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선공주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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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공주 묘(明善公主 墓)
서삼릉 왕자공주 분묘 집장지 명선공주 묘
식별자 RT006
분류 분묘
한글명 명선공주 묘
한자명 明善公主 墓
영문명 Tomb of Princess Myongsun
피장자 명칭 명선공주(明善公主)
피장자 이칭 미상
피장자 부 현종(顯宗)
피장자 모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
피장자 생년월일 1660
피장자 몰년월일 1673.08.02
초장 연월일 미상
초장지 기록 광주군 중부면 탄동 능원묘천봉안
초장지 기록1 능측(陵側, 헌릉(獻陵) 옆) 숙종실록
초장지 기록2 광주(廣州) 탄동(炭洞)(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선원계보기략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장 연월일 1936.05.24
이장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장지 좌표(위도) 37°66'49.51"N
이장지 좌표(경도) 126°85'95.20"E
지문 明善公主之墓
지문 찬자 이왕직 예식과(李王職 禮式課)
지문 소장처 조선왕릉 서부지구관리소



목차

내용

조선의 제18대 왕인 현종(顯宗)과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장녀인 명선공주(1660~1673) 묘이다.

1669년(현종 10) 사신이 청나라로부터 받은 은자와 비단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자 은자 1천 냥을 명선공주에게 하사하였다.

명선공주는 맹주서(孟胄瑞)의 아들 맹만택(孟萬澤)과 정혼하였으나 가례를 치르기 전인 1673년(현종 14) 8월에 사망하였다.

1675년(숙종 1) 사당을 세웠다. 이후 사당은 수진궁(壽進宮)에 속하게 해서 관리하였다.

초장지는 현재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일대로 추정된다. 1718년(숙종 44) 숙빈 장씨의 장지를 명선공주의 묘산 내 청룡 터에 입장(入葬)하려는 일이 있었으나 이를 금지시켰다.

강백년, 이은상, 김만기, 김석주 등이 찬술한 만사(輓詞)가 전한다.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6권, 현종 10년(1669) 3월 11일 갑진(甲辰)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사신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올 때면 청국(淸國)에서 으레 은자(銀子)와 비단을 조정에 보내면서 상사(賞賜)라고 하였다. 이때 동지사(冬至使)가 받아온 은자가 1천 냥이었는데, 상이 명선 공주(明善公主)에게 하사하니 주상의 제 1녀였다.

使臣之自北京還, 淸國例送銀叚於朝廷, 稱以賞賜。 至是冬至使齎來銀一千兩, 上以賜明善公主, 卽上第一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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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종실록』16권, 현종 10년(1669) 3월 11일 갑진(甲辰) 3번째 기사


『현종실록』20권, 현종 12년(1671) 12월 27일 갑진(甲辰)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이민적(李敏迪)을 도승지로, 권기(權愭)를 지평으로, 신정(申晸)을 부교리로 삼고, 맹만택(孟萬澤)에게 신안위(新安尉)의 작호를 내렸다. 맹만택은 맹주서(孟胄瑞)의 아들인데 장차 상의 딸 명선 공주(明善公主)에게 장가가기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공주가 미처 시집가기 전에 죽었으나 상이 차마 그 작호를 파하지 못하였다. 대간이 육례를 행하지 않았다 하여 도로 그 작호를 거두기를 힘껏 청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어서야 따랐다.

以李敏迪爲都承旨, 權愭爲持平, 申晸爲副校理, 賜孟萬澤爵新安尉。 萬澤, 冑瑞之子, 將以尙上女明善公主也。 後, 主未及下嫁而卒, 上不忍罷其爵號。 臺諫以六禮不行, 力請還收, 累啓, 乃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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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종실록』20권, 현종 12년(1671) 12월 27일 갑진(甲辰) 1번째 기사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1673) 7월 23일 경인(庚寅)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약방 제조(藥房提調) 등과 여러 승지가 청대하고 들어와 아뢰기를, "들으니, 명선 공주(明善公主)의 병 증세가 분명히 두역(痘疫)이라고 합니다. 상께서도 빨리 피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공주도 마땅히 궐 밖으로 내어다 두고 치료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안으로 마땅히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기겠다. 왕세자(王世子)와 세자빈(世子嬪)을 먼저 가게 하라." 하고, 저녁에 상이 경덕궁으로 옮겼다.

藥房提調等及諸承旨, 請對入奏曰: "聞明善公主𤺌患, 明是痘疫云。 自上不可不急速移避。 公主亦宜出置闕外。" 上曰: "今日內, 當移御慶德宮, 令王世子及世子嬪, 先〔往〕 。" 夕上移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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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1673) 7월 23일 경인(庚寅) 3번째 기사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1673) 8월 2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명선 공주(明善公主)가 졸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연달아 참통한 상(喪)을 만나니 심사가 막히고 혼미하다. 다만 생각하건대 이 초상은 명혜 공주의 초상과 같지 않다. 맹만택(孟萬澤)의 위호(尉號)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니,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의논드리기를,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있기를 ‘길일(吉日)을 정해 두고 여자가 죽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사위[婚]는 자최복으로 조상을 하고, 장사지낸 후 복을 벗는다.’ 하였으며, 해석한 자는 말하기를 ‘일찍이 청기(請期)를 했기 때문에 자최복으로 조상한다. 그러나 아직 아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장사를 지내고 나서는 벗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명선 공주는 삼간택(三揀擇)을 한 뒤에 부마(駙馬)를 봉작(封爵)했을 뿐만 아니라 납채(納采)·납폐(納幣)·명복(命服)을 들여오고 내가며 친영(親迎)하는 등의 길일을 아울러 모두 미루어 택하고 가례청(嘉禮廳)도 배설했으니 이는 바로 예문(禮文)에 이른바 ‘혼인의 날짜를 알린[告期] 사위는 자최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최복을 입었다고 한다면 전날의 명혜 공주(明惠公主)의 상(喪)과는 차이가 있는 듯하나, ‘아직 아내가 되지 못했다.’고 하는 경우는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위호(尉號)에 관한 한 가지 일은 실로 의거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신의 천박한 지식으로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삼가 성상께서 결단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길일을 정하고 또 가례청을 설치하였으니, 단지 혼인 날짜만 알린 것과는 차이가 있다. 작호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明善公主卒, 上下敎政院曰: "連遭慘痛之喪, 心事荒迷。 而第念此喪, 與明惠喪不同。 孟萬澤尉號, 仍存似可。 令該曹, 議于大臣, 以啓。" 右議政金壽興議: "《禮記》 《曾子問》有曰: ‘取女有吉日而死, 如之何?’ 孔子曰: ‘壻齊衰而弔, 旣葬而除之。’ 釋之者曰: ‘以其嘗請期, 故齊衰而弔。 然未成婦也, 故旣葬而除之。’ 以此言之, 則明善公主, 三揀擇後, 不但駙馬封爵而已, 至於納采、納幣命服內出親迎等吉日, 竝皆推擇, 嘉禮廳亦爲排設, 則此正禮文所謂, 告期而壻當爲齊衰之服。 旣服齊衰, 則似與前日明惠之喪, 差異, 而若其未成婦則一也。 尉號一事, 實無可據之前例, 臣之淺識, 有難斷定。 伏惟上裁。" 下敎曰: "旣定吉日, 而又設廳, 與只告期者有異。 爵號仍存,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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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1673) 8월 2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1673) 8월 2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명선 공주가 죽었는데, 상의 장녀이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번 명선 공주의 상(喪)은 명혜 공주(明惠公主)의 상과는 같지 않으니, 맹만택(孟萬澤)의 위호(尉號)를 그냥 두어야 할 듯한데, 해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만택은 승지 맹주서(孟胄瑞)의 아들로서 신안위(新安尉)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이미 가례청(嘉禮廳)도 설치하고 육례(六禮)를 행할 길일(吉日)도 모두 가려 뽑았었는데, 만택이 어미 상을 당해 아직 예를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상이 이렇게 분부한 것이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의논드리기를, "증자문(曾子問)에 이르기를 ‘「딸을 시집보낼 길일이 정해졌는데 딸이 죽었을 경우엔 어떻게 합니까?」하니,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사위될 사람이 자최복(齊哀服)을 입고 조문하고 장례가 끝난 후 벗는다.」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석을 달기를 ‘그가 일찍이 청기(請期) 했기 때문에 자최복 차림으로 조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장례를 치르고 나면 벗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명선 공주에 대해 삼간택(三揀擇)을 행한 뒤에 부마(駙馬)의 작위를 봉해 주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납채(納采)·납폐(納幣)·명복(命服)·내출(內出)·친영(親迎) 등의 길일도 모두 가려 정했으며 가례청도 배설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야말로 예문(禮文)에서 이야기한 고기(告期)에 해당되는 만큼 사위될 사람이 당연히 자최복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일단 자최복을 입었으면 전일 명혜 공주의 상과 차이가 나는 듯싶기는 합니다만, 아직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위호(尉號)의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실로 근거할 만한 전례(前例)가 없고 신의 천박한 식견으로는 단정짓기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상께서 재결하셨으면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길일을 정했고 또 가례청을 설치했으니, 그저 고기(告期)만 행한 경우와는 더욱 차이가 있다. 작호를 그대로 두도록 하라." 하였다.

明善公主卒。 上之長女也。 上下敎政院曰: "今此明善公主之喪, 與明惠喪不同。 孟萬澤尉號, 似當仍存, 令該曹議于大臣以啓。 萬澤, 承旨孟冑瑞之子, 賜號新安尉, 旣設嘉禮廳, 六禮吉日, 亦皆推擇, 而萬澤遭母喪, 未及成禮, 故上敎如此。 右議政金壽興議曰: "《曾子問》曰: ‘娶女有吉日而死, 如之何?’ 孔子曰: ‘壻齊衰而弔, 旣葬而除之。’ 釋之者曰: ‘以其嘗請期, 故齊衰而弔, 然未成婦也。 故旣葬而除之。’ 以此言之, 則明善公主三揀擇後, 不但駙馬封爵而已, 至於納采、納幣、命服內出, 親迎等吉日, 竝皆推擇, 嘉禮廳亦爲排設, 則此正禮文所謂告期, 而壻當爲齊衰之服, 旣服齊衰, 則似與前日明惠之喪差異, 而若其未成婦則一也。 尉號一事, 實無可據之前例。 臣之淺識, 有難斷定, 伏惟上裁。" 下敎曰: "旣定吉日, 而又設嘉禮廳, 與只行告期者, 尤有異焉, 爵號仍存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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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1673) 8월 2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숙종실록』2권, 숙종 1년(1675) 2월 3일 신묘(辛卯)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명혜 공주(明惠公主)·명선 공주(明善公主) 두 공주의 사당을 세울 때에 내사(內司)와 해조(該曹)는 제구를 관(官)에서 장만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命建明惠、明善兩公主祠堂, 內司及該曹, 官庀諸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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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2권, 숙종 1년(1675) 2월 3일 신묘(辛卯) 4번째 기사



『숙종실록』6권, 숙종 3년(1677) 4월 1일 정미(丁未)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지사(知事)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황해도의 내수사(內需司)에서 쌓는 둑은 비록 내수사의 종[奴]이 일을 한다 하지만 둑 하나에 역군이 거의 3천이나 들어가는데 백성들이 어찌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듣건대, 이는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 두 공주를 위해 전장(田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데 두 공주가 모두 출합(出閤)하기 전에 세상을 버렸으니 전장을 설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뒤에 마땅히 금지하겠다." 하였다.

知事吳挺緯曰: "黃海道內司築堰, 雖以內奴使役, 而一堰役軍, 幾入三千, 民安得不怨乎? 聞此爲明善、明惠兩公主設庄, 而兩公主皆未出閤而棄世, 安用設庄爲哉?" 上曰: "後當禁止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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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6권, 숙종 3년(1677) 4월 1일 정미(丁未) 2번째 기사



『숙종실록』14권, 숙종 9년(1683) 4월 26일 무술(戊戌)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인경궁(仁慶宮) 담장쪽 15간(間)을 떼어서 명선(明善)·명혜(明惠)·두 공주(公主)의 사당으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割仁慶宮墻垣十五間, 命給明善、明惠兩公主祠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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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14권, 숙종 9년(1683) 4월 26일 무술(戊戌) 3번째 기사



『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1684) 12월 25일 병진(丙辰)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지평(持平) 이두악(李斗岳)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단을 없애고, 위를 덜어서 아래에 보태주는 정치를 강구하고, 명선(明善)·명혜(明惠) 두 공주(公主)의 사우(祠宇)를 수진궁(壽進宮)에 옮겨 세워서 제사를 받들게 하되, 저축한 재물과 곡식은 모두 유사(有司)에게 돌려서 내년 봄 진구(賑救)하는 데 쓰게 하고, 각 아문(衙門)의 둔전(屯田)은 소재(所在)한 고을로 하여금 그 곡물(穀物)의 수량을 기록해서 진휼청(賑恤廳)에 일체 위임하여 주관하게 하되, 본 아문(衙門)의 1년 비용을 아울러 적당하게 주고, 그 나머지를 계산하여 진제(賑濟)에 대비하게 하고, 전관(銓官)에게 밝게 타일러서 수령(守令)을 신중히 택용(擇用)하게 하고, 감사(監司)를 칙려(飭勵)하여 거듭 고과(考課)를 밝히게 하고, 어사(御史)가 염문(廉問)하였을 때에 혹시 수령으로서 불법(不法)이 가장 많은 자가 있으면 감사도 아울러 죄주게 하고, 별도로 추천한 사람이 적당하지 못하면 이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또한 거주(擧主)693) 도 잘못 천거한 율(律)로 다스리게 하소서. 김중하(金重夏)는 죄가 이미 환히 드러났는데 양사(兩司)에서 번갈아 다투어도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최석항(崔錫恒) 등은 당직(戇直)694) 함이 숭상할 만한데 도리어 최절(摧折)함을 더하시니 마땅히 사랑하고 미워하심이 치우친 데 얽매여 있음을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가(可)하다. 의논하여 처리할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두 공주(公主)의 궁장(宮庄)을 그대로 두고 따로 사우(祠宇)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선조(先朝)의 유의(遺意)로서 하교가 정녕(丁寧)하여 아직까지 귀에 생생한데, 사헌부에서 혁파할 것을 청한 논의에 이 뜻을 자세히 갖추어 말하였는데, 미처 들어 알지 못한 것이 아닌가? ‘사랑하고 미워함이 치우친 데 얽매었다’는 등의 말은 마땅한지 알지 못하겠으나, 극진하게 말하고 숨김이 없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하였다.

持平李斗岳上疏: 請蠲除傷財病民之弊, 講究損上益下之政, 明善、明惠兩公主祠宇, 移建於壽進宮, 使奉祭祀, 所儲財穀, 盡歸有司, 以爲明春賑救之用, 各衙門屯田, 令所在邑, 錄其穀物之數, 一委賑廳, 使之主管, 本衙門一年之用, 竝令量宜以給, 而計其贏餘, 以備賑濟, 明諭銓官, 愼擇守令, 飭勵監司, 申明考課, 御史廉問之時, 或有守令不法之最多者, 竝與監司而罪之, 別薦不得其人, 則不徒斥退, 且繩擧主以誤薦之律。 金重夏罪旣彰著, 而兩司交爭, 竝不允, 崔錫恒等戇直可尙, 而反加摧折, 宜以愛惡偏係爲戒。答曰: "可以議處事, 令廟堂稟處。 兩公主之仍存宮庄, 別立祀宇, 實先朝遺意, 下敎丁寧, 尙今在耳, 頃於憲府請罷之論, 備悉此意, 無乃未及聞知乎? ‘愛惡偏係等說。’ 未知其得當, 而盡言無隱, 予用嘉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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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1684) 12월 25일 병진(丙辰) 2번째 기사



『숙종실록』19권, 숙종 14년(1688) 2월 26일 기사(己巳)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관원(官員)을 보내어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明安)·숙정(淑靜) 네 공주(公主)의 묘(墓)와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모두 광주(廣州) 지역(地域)에 있다. 임금이 명선·명혜 두 묘가 길 곁에서 가장 가까우므로 두루 보고 싶다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아뢰기를, "군주는 사묘(私墓)에 친히 가서 보는 일이 없으며, 길도 험하고 좁아서 행차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중지하였다.

遣官祭明善、明惠、明安、淑靜四公主墓及永昌大君墓, 皆在廣州地也。 上以明善、明惠兩墓, 最近於途傍, 欲爲歷臨, 問於諸臣。 皆曰: "人君無親臨私墓之事, 而路且險隘, 不可行。" 上遂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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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19권, 숙종 14년(1688) 2월 26일 기사(己巳) 4번째 기사



『숙종실록』23권, 숙종 17년(1691) 4월 2일 정사(丁巳)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이때 광주(廣州) 봉국사(奉國寺)에서 명선(明善)·명혜(明惠) 두 공주(公主)의 원당(願堂)에 그 목주(木主)를 봉안하고 해마다 봄·가을에 궁인(宮人)이 나가서 제사를 지낸다 하였는데, 대사헌(大司憲) 심단(沈檀)이 그것이 옳지 않음을 말하고, 민암이 말하기를, "예전에 봉선사(奉先寺)·봉은사(奉恩寺)에 열성(列聖)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는데 유생(儒生)의 상소 때문에 폐지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持難)하는 까닭을 경(卿)들이 스스로 알거니와, 이것은 갑자기 폐지할 일이 아니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드디어 힘껏 청하지 않고 물러갔다.

時廣州 奉國寺, 稱以明善。 明惠兩公主願堂。 奉安其木主, 每年春秋, 宮人出往行祭。 大司憲沈檀, 陳其不可。 閔黯曰: "昔年奉先、奉恩兩刹, 奉列聖位版, 因儒疏革罷矣。" 上曰: "予所持難者, 卿等可自知之。 此非倉卒革罷之事, 諸臣遂不力請而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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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23권, 숙종 17년(1691) 4월 2일 정사(丁巳) 4번째 기사


『숙종실록』26권, 숙종 20년(1694) 2월 26일 갑오(甲午)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임금이 제사를 지내고 또 친히 제문을 지어 명선(明善)·명혜(明惠) 두 공주(公主)에게 제사지내고, 관원을 보내어 영창(永昌)·평원(平原)·제안(齊安) 세 대군(大君)의 무덤에 제사지내게 했으니, 무덤이 모두 헌릉(獻陵)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上行祭, 且親製文祭明善、明惠兩公主。 遣官祭永昌、平原、齊安三大君墓, 墓皆在陵側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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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26권, 숙종 20년(1694) 2월 26일 갑오(甲午) 1번째 기사



『숙종실록』61권, 숙종 44년(1718) 4월 20일 무술(戊戌)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임금이 하교하기를, "숙빈(淑嬪)의 장지를 간심(看審)할 때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가 범연히 광주(廣州)의 경내에서 묘산(墓山)을 얻었다고 진달(陳達)함으로써 은연중 법금을 무시하고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의 묘산(墓山) 내의 청룡(靑龍)의 터에 입장(入葬)하려는 계책을 세웠으니, 일이 해괴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파직시키고 관원을 더 정하라. 그들로 하여금 우선 들어오도록 하고 다른 산을 바꾸어 구하게 하라."하였다.

上下敎曰: "淑嬪葬地看山時, 內官張厚載, 泛以得山於廣州境內陳達, 隱然爲冒禁入葬於明善、明惠兩公主墓山內靑龍之計, 事之可駭, 莫此爲甚。 罷職加定官, 使之姑爲入來, 改求他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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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61권, 숙종 44년(1718) 4월 20일 무술(戊戌) 1번째 기사



『숙종실록』61권, 숙종 44년(1718) 4월 29일 정미(丁未)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이때 숙빈(淑嬪)의 장지(葬地)를 택하였는데 호상 내사(護喪內使)와 본방(本房)의 직임을 맡은 자들이 처음에는 명혜 공주(明惠公主)와 명선 공주(明善公主)의 묘산(墓山) 근처에 택점(擇占)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명하여 다른 곳으로 바꾸어 정하게 하였다. 또 선릉(宣陵) 근처로 택점하였는데, 임금이 그 곳이 선릉과 서로 바라보는 곳이란 말을 듣고는 예조에 명하여 적간(摘奸)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계달(啓達)하기를, "사성(沙城)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능소(陵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니, 세자가 이것으로 임금에게 품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사성은 하나인데 전에는 왕후의 능이 바라보였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혈처(穴處)는 한가지인데,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장사지내는 것을 금하고 후정(後庭)에 있어서는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조정의 처분(處分)이 심히 공정하지 못하다. 다른 산으로 바꾸어서 택점하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時, 擇淑嬪葬地, 護喪內使及本房任掌輩, 始占明惠、明善公主墓山近處, 上不許, 命改卜他處。 又占於宣陵近處, 上聞其與陵相望, 命禮曹摘奸。 禮曹啓言: "升望於沙城之上, 不見陵所。" 世子以稟, 上下敎曰: "沙城一也, 而前則望見王后陵, 今則不見云, 已未可知。 穴處則一也, 而任他人則禁葬, 在後庭則許葬, 朝家處分, 甚不公正。 不如改占他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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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61권, 숙종 44년(1718) 4월 29일 정미(丁未) 1번째 기사



『경종실록』3권, 경종 1년(1721) 2월 21일 임자(壬子)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정소(李廷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이어 아뢰기를, "수진궁(壽進宮)은 곧 무후(無後)한 대군(大君)·왕자(王子)·공주(公主)·후궁(後宮)의 제사를 받드는 곳인데, 명선 공주(明善公主)와 명혜 공주(明惠公主)의 두 공주방(公主房) 및 소의방(昭儀房)도 또한 무후한 궁방(宮房)입니다. 만약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두 공주방 및 소의방을 수진궁에 이속(移屬)한 뒤 전결(田結)과 노비(奴婢)로서 파(罷)할 만한 것은 파하고 둘 만한 것은 둔다면 일분(一分)의 폐단이라도 없앨 수 있으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소서."하였다.

憲府 【持平李廷熽】 申前啓, 仍啓曰: "壽進宮, 乃無後大君、王子、公主、後宮奉祭之所, 而明善、明惠兩公主房及昭儀房, 亦無後宮房也。 若以明善、明惠兩公主及昭儀房, 移屬於壽進宮後, 田結、奴婢可罷者罷之, 可存者存之, 則庶除一分之弊。 請令廟堂, 劃卽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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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종실록』3권, 경종 1년(1721) 2월 21일 임자(壬子) 2번째 기사



『영조실록』83권, 영조 31년(1755) 2월 1일 을사(乙巳)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임금이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 두 공주의 사당에 나아갔다가 지나는 길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집에 들렀다. 명선 공주·명혜 공주는 바로 현종(顯宗)의 따님으로 출가하기 전에 일찍 죽었다. 임금이 그 묘우(廟宇)가 황폐하고 쓸쓸하다고 여겨 직접 임어(臨御)하여 경계시켰다.

上幸明善、明惠兩公主廟, 歷臨錦城尉 朴明源第。 明善、明惠卽顯廟出, 未及下嫁而殀。 上以其廟宇荒涼, 親臨而飭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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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83권, 영조 31년(1755) 2월 1일 을사(乙巳) 1번째 기사



『정조실록』8권, 정조 3년(1779) 8월 9일 경신(庚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온조왕 묘(溫祚王廟)와 현절사(顯節祠)와 영창 대군(永昌大君)·명혜 공주(明惠公主)·명선 공주(明善公主)·숙정 공주(淑靜公主)·숙경 공주(淑敬公主)·명안 공주(明安公主)·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묘(墓)와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사당과 험천(險川)·북문(北門)·쌍령(雙嶺)의 전망(戰亡)한 곳과 왕십리(王十里)에서 신해년에 굶어 죽는 사람에게 치제(致祭)하였다.

致祭溫祚王廟、顯節祠、永昌大君、明惠、明善、淑靜、淑敬、明安公主、忠獻公 金昌集墓、完豐府院君 李曙、文忠公 閔鎭遠祠、險川、北門、雙嶺戰亡處、王十里辛亥餓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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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83권, 영조 31년(1755) 2월 1일 을사(乙巳) 1번째 기사



『정조실록』49권, 정조 22년(1798) 9월 7일 정묘(丁卯)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가 아뢰기를, "내수사(內需司)가 보고해 온 데 따라 인성 대군(仁城大君)의 묘소에 한식(寒食) 제사를 드릴 때의 제품(祭品) 기수(器數)를 마련하여 별단(別單)으로 들입니다. 그런데 수진궁(壽進宮)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보건대, 병신년 4월 전교하신 데 따라 본궁(本宮)에서 각 사판(祠版)에 대한 시향(時享)과 묘제(墓祭)를 행할 때의 찬품(饌品) 및 의절(儀節)을 고루 나누어 규정으로 만든 뒤 지금까지 준행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판에 대한 시향은 2월과 8월 중순의 정일(丁日)에 행하고 묘제는 매년 한식에 행하는 등 모두가 예(禮)의 뜻에 맞았고, 제품의 기수를 정해놓은 것도 늘리거나 줄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명선 공주(明善公主)와 명혜 공주(明惠公主)의 경우 사판에 대해 시향을 드릴 때와 묘제를 올릴 때의 찬품에 약간 차이가 있는 만큼 한 가지 예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만, 이것이 어디까지나 전교하신 데 따라 준행해 온 것인 이상 아래에서 감히 바꾸자고 경솔하게 의논드릴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향(祀享)하는 의절(儀節)을 궁속(宮屬)에게 상세히 물어 보았더니, 대군(大君)·왕자(王子)·공주(公主)·옹주(翁主)의 사판에 시향을 드릴 때는 애당초 내시(內侍)가 제사 일을 맡는 예가 없이 본궁의 궁인(宮人) 스스로가 거행해 왔고, 대군·왕자·귀인(貴人)의 묘제를 행할 때는 내시가 그곳에 나아가 제사 일을 맡았다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사향인데 내시가 어떤 때는 맡고 어떤 때는 맡지 않는 것은 예제(禮制)에 흠이 되는 일인 듯싶고, 또 정해진 규정도 없으니, 이 뒤로는 사판에 대한 시향이든 아니면 묘소에서 지내는 절향(節享)이든 간에 모두 내시를 차정(差定)해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수진궁에서 담당하는 궁내의 사판 및 산소(山所)의 제품(祭品)·제의(祭義)·제일(祭日)에 관한 별단은 다음과 같다. 1. 5묘(廟)에서 15위(位)의 사판을 봉안(奉安)하고 있는데, 평원 대군(平原大君)·강령 부부인(江寧府夫人)·제안 대군(齊安大君)·상산 부부인(商山府夫人)·영창 대군(永昌大君)·용성 대군(龍城大君) 이상 6위를 1묘에 봉안하고, 의창군(義昌君)·양천 군부인(陽川郡夫人)·평선군(平善君)·동원 군부인(東原郡夫人) 이상 4위를 1묘에 봉안하고, 숙신 공주(淑愼公主) 1위를 1묘에 봉안하고,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 이상 2위를 1묘에 봉안하고, 귀인(貴人) 김씨(金氏), 소의(昭儀) 유씨(劉氏) 이상 2위를 1묘에 봉안하고 있다. 이상은 모두 봄 가을의 가운데 달 가운데 정일에 시향을 거행한다. 2. 묘소에 20위를 봉안하고 있다. 평원 대군·강령 부부인·제안 대군·상산 부부인·영창 대군·명선 공주·명혜 공주 이상 7위의 묘소는 광주(廣州)에 있고, 용성 대군·의창군·양천 군부인 이상 3위의 묘소는 풍양(豊壤)에 있고, 낙선군(樂善君)·동원 군부인 이상 2위의 묘소는 청송(靑松)에 있고, 숙신 공주의 묘소는 서산(西山)에 있고, 귀인 김씨의 묘소는 망우리(忘憂里)에 있고, 소의 유씨의 묘소는 진관(津寬)에 있는데, 매년 한식에 묘소에서는 한 번만 제사를 지낸다. 대군 아지씨(大君阿只氏)의 묘소는 광주에 있고, 숙의(淑儀) 나씨(羅氏)의 묘소는 서산에 있고, 숙원(淑媛) 장씨(張氏)의 묘소는 연서(延曙)에 있고, 명빈(明嬪) 김씨(金氏)의 묘소는 아차산(峩嵯山)에 있고, 증 경빈(慶嬪) 이씨(李氏)의 묘소는 풍양에 있는데, 이상은 매년 한식에 제사를 설행한다.】

禮曹啓言: "因內需司所報, 仁城大君墓寒食祭祭品器數, 磨鍊別單以入。 而取見壽進宮謄錄, 則丙申四月因傳敎, 本宮各祠版時享墓祭饌品儀節, 分排定式, 至今遵行。 祠版時享, 則行於二八月中丁, 墓祭行於每年寒食, 儘合禮意, 而祭品精約, 無可增損。 至於明善、明惠兩公主祠版時享墓祭饌品, 略有同異, 似宜一例, 而此是因傳敎遵行, 自下有不敢輕議變改。 祀享儀節, 詳問宮屬, 則大君、王子、公主、翁主祠版時享, 初無內侍將事之例, 而自本宮宮人擧行, 大君、王子、貴人墓, 則內侍進去將事云。 同是祀享, 而內侍將事, 或行或否, 似欠禮制, 亦無定規, 此後則無論祠版時享及墓所節享, 請皆以內侍差定擧行。 【壽進宮所在宮內祠版及山所祭品、祭儀、祭日別單。 一, 五廟奉安十五位祠版, 平原大君、江寧府夫人、齊安大君、商山府夫人、永昌大君、龍城大君以上六位一廟奉安, 義昌君、陽川郡夫人、平善君、東原郡夫人以上四位一廟奉安, 淑愼公主一位一廟奉安, 明善公主、明惠公主以上二位一廟奉安, 貴人 金氏、昭儀 劉氏以上二位一廟奉安。 以上春秋仲朔中丁日設行。 一, 墓所奉安二十位。 平原大君、江寧府夫人、齊安大君、商山府夫人、永昌大君、明善公主、明惠公主以上七位墓在廣州, 龍城大君、義昌君、陽川郡夫人以上三位墓在豐壤, 樂善君、東原郡夫人以上二位墓在靑松, 淑眞公主墓在西山, 貴人 金氏墓在忘憂里, 昭儀 劉氏墓在津寬, 一只祭每年寒食墓所。 大君阿只氏墓在廣州, 淑儀 嚴氏墓在西山, 淑媛張氏墓在延曙, 明嬪 金氏墓在峩嵯山, 贈慶嬪 李氏墓在豐壤, 以上每年寒食祭設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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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49권, 정조 22년(1798) 9월 7일 정묘(丁卯) 2번째 기사



『고종실록』4권, 고종 4년(1867) 9월 10일 경신(庚申)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또 전교하기를, "명혜 공주(明惠公主)와 명선 공주(明善公主)의 묘에도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청연 군주(淸衍郡主)의 묘에도 지방관(地方官)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又敎曰: "明惠公主、明善公主墓, 遣內侍致祭; 淸衍郡主墓, 遣地方官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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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4권, 고종 4년(1867) 9월 10일 경신(庚申) 4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225책 (탈초본 12책) 현종 12년(1671) 12월 26일 계묘(癸卯) 7/10 기사

Quote-left blue.png 以備忘記, 傳于李嵇曰, 明善公主駙馬, 定於承旨孟胄瑞之子, 言于該曹。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25책 (탈초본 12책) 현종 12년(1671) 12월 26일 계묘(癸卯) 7/10 기사



『승정원일기』 235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7월 24일 신묘(辛卯) 4/27 기사

Quote-left blue.png 藥房啓曰, 數夜以來, 新涼漸生, 伏未審聖體調攝, 若何? 慈殿寒熱之候, 雖已平復, 水刺厭進之症, 尙爾一樣, 伏不勝憂慮, 與諸醫等商議, 則加味生脈散, 調牛黃末一分進御, 宜當云, 此藥五貼製入, 而伏聞明善公主所患, 明是痘症, 而仍留闕中, 不卽出外, 伏想聖上, 必以慈憂之至情, 有所不忍矣。聖上縱自輕, 獨不念宗社之重, 上貽慈殿之憂乎? 亟命出送闕外, 移御之擧, 決不可少緩, 亦令有司, 從速稟旨擧行, 臣等終宵鬱悶, 敢來問安, 竝此仰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5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7월 24일 신묘(辛卯) 4/27 기사


『승정원일기』 235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8월 2일 기해(己亥) 5/10 기사

Quote-left blue.png 明善公主卒逝。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5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8월 2일 기해(己亥) 5/10 기사



『승정원일기』 235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8월 2일 기해(己亥) 7/10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連遭慘慟之喪, 哀慟之至, 心神荒迷, 不能念他, 而今番, 則曲折與前不同, 尉號事, 令該曹議于大臣以啓。朝報 傳曰, 今此明善公主喪出殯處所, 宣仁門外閭家, 極擇修掃事, 一從護喪中使之言, 擧行。禮曹謄錄。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5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8월 2일 기해(己亥) 7/10 기사



『승정원일기』 235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8월 2일 기해(己亥) 8/10 기사

Quote-left blue.png 上曰, 禮曹啓曰, 今此明善公主之喪, 擧哀儀註, 當依禮文磨鍊, 而自上方在調攝之中, 哀痛慘切之餘, 必有添傷之患, 卽今亦有難便之勢, 擧哀一節, 似當停行, 何以爲之? 敢稟。傳曰, 知道。傳曰, 今此明善公主之喪, 一依明惠公主喪事時例擧行, 而凡事, 依護喪中使之言, 擧行之意, 分付各該曹。傳曰, 明善公主之喪事, 比前有異, 凡喪需之物, 雖在謄錄之外, 一從護喪中使之言, 進排事, 分付尙衣院及各該司, 而不必續續煩稟事, 政院知悉。禮曹謄錄。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5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8월 2일 기해(己亥) 8/10 기사



『승정원일기』 235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8월 2일 기해(己亥) 10/10 기사

Quote-left blue.png 政院啓曰, 明善公主之喪, 昌德·昌慶兩宮中, 從何門出送乎? 敢稟。傳曰, 公主喪, 則從宣仁門出送, 通化門, 則留門, 以砲手把守, 可也。訓局謄錄。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5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8월 2일 기해(己亥) 10/10 기사



『승정원일기』 236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10월 11일 정미(丁未) 9/18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鄭晳曰, 舊陵御齋室, 明善公主喪家畫給事, 分付都監。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6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10월 11일 정미(丁未) 9/18 기사



『승정원일기』 236책 (탈초본 12책) 현종 12년(1673) 10월 15일 신해(辛亥) 4/8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尹深曰, 明善公主返虞之家, 依明惠公主返虞之家例修補事, 言于該曹。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6책 (탈초본 12책) 현종 12년(1673) 10월 15일 신해(辛亥) 4/8 기사



『승정원일기』 236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10월 22일 무오(戊午) 13/14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沈梓曰, 明善公主返虞家, 修補時役軍五十名定送事, 分付該曹。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6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1673) 10월 22일 무오(戊午) 13/14 기사



『승정원일기』 237책 (탈초본 75책) 현종 14년(1673) 11월 18일 계미(癸未) 3/10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沈梓曰, 明善公主發靷, 四更一點, 當到水口門, 趁時開門, 分付該曹。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37책 (탈초본 75책) 현종 14년(1673) 11월 18일 계미(癸未) 3/10 기사



『승정원일기』 245책 (탈초본 12책) 숙종 1년(1675) 2월 26일 갑인(甲寅) 19/32 기사

Quote-left blue.png 又以兵曹言啓曰, 明善公主·明惠公主祠堂造成時, 到防軍沒數定送, 限二日赴役事, 命下矣。今三·四月當元軍一千五百九十五名內, 納布九百五十名, 老弱六十八名, 旅師五十三名計除, 實役軍五百二十四名, 自二十八日至二十九日定送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45책 (탈초본 12책) 숙종 1년(1675) 2월 26일 갑인(甲寅) 19/32 기사



『승정원일기』 306책 (탈초본 16책) 숙종 10년(1684) 12월 25일 병진(丙辰) 10/13 기사

Quote-left blue.png 持平李斗岳上疏。入啓。答曰, 省疏具悉。職在言責, 憂國進言之誠, 心甚嘉尙, 予當體念, 可以議處事, 令廟堂稟處。至於用舍之際, 克祛私意, 恢張公道一款, 亦當申飭銓曹, 而明善·明惠兩公主祠宇, 移構於壽進宮, 以其財糓, 盡歸賑資事, 意非不好, 而第當初仍存宮莊, 別立祠宇, 實是先朝遺意, 而下敎丁寧, 尙今在耳, 頃於憲府請罷之論, 備悉此意矣, 無乃未及聞之乎? 賑政雖重, 決不可違兩聖之意, 而輕易變改也。疏末愛惡係着等說, 雖未知其得當, 而其進言無隱之誠, 予用嘉尙, 爾其勿辭察職。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06책 (탈초본 16책) 숙종 10년(1684) 12월 25일 병진(丙辰) 10/13 기사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6일 기사(己巳) 5/17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金領府事·領議政, 引見。引見時, 明善·明惠·明安·淑靜四公主墓, 及驪州地驪陽府院君墳山, 遣官致祭事, 榻前下敎, 雙嶺戰亡處, 遣官致祭事, 及溫王廟及配享臣完豐府院君處, 遣官致祭事, 定奪, 京畿往十里近處, 辛亥飢死埋置處, 遣京官致祭事, 下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6일 기사(己巳) 5/17 기사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6일 기사(己巳) 10/17 기사

Quote-left blue.png 禮曹啓曰, 今二月二十六日, 領府事·領議政引見時, 溫王廟及配享臣完豐府院君處, 遣官致祭, 廣州地明善·明惠·明安·淑靜四公主墓, 及驪州地驪陽府院君墳山, 遣官致祭, 雙嶺戰亡處, 遣官致祭, 京城往十里近處辛亥飢死人埋置處, 遣京官祭物, 自京措備致祭事, 榻前定奪矣。溫王廟·四公主墓所·雙嶺戰亡處致祭事, 不卜日, 今月三十日設行, 驪陽府院君墳山致祭, 則同月二十九日設行, 而祭官·執事, 令吏曹差送, 祭物則亦令本道及廣州府, 精備進排, 往十里飢死人處致祭, 亦於三十日設行, 而祭官執事及祭物, 依定奪, 自京差出備送事, 竝爲知委, 何如? 傳曰, 允 以上禮曹謄錄。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6일 기사(己巳) 10/17 기사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7일 경오(庚午) 11/12 기사

Quote-left blue.png 禮曹啓曰, 光城府院君墓所在廣州, 一體致祭事, 命下矣。遣官致祭, 當於三十日設行, 而第念廣州一府, 溫王廟·明善·明惠·明安·淑靜四公主墓, 雙嶺·險川·北門, 前後通計, 則至於九所之多, 而日子又如是急迫, 許多祭物, 決難一時獨自措辦。且以陪從之臣, 亦難盡爲塡差於祭官·執事, 只祭官, 以陪從臣差出, 其餘執事及祭物, 令本道分半差出措備似當, 而日子亦不可不退定, 三十日回鑾時, 竝爲傳香於廣州, 行祭日子, 則退定於三月初一日, 擧行事, 竝爲分付, 而驪陽府院君致祭, 則依前定二十九日設行, 何如? 傳曰, 允。以上禮曹謄錄。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7일 경오(庚午) 11/12 기사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9일 임신(壬申) 12/19 기사

Quote-left blue.png 今日廣州行在所引見時, 永昌大君墓山, 在於明惠·明善公主一山之內, 一體致祭事, 榻前下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9일 임신(壬申) 12/19 기사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9일 임신(壬申) 16/19 기사

Quote-left blue.png 禮曹啓曰, 今二月二十九日廣州行在所引見時, 故永昌大君墓山, 在於明惠·明善公主一山之內, 一體賜祭事, 下敎矣。今此致祭, 依兩公主例, 三十日傳香, 初一日設行, 而祭官則令吏曹差送, 祭物, 令廣州府亦依他例, 差出備送事, 分付,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2월 29일 임신(壬申) 16/19 기사



『승정원일기』 355책 (탈초본 18책) 숙종 20년(1694) 2월 26일 병오(丙午) 4/11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明善·明惠兩公主墓所, 距此不遠, 今當祗謁園陵之行, 益切感念之懷, 玆用親製祭文以下, 令該曹卜日擧行。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55책 (탈초본 18책) 숙종 20년(1694) 2월 26일 병오(丙午) 4/11 기사



『승정원일기』 355책 (탈초본 18책) 숙종 20년(1694) 2월 28일 병신(丙申) 4/10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明善·明惠公主墓所致祭時, 永昌君, 一體致祭事, 分付矣。平原大君·齊安大君之墓, 亦在其同崗, 雖與永昌之冤死, 有異, 旣已輦過於至近之地, 三大君致祭, 所當一體擧行, 兩公主致祭, 依前擧行, 三大君, 則卜日擧行, 可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55책 (탈초본 18책) 숙종 20년(1694) 2월 28일 병신(丙申) 4/10 기사



『승정원일기』 555책 (탈초본 30책) 경종 3년(1723) 6월 8일 을묘(乙卯) 15/17 기사

Quote-left blue.png 又以兵曹言啓曰, 今此玉山府大嬪祠宇展拜擧動時, 四面墻外, 當爲扈衛, 而明善公主祠堂內墻, 與祠宇北墻相連, 毁墻通路, 事涉未便, 在前社稷擧動時, 大院君祠堂內墻, 亦與社禝南墻相連, 故扈衛軍兵, 退立於祠堂墻外矣。今亦依此擧行,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555책 (탈초본 30책) 경종 3년(1723) 6월 8일 을묘(乙卯) 15/17 기사



『승정원일기』 765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9월 11일 기축(己丑) 15/23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洪尙賓曰, 永昌大君墓, 明善·明惠兩公主墓, 致祭事, 依甲戌年例, 令禮官卜日擧行。兩公主墓, 則今下親製祭文用之, 永昌大君墓, 則以知製敎撰進, 海昌尉·明安公主墓, 亦爲遣禮官致祭, 而祭文, 亦以內下者用之。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765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9월 11일 기축(己丑) 15/23 기사



『승정원일기』 765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9월 11일 기축(己丑) 17/23 기사

Quote-left blue.png 尹陽來, 以禮曹意啓曰, 傳曰, 永昌大君墓, 明善·明惠兩公主墓致祭事, 依甲戌年例, 令禮官卜日擧行。兩公主墓, 則今下親製祭文用之, 永昌大君墓, 則以知製敎撰進, 海昌尉·明安公主墓, 亦爲遣禮官致祭, 而祭文, 亦以內下者用之事, 命下矣。致祭吉日, 卽令日官推擇, 則今九月十五日爲吉云, 以此日擧行, 而祭物執事, 依前例, 令本道差定進排, 永昌大君墓, 明善·明惠兩公主墓, 致祭祭官, 亦令吏曹差出事, 分付,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765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9월 11일 기축(己丑) 17/23 기사



『승정원일기』 1116책 (탈초본 62책) 영조 31년(1755) 2월 1일 을사(乙巳) 38/41 기사

Quote-left blue.png 校理李最中書曰, 伏以臣卽伏見小報, 有以明善·明惠兩公主廟宇凄涼, 至下親臨之命, 此蓋出於仰體慈敎, 躬自飭勵之意, 我大朝追先敦睦之誼, 孰不欽仰。而第念人君一動, 自有儀度, 如欲修擧, 則一有司, 可以奉行, 何至於聖躬之自貽伊勞耶? 令下倉卒, 事多窘迫, 三軍不及成列, 百司未暇趨事, 聽聞擾攘, 氣像忙遽, 恐有欠於淸路鳴和鑾之節也。臣之本來情勢, 固不敢以官職自居, 而事關國體, 有難終默, 敢陳短章, 仰暴迷見。伏乞仰稟大朝, 卽收成命, 以光聖德, 千萬幸甚。答曰, 覽書具悉。成命之下, 仰稟爲難矣。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116책 (탈초본 62책) 영조 31년(1755) 2월 1일 을사(乙巳) 38/41 기사



『승정원일기』 1445책 (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7월 23일 을사(乙巳) 21/22 기사

Quote-left blue.png 又命書傳敎曰, 淑靜·淑敬公主墓, 亦依兩朝故事, 還宮後擇日, 遣內侍致祭, 祭物自本邑進排, 明安公主墓致祭一節, 依此擧行。永昌大君及明惠·明善公主墓, 旣付壽進宮矣。還宮後致祭, 一體擧行, 而祭物使該宮房擧行, 祝文則但令製進。上曰, 往十里近處, 辛亥飢死人處, 依前例一體致祭。上曰, 今番各處致祭祭文, 各令知製敎分撰, 從速入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5책 (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7월 23일 을사(乙巳) 21/22 기사



『승정원일기』 1812책 (탈초본 96책) 정조 23년(1799) 8월 23일 기유(己酉) 23/39 기사

Quote-left blue.png 李貞運, 以忠勳府言啓曰, 傳曰, 獻陵展謁, 昔在世宗朝行之, 至孝廟朝, 欲行之而未果, 至肅廟朝, 甲戌始行之, 而先朝癸丑行之, 戊子修改時, 又行展謁。予於其時, 陪駕今年又展謁, 有紀實之文, 而先朝展謁時, 致祭於永昌大君墓, 海昌尉·明安公主墓, 明惠·明善公主墓, 亦皆致祭。今番依此擧行, 大君·都尉墓, 遣承旨, 兩公主墓, 遣內侍, 皆於今月內致祭, 而先朝亦有訪問勳臣後裔之命, 令勳府詳考各派嫡長人姓名, 雖忠義, 連皆爲之列錄以聞事, 命下矣。太宗朝佐命功臣嫡長孫中, 時存人姓名, 別單書入之意, 敢啓。傳曰, 似此未瑩之草記, 何以捧入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812책 (탈초본 96책) 정조 23년(1799) 8월 23일 기유(己酉) 23/39 기사



『승정원일기』 1812책 (탈초본 96책) 정조 23년(1799) 8월 23일 기유(己酉) 38/39 기사

Quote-left blue.png 命書傳敎曰, 獻陵展謁, 昔在世宗朝行之, 至孝廟朝, 欲行之而未果, 至肅廟朝, 甲戌始行之, 而先朝癸丑行之, 戊子修改時, 又行展謁。予於其時陪駕, 今年又展謁, 有紀實之文, 而先朝展謁時, 致祭於永昌大君墓, 海昌尉·明安公主墓, 明惠·明善公主墓, 亦皆致祭。今番依此擧行, 大君·都尉墓, 遣承旨, 兩公主墓, 遣內侍, 皆於今月內致祭, 而先朝亦有訪問勳臣後裔之命。令勳府詳考各派嫡長人姓名, 雖忠義, 連皆爲之列錄以聞事, 分付。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812책 (탈초본 96책) 정조 23년(1799) 8월 23일 기유(己酉) 38/39 기사



『승정원일기』 1812책 (탈초본 96책) 정조 23년(1799) 8월 24일 경술(庚戌) 26/45 기사

Quote-left blue.png 金達淳, 以忠勳府言啓曰, 傳曰, 獻陵展謁, 昔在世宗朝行之, 至孝廟朝, 欲行之而未果, 至肅廟朝, 甲戌始行之, 而先朝癸丑行之, 戊子修改時, 又行展謁。予於其時陪駕, 今年又展謁, 有紀實之文, 而先朝展謁時, 致祭於永昌大君墓, 海昌尉·明安公主墓, 明惠·明善公主墓, 亦皆致祭。今番依此擧行, 大君·都尉墓, 遣承旨, 兩公主墓, 遣內侍, 皆於今月內致祭, 而先朝亦有訪問勳臣後裔之命。令勳府詳考各派嫡長人姓名, 雖忠義, 連皆爲之列錄以聞事, 命下矣。太宗朝佐命功臣三十八人嫡長孫, 時存人及未錄名, 區別列錄, 別單書入之意, 敢啓。傳曰, 知道。佐命功臣嫡長十八家已錄名中, 九家嫡長之未付忠義者, 卽付草記。其中義安大君贈諡襄昭公嫡長孫令李宗恢, 令吏判招見, 可合百里, 則除百里, 只可陞敍, 則(陞敍)卽爲陞敍。晉山府院君領議政文忠公河崙嫡長孫忠義衛河龍彬, 當窠參奉, 待窠調用, 而上黨君景肅公李佇, 鷲山君辛克禮, 亦一等功臣也, 其後孫未及祿名[錄名]云, 卿其各別搜訪草記。漢山府院君趙英茂, 開國功臣爲三等, 定社功臣爲一等, 佐命功臣又爲一等, 嫡長孫守衛官趙命漢, 待其遞來, 先付諭書, 忠義待窠收用。未錄家二十家中二家, 先命搜訪, 餘亦隨訪付忠義。義安大君墓, 一等功臣河文忠公墓, 遣承旨卜日致祭, 祭文當親撰, 而此外一等上黨·漢山·鷲山墓, 遣禮官致祭, 可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812책 (탈초본 96책) 정조 23년(1799) 8월 24일 경술(庚戌) 26/45 기사



『승정원일기』 2576책 (탈초본 124책) 철종 7년(1856) 2월 20일 무신(戊申) 14/14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驪興府院君閔霽內外祠板, 遣禮官致祭, 其祀孫, 初仕待窠調用, 廣平大君墓, 遣地方官致祭, 明惠公主墓·明善公主墓·淸衍君主墓, 遣內侍致祭, 故領議政鄭光弼墓, 故左議政李𡎋墓, 竝遣地方官致祭, 延陽府夫人墓, 遣承旨致祭, 贈領議政金洙根墓, 遣地方官致祭。 出傳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576책 (탈초본 124책) 철종 7년(1856) 2월 20일 무신(戊申) 14/14 기사



『승정원일기』 2718책 (탈초본 128책) 고종 4년(1867) 9월 10일 경신(庚申) 25/47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明惠公主·明善公主墓, 遣內侍致祭, 淸衍郡主墓, 遣地方官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718책 (탈초본 128책) 고종 4년(1867) 9월 10일 경신(庚申) 25/47 기사



경기도감영장계등록

『경기도감영장계등록(京畿道監營狀啓謄錄)』4, 장계(狀啓)

Quote-left blue.png 甲辰三月 日

承政院開坼 前因備邊司啓下關, 道內各邑所在無後大君公主塚墓之禁伐, 有名無實者, 公子貴主墳山之貧窮不能守護者, 關問列邑, 待其報來, 先爲條列狀聞之意, 已爲馳啓爲白有在果, 該邑守令, 躬往墓在處, 子孫有無, 茔域完毁與否, 使之探問看審, 詳細枚報矣。 今始齊到, 故謹此開錄于左爲白乎旀, 其中無後墳墓, 自各宮房修治者, 每於春秋, 官家審察其禁伐形止, 若有有名無實之患, 則各別嚴飭, 俾無未盡之弊爲白遣, 或有絶祀而爲無主之塚者, 改莎封域, 俾免茂草之場, 而定給守墓之人, 使之禁伐是白遣, 或有子孫而貧窮流離, 不得守護者, 官出物力, 被莎補土, 俾無樵牧侵及之患。 自各其邑, 姑待農歇, 着意擧行後, 形止卽爲修報, 而所入物力, 報惠廳會減爲白乎矣, 此後段, 毋或仍以抛置, 這這申飭, 使我聖上親九族之德意, 遍曁於泉壤事, 亦爲勉飭於墓在各邑, 緣由竝以馳啓云云。

甲辰三月 日 〈後〉 平安大君, 江寧府夫人, 齊安大君, 商山府夫人, 永昌大君, 明善公主, 明惠公主, 大君阿只氏。 以上墓, 在廣州炭洞。 龍城大君, 義昌大君, 陽川郡夫人, 贈慶嬪李氏。 以上墓, 在楊州豊壤。 樂善君, 東原郡夫人。 以上墓, 在楊州靑松。 明嬪金氏墓, 在楊州峨嵯山。 貴人金氏墓, 在楊州忘憂里。 昭儀劉氏墓, 在楊州眞官。 淑媛張氏墓, 在楊州延曙。 淑儀羅氏, 淑愼公主。 以上墓, 在高陽西山。 以上二十墓, 壽進宮次知。(…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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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기도감영장계등록(京畿道監營狀啓謄錄)』4, 장계(狀啓)



운봉유고

『운봉유고(雪峯遺稿)』권21, 성남록(城南錄), 「명선공주만(明善公主挽)」

Quote-left blue.png 正待穠華詠。飜成薤露辭。天年笄僅及。仙躅履空遺。紅蜜還無效。銅車謾設儀。雙珠藏一麓。朝夕定相隨 Quote-right blue.png
출처: 『운봉유고(雪峯遺稿)』권21, 성남록(城南錄), 「명선공주만(明善公主挽)」



동리집

『동리집(東里集)』권7, 시(詩), 「명선공주만(明善公主挽)」

Quote-left blue.png 驚聞急訃怳然疑。奉讀哀綸淚共垂。忍想宸情偏慘怛。誰言盛禮竟差池。摧蘭更續無年慟。穠棣仍含不盡悲。悵望廣陵雙窕並。也應魂魄日相隨 Quote-right blue.png
출처: 『동리집(東里集)』권7, 시(詩), 「명선공주만(明善公主挽)」



서석집

『서석집(瑞石集)』권4, 시(詩), 「명선공주만사(明善公主挽詞)」

Quote-left blue.png 貴主芳徽盛。申申內則儀。柔嘉承聖訓。顧復倍宸慈。神理憑誰詰。眞遊杳莫追。龍樓問安地。環佩遽長辭。

其二 鸞馭沖霄漢。芳塵謝玉除。榮光出閤近。妙歲及笄初。歸妹占空在。乘龍事已虛。靈輀侵曉發。不是肅雍車。 其三 運氣丁災厄。天人亦夭殤。荐驚瑤婺霣。莫慰聖心傷。泡幻仍同歲。堂封更按岡。連枝泉下會。戀結紫宸傍。

Quote-right blue.png
출처: 『서석집(瑞石集)』권4, 시(詩), 「명선공주만사(明善公主挽詞)」



식암유고

『식암유고(息庵遺稿)』권2, 오언고시(五言古詩), 「명선공주만사(明善公主挽詞)」

Quote-left blue.png 三珠閬苑樹。燦燦瓊花綴。鮮飊忽廻蕩。慘見雙枝折。十五瑤臺月。盈盈復皎潔。正仰淸光滿。誰知圓嵬缺。鴛機已先斷。鳳簫亦中咽。上帝所震驚。九重共愴結。詞臣在下土。橐筆事詩訣。悲將薤曲陳。忍覩穠華撤。 Quote-right blue.png
출처: 『식암유고(息庵遺稿)』권2, 오언고시(五言古詩), 「명선공주만사(明善公主挽詞)」



『식암유고(息庵遺稿)』권19, 치제문(致祭文), 「명선공주견내시치제문(明善公主遣內侍致祭文)」

Quote-left blue.png 前夏之戚。予哭明惠。少猶怛予。其淚未霽。婉婉其長。復隨而逝。慈情所鍾。此哀何際。哀汝儜弱。遽失芳歲。憐汝柔慧。未諧嘉儷。胡汝夭促。一似汝弟。矧汝約婚。旣定六禮。事故多愆。遂遲采幣。誰料轉眄。永辭衿帨。昧昧後計。孰尸汝祭。予一念至。益增悲係。嗚呼。昔隕單珠。今凋並蒂。始詠夭桃。終傷弱蕙。出殯匪閤。帷堂卽繐。床留遺弄。篋餘舊製。僾僾聲容。猶在聆睇。兩宮興悼。九內共涕。予獨何爲。能不心悷。崇豆維肴。盈觴維醴。玆遣內侍。予諭是替。庶汝有知。尙此歆契。 Quote-right blue.png
출처: 『식암유고(息庵遺稿)』권19, 치제문(致祭文), 「명선공주견내시치제문(明善公主遣內侍致祭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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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

1.문집

  • 강백년(姜栢年), 『운봉유고(雪峯遺稿)』.
  • 이은상(李殷相), 『동리집(東里集)』.
  • 김만기(金萬基), 『서석집(瑞石集)』.
  • 김석주(金錫胄), 『식암유고(息庵遺稿)』.

2.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능원묘천봉안(陵園墓遷奉案)』, 1929 ~ 194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3.논문

  • 윤종준, 「명선(明善)·명혜공주(明惠公主)에 대한 고찰」, 『성남문화연구』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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