본 11책) 현종 11년(1670) 1월 16일 갑진(甲辰) 16/16 기사

Quote-left blue.png 觀象監官員, 以領事提調意啓曰, 明惠公主藏胎事, 旣已入啓, 而新生公主乙巳生阿只氏藏胎, 一時擧行事, 亦爲命下矣。令地官推擇, 則自三月, 至八月, 皆是吉朔云。胎峯落點後, 兩公主藏胎, 一時擇日擧行, 何如? 傳曰, 允。以上禮曹謄錄。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18책 (탈초본 11책) 현종 11년(1670) 1월 16일 갑진(甲辰) 16/16 기사



『승정원일기』 218책 (탈초본 11책) 현종 11년(1670) 윤 2월 26일 계축(癸丑) 2/19 기사

Quote-left blue.png 承文副正字李善源, 明惠公主·新生公主藏胎時, 書標官以, 林川地出去。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18책 (탈초본 11책) 현종 11년(1670) 윤 2월 26일 계축(癸丑) 2/19 기사



『승정원일기』 219책 (탈초본 11책) 현종 11년(1670) 3월 7일 갑자(甲子) 3/21 기사

Quote-left blue.png 兵曹參議閔點, 明惠公主·新生公主安胎事, 林川地出去。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19책 (탈초본 11책) 현종 11년(1670) 3월 7일 갑자(甲子) 3/21 기사


『승정원일기』 232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2월 7일 정미(丁未) 5/5 기사

Quote-left blue.png 備忘記傳于鄭晳曰, 明惠公主駙馬, 定於參知申最之子, 言于該府。燼餘。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2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2월 7일 정미(丁未) 5/5 기사



『승정원일기』 233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4월 27일 병인(丙寅) 2/15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安縝曰, 今此明惠公主之喪, 凡干擧行之事, 磨鍊以待事, 分付該曹。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3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4월 27일 병인(丙寅) 2/15 기사



『승정원일기』 234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5월 22일 신묘(辛卯) 17/19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地官潘好義, 主管明惠公主山所裁穴及開金井之事, 而方在看山之行, 到獻陵竣事後, 除復命直往公主山所之意, 分付。禮曹謄錄。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4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5월 22일 신묘(辛卯) 17/19 기사



『승정원일기』 234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6월 10일 무신(戊申) 2/9 기사

Quote-left blue.png 歸厚別提金碇, 卒明惠公主禮葬後入來。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4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6월 10일 무신(戊申) 2/9 기사



『승정원일기』 245책 (탈초본 12책) 숙종 1년(1675) 2월 26일 갑인(甲寅) 19/32 기사

Quote-left blue.png 又以兵曹言啓曰, 明善公主·明惠公主祠堂造成時, 到防軍沒數定送, 限二日赴役事, 命下矣。今三·四月當元軍一千五百九十五名內, 納布九百五十名, 老弱六十八名, 旅師五十三名計除, 實役軍五百二十四名, 自二十八日至二十九日定送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45책 (탈초본 12책) 숙종 1년(1675) 2월 26일 갑인(甲寅) 19/32 기사



『승정원일기』 306책 (탈초본 16책) 숙종 10년(1684) 12월 25일 병진(丙辰) 10/13 기사

Quote-left blue.png 持平李斗岳上疏。入啓。答曰, 省疏具悉。職在言責, 憂國進言之誠, 心甚嘉尙, 予當體念, 可以議處事, 令廟堂稟處。至於用舍之際, 克祛私意, 恢張公道一款, 亦當申飭銓曹, 而明善·明惠兩公主祠宇, 移構於壽進宮, 以其財糓, 盡歸賑資事, 意非不好, 而第當初仍存宮莊, 別立祠宇, 實是先朝遺意, 而下敎丁寧, 尙今在耳, 頃於憲府請罷之論, 備悉此意矣, 無乃未及聞之乎? 賑政雖重, 決不可違兩聖之意, 而輕易變改也。疏末愛惡係着等說, 雖未知其得當, 而其進言無隱之誠, 予用嘉尙, 爾其勿辭察職。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06책 (탈초본 16책) 숙종 10년(1684) 12월 25일 병진(丙辰) 10/13 기사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6일 기사(己巳) 5/17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金領府事·領議政, 引見。引見時, 明善·明惠·明安·淑靜四公主墓, 及驪州地驪陽府院君墳山, 遣官致祭事, 榻前下敎, 雙嶺戰亡處, 遣官致祭事, 及溫王廟及配享臣完豐府院君處, 遣官致祭事, 定奪, 京畿往十里近處, 辛亥飢死埋置處, 遣京官致祭事, 下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6일 기사(己巳) 5/17 기사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6일 기사(己巳) 10/17 기사

Quote-left blue.png 禮曹啓曰, 今二月二十六日, 領府事·領議政引見時, 溫王廟及配享臣完豐府院君處, 遣官致祭, 廣州地明善·明惠·明安·淑靜四公主墓, 及驪州地驪陽府院君墳山, 遣官致祭, 雙嶺戰亡處, 遣官致祭, 京城往十里近處辛亥飢死人埋置處, 遣京官祭物, 自京措備致祭事, 榻前定奪矣。溫王廟·四公主墓所·雙嶺戰亡處致祭事, 不卜日, 今月三十日設行, 驪陽府院君墳山致祭, 則同月二十九日設行, 而祭官·執事, 令吏曹差送, 祭物則亦令本道及廣州府, 精備進排, 往十里飢死人處致祭, 亦於三十日設行, 而祭官執事及祭物, 依定奪, 自京差出備送事, 竝爲知委, 何如? 傳曰, 允 以上禮曹謄錄。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6일 기사(己巳) 10/17 기사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7일 경오(庚午) 11/12 기사

Quote-left blue.png 禮曹啓曰, 光城府院君墓所在廣州, 一體致祭事, 命下矣。遣官致祭, 當於三十日設行, 而第念廣州一府, 溫王廟·明善·明惠·明安·淑靜四公主墓, 雙嶺·險川·北門, 前後通計, 則至於九所之多, 而日子又如是急迫, 許多祭物, 決難一時獨自措辦。且以陪從之臣, 亦難盡爲塡差於祭官·執事, 只祭官, 以陪從臣差出, 其餘執事及祭物, 令本道分半差出措備似當, 而日子亦不可不退定, 三十日回鑾時, 竝爲傳香於廣州, 行祭日子, 則退定於三月初一日, 擧行事, 竝爲分付, 而驪陽府院君致祭, 則依前定二十九日設行, 何如? 傳曰, 允。以上禮曹謄錄。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7일 경오(庚午) 11/12 기사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9일 임신(壬申) 12/19 기사

Quote-left blue.png 今日廣州行在所引見時, 永昌大君墓山, 在於明惠·明善公主一山之內, 一體致祭事, 榻前下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9일 임신(壬申) 12/19 기사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9일 임신(壬申) 16/19 기사

Quote-left blue.png 禮曹啓曰, 今二月二十九日廣州行在所引見時, 故永昌大君墓山, 在於明惠·明善公主一山之內, 一體賜祭事, 下敎矣。今此致祭, 依兩公主例, 三十日傳香, 初一日設行, 而祭官則令吏曹差送, 祭物, 令廣州府亦依他例, 差出備送事, 分付,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9일 임신(壬申) 16/19 기사



『승정원일기』 355책 (탈초본 18책) 숙종 20년(1694) 2월 26일 병오(丙午) 4/11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明善·明惠兩公主墓所, 距此不遠, 今當祗謁園陵之行, 益切感念之懷, 玆用親製祭文以下, 令該曹卜日擧行。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55책 (탈초본 18책) 숙종 20년(1694) 2월 26일 병오(丙午) 4/11 기사



『승정원일기』 355책 (탈초본 18책) 숙종 20년(1694) 2월 28일 병신(丙申) 4/10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明善·明惠公主墓所致祭時, 永昌君, 一體致祭事, 分付矣。平原大君·齊安大君之墓, 亦在其同崗, 雖與永昌之冤死, 有異, 旣已輦過於至近之地, 三大君致祭, 所當一體擧行, 兩公主致祭, 依前擧行, 三大君, 則卜日擧行, 可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55책 (탈초본 18책) 숙종 20년(1694) 2월 28일 병신(丙申) 4/10 기사



『승정원일기』 556책 (탈초본 30책) 경종 3년(1723) 7월 24일 신축(辛丑) 11/25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沈仲良曰, 廣州地明惠公主墓所改莎草時, 役軍五十名, 限三日赴役事, 分付本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556책 (탈초본 30책) 경종 3년(1723) 7월 24일 신축(辛丑) 11/25 기사



『승정원일기』 765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9월 11일 기축(己丑) 15/23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洪尙賓曰, 永昌大君墓, 明善·明惠兩公主墓, 致祭事, 依甲戌年例, 令禮官卜日擧行。兩公主墓, 則今下親製祭文用之, 永昌大君墓, 則以知製敎撰進, 海昌尉·明安公主墓, 亦爲遣禮官致祭, 而祭文, 亦以內下者用之。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765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9월 11일 기축(己丑) 15/23 기사



『승정원일기』 765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9월 11일 기축(己丑) 17/23 기사

Quote-left blue.png 尹陽來, 以禮曹意啓曰, 傳曰, 永昌大君墓, 明善·明惠兩公主墓致祭事, 依甲戌年例, 令禮官卜日擧行。兩公主墓, 則今下親製祭文用之, 永昌大君墓, 則以知製敎撰進, 海昌尉·明安公主墓, 亦爲遣禮官致祭, 而祭文, 亦以內下者用之事, 命下矣。致祭吉日, 卽令日官推擇, 則今九月十五日爲吉云, 以此日擧行, 而祭物執事, 依前例, 令本道差定進排, 永昌大君墓, 明善·明惠兩公主墓, 致祭祭官, 亦令吏曹差出事, 分付,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765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9월 11일 기축(己丑) 17/23 기사



『승정원일기』 1116책 (탈초본 62책) 영조 31년(1755) 2월 1일 을사(乙巳) 38/41 기사

Quote-left blue.png 校理李最中書曰, 伏以臣卽伏見小報, 有以明善·明惠兩公主廟宇凄涼, 至下親臨之命, 此蓋出於仰體慈敎, 躬自飭勵之意, 我大朝追先敦睦之誼, 孰不欽仰。而第念人君一動, 自有儀度, 如欲修擧, 則一有司, 可以奉行, 何至於聖躬之自貽伊勞耶? 令下倉卒, 事多窘迫, 三軍不及成列, 百司未暇趨事, 聽聞擾攘, 氣像忙遽, 恐有欠於淸路鳴和鑾之節也。臣之本來情勢, 固不敢以官職自居, 而事關國體, 有難終默, 敢陳短章, 仰暴迷見。伏乞仰稟大朝, 卽收成命, 以光聖德, 千萬幸甚。答曰, 覽書具悉。成命之下, 仰稟爲難矣。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116책 (탈초본 62책) 영조 31년(1755) 2월 1일 을사(乙巳) 38/41 기사



『승정원일기』 1446책 (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8월 11일 임술(壬戌) 22/22 기사

Quote-left blue.png 又命書傳敎曰, 守禦廳山城敎鍊官延德雨, 曉事頗精, 駕前亦多擧行, 宜有激勵之政, 善地邊將, 待闕調用。又命書傳敎曰, 驪州淑敬公主·興平尉墓致祭, 初命內侍, 更思徒貽民弊, 令地方官擧行, 執事官亦令以附近邑守令, 勿拘常式, 減數兼差, 廣州淑靜公主·東平尉墓及明安公主·海昌尉墓致祭, 亦令地方官擧行, 而但於永昌大君·明善·明惠公主墓致祭, 內侍爲之, 竝勿騎驛, 以除廚傳, 此槪爲畿民一分息肩之意, 如是下敎之後, 若有貽弊之端, 不飭之道臣, 豈無論責? 竝令知悉事, 下諭于京畿監司。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6책 (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8월 11일 임술(壬戌) 22/22 기사



『승정원일기』 2576책 (탈초본 124책) 철종 7년(1856) 2월 20일 무신(戊申) 14/14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驪興府院君閔霽內外祠板, 遣禮官致祭, 其祀孫, 初仕待窠調用, 廣平大君墓, 遣地方官致祭, 明惠公主墓·明善公主墓·淸衍君主墓, 遣內侍致祭, 故領議政鄭光弼墓, 故左議政李𡎋墓, 竝遣地方官致祭, 延陽府夫人墓, 遣承旨致祭, 贈領議政金洙根墓, 遣地方官致祭。 出傳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576책 (탈초본 124책) 철종 7년(1856) 2월 20일 무신(戊申) 14/14 기사



『승정원일기』 2718책 (탈초본 128책) 고종 4년(1867) 9월 10일 경신(庚申) 25/47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明惠公主·明善公主墓, 遣內侍致祭, 淸衍郡主墓, 遣地方官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718책 (탈초본 128책) 고종 4년(1867) 9월 10일 경신(庚申) 25/47 기사



『승정원일기』 2718책 (탈초본 128책) 고종 4년(1867) 9월 10일 경신(庚申) 47/47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明惠公主墓, 遣內侍致祭, 淸衍郡主〈墓〉, 遣地方官致祭。出傳敎 傳曰, 行陣不率醫員之先後廂大將, 施以越俸之典。出傳敎 仍經宿。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718책 (탈초본 128책) 고종 4년(1867) 9월 10일 경신(庚申) 47/47 기사



경기도감영장계등록

『경기도감영장계등록(京畿道監營狀啓謄錄)』4, 장계(狀啓)

Quote-left blue.png 甲辰三月 日

承政院開坼 前因備邊司啓下關, 道內各邑所在無後大君公主塚墓之禁伐, 有名無實者, 公子貴主墳山之貧窮不能守護者, 關問列邑, 待其報來, 先爲條列狀聞之意, 已爲馳啓爲白有在果, 該邑守令, 躬往墓在處, 子孫有無, 茔域完毁與否, 使之探問看審, 詳細枚報矣。 今始齊到, 故謹此開錄于左爲白乎旀, 其中無後墳墓, 自各宮房修治者, 每於春秋, 官家審察其禁伐形止, 若有有名無實之患, 則各別嚴飭, 俾無未盡之弊爲白遣, 或有絶祀而爲無主之塚者, 改莎封域, 俾免茂草之場, 而定給守墓之人, 使之禁伐是白遣, 或有子孫而貧窮流離, 不得守護者, 官出物力, 被莎補土, 俾無樵牧侵及之患。 自各其邑, 姑待農歇, 着意擧行後, 形止卽爲修報, 而所入物力, 報惠廳會減爲白乎矣, 此後段, 毋或仍以抛置, 這這申飭, 使我聖上親九族之德意, 遍曁於泉壤事, 亦爲勉飭於墓在各邑, 緣由竝以馳啓云云。

甲辰三月 日 〈後〉 平安大君, 江寧府夫人, 齊安大君, 商山府夫人, 永昌大君, 明善公主, 明惠公主, 大君阿只氏。 以上墓, 在廣州炭洞。 龍城大君, 義昌大君, 陽川郡夫人, 贈慶嬪李氏。 以上墓, 在楊州豊壤。 樂善君, 東原郡夫人。 以上墓, 在楊州靑松。 明嬪金氏墓, 在楊州峨嵯山。 貴人金氏墓, 在楊州忘憂里。 昭儀劉氏墓, 在楊州眞官。 淑媛張氏墓, 在楊州延曙。 淑儀羅氏, 淑愼公主。 以上墓, 在高陽西山。 以上二十墓, 壽進宮次知。(…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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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기도감영장계등록(京畿道監營狀啓謄錄)』4, 장계(狀啓)



서석집

『서석집(瑞石集)』권4, 시(詩), 「명혜공주만사(明惠公主挽詞)」

Quote-left blue.png 天潢毓秀襲徽音。少小深宮飭佩衿。服禮何曾煩姆敎。承顏常得慰宸心。瑤階一夕芳蘭折。象緯重霄寶婺沈。阿保相看撣涕說。篋中瑜珥已塵侵。

其二 女生恒願室家宜。父母皆然矧聖慈。歸妹方看占吉兆。穠華佇待續前詩。將開魯館春先謝。未和秦簫月已虧。新壟可堪丹禁隔。芳魂應憶問安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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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석집(瑞石集)』권4, 시(詩), 「명혜공주만사(明惠公主挽詞)」



식암유고

『식암유고(息庵遺稿)』권4, 칠언율시(七言律詩), 「명혜공주만사(明惠公主挽詞)」

Quote-left blue.png 昨聞繡嶺初廻駕。誰料瑤臺遽罷夢。萬舞却傾吳市鶴。獨影奄迷秦樓鳳。錦石銀河謾支機。紅蜜兜離虛滿甕。最是丹扆留至愴。玉簫悽斷不成弄。 Quote-right blue.png
출처: 『식암유고(息庵遺稿)』권4, 칠언율시(七言律詩), 「명혜공주만사(明惠公主挽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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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

1.문집

  • 김만기(金萬基), 『서석집(瑞石集)』.
  • 김석주(金錫胄), 『식암유고(息庵遺稿)』.

2.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능원묘천봉안(陵園墓遷奉案)』, 1929 ~ 194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3.논문

  • 윤종준, 「명선(明善)·명혜공주(明惠公主)에 대한 고찰」, 『성남문화연구』17, 201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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