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태실지
정종 태실(定宗 胎室) | |
식별자 | PC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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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국왕 태실 |
한글명 | 정종 태실 |
한자명 | 定宗 胎室 |
영문명 | Placenta Chamber of King Jeongjong |
피장자 명칭 | 정종(定宗) |
피장자 이칭 | 이방과(李芳果)·이경(李曔) |
피장자 부 | 태조(太祖) |
피장자 모 |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
피장자 생년월일 | 1357.07.18 |
피장자 몰년월일 | 1419.09.24 |
초장 연월일 | 1399.04.05 |
초장지 기록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번지 |
초장지 기록1 | 금산현(金山縣) 정종실록 |
초장지 기록2 | 금산현 서쪽 10리 황악산(黃岳山) 세종실록지리지 |
이장 연월일 | 1930.05 |
이장지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
지문 | 高麗恭愍王六年丁酉七月一日生,定宗大王胎,藏于金泉郡垈項面,昭和四年月日移藏 |
지문 찬자 | 이왕직 예식과(李王職 禮式課) |
지문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태항아리 | 정종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
태항아리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정의
조선의 초대 왕인 태조(太祖)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2남이며,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太宗)의 형인 조선 제2대 왕 정종의 태실지 관련 정보 페이지.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1권, 정종 1년(1399) 1월 19일 경인(庚寅) 2번째 기사
여흥백(驪興伯) [민제(閔霽)]를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보내어 안태(安胎)할 땅을 징험하여 고찰하게 하였다.
遣驪興伯 閔霽于忠淸、全羅、慶尙道, 證考安胎之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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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종실록』1권, 정종 1년(1399) 1월 19일 경인(庚寅) 2번째 기사 |
『정종실록』1권, 정종 1년(1399) 4월 5일 을사(乙巳) 4번째 기사
중추원 사(中樞院事) 조진(趙珍)을 보내어 금산현(金山縣)에 태(胎)를 안치(安置)하게 하고, 금산을 승격시켜 군(郡)으로 하였다.
遣(中樞院事)〔中樞院使〕 趙珍, 安胎于金山縣, 陞金山爲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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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종실록』1권, 정종 1년(1399) 4월 5일 을사(乙巳) 4번째 기사 |
『세종실록』13권, 세종 3년(1421) 10월 10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
태실(胎室)에 안위(安慰)하는 제사를 없애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왕자의 태(胎)를 묻은 뒤에 3년만에 한 차례씩 제사지내는 것을 태실 안위제(胎室安慰祭)라 하였다. 이날에 이르러 예조에서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옛날 규례를 상고하라 하였더니, 태조와 공정왕은 안태(安胎)한 뒤에 다 안위제(安慰祭)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므로, 인하여 없애라고 명하게 되었다.
命除胎室安慰祭。 前此, 安胎後, 每三年一次行祭, 謂之胎室安慰祭。 至是, 禮曹令書雲觀稽舊例, 太祖、恭靖王安胎後, 竝不行安慰祭, 乃命罷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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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3권, 세종 3년(1421) 10월 10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 |
『세종실록』150권,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금산군
◎ 금산군(金山郡)
신라 때에는 감문군(甘文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경산부(京山府)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2년 경오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 공정왕(恭靖王) 원년 기묘에 어태(御胎)를 현(縣) 서쪽 10리 되는 황악산(黃岳山)에 안치하고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금릉(金陵)이다. 金山郡: 新羅時, 爲甘文郡領縣。 高麗 顯宗九年戊午, 屬京山府任內, 恭讓王二年庚午, 始置監務。 本朝恭靖王元年己卯, 安御胎于縣西十里黃岳山, 陞爲知郡事, 別號金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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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50권,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금산군 |
『정조실록』18권, 정조 8년(1784) 9월 15일 정묘(丁卯) 1번째 기사
예조에서 열성조(列聖朝)의 태봉(胎峰)을 써서 바쳤다.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태봉(胎封)은 진산(珍山) 만인산(萬仞山)에, 정종 대왕(定宗大王)의 태봉은 금산(金山) 직지사(直持寺) 뒤에,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태봉은 성산(星山) 조곡산(祖谷山)에,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태봉은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문종 대왕(文宗大王)의 태봉은 풍기(豊基) 명봉사(鳴鳳寺) 뒤에, 단종 대왕(端宗大王)의 태봉은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세조 대왕(世祖大王)의 태봉은 성주(星州) 선석사(禪石寺) 뒤에,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태봉은 전주(全州) 태실산(胎室山)에,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태봉은 광주(廣州) 경안역(慶安驛) 뒤에,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태봉은 가평(加平) 서면(西面)에, 인종 대왕(仁宗大王)의 태봉은 영천(永川) 공산(公山)에, 명종 대왕(明宗大王)의 태봉은 서산(瑞山) 동면(東面)에,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태봉은 임천(林川) 서면(西面)에 있었다.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태봉은 대흥(大興) 원동면(遠東面)에 있는데, 신유년 10월에 돌 난간을 배설(排設)한 뒤에 대흥현(大興縣)을 승호(陞號)하여 군수(郡守)를 두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태봉은 공주(公州) 남면(南面) 오곡(吳谷) 무수산(無愁山) 동구(洞口)에, 경종 대왕(景宗大王)의 태봉은 충주(忠州) 엄정립비(嚴政立碑)의 북쪽 이삼리 쯤에,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태봉은 청주(淸州) 산내(山內) 일동면(一東面) 무쌍리(無雙里)에 있었다. 禮曹書進列聖朝胎(峰)〔封〕 。 太祖大王胎封珍山 萬仞山, 定宗大王胎封金山 直持寺後, 太宗大王胎封星山 祖谷山, 世宗大王胎封昆陽 所公山, 文宗大王胎封豐基 鳴鳳寺後, 端宗大王胎封昆陽 所谷山, 世祖大王胎封星州 禪石寺後, 睿宗大王胎封全州 胎室山, 成宗大王胎封廣州 慶安驛後, 中宗大王胎封加平西面。 仁宗大王胎封永川 公山, 明宗大王胎封瑞山東面, 宣祖大王胎封林川西面。 顯宗大王胎封大興遠東面, 辛酉年十月, 石欄干排設後, 大興縣陞號爲郡守。 肅宗大王胎封公州南面吳谷 無愁山洞口, 景宗大王胎封忠州嚴政立碑北數里許, 英宗大王胎封淸州山內一東面 無雙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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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18권, 정조 8년(1784) 9월 15일 정묘(丁卯) 1번째 기사 |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1623책 (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4월 13일 경술(庚戌) 39/42 기사
與徐有隣偕入進伏訖。有隣曰, 頃因直指寺僧上言, 有令禮堂, 取考可據他寺例決給之命矣。取考他寺前例, 則列聖朝胎峯守護之地, 御製奉安之所, 俱有劃給免稅, 蠲減雜役之事, 蓋緣所重有在, 不可以闢異端之故, 少忽於顧恤之方故也。今此直指寺, 以定宗朝胎室守護寺刹, 又奉先朝御製, 事體與他自別, 而免稅之旣給還徵, 義僧之替他備納, 未免斑駁。本寺有土免稅十五結, 依前還給, 義僧番錢七十兩, 方當道內諸寺刹凋殘之時, 有難移送他處, 一依減半時新定式例, 令所在地方官, 稱此數加分取耗, 以爲充給之地,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 ||
출처: 『승정원일기』 1623책 (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5) 4월 13일 경술(庚戌) 39/42 기사 |
『승정원일기』 1811책 (탈초본 96책) 정조 23년(1799) 7월 22일 무인(戊寅) 17/25 기사
비변사등록
『비변사등록』 170책 정조 11년(1787) 4월 5일 임인(壬寅) 39/42 기사(기사 링크 수정 불가)
경상도 금산(金山) 직지사(直指寺) 승도(僧徒)의 면세(免稅)를 다른 사찰의 예에 의하여 획급하고 의승(義僧)의 번역(番役)을 제해주는 문제의 상언(上言)에 판부(判付)하기를
“본사찰의 관계에 소중함이 있음은 곧 정종조(定宗朝) 태실(胎室)의 주봉사(主峰寺)라고 하니 수호를 소홀히 해서는 옳지 않다. 해궁(該宮)의 원당(願堂)이 비록 이미 폐지되였으나 선조(先朝)의 어제(御製)를 봉안한 본사(本寺)는 일의 체통이 더욱 자별할 뿐만 아니라 모두 역에 응해야 할 일로서 공사역역(公私力役)을 면제해 주어 도리어 새로이 다른 사찰의 세역(稅役)을 증가 징수하게 되었으니 혜택을 입지 못한다는 탄식은 옳다. 대체로 이름 있는 거찰(巨刹)이 곳곳이 공허함을 조가에서 늘 걱정한다. 승도도 백성이다. 처소를 잃음은 가엾은 일이다. 콩잎도 따지 못함은 오히려 산의 호랑이를 꺼려서이다. 깊은 산 험한 곳에서 승도가 아니면 누가 선뜻 수호할 것인가? 사리로 미루어 보면 죄를 짓고 도망친 자의 소굴이 될 것이니 결코 나라를 경영하는 자가 등한히 보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또 조가에서 급박한 일에 힘이 됨은 이들에게 많다. 공사의 문적을 보면 상고해 알 수 있다. 지금 이 일로 인하여 이와 같이 판하한다면 이는 실제를 위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계획을 세우는 자가 있을 것이다. 관서·영동·양남의 여러 도에 신칙하여 승도가 계속 처소를 잃는 일이 없게 하고 대찰(大刹)도 공허하지 않게 하라는 내용으로 행회(行會)하라. 본 일을 예조에서 근거가 될 만한 다른 사찰의 예를 상고하여 결정해 준 뒤에 초기하게 하라.” 하였다. 慶尙道金山直指寺僧徒免稅, 依他寺例劃給, 義 僧番役除給事上言判付, 本寺關係自有所重, 卽 是定宗朝胎室主峰寺云爾, 則守護之不可泛忽, 該宮願堂雖在已罷中, 先朝御製奉安本寺, 則事 體尤有自別兺不喩, 均是應役之寺, 而公私力役之 頉給, 新反增徵他寺之稅役, 宜爲向隅之歎, 大抵名 方鉅刹之在在空虛, 朝家每以爲悶, 而僧亦民也, 失所可矜除良, 茹藿之不採, 猶憚在山之虎, 深山險 阻之地, 非僧徒孰肯守護, 推以事理, 將爲逋逃之藪, 決非謀國者等閑看過處, 且朝家之緩急得力, 多 在渠輩, 觀於公私文跡, 可按而知, 今因此事, 如是措 辭判下是如乎, 此非爲實端, 自有籌度者存焉, 申飭 關西嶺東兩南諸道, 使緇徒無至如前失巢, 大刹亦 無至一直空曠之意, 措辭行會, 本事段, 令禮曹取考 可據他寺例, 決給後草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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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변사등록』 170책 정조 11년(1787) 4월 5일 임인(壬寅) 39/42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