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태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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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태실(正祖 胎室)
강원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의 정조 태실 터 공중 전경
식별자 PC017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정조 태실
한자명 正祖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Jeongjo
피안자 명칭 정조(正祖)
피안자 이칭 이산(李祘)·자(字) 형운(亨運)·호(號) 홍재(弘齋)·선황제(宣皇帝)·건릉(建陵)
피안자 부 장조(莊祖)
피안자 모 헌경왕후(獻敬王后) 홍씨(洪氏)
피안자 생년월일 1752.10.28
피안자 몰년월일 1800.08.18
안태 연월일 1753.01.21 『정조 태지석』
안태지 기록 강원도(江原道) 영월부(寧越府) 하동면(下東面) 정양리(正陽里) 계족산(鷄足山) 서쪽 기슭 계좌정향(癸坐丁向) 『영조실록』
안태지 기록1 영월(寧越) 『정조실록』
안태지 기록2 강원 영월군 하동면 『서삼릉 정조 태실 후면 각자』
안태지 좌표(위도) 37°16'26.02"N
안태지 좌표(경도) 128°49'42.29"E
안태지 주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467
문화재 지정여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4호
이안 연월일 1929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壬申年,九月,二十二日,丑時生,元孫阿只氏胎,乾隆十八年,正月,二十一日,午時藏
지문 찬자 조선 예조(朝鮮 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정조 가봉태실 안태지 옆 산 중턱에 복원
태항아리 정조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목차

내용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의 태실이다.

1752년(영조 28) 안태처로 강원도 원주 역안산·백운산·영월부 계족산·경상도 예천군 용문사 등이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강원도 영월의 계족산에 안태하였다.

정조 즉위 초부터 신하들이 태실을 가봉할 것을 건의 하였으나 풍년인 해를 기다려 가봉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거의 매해 가봉을 미루었다. 하지만 이는 사도세자 태실 가봉을 이루기 위한 포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정조 치세 중 태실 가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조 태실의 가봉은 1801년(순조 1) 10월에야 이루어졌다. 이 때 가봉의 의절은 경모궁 태실 가봉의 예를 따라 이루어졌다. 이 때 가봉에 쓰인 석물은 제천에서 생산한 것을 가져다 썼으며, 태실제도는 영조 태실을 기준으로 삼았다. 가봉이 이루어진 뒤 금표 영역을 300보로 넓히고 수호군도 기존 2명에서 6명을 더해 8명으로 두었다.

일제강점기 태실이 훼손된 후 석물들은 영월 MBC 마당 등으로 옮겨다녔다. 게다가 태실지에는 발전소가 건립되면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최근에 영월발전소 옆 봉우리에 태실 석물을 모두 옮겨 복원하였으나 태실과 태실비의 위치는 새롭게 고증이 필요하다.

상세

정조(正祖) 태실은 1753년 원손 태실로 처음 조성되었다.[1]

초안지는 강원도 영월부 하동면 정양리 계족산 서쪽 기슭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2] 여러 차례 가봉에 대한 주청이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3] 가봉은 1801년에 이루어졌다.[4]

1929년 이왕직에서 전국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이안하면서 정조 태실 또한 본래의 경관을 잃게 되었다. 이후 초안지 태봉은 석회광산업자의 석회채취공사로 동편 약1/3 이상이 결실되었으며 정상부는 한국전력 고압선 철탑이 설치되었다. 태봉 정상에 흩어져 있던 가봉 태실 석물은 앞서 언급한 석회채취공사로 한차례 매몰되었으며 1967년 영월개발위원회에서 영월발전소의 협조를 얻어 태실 석물을 영월읍 정양리 KBS 방송사 구내로 옮겨 보존하였다.

이후 영월군에서 이전복원 계획을 수립하여 실측조사를 진행한 후, 1998년 기존 초안지보다 500m 동측인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으로 옮겨 복원되었다.[5][6] 이전 복원된 정조 가봉 태실은 1995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어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현재 이전 복원된 정조 태실은 명문이 마멸되어 판독이 어려운 아기태실비와 가봉태실비, 가봉태실 석물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아기태실비는 비면 상면에 원대(圓臺) 없이 반원형의 연봉이 있고 비수 외면에는 연줄기가 양각으로 표현되었다. 연줄기 밑으로는 대석이 있는데 정면에서 보면 위로 볼록한 곡선이다. 아기태실비는 전체 높이가 150cm이며 비수 높이 42cm, 비신 높이 98cm, 비신 너비 50cm, 비신두께 25cm, 대석 길이 80cm, 대석너비 55cm이다. 비신의 명문은 앞면이 ‘乾隆十七年九月二十二日丑時生元孫阿只氏胎室’로 각자되어 1752년 원손으로 태어난 정조의 태를 묻었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으며, 뒷면은 ‘乾隆十八年正月二十一日立’이라 새겨져 아기태실비과 1753년 1월 21일에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7]

가봉태실비는 귀룡대석과 표석이 결합되어있다. 귀룡대석은 높이 78cm, 폭 1.138m, 길이 1.95m로 귀룡의 머리는 몸체에 비해 크고 목이 굵은 형상이며 코는 넓고 입은 벌린 상태에서 여의주를 물고 있다. 눈은 둥글고 귀와 뿔은 작게 표현하여 얼굴이 전반적으로 순한 형상을 한다. 등에는 비좌를 중심으로 연잎과 줄기를 양각했고 밑으로는 귀갑문을 표현했다. 목과 발 그리고 꼬리에는 비늘이 새겨져 있고 앞발 발가락은 3 ~ 4개를 표현했으나 뒤발 발가락의 표현은 생략했다. 발밑으로는 팔각대석이 있는데 귀룡대석과 일체이다. 이수는 높이 56cm, 폭 63.5cm, 두께 40cm로 두 마리의용이 서로 여의주를 마주보고 그 사이에 구름의 형상을 조각하였다. 비신은 높이 1.2m, 폭 51.8cm, 두께 30cm로 명문이 앞뒤로 새겨져있다. 앞면은 ‘正宗大王胎室’이라 각자되어 정조의 묘호가 조(祖)로 추숭되는 1899년 이전에 가봉태실비가 세워졌음을 유추할 수 있고, 뒷면은 ‘嘉慶六年十月二十七日建’이라 적혀있어 1801년에 가봉이 이뤄진 사실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중앙태석은 개첨석과 중동석이 조합된 형태이다. 개첨석은 높이 1.12m, 폭 1.08m, 바닥원형 홈 지름 89cm로 평면 팔각으로 상부 중앙에 원대(圓臺)와 연봉형의 보주가 있다. 외면은 연잎 줄기를 2단으로 양각하였으며 아랫면은 중동석과 결합하기 위한 원형 홈이 있다. 중동석은 높이 82.5cm, 상하부 지름 89cm이다. 원구형으로 외면 상부와 하부에 원형고리를 촘촘하게 엮은 문양이 돌아가고, 중앙에는 운문이 8곳 양각되었다. 중동석의 기단에 해당하는 사방석은 높이 31cm, 폭 1.04m로 평면 팔각이며 중동석과 같은 운문이 양각되었다.

전석(磚石)은 우전석(隅磚石)과 면전석(面磚石)으로 구성되어있다. 상면에는 난간석(欄干石)을 세워 고정하기 위한 홈이 있으며 전석의 전체지름은 3.88m, 한 면의 높이는 1.607m이다. 우전석은 평면 오각형으로 난간이 꺾이는 모퉁이에 받치는 전석이고 면전석은 평면 사다리꼴로 우전석과 우전석 사이 반듯한 면에 받치는 전석이다. 우전석의 홈에는 연엽주석을 꽂고 면전석에는 연엽동자석을 꽂는다. 우전석은 높이는 1.215m, 최대 폭 82.5cm, 최소 폭 41cm, 두께 34.5cm, 원형 홈 지름 19cm이며 면전석은 높이 94cm, 최대 폭 71.5cm, 최소 폭 36.5cm, 두께 34.5cm, 원형 홈 지름 19cm이다.

상석(裳石)은 전석과 마찬가지로 평면 팔각의 형태이며 전석 위에 설치하고 중앙에는 상석 끝을 약간 걸쳐 사방석을 놓는다. 상석의 전체 지름은 2.64m, 한 면의 높이는 1.094m이다. 우상석은 평면 오각형으로 우전석 위에 놓이고 측면 양면에는 운문이 양각되었으며 면상석은 평면 사다리꼴로 면전석 위에 놓였다. 우상석의 높이는 1.095m, 최대 폭 56cm, 최소 폭 15cm, 두께 24cm이고, 면상석은 높이 94cm, 최대 폭 48.5cm, 최소 폭 14cm, 두께 24cm이다.

난간석은 연엽주석과 연엽동자석, 횡죽석으로 구성되어있다. 연엽주석은 높이 1.215m, 폭 49.5cm, 두께 34.5cm로 우전석의 원형 홈에 끼워 세우는 기둥으로 상부는 연봉형의 보주가 있고 밑으로는 원대(圓臺)가있다. 원대 밑으로는 2열의 음각 홈이 돌아가고 앞면에는 원문(圓紋)과 2중선이 양각되었다. 양옆의 횡죽석을 받치는 부분에는 상하 구분하여 연엽과 연줄기를 장식했다. 바닥에는 우전석의 홈에 끼울 수 있도록 돌기가 있다. 연엽동자석은 높이 67.5cm, 폭 45.5cm, 두께 35cm로 면전석의 원형 홈에 끼워 세우며 연엽주석 사이의 횡죽석을 받치는 기둥이다. 상면에는 횡죽석을 받치도록 홈이 마련되었고 정면과 측면에 연엽과 연줄기가 새겨졌다. 횡죽석은 연엽주석과 동자석에 횡으로 얹는 난간대이고 단면 팔각 8매로 구성되었다. 1매의 길이는 1.020m, 폭 25cm이며 양끝은 난간석이 팔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꺾이는 부분을 고려하여 사선으로 절단하였다.[8]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0권, 영조 28년(1752) 11월 25일 임오(壬午)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원손의 태봉을 묻을 곳을 정하다》

관상감에서 올린 계사로 인해 원손의 태봉(胎峯)을 강원도(江原道) 영월부(寧越府) 하동면(下東面) 정양리(正陽里) 계족산(鷄足山) 서쪽 기슭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정하고, 계유년 정월을 기다렸다가 날을 잡아 거행하도록 하였다. 대개 남자의 태는 5개월이 되어서 묻은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因觀象監啓, 命元孫胎峰定以江原道 寧越府 下東面 正陽里 鷄足山西麓癸坐丁向, 待癸酉正月擇日擧行。 蓋男胎五朔以藏, 例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영조실록』70권, 영조 28년(1752) 11월 25일 임오(壬午) 3번째 기사



『영조실록』79권, 영조 29년(1753) 1월 14일 경오(庚午)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비변사에서 원손궁의 장태사는 종2품으로 고쳐서 계하할 것을 청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원손궁(元孫宮)의 장태사(藏胎使)는 청컨대 종2품으로 고쳐서 계하(啓下)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備邊司啓: "元孫宮藏胎使, 請以從二品改啓下。" 允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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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79권, 영조 29년(1753) 1월 14일 경오(庚午) 2번째 기사



『정조실록』4권, 정조 1년(1777) 12월 24일 병진(丙辰)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장태에 표석 세우는 일은 풍년 든 후로 미루어 거행하게 하다》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아뢰기를,

"선왕조(先王朝) 을유년에 ‘장태(藏胎)를 이미 봉토(封土)한 것은 그전대로 수호(守護)해야 하거니와, 이 뒤로는 장태를 어원(御苑)의 정결한 곳에다 하라.’고 하신 수교(受敎)를 받들어 일정한 식례(式例)로 했었습니다. 임신년에 영월(寧越) 계죽산(鷄竹山)에 봉토한 장태는 수교하기 이전에 한 것입니다. 성상께서 즉위(卽位)하신 뒤에는 사체가 지극히 중요하게 되었으니, 표석(表石) 세우는 일들을 한결같이 열성조(列聖朝)에 이미 시행해 온 전례대로 즉시 거행하도록 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올해 관동(關東)에 어떻게 민간의 힘을 번거롭게 할 수 있겠는가? 풍년 들기를 기다렸다가 거행하라."

하였다.

次對。

領議政金尙喆啓言: "先朝乙酉, 有‘藏胎已封者, 依前守護, 此後則藏于御苑凈潔處’之受敎定式, 而壬申寧越 雞 竹山胎封, 在於受敎之前。 聖上卽位後, 事體至重, 表石等事, 一依列聖朝已行之例, 卽令擧行爲宜。"

敎曰: "今年關東, 豈煩民力? 待年豐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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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4권, 정조 1년(1777) 12월 24일 병진(丙辰) 1번째 기사



『정조실록』25권, 정조 12년(1788) 1월 13일 병자(丙子)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정조의 태실이 있는 영월의 가봉·호서의 조선에 따른 민폐·정창손의 사직소 등에 관해 논의하다》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아뢰기를,

"호조가 관북(關北)에서 구매한 삼(蔘)에 대해, 도신(道臣)이 근수(斤數)를 줄여주기를 청하였으나, 사세로 보아 따르기 어려우니, 그 값을 올려주어 민폐를 제거하소서."

하니, 그 근수를 줄이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하의 태실(胎室)이 영월(寧越)에 있는데, 가봉(加封)하는 것이 예에 마땅하니, 택일하여 공사를 시작하게 하소서."

하니,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次對。

領議政金致仁啓言: "戶曹貿蔘於關北道臣, 請減其斤數, 而勢難强從, 宜增其價, 以除民弊。"

命減其斤數。

又啓言: "當宁胎室, 在寧越, 禮當加封。 請擇日始役。"

命待秋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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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25권, 정조 12년(1788) 1월 13일 병자(丙子) 1번째 기사



『순조실록』3권, 순조 1년(1801) 8월 10일 갑인(甲寅)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심환지가 사학 죄인 유항검에 대해 아뢰다》

… (전략) … 심환지가 말하기를,

"지금 이 선대왕(先大王)의 태실(胎室)을 가봉(加封)할 때에 경모궁(景慕宮)의 태실을 가봉할 때의 예에 따라 관상감(觀象監)·선공감(繕工監)의 제조(提調) 중에서 한 사람을 겸하여 나아가게 하는 뜻을 연석(筵席)에서 여쭈어 윤허를 받았는데, 다시 등록(謄錄)을 상고한즉, 서표관(書標官)을 제조로서 나아가는 사람으로써 겸하여 차하(差下)하였습니다. 지금도 역시 이에 의하여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煥之曰: "今此先大王胎室加封時, 依景慕宮胎室加封時例, 觀象監、繕工監提調中一員兼進之意, 筵稟蒙允, 而更考謄錄, 則書標官以提調進去人兼差矣。 今亦依此爲之好矣。"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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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3권, 순조 1년(1801) 8월 10일 갑인(甲寅) 3번째 기사



『순조실록』3권, 순조 1년(1801) 10월 9일 임자(壬子)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영월부에 있는 선대왕의 태실 가봉을 거행하도록 명하다》

영월부(寧越府)에 있는 선대왕(先大王)의 태실(胎室) 가봉(加封)을 이달 27일에 거행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寧越府先大王胎室加封, 命以今月二十七日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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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3권, 순조 1년(1801) 10월 9일 임자(壬子) 2번째 기사



『순조실록』3권, 순조 1년(1801) 11월 8일 신사(辛巳)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사당을 주토한 뒤에 종묘에 고유하는 일에 관한 하교》

차대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를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태실(胎室)을 가봉(加封)한 뒤에 별단(別單)을 닦아서 들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次對。 上命禮判進前, 敎曰: "胎室加封後, 別單修入可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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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3권, 순조 1년(1801) 11월 8일 신사(辛巳) 1번째 기사



『순조실록』3권, 순조 1년(1801) 11월 8일 신사(辛巳)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선대왕의 태봉 금표 안의 민가 민전을 헐지 말고 묵히지 말라고 명하다》

선대왕(先大王)의 태봉(胎封) 금표(禁標) 안에 있는 민가(民家)와 민전(民田)을 헐지 말고 묵히지 말라고 명하였다.

先大王胎封禁標內民家民田, 勿毁勿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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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3권, 순조 1년(1801) 11월 8일 신사(辛巳) 4번째 기사



『순조실록』3권, 순조 1년(1801) 11월 11일 갑신(甲申)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정종 대왕 태실을 가봉하는데 수고한 사람에게 가자하라는 하교》

하교하기를,

"영월(寧越)의 정종 대왕(正宗大王) 태실(胎室)을 가봉(加封)하는 공역(工役)을 순조롭게 이루었으니, 나 소자(小子)의 애통한 사모가 더욱 깊어진다. 감동(監董)한 여러 사람에게만 특별히 그 노고(勞苦)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고자 하는 것이니,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 겸 서표관(書標官) 정대용(鄭大容)에게는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가자(加資)하고 감역(監役) 겸 도차사원(都差使員)인 지방관(地方官) 허질(許晊)에게는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라."

하였다.

敎曰: "寧越 正宗大王胎室加封, 工役順成, 予小子哀慕益深。 監蕫諸人, 非特酬其勞, 亦欲重其事也。 繕工提調兼書標官鄭大容, 加正憲, 監役兼都差使員地方官許晊, 加嘉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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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3권, 순조 1년(1801) 11월 11일 갑신(甲申)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1088책 (탈초본 60책) 영조 28년(1752) 11월 23일 경진(庚辰) 15/19 기사

Quote-left blue.png 具允明, 以觀象監官員, 以提調言啓曰, 新生元孫阿只氏, 藏胎看審處, 江原道原州牧新林驛案山, 雉嶽山麓白雲山下, 午坐子向, 江原府·寧越府下東西正陽西鷄竹山西麓, 癸坐丁向, 慶尙道醴泉郡龍門寺後杜雲峯, 子坐午向之原三處, 年前看審時, 元體秀美, 依例備望以入之意, 敢啓。

傳曰, 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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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088책 (탈초본 60책) 영조 28년(1752) 11월 23일 경진(庚辰) 15/19 기사



『승정원일기』 1088책 (탈초본 60책) 영조 28년(1752) 11월 24일 신사(辛巳) 23/28 기사

Quote-left blue.png 《擇日하여 擧行할 것을 청하는 觀象監의 草記》

具允明, 以觀象監官員, 以提調意啓曰, 今此元孫阿只氏胎峯, 以江原道寧越府下東面正陽村, 鷄竹山西麓癸坐丁向, 落點矣。藏胎之法, 男胎五朔以藏, 而來癸酉正月, 旣準五朔, 且是吉月, 依此擇日擧行,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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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088책 (탈초본 60책) 영조 28년(1752) 11월 24일 신사(辛巳) 23/28 기사



『승정원일기』 1090책 (탈초본 60책) 영조 29년(1753) 1월 6일 임술(任戌) 7/15 기사

Quote-left blue.png 《職名이 없는 任鏡觀에게 口傳으로 軍職을 붙여줄 것을 청하는 吏曹의 草記》

李之億, 以吏曹言啓曰, 元孫阿只氏藏胎使從事官前正言任鏡觀, 時無職名, 令該曹口傳付軍職,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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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090책 (탈초본 60책) 영조 29년(1753) 1월 6일 임술(任戌) 7/15 기사



『승정원일기』 1090책 (탈초본 60책) 영조 29년(1753) 1월 14일 경오(庚午) 18/38 기사

Quote-left blue.png 金致仁, 以備邊司言啓曰, 元孫宮藏胎使, 當以從二品差送, 而該曹誤以正二品啓下云。當該銓堂, 推考警責。發行擇日, 在於明日, 事勢甚急。分付該曹, 以從二品, 卽爲改啓下, 以爲趁卽發行之地,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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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090책 (탈초본 60책) 영조 29년(1753) 1월 14일 경오(庚午) 18/38 기사



『승정원일기』 1090책 (탈초본 60책) 영조 29년(1753) 1월 14일 경오(庚午) 27/38 기사

Quote-left blue.png 《朴正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吏曹口傳政事, 檢閱二, 朴正源·李命植單付, 元孫阿只氏藏胎使尹光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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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090책 (탈초본 60책) 영조 29년(1753) 1월 14일 경오(庚午) 27/38 기사



『승정원일기』 1410책 (탈초본 78책) 정조 1년(1777) 12월 24일 병진(丙辰) 9/12 기사

Quote-left blue.png … (전략) … 尙喆曰, 先朝乙酉受敎, 藏胎已封者, 依前守護, 而此後必也御苑淨潔處藏置。觀象監胎封置簿, 亟令祛之事, 定式爲敎, 而壬申年寧越鷄竹山胎封, 旣在下敎前, 則聖上卽位之後, 事體至重。石物及表石, 一依列聖朝已行之例, 卽爲擧行之意, 分付該曹, 何如?

上曰, 雖有前例, 今年關東, 豈費民力? 稍待年豐擧行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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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410책 (탈초본 78책) 정조 1년(1777) 12월 24일 병진(丙辰) 9/12 기사



『승정원일기』 1447책 (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8월 25일 병자(丙子) 20/21 기사

Quote-left blue.png 己亥八月二十五日辰時, 上御誠正閣。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 前洪忠監司同爲入侍時, 領議政金尙喆, 兼漢城判尹具善復, 戶曹判書金華鎭, 禮曹判書李福源, 工曹判書鄭好仁, 刑曹判書趙㻐, 訓鍊院都正李敬懋, 行都承旨洪國榮, 漢城右尹李性源, 前洪忠監司李命植, 持平徐有成, 正言李亮載·李正薰, 校理金翊休, 副修撰沈樂洙, 同副承旨南鶴聞, 假注書徐鼎修, 事變假注書黃仁炫, 記事官金勉柱·鄭東浚, 以次進伏訖。

… (중략) …

福源曰, 年前大臣, 以胎封加封事, 陳達, 而有待年豊擧行之敎矣。今年年事稍登, 胎封事體甚重, 一向遷就, 殊涉未安, 何以爲之乎?

上曰, 更觀明年年事擧行,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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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447책 (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8월 25일 병자(丙子) 20/21 기사



『승정원일기』 1607책 (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윤 7월 29일 경자(庚子) 21/23 기사

Quote-left blue.png 丙午閏七月二十九日辰時, 上御熙政堂。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領議政鄭存謙, 左議政李福源, 右議政金熤, 行兵曹判書李命植, 左參贊金魯鎭, 右參贊李在協, 吏曹判書兪彦鎬, 行副司直徐有寧·徐有慶, 刑曹判書徐浩修, 延豊君李𡊠, 禮曹判書李在簡, 行副司直李柱國, 戶曹判書趙時俊, 漢城判尹金尙集, 右尹徐有大, 行都承旨洪秀輔, 吏曹參判李秉模, 校理李晴, 左副承旨徐瀅修, 假注書金祖淳, 事變假注書李相璜, 記注官承膺祚·金健修, 以次進伏訖。

… (중략) …

存謙曰, 以寧越胎室加封, 待秋擧行事, 下敎矣。禮曹知委諸道石物, 亦令措備, 今則只當擇日, 依例擧行矣。

上曰, 今年則非其時也, 待明秋擧行,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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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07책 (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윤 7월 29일 경자(庚子) 21/23 기사



『승정원일기』 1629책 (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7월 6일 신미(辛未) 25/28 기사

Quote-left blue.png 丁未七月初六日卯時, 上御誠正閣。

都承旨入侍時, 行都承旨沈豐之, 假注書趙台榮, 記事官李相璜·金祖淳, 以次進伏訖。

… (중략) … 致仁曰, 臣之病狀, 難以時日可起, 旣蒙聖恩, 許以長暇, 此後賓對進參, 未期早晏, 敢以賓對擬陳者仰達矣。列聖朝以來, 胎室加封, 雖或待年豐退行, 未嘗過於七八年之久矣。昨年夏, 以寧越胎室加封事, 因大臣筵奏, 禮堂知委本道, 所入石物, 預爲措備, 而先有待明秋擧行之命, 故至今遲待矣。聖念雖軫民邑之弊, 每降姑待之敎, 而旣是應行典禮, 則有不容一向遷就, 今則秋序已屆, 分付禮曹雲館, 預先卜日, 知委該道, 運置石物, 磨置以待, 秋成卽時擧行, 何如?

上曰, 欲觀今年秋事爲之, 待秋成更爲稟處,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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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29책 (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7월 6일 신미(辛未) 25/28 기사



『승정원일기』 1635책 (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10월 10일 갑진(甲辰) 19/20 기사

Quote-left blue.png 丁未十月初十日辰時, 上御誠正閣。

大臣·備局堂上, 引見入侍時, 領議政金致仁, 左議政李在協, 右議政兪彦鎬, 左參贊金魯鎭, 行司直鄭昌聖, 戶曹判書徐有隣, 行副司直徐有寧, 禮曹判書金履素, 行副司直鄭好仁, 吏曹判書李𡊠, 兵曹判書鄭昌順, 兼都承旨沈豐之, 開城留守閔鍾顯, 行副司直李敬懋, 吏曹參判金文淳, 行副司直李秉模·徐有大, 刑曹參判洪秀輔, 漢城右尹朴祐源, 江華留守趙鼎鎭, 行副司直金持默, 校理李鼎德, 左副承旨曺允大, 假注書李羲觀, 事變假注書金膺著, 記事官李相璜·金祖淳, 以次進伏訖。

… (중략) …

致仁曰, 頃以寧越胎峰加封事陳達, 有待秋成, 更爲稟處之命矣。今則滌場已訖。民事少歇, 分付該曹, 擇日擧行, 何如?

上曰, 今已當寒, 退定於明春可也。出擧條

致仁曰, 行副司直李性源·李在簡, 吏曹判書李𡊠, 備堂還差李在簡, 使之仍察有司之任, 何如?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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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35책 (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10월 10일 갑진(甲辰) 19/20 기사



『승정원일기』 1638책 (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1월 13일 병자(丙子) 20/21 기사

Quote-left blue.png 戊申正月十三日午時, 上御誠正閣。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領議政金致仁, 左議政李在協, 戶曹判書徐有隣, 行副司直徐有寧, 吏曹判書吳載純, 兵曹判書鄭好仁, 禮曹判書李𡊠, 行副司直李在簡·李柱國, 兼都承旨沈豐之, 刑曹判書李秉模, 開城留守閔鍾顯, 行副司直金文淳, 刑曹參判洪秀輔, 行副司直金持默, 校理宋祥濂, 左副承旨曺允大, 假注書李貞運, 事變假注書金和鍾, 記事官李相璜·金祖淳, 以次進伏訖。

… (중략) …

致仁曰, 寧越胎峯加封事, 昨年陳達, 旣承今春擧行之命矣。今已歲換, 解凍在卽, 分付該曹, 使之擇日始役, 何如?

上曰, 待秋成擧行,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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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38책 (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1월 13일 병자(丙子) 20/21 기사



『승정원일기』 1647책 (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10월 28일 병진(丙辰) 26/40 기사

Quote-left blue.png 李洪載, 以觀象監官員, 以領事提調意啓曰, 寧越胎室加封事, 今春陳達, 旣承待秋成擧行之命矣。今則滌場不遠, 分付該曹, 使之卜日擧行, 何如?

傳曰, 待豐更稟,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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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47책 (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10월 28일 병진(丙辰) 26/40 기사



『승정원일기』 1686책 (탈초본 89책) 정조 15년(1791) 1월 28일 계묘(癸卯) 16/16 기사

Quote-left blue.png 辛亥正月二十八日未時, 上御誠正閣。

前忠淸監司入侍時, 右副承旨洪仁浩, 假注書趙台榮, 記事官洪樂游·徐有聞, 忠淸前監司鄭存中, 以次進伏訖。

… (중략) …

存中曰, 從前胎封, 卽排石物, 實是國朝典禮也, 俗離胎封, 旣是人跡之所罕到處, 則表石等儀, 決不可久闕不設, 臣意則俗離及他處未設石儀之胎封, 竝卽排設, 一遵典禮, 恐合事宜, 敢此仰達矣。

上曰, 卿言旣如此, 然則待年豐擧行,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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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86책 (탈초본 89책) 정조 15년(1791) 1월 28일 계묘(癸卯) 16/16 기사



『승정원일기』 1722책 (탈초본 91책) 정조 17년(1793) 10월 29일 기축(己丑) 11/12 기사

Quote-left blue.png 癸丑十月二十九日辰時, 上御誠正閣。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右承旨李勉兢, 假注書洪樂游, 事變假注書李弘達, 記注官金良倜·承膺祚, 左議政金履素, 行司直李文源, 延豐君李𡊠, 戶曹判書沈頤之, 右參贊洪秀輔, 兵曹判書鄭好仁, 吏曹判書金思穆, 禮曹判書閔鍾顯, 刑曹判書李得臣, 行副司直李敬懋, 訓鍊都正趙心泰, 大司憲林蓍喆, 副司直尹行任, 司諫韓光植, 掌令鄭毅祚, 校理宋民載·高宅謙, 正言洪秀晩, 以次進伏訖。

… (중략) …

履素曰, 寧越胎室加封之尙未擧行, 雖出軫弊之聖念, 而事關典禮, 恐不當許久遷就, 今年則該道年事, 幸値稍豐, 石物亦已措備, 及今始役, 似好, 故敢此仰達矣。

上曰, 更待下敎,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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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722책 (탈초본 91책) 정조 17년(1793) 10월 29일 기축(己丑) 11/12 기사



『승정원일기』 1836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801) 4월 16일 임술(任戌) 26/26 기사

Quote-left blue.png 辛酉四月十六日午時, 上御熙政堂。

大王大妃殿垂簾,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左副承旨金近淳, 假注書李允謙, 事變假注書柳聖儀, 記事官吳淵常·呂東植, 領府事李秉模, 領議政沈煥之, 左議政李時秀, 右議政徐龍輔, 知敦寧金祖淳, 右參贊李敬一, 戶曹判書李書九, 禮曹判書尹行恁, 漢城左尹申大顯, 行護軍李得濟, 同知李漢豐, 行護軍南公轍, 校理鄭晩錫, 以次進伏訖。

… (중략) … 煥之曰, 先朝胎室, 封在寧越, 丙申後, 事當卽爲加封, 大臣·禮堂之仰請加封者屢矣, 而聖念深軫民邑之弊, 每降姑徐之敎, 至今丙午夏, 因今左相奉審歸奏, 以石物則預爲措備, 待秋成擧行之意, 仰請蒙允, 而伊後又命退定, 遂至今因循矣。 今則事體有異於前日, 而碑面所刻, 仍舊未改, 尤萬萬未安。 應行典禮, 有不容一日虛徐, 而聞石物, 擇定於原州·堤川等地, 姑未浮出云。 爲先分付道臣, 待七月農隙, 卽爲經紀運致, 秋成後, 仍卽涓吉擧行, 而在前加封時, 觀象·繕工兩提調及官員, 竝爲下去董役矣。 乙巳景慕宮胎室加封時, 因特敎, 兩提調, 以一員兼進, 地方官兼監役, 相地官一員, 只爲帶去。 今亦依乙巳例擧行, 仰體先朝軫念民邑之德意恐好, 故敢此仰達矣。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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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836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801) 4월 16일 임술(任戌) 26/26 기사



『승정원일기』 1840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301) 8월 10일 갑인(甲寅) 19/19 기사

Quote-left blue.png 辛酉八月初十日午時, 上御熙政堂。

大王大妃殿垂簾, 藥房入診,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都提調徐龍輔, 提調李晩秀, 副提調尹光普, 右副承旨權襈, 假注書李潮·鄭祖榮, 事變假注書崔漢翼, 記事官吳淵常·呂東植, 領議政沈煥之, 左議政李時秀, 兵曹判書趙鎭寬, 工曹判書李敬一, 戶曹判書李書九, 行護軍申大謙·李漢豐·南公轍, 掌令李基慶, 副校理任厚常, 醫官金孝儉·李敬培·李惟鑑·玄必采·吳仁豐·吳千根, 以次進伏訖。

… (중략) …

書九曰, 先大王胎室加封石物, 浮取於堤川, 碑石浮取於原州之意, 大臣向已筵稟, 而追聞原州, 距封山爲二百里, 堤川, 則比原州, 幾減半程, 而石品頗好, 舊碑石亦用此石云, 故今番碑石, 一體浮取於此處, 而加封事目, 自該曹, 當從近啓下矣。 景慕宮胎室加封時, 相地官一員, 臨時下送, 監董工役, 奏時官, 仍令兼行, 今亦依此磨鍊, 似好, 故敢此仰達矣。

上曰, 依爲之。 出擧條

煥之曰, 今此胎室加封時, 觀象監·繕工監提調, 依景慕宮胎室加封時例, 一員兼進之意, 頃已筵稟蒙允, 而更考謄錄, 則書標官, 亦以提調進去人兼差矣, 今亦依此爲之, 似好, 故敢此仰達矣。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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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840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301) 8월 10일 갑인(甲寅) 19/19 기사



『승정원일기』 1840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301) 8월 16일 경신(庚申) 21/22 기사

Quote-left blue.png 辛酉八月十六日辰時, 上御熙政堂。

右承旨入侍, 稟事閣臣同爲入侍時, 右承旨徐英輔, 假注書申緯, 記事官呂東植·金邁淳, 檢校直閣金近淳, 以次進伏訖。

… (중략) … 啓下公事, 至禮曹啓目胎室加封石物事,

上曰, 判堂何不着銜, 而只參議爲之乎?

英輔曰, 臣未及詳知, 筵退後當問該曹矣。

上命退, 諸臣以次退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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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840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301) 8월 16일 경신(庚申) 21/22 기사



『승정원일기』 1842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301) 10월 9일 임자(壬子) 42/42 기사

Quote-left blue.png 辛酉十月初九日辰時, 上御熙政堂。

勸講入侍時, 參贊官鄭東觀, 記事官金𨩿·吳淵常·金邁淳, 領事沈煥之, 提學金祖淳, 檢討官安廷善, 以次進伏訖。

… (중략) …

上命掩卷, 煥之曰, 先大王胎室加封吉日, 以十一月初四日, 推擇啓下矣。 卽見江原監司李魯春所報, 則石役, 可於念前告竣, 且胎峯地勢高峻, 若値深冬, 工役倍艱, 迨此未凍前, 安排石物, 事甚便宜云。 故令日官池景泌, 更爲推擇, 則今月二十七日午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似好, 故敢此仰達矣。

上曰, 依爲之。

煥之曰, 列聖朝胎室追封時, 標石前面, 書以廟號大王胎室, 後面則以年號幾年某月日書塡, 今番亦依此爲之乎?

上曰, 依爲之。

煥之曰, 胎峯禁標, 以二百步爲限, 而加封後則例加百步, 守護軍元定二名, 而加封後則例加六名, 今亦依此分付於該道道臣處, 何如?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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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842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301) 10월 9일 임자(壬子) 42/42 기사



『승정원일기』 1842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301) 10월 15일 무오(戊午) 27/27 기사

Quote-left blue.png 辛酉十月十五日辰時, 上御熙政堂。

大王大妃殿垂簾, 藥房入診,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都提調沈煥之, 提調黃昇源, 副提調林蓍喆, 記事官李允謙, 左承旨鄭東觀, 假注書柳訸, 事變假注書李箕淵, 記事官呂東植·金邁淳, 右議政徐龍輔, 行上護軍李得臣, 行兵曹判書李晩秀, 吏曹判書金祖淳, 知訓鍊徐有大, 戶曹判書李書九, 行護軍申大謙·李漢豐, 應敎閔耆顯, 持平申溆, 獻納申龜朝·朴命燮, 以次進伏訖。

… (중략) …

煥之曰, 胎封書標官, 例以監董進去, 觀象監·繕工提調中擧行矣。 禮曹堂上, 方以莊陵奉審事下去, 兼行監董, 事甚便好, 繕工提調趙鎭寬, 今姑許遞, 仍令該曹, 今日政差出, 何如?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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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842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301) 10월 15일 무오(戊午) 27/27 기사



『승정원일기』 1842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301) 10월 17일 경신(庚申) 19/30 기사

Quote-left blue.png 宋祥濂, 以禮曹言啓曰, 今此莊陵奉審及胎室書標事進去, 本曹堂上所用奉使印信一顆, 依前例齎去之意, 敢啓。

傳曰, 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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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842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301) 10월 17일 경신(庚申) 19/30 기사



『승정원일기』 1843책 (탈초본 98책) 순조 1년(1301) 11월 11일 갑신(甲申) 10/26 기사

Quote-left blue.png 備忘記。 寧越正宗大王胎室加封工役順成, 予小子哀慕益深。 監董諸人, 非特酬其勞, 亦欲重其事也。 繕工提調兼書標官禮曹判書鄭大容, 監役兼都差使員地方官府使許晊竝加資。 監役兼傳香奏時官前監牧官安思彦, 今見乙巳謄錄, 景慕宮胎室加封時, 亦以是任往焉, 事甚稀矣。 善地瓜近牧官作窠差送。 浮石差使員堤川縣監洪載淵, 運石差使員橫城縣監鄭來升, 各兒馬一匹賜給。 本道觀察使李魯春, 弓一張賜給。 都看役營裨折衝朴履孝, 賞加。 看役將校等, 令道臣分等施賞。 其餘京鄕員役·工匠等, 分等從厚施賞事, 分付戶曹及本道。 告祭時執事守令, 各弓一張賜給。 執事儒生, 令本道各給紙筆墨後, 一體狀聞事, 亦爲分付。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843책 (탈초본 98책) 순조 1년(1301) 11월 11일 갑신(甲申) 10/26 기사



『승정원일기』 1843책 (탈초본 98책) 순조 1년(1301) 11월 18일 신묘(辛卯) 22/23 기사

Quote-left blue.png 禮曹判書鄭大容疏曰, 伏以, 三冬已半, 一陽初生, 孝元殿望祭, 節享, 次第奄過, 伏惟我聖上撫時哀慕, 益復如新。 仍伏念, 臣以先朝胎室書標之役, 猥承晉秩之命, 伏地惶感, 歷日靡措, 嗚呼, 臣卽先朝陶甄中一物耳。 涓埃莫報, 穹壤靡逮, 此生此恨, 斃而後已, 苟可效力於王事, 雖至腁手足而疲筋骸, 尙不敢言勞, 況無尺寸之可紀, 遽蒙資秩之特加, 私心恧縮, 當復如何? 臣嘗伏見頒賞傳敎下端, 每以一人雖兼數事, 毋得疊受結之, 有以仰朝家恩典, 必軫踰濫之戒也。 臣之正卿, 近在今夏之季, 而纔過數月, 輒受新資, 則事端雖異, 其有違於愼賞之成憲, 孰大於此乎? 適會以親享贊禮, 身入禁中, 雖不得不祗肅恩命, 而揣義揆分, 終不敢晏然仍冒, 玆陳短章, 仰暴衷懇。 伏乞聖明, 俯垂諒察, 亟命還收臣正憲新資, 以重爵賞, 以安私分, 千萬幸甚, 臣無任屛營祈懇之至, 謹昧死以聞。 答曰, 省疏具悉。 爲所重也, 卿其勿辭行公。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843책 (탈초본 98책) 순조 1년(1301) 11월 18일 신묘(辛卯) 22/23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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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

주석

  1. 『正祖胎誌石』, 1753, 壬申年九月二十二日丑時生元孫阿只氏胎 乾隆十八年正月二十一日午時藏.
  2. 『英祖實錄』 28년(1752) 11월 25일 임오, 因觀象監啓 命元孫胎峰定以江原道 寧越府 下東面 正陽里 鷄足山西麓癸坐丁向 待癸酉正月擇日擧行 蓋男胎五朔以藏 例也.
  3. 『正祖實錄』 1년(1777) 12월 24일 병진. 先朝乙酉 有藏胎已封者 依前守護 此後則藏于御苑凈潔處之受敎定式 而壬申寧越 雞竹山胎封 在於受敎之前 聖上卽位後 事體至重 表石等事 一依列聖朝已行之例 卽令擧行爲宜 敎曰 今年關東 豈煩民力 待年豐擧行; 『正宗大王胎室加封儀軌』 병오(1786) 4월 20일. 㳙吉加封則當在於秋成之後石物之先期措備自臣曺疎今知委然後可無窘速之患亦可蔞民邑之蒻矣; 같은 책(1787) 7월 초6일. 聖念雖軫民邑之蒻每降姑待之敎而旣是應行典禮則有不容一向遷就 … 待秋成卽時擧行何如 上曰 欲觀今年秋事爲之待秋成更爲稟處可也; 같은 책(1787) 10월 초10일. 啓項以寧越胎峯加封事陳達待秋成更爲稟處之 … 擇日擧行何如 上曰 今己當寒退定於明春可也; 『正祖實錄』 12년(1788) 1월 13일 병진. 當宁胎室 在寧越 禮當加封 請擇日始役 命待秋成.
  4. 『純祖實錄』 1년(1801) 10월 9일 임자, 寧越府先大王胎室加封 命以今月二十七日擧行.
  5. 홍성익, 「江原地域 胎室에 관한 硏究」, 『江原文化史硏究』, 제3권, 1998, 강원향토문화연구회, 76쪽.
  6. 윤석인, 「조선 정조대왕 태실 연구」, 『文化財』, 제46권 제1호, 2013, 국립문화재연구소, 82쪽.
  7. 윤석인, 위의 논문(2013), 86 ~ 87쪽.
  8. 이상의 태실 석물의 구조와 양상은 윤석인, 앞의 논문(2013), 84 ~ 95쪽을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