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원자 태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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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실(燕山君 元子 金乭伊 胎室)
경북 상주 화서면 태봉산 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실 전경
식별자 PC029
분류 왕자공주 태실
한글명 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실
한자명 燕山君 元子 金乭伊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Prince Geumdol
피안자 명칭 금돌이(金乭伊)
피안자 이칭 이황(李𩔇) · 폐세자(廢世子)
피안자 부 연산군(燕山君)
피안자 모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愼氏)
피안자 생년월일 1497.12.18
피안자 몰년월일 1506.09.24
안태 연월일 1501.07.09.12
안태지 좌표(위도) 36°44'40.8"N
안태지 좌표(경도) 127°94'65.8"E
안태지 주소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안 연월일 1930.05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39'52.9"N
이안지 좌표(경도) 126°51'38.0"E
지문 皇明弘治十年,十二月二十九日,子時生,元子金乭伊阿只氏胎,弘治十四年,七月初二日,未時藏
지문 찬자 조선 예조(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유물1 원자 금돌이 부속유물(동전)(국립고궁박물관)
태항아리 원자 금돌이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목차

정의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18일 을유(乙酉)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밤에 원자가 탄생하다》

밤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

夜, 元子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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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18일 을유(乙酉) 3번째 기사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25일 임진(壬辰)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대간이 원자 탄생에 대한 논상이 과함을 논하고, 왕이 진노하니 사직을 청하다》

대사간 김영정, 집의 이유청 등이 심미의 일을 논계(論啓)하고, 정언 곽종번(郭宗蕃)이 또한 논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대간(臺諫)에게 전교하기를,

"지금 내약방(內藥房)에 대한 논상도 역시 너무 과하다고 이르는 것이냐?"

하매, 영정(永貞) 등이 아뢰기를,

"원자(元子)의 탄생은 실로 막대한 경사입니다만, 이미 백관(百官)의 품자를 더하였으니 또 더할 필요가 없으며, 대신의 가자(加資)는 현(賢)과 덕으로써 해야 하옵고 미미한 공으로써 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처음에 물은 것은 경 등도 또한 반드시 해야 한다고 이를 것으로 생각해서인데, 지금 경 등의 말이 이러하니 이는 나의 신하가 아니다. 죄가 베어도 용서되지 않으니, 마땅히 극형을 받아야 한다."

하매, 영정(永貞) 등이 서계하기를,

"원자(元子)의 탄생은 실로 종묘 사직의 복이오니 온 나라 신민이 누구인들 경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오리까. 전하께서 중외(中外)에 대사령을 내리시고 또 백관의 계급을 더해 주시고 계궁(階窮)한 자는 대가(代加)를 하셨으니, 성은(聖恩)이 넓고 커서 천지 같이 헤아릴 수 없사온데, 지금에 또 약방(藥房)을 논상하여 각각 한 자급을 가하시니, 신 등의 생각으로는, 산실(産室)을 간호하는 것은 기정된 일이옵고, 또 신자(臣子)의 직분에 당연히 할 일이므로 공로가 따로 있다고 여기어 자급(資級)을 첨가해 주는 것은 불가합니다.

만약 조금 공로가 있다고 인정되면 단지 상사(賞賜)를 하는 것이 옳습니다. 더구나 재상의 계급은 마땅히 어짊과 덕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 어찌 이것으로서 자급을 올린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신 등은 대체에 의거하여 논계(論啓)한 것이온데, 전하께서 하교하시기를, ‘당연히 극형을 받아야 한다.’ 하였으니, 신 등이 대간의 일원으로 죄가 마땅히 베어야 할 정도에 이르렀으니 직위에 나갈 수 없습니다. 사피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이 일을 들어 경 등에게 물은 것은 반드시 경 등의 생각도 내 마음과 같으려니 생각해서인데, 지금 말한 바가 이러하므로 나 역시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경 등이 내 말을 꺼리거든 다시 아뢰지 말라. 지금의 이 은사(恩賜)는 큰 경사가 있기 때문이니, 비록 천지가 뒤집혀도 또한 들을 수 없다."

하였다. 영정(永貞) 등이 다시 아뢰기를,

"임금의 발언이 쉽지 않습니다. 만약 한 말씀을 하게 되면 사책(史策)에 기재되어 만세에 유전하는데 지금 전하께서 신 등에게 분부하심이 이러하시니, 직에 나아가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하고, 대사헌 이집(李諿)은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역시 큰 경사가 있다 할지라도 작상(爵賞)을 남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겼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평상시에 이러한 은혜를 베푼다면 외람된 일이라 해도 가하지만, 지금은 국본(國本)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 만약 경 등이 자급(資級)만을 아낀다면 차라리 국본이 없는 것이 옳을 것이며, 만약 국본이 없어서는 아니된다면 자급은 족히 아낄 것이 없다. 이 사실을 사책에 기재하여 후세가 나보고 국본을 위해서 은수(恩數)를 남발했다 하여도 나는 두렵지 아니하다. 지금 경 등의 직을 교체해도 가하고 경들의 죄를 다스려도 가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으니, 다시 아뢰지 말라."

하였다. 영정(永貞)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대간의 일원으로 있사온데, 성상의 분부가 ‘죄를 다스려도 가하다.’ 하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사오니 직에 나오기는 실로 어렵사온즉, 청컨대 신 등의 직을 갈아 주옵소서."

하고, 이집(李諿) 역시 아뢰기를,

"신이 아뢰는 바도 영정(永貞) 등과 동일하옵니다.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시니 신 역시 피하기를 원하옵니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大司諫金永貞、執義李惟淸等論啓沈湄事, 正言郭宗蕃亦論之, 不聽。 傳于臺諫曰: "今內藥房論賞, 亦謂太過耶?" 永貞等啓: "元子誕生, 實是莫大之慶。 然已加百官階, 不必又加也。 大臣加資, 當以賢以德, 而不宜以微功也。" 傳曰: "初問之者意, 卿等亦必謂當如是也, 今卿等之言如此, 是非予之臣也。 罪不容誅, 當被極刑。" 永貞等書啓:

元子誕生, 實宗社之福, 一國臣民, 孰不喜慶? 殿下大赦中外, 又加百官階, 階窮者代加, 聖恩洪大, 天地莫量。 今又論賞藥房, 各加一資, 臣等意以爲, 護産旣是例事, 又臣子職分當爲, 不可以別有功勞, 而疊加資級也。 若以爲, 少有功勞, 則只賞賜可也, 況宰相階級, 當以賢以德, 豈可以此, 而爲之加階乎? 故臣等據大體論啓, 而殿下敎曰: "當被極刑。" 臣等備員臺諫, 罪至當誅, 不可就職, 請避

傳曰: "予所以而問之者, 意必卿等言, 亦如予心, 而今所言如是, 故予亦答之如是, 卿其憚予言耶? 其勿更啓。 今之恩數, 以有大慶也。 雖飜天改地, 亦不可聽。" 永貞等更啓: "人主發言不易, 若發一言, 則書諸史策, 傳之萬世。 今殿下敎臣等如此, 就職固難。" 大司憲李諿啓: "臣意亦謂, 雖有大慶, 爵賞不宜濫也。" 傳曰: "在平時, 如是施恩, 則謂之猥濫亦可, 今則爲國本而然也。 卿等若惜資級, 則寧無國本可矣, 若以國本爲不可無, 則資級不足惜也。 此事書之史策, 使後世謂予爲國本濫加恩數, 予不懼矣。 今遞卿職可也, 治卿罪可也, 而今姑不然, 其勿更啓。" 永貞等啓: "臣等備員臺諫, 而上敎至云: ‘治罪亦可也。’ 就職實難, 請遞臣等之職。" 諿啓: "臣所啓, 亦與永貞等同, 而上敎如此, 臣亦請避。" 不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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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25일 임진(壬辰) 2번째 기사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26일 계사(癸巳)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대사헌 이집 등이 합사하여 원자 탄신에 대한 논상의 일에 대해 서계하다》

대사헌 이집(李諿), 대사간 김영정(金永貞) 등이 합사(合司)하여 서계(書啓)하기를,

"하늘이 우리 대동(大東)을 도와 원자(元子)가 탄생하였으니, 실로 종묘 사직의 한량없는 아름다움이라, 아무리 궁벽한 시골의 영세한 백성일지라도 오히려 경사를 기뻐할 줄 아옵니다. 하물며 신 등은 직이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사온데 어찌 경사임을 모르오리까. 다만 작상(爵賞)은 유일한 명기(名器)로서 임금이 현능(賢能)을 대우하는 것이므로 경솔하게 아무에게나 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약방 제조(藥房提調)와 내의(內醫) 내관(內官)이 산실(産室)을 간호한 미미한 공로가 있다 해서 참람히 자급(資級)을 제수하는 것은, 예전의 예를 상고해도 역시 이와 같은 일이 없었습니다. 또 전일 중삭연(仲朔宴)에 가자(加資)를 내렸다가 다시 개정(改正)한 인원 중에는, 조정의 정사를 탁란(濁亂)한 자도 있고 또 탐학하고 광패한 자도 있어서 그때 대간(臺諫)들이 바야흐로 합문(閤門)에 엎드려 정쟁(廷爭)하고 있을 적에 벼락이 정전(正殿)에 떨어져 천견(天譴)을 정령히 보였으므로, 전하께서 천계(天戒)를 삼가하사 아울러 개정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두어 달이 못되어 다시 백관의 가자를 친수(親授)하겠다 하시니, 어찌 임금이 하늘에 순응하기를 성실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개국(開國)과 승가(承家)에는 소인을 쓰지 말라 하였는데, 지금 원자가 탄생하였으니 이는 실로 승가의 기회로는 이보다 큰 경사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국본(國本)을 튼튼히 하고 종사(宗社)를 편안히 하시려면 마땅히 어진 인재를 초빙하여 모든 직위에 나열해서 뒷사람에게 물려 주시는 것이 가하온데, 어찌 감히 이런 무리들을 인용하여 후일에 나라를 그르치는 사단을 열어놓으려 하옵니까. 또 심미(沈湄)의 죄는 용서하지 못할 죄과가 있어서, 신 등이 한 달이 넘도록 논쟁한 것이온데, 아직 윤허를 입지 못하오니 마음 아픔을 이지기 못하옵니다. 바라옵건대 빨리 성명(成命)을 환수하여 간하는 말을 들어주시는 성명(聖明)을 드러내옵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집(諿) 등이 다시 논계(論啓)하니, 전교하기를,

"경 등이 하늘에 순응하기를 성실하게 하라 하는데, 나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도 반드시 들어준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경사는 하늘이 곧 말 없는 가운데 도와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집(諿) 등이 다시 아뢰기를,

"지금 하늘이 길이 복 있는 자손을 주었으니, 하늘이 사랑하고 돕는 것을 진실로 알겠습니다. 그러나 공이 없고 부정한 사람에게 막중한 은수(恩數)를 마구 가(加)하는 것은 어찌 천심(天心)에 합당하다 하오리까. 이것이 바로 전하께서 하늘에 응하시되 성실로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대저 지나치게 기뻐하면 참상(僭賞)을 내리게 되고 지나치게 노하면 남벌(濫罰)이 있기 마련이니, 임금은 경솔히 기뻐하고 성내서 과한 상벌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지금 원자(元子)가 탄생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신민의 다행이요 종사(宗社)의 복입니다. 그러나 은수를 이와 같이 참람하게 해서는 안되옵니다.

약방(藥房)이 아무리 조그마한 공로가 있을지라도 상을 내리는 것은 가하지만 어찌 자급을 마구 높혀 줄 수 있으며, 공신(功臣)과 그 적장(嫡長)으로 가자(加資)를 받았다가 도로 개정(改正)된 사람들은 모두가 흉사(兇邪)하고 부정한 무리들인데 경사를 핑계해서 아울러 가자(加資)를 허하시면, 전일에 개정한 것은 천계(天戒)를 삼가하는 뜻이고 오늘 도로 주는 것은 바로 천계를 경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더구나 경사날을 당해서 어찌 꼭 흉사하고 부정한 사람들에게 급급히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까. 이 무리들이 경사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높여 주고 키워 준단 말입니까. 이는 다 전하의 지나치신 기쁨에서 나온 것이니, 불가불 개정되어야 하옵니다. 심미(沈湄)에게 통청(通淸)을 허하는 일은 신 등이 한 달이 넘도록 논집(論執)하였사오나 아직도 윤허를 입지 못하고 있사오니, 마음 아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청컨대 아울러 쾌히 결단하옵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결단코 들을 수 없으니 뒤에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매, 집(輯) 등이 다시 서계(書啓)하기를,

"이는 바로 작상(爵賞)을 참람하게 내리는 과실이오며, 강상(綱常)을 파괴하는 사단이오며, 군자(君子)와 소인이 진퇴(進退)하는 기틀이 되므로 모두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에 관계되오니, 신 등의 직책이 언관(言官)에 있는 이상 부득불 면절 정쟁(面折廷爭)하여 전하의 과하신 처사를 구(救)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홍귀달(洪貴達)·신수근(愼守勤)·김효강(金孝江)·김흥수(金興守)·하종해(河宗海)·박성림(朴成林)이 비록 조그마한 공로가 있다 할지라도 단지 상을 내리는 것이 가하옵고 관작을 남수(濫授)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

하물며 수근(守勤)으로 말하오면 별다른 현능(賢能)도 없는데, 특히 초방(椒房)669) 의 지친이라 해서 지난 봄에 특별히 가선(嘉善)으로 가자했다가 얼마 안되어 또 가정(嘉靖)으로 가자했는데, 지금 또 약방의 공을 칭탁하여 명하여 자헌(資憲)을 제수하라 하시니, 아무리 무리에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할지라도 1년 안에 이와 같이 뛰어오를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일국의 신민들이 전하의 사의(私意)를 엿볼까 두렵습니다.

임사홍(任士洪)은 성종조(成宗朝)에 붕당(朋黨)을 결탁하여 조정의 정사를 탁란(濁亂)하였으며, 정숭조(鄭崇祖)는 일찍이 호부(戶部)의 장이 되어 탐오(貪汚)하고 청렴하지 못했으며, 한환(韓懽)은 처부(妻父)를 구타하고 민전(民田)을 겁탈하였으며, 조득림(趙得琳)은 노예(奴隷)의 천류로 복(服) 중에 혼인을 계획했으며, 김효강(金孝江)·서경생(徐敬生)·안중경(安仲敬)·이존명(李存命)은 훈부의 나머지로[薰腐之餘] 지위가 높은 품계에 이르렀는데 지난 봄 중삭연(仲朔宴)에 명하여 모두 계급을 더 올리시니, 대간이 옳지 못하다고 논쟁을 하고 하늘이 또한 이변(異變)을 보이므로 전하께서 하늘의 노(怒)함을 발해서 곧 개정할 것을 명령하셨던 것이온데, 그 후 얼마 안가서 도로 그 가자를 내주시고, 심지어는 조헌(曺獻)·이치남(李致南)·설주(薛柱)의 용렬한 무리들까지 또한 당상관(堂上官)으로 승격하였으니, 이는 은수(恩數)가 제한이 없고 정령(政令)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하의 천계(天戒)를 삼가하시던 그 마음이 갑자기 몇 달 후에 잊었으니, 신은 실로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이옵니다.

심미(沈湄)는 범한 바가 지극히 중대하여 또한 통청(通淸)을 허할 수 없사오니, 전하께서 만약 신 등의 직을 갈아주신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하루라도 이 직에 처해 있게 하오면 어찌 차마 침묵만 지켜서 위임하신 뜻을 저버리리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大司憲李諿、大司諫金永貞等合司書啓:

天佑大東, 元子誕生, 實宗社無疆之休。 雖窮巷細民, 猶知喜慶, 況臣等職在侍從之列, 豈不知慶? 但爵賞名器, 人君之所以待賢能也, 不可輕以與人也。 今者藥房提調及內醫內官, 以護産微勞, 濫授資級, 考之舊例, 亦無如此。 且前日仲朔宴加資, 改正人員有濁亂朝政者, 又有貪婪狂悖者。 其時臺諫方伏閤廷爭, 而電震正殿, 示譴丁寧, 殿下克謹天戒, 竝令改正。 曾未數月, 更令親授百官加, 豈人君應天以實之誠耶? 《易》曰: "開國承家, 小人勿用。" 今元子誕生, 此實承家之會, 莫大之慶也。 殿下欲使國本重而宗社寧, 當招俊乂, 列庶位, 以遺後人可也。 安敢引用此輩, 以開後日誤國之端乎? 且沈湄之罪, 在所不赦。 臣等踰月諍論, 未蒙允可, 不勝痛心。 伏願亟收成命, 以彰從諫之明。

不聽。 諿等更論啓, 傳曰: "卿等云: ‘應天以實。’ 予意以謂, 人之所欲, 天必從之。 今此慶事, 天乃默佑而然也。" 諿等更啓: "今天永錫祚胤, 天之眷佑, 固可知矣。 然濫加恩數於無功、不正之人, 豈合天心乎? 此殿下之應天不以實也。 大抵過喜則僭賞, 過怒則濫罰, 人君不可輕以喜怒, 而過爲賞罰也。 今者元子誕生, 是誠臣民之幸, 宗社之福, 然恩數不可如是僭也。 藥房雖有微勞, 賞賜可也, 豈可濫授階級? 功臣嫡長加資改正人, 皆兇邪、不正之徒, 而諉以慶事, 竝許加資。 前日之改正, 以謹天戒也則今日之還授, 乃以慢天戒也。 況値有慶之日, 不必汲汲施恩於兇邪、不正之人也。 此輩何關於慶事, 而是崇、是長乎? 此皆出於殿下之過喜, 不可不改正也。 沈湄不可許通事, 臣等踰月論執, 尙未蒙允, 不勝痛心, 請竝夬斷。" 傳曰: "決不可聽, 後勿更言。" 諿等更書啓:

此乃爵賞僭濫之失, 綱常敗毁之端, 君子、小人進退之機, 而皆係於治亂、安危。 臣等職在言官, 不得不面折庭諍, 以救殿下之過擧也。 洪貴達、愼守勤、金孝江、金興守、河宗海、朴成林雖有微勞, 只賞賜可也, 不宜濫授官爵。 況守勤別無賢能, 而特以椒房至親, 去春特加嘉善。 未幾又加嘉靖, 今又托以藥房之功, 命授資憲, 雖有出倫之才, 一歲之內, 未有如此超擢者, 恐一國臣民得以窺殿下之私意也。 任士洪在成宗朝交結朋黨, 濁亂朝政。 鄭崇祖曾長戶部, 貪汚不廉。 韓懽歐打妻父, 刼奪民田。 趙得琳奴隷之賤, 服內圖婚。 金孝江、徐敬生、安仲敬、李存命熏腐之餘, 位至崇品, 而去春仲朔宴, 命皆加階。 臺諫爭論不可, 而天亦示變, 殿下發天之怒, 卽命改正。 未幾還授其資, 以至曺獻、李致南、薛柱之庸流, 亦陞堂上, 是則恩數無節, 政令不一。 殿下克謹天戒之心, 遽忘於數月之後, 臣實痛心。 沈湄所犯至重, 亦不可許通。 殿下若遞臣等之職則已矣, 若一日居是職, 則豈忍含默, 以負殿下委任之意乎?

不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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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26일 계사(癸巳)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29일 병신(丙申)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원자 탄생으로 가자한 일에 반대하는 대간의 논쟁에 대해 전교하다》

대간이 다시 전자의 논쟁을 고집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원자(元子)가 탄생하여 국본(國本)이 이미 정해졌으니, 이보다 큰 경사가 없다. 설사 내가 아들이 없다손 치더라도 어찌 사왕(嗣王)이야 없겠느냐. 그러나 적장(嫡長)으로 계승하는 것이 순한 일이다. 구차하게 지손으로 입승(入承)하면 나라가 편안하겠느냐. 백 년의 사직이 나에게 와서 뒤가 없으면 그 한을 어찌 견디겠느냐. 지금 가자(加資)한 일들은 대개가 희경(喜慶)으로 인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또 내시의 무리들을 만약 궁마(弓馬)의 잡희(雜戲)로써 나의 뜻을 영합하였다 해서 특명으로 계급을 올려주었다면 경 등의 말이 옳다. 그러나 지금 가계(加階)한 것은 봉후(封侯)의 비유는 아니니 들을 수 없다."

하였다.

臺諫更執前論, 傳曰: "今元子誕生, 國本旣定, 慶莫大焉。 設使予無子, 豈乏嗣王? 然以嫡長繼序則順矣。 苟以藩邸入承, 國其寧耶? 百年社稷, 至予而無後, 則爲恨可勝? 今加資等事, 蓋因喜慶而然也。 且宦寺輩, 若以弓馬雜戲, 逢迎予意, 而特命加階, 則卿等之言是矣。 今加階非封侯之比, 不可聽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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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29일 병신(丙申)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29권, 연산군 4년(1498) 1월 4일 경자(庚子)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의원·내시 등에게 가자한 일 등에 대한 대사간 김영정 등의 논의》

대사간 김영정(金永貞)·집의 이유청(李惟淸) 등이 아뢰기를,

옛날 제왕(帝王)은 아무리 총명하고 제성(齊聖)한 이라도 오히려 좌우 신하들의 허물을 고쳐주고 틀린 점을 규정(糾正)해 주며 그른 마음을 바르게 해 줌에 힘입어서 능히 전열(前烈)을 계승하였습니다. 지금 신 등이 계한 바는, 한갓 작상(爵賞)이 참람한 것만이 아니라 군자와 소인의 진퇴하는 기미와 국가의 치란(治亂)과 안위(安危)가 매였으므로, 신 등은 이 점이 두려워서 여러 달을 두고 논쟁과 고집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굳이 거부하여 윤허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하교하시기를 ‘너희들은 죄가 용납될 수 없다. 당연히 극형을 받아야 한다.’ 하시고 또 하교하시기를 ‘너희들의 말은 도리어 미미한 내시들만도 못하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종(侍從)이 논(論)하니 하교하시기를, ‘지금의 홍문관(弘文館)은 대간(臺諫)의 직책까지 겸했느냐.’ 하셨고, 의정부(議政府)가 말하니, 하교하시기를, ‘경(卿) 등은 아직 어리다.’ 하시고, 또 ‘사왕(嗣王)은 들을지 모르나 나는 들을 수 없다.’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간하는 말을 이렇게까지 거부하신다면 재상(宰相)·대간·시종들을 제외하고 누구와 더불어 정사를 모의하며 국가를 유지하시렵니까?

신 등이 또 내농작(內農作)의 폐해를 아뢰니, 하교하시기를, ‘이는 가색(稼穡)의 어려움을 알리는 바이니 폐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신 등은 상고하건대, 《서경》 무일(無逸)에 이르기를, ‘먼저 가색을 올리는 것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안일하게 지내면 곧 백성의 의지하는 바를 알게 될 것이다.’ 하였으며, 옛날의 왕으로 백성의 의지하는 바를 아는 것이 문왕(文王)보다 더한 이는 없는데도 인력을 허비하여 유희(遊戲)와 완롱(玩弄)의 바탕으로 삼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가색(稼穡)의 어려움을 아시고자 하실진대 마땅히 빈풍(豳風)과 무일(無逸)의 그림을 그려서 좌우에 걸어두고 아침 저녁으로 관성(觀省)할 것이며, 또 봄에는 경작(耕作)하는 것을 살피고 가을에는 거두는 것을 살피어 민력을 빼앗지 않고 농사철을 어기지 않으면 자연히 집집마다 윤택하고 사람마다 족할 것인데 어찌 꼭 무익한 일을 만들어서 완호(玩呼)의 기구로 삼으시려 하옵니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영정(永貞)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삼가 상고하건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덕 있는 자를 명하면 5등의 복(服)으로 다섯 가지를 빛나게 하고, 하늘이 죄 있는 자를 토벌(討罰)하면 5등의 형(刑)으로 다섯 가지를 사용하시어 정사를 힘쓰고 힘쓰소서.’ 하였으니, 대개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잘한 일이 있어 상을 주되 하늘이 상을 준다고 이르는 것은 사사로 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요, 죄가 있어 벌을 주되 하늘이 벌한다 이르는 것은 사사로 노(怒)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혹시 작(爵)으로 상주고 형(刑)으로 위엄을 보이는데 일호라도 참람(僭濫)함이 있다면 사람들이 장차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명하고 하늘이 벌한 것이 아니라 한갓 사의(私意)로써 상주고 벌준 것이다.’ 할 것이오니, 이로 말미암아 선(善)한 자는 게을러지고 악한 자는 날뛰며 소인은 진출되고 군자는 후퇴하며 천명(天命)은 가고 인심은 흩어질 것이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지금 하늘이 우리 국가를 도우시어 원자(元子)가 탄생하여 국본(國本)이 이미 정해지고 인심이 부쳤으니, 어느 누가 서로 시조(市朝)에서 경축하지 않고, 우리 조선의 억만 년 다함 없는 아름다움으로 여기지 않는 자가 있으리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께서 중외(中外)에 대사(大赦)를 반포하시고 백료(百僚)에게 계급을 올려주어 온 나라 신민들과 함께 큰 경사를 누릴 것을 생각하셨으므로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뜻이 그 사이에 충만했습니다. 어찌 태평 세대의 막대한 경사가 아니오리까.

다만 전하께서 좋고 즐거운 마음만이 있어서 그 정(正)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상과 벌의 시행이 사뭇 그 당연성을 잃으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약방(藥房)의 미미한 노고는 직분상 의당 할 일이온즉 물건을 하사하심이 가하거늘, 문득 명하여 상으로 계급을 올려 주시고 공신(功臣)과 적장(嫡長)으로 계급을 승진한 자가 흉사(凶邪)하고 부정한 사람이 있다면 배척하고 축출하여 서용(敍用)하지 않는 것이 가한데, 친히 그 가자(加資)를 제수하여 숭반(崇班)과 극품(極品)을 일찍이 존중하고 아끼지 않고 초개(草芥)와 이사(泥沙)와 같이 천히 여기시므로, 천마(天麻)가 한 번 내리면 물론(物論)이 해괴하게 여기니 신은 아마도 연거 두량(連車斗量)의 기롱이 다시 오늘날에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홍귀달(洪貴達)은 지위가 높은 재상으로서 자급이 현덕(賢德)으로 말미암아 오르지 않았으니 수치스러운 일이오며, 신수근(愼守勤)은 공로도 없고 재덕(才德)도 없는데 한갓 폐부(肺腑)의 친(親)이란 점 때문에 후설(喉舌)의 장이 되었고, 1년 동안에 연달아 세 번이나 가자(加資)되어 마치 땅에서 지푸라기를 줍듯이 하였으며, 신승복(愼承福) 역시 척완(戚畹)으로 여러해 고을을 다스렸으나 별다른 성적도 없는데 갑자기 당상(堂上)으로 올라갔으니 이 점이 바로 신 등의 이른바, 전하 한 집안 정사이고 진실로 하늘이 덕 있는 자를 명하는 본의가 아니옵니다.

김흥수(金興守)는 의가(醫家)의 유(流)로서 발신하여 가선(嘉善)으로 승진되었으니 진실로 분에 넘치는 일이거늘, 지금 또 승자(陞資)시켜 재상보다도 우위에 이름이 있으니 조정을 존중하는 바가 아니오며, 임사홍(任士洪)은 정사를 어지럽힌 소인이며, 정숭조(鄭崇祖)는 농단(壠斷)의 야비한 자이오며, 한환(韓懽)은 광탕(狂蕩)하고 포학한 자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 천토(天討)를 보인 자들이거늘 단지 훈맹(勳盟)만을 연유하여 도로 작위를 주었으니 천은(天恩)이 이미 족하온데 또 숭반(崇班)을 가했으며 조득림(趙得琳)은 노예의 천인이요, 설주(薛柱)·조헌(曹獻)·이치남(李致南)은 용렬하고 무식하온데 혹은 1품이 제수되고 혹은 당상(堂上)에 올랐으니, 하늘이 덕 있는 자를 명하는 본의가 과연 이러하옵니까.

내시의 임무는 문을 지키고 명령을 전달하며 소제하는 역사를 받드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내시성(內侍省)에 3품관을 두지 않았는데, 그후에 현종(玄宗)이 태종의 제도를 경솔히 변경하여 환관(宦官)에게 3품의 장군(將軍)을 제수한 것이 차차 많았으므로, 당실(唐室)의 화가 개원(開元)에서부터 터가 잡혔으니 이는 이연(已然)의 귀감(龜鑑)이옵니다. 그런데 지금 김효강(金孝江)·이존명(李存命)·안중경(安仲敬)·서경생(徐敬生)이 또한 특별한 은혜를 입어 지위가 숭품(崇品)에 이르렀은즉 당(唐)의 3품관에 비할 바가 아니옵니다.

하물며 김효강은 가슴속이 깊고 치밀하여 간교하기가 이를데 없사오니 이는 바로 진(秦)의 조고(趙高)요 한(漢)의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입니다. 지난날 낙산(洛山)의 소금과 봉안(奉安)하는 종들을 제 마음대로 아뢰어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였으니, 군상(君上)을 기만한 것이 죽여도 죄가 남는데 도리어 높은 직급을 제수하되 불차(不次)로 뛰어올렸으니 하늘이 덕 있는 자를 명하는 뜻이 역시 어디에 있습니까.

또 심미(沈湄)는 강상(綱常)을 무너뜨린 죄인입니다. 그 소위에 비추어 죄를 정하면 마땅히 중죄를 입어야 하는데, 단지 죄안(罪案)에 기록하여 금고(禁錮)만을 내렸으니 은혜가 지극히 크거늘, 지금에 법을 어기고 통청(通淸)을 허하였으니 그 하늘이 죄 있는 자를 벌하는 뜻과 비출 때 어떠하옵니까.

전하께서 요사이 큰 경사로 인하여 무릇 공신의 후손과 의원·내시·척리(戚里)의 유들을 모두 다 승진시키어, 혹은 거듭 높은 질급을 제수한 자도 있고 혹은 한 해에 3급을 뛰어올린 자도 있사오니 이러한 명기(名器)의 남용은 예전에 듣지 못한 바입니다. 알지 못하겠지만, 성심(聖心)이 사사로운 정의에 갇히어 그 그릇됨을 깨닫지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대간(臺諫)이 말하고 시종(侍從)이 말하고 재상(宰相)이 말하니 또한 살피실만 하온데 간함을 거부하심이 더욱 심하여 ‘대간의 평론이 내시의 말만도 못하다.’ 이르시고, ‘묘당(廟堂)의 정책이 아동(兒童)의 소견과 다름이 없다.’ 하시니, 아! 내시와 아동이 어찌 재상과 대간을 대우하는 대상자가 되오리까.

명기(名器)를 천히 여기고 조정을 욕되게 하여 이미 정치하는 체모를 잃었는데, 더구나 자신은 넓고 남은 좁다 해서 아무리 의정부의 대신이라 할지라도 조금도 가차(假借)가 없으니 이치에 어긋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옵니까. 이는 반드시 전하께서 깊숙이 들어앉아 연안(宴安)만을 즐기고 경연(經筵)에 게을리 납시어 기거(起居)와 동정(動靜)이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실상에서 위배되므로, 그 외면에 발로되는 것이 이렇게 검속할 수 없사오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감히 충직(忠直)을 거역하고 기덕(耆德)을 멀리하고 완동(頑童)을 친하면 이를 난풍(亂風)이라 하는데, 나라 임금이 이 중에서 한 가지만 몸에 두어도 나라가 반드시 망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대간(臺諫)은 공론의 소재로서 그 충성된 말과 강직한 의논이 일찍이 종묘·사직을 위하여 꾀하지 않은 바가 없사온데 전하께서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시니 충언(忠言)을 거역하심에 가깝지 않습니까. 삼공(三公)은 누조(累朝)의 원로(元老)로서 국가와 휴척(休戚)을 같이 했을 뿐더러 선왕께서 전하에게 물려주신 바이온데, 전하께서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시면 기덕(耆德)을 멀리하심에 가깝지 않습니까. 간사하고 광패(狂悖)한 무리와 탐오(貪汚)하고 노예(奴隷)의 하천과 의원(醫員)·내시·외척의 무리들은 국가를 함께 다스릴 수 없는 것이온데, 전하께서는 이들을 존숭하고 이들을 키우시기를, 오히려 미치지 못할 것 같이 하시니 이는 완동(頑童)을 친비(親比)하심에 가깝지 않습니까.

또 하교하시기를 ‘불행히 경사가 일찍 오지 아니해서 모후(母后)가 정사를 전제하여 비인(匪人)을 끌어 썼다면 그 화가 장차 이보다 크지 않겠느냐.’ 하였사온데, 전하의 이 하교는 양한(兩漢)의 일을 보신 것입니다. 양한의 난리는 소유래가 있사옵니다. 외척(外戚)이 밖에서 제 마음대로 하고 내시들이 안에서 굳게 차지하고 있는 데다가, 힘이 있는 자, 금고(禁錮)를 당한 자, 무뢰(無賴)한 자들이 연줄을 타고 당부(黨附)하여 교대해 가면서 서로 치성하여 주권(主權)을 거꾸로 쥐고 어린 임금을 세워서 권세와 은총을 굳혔으므로 한(漢)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니, 이는 노두가 서리를 밟을[履霜] 적부터 근신하지 아니한 화라고 하겠습니다. 성려(聖慮)가 여기까지 미치시고도 달갑게 복철(覆轍)을 밟으시고 일찍이 각오하지 못하여 스스로 화(禍)를 터잡은 임금이 되신다면 어찌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은탕(殷湯)의 삼풍(三風)의 경계를 생각하여 대간(臺諫)과 대신의 의논을 채택하시고, 아집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라 총명을 넓히시옵고, 명기(名器)를 애석하여 조정을 높이시고, 언행(言行)을 계신(戒愼)하여 백성의 지표를 세우소서. 그러면 참으로 종묘 사직에 만세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大司諫金永貞、執義李惟淸等啓: "古之帝王, 雖聰明齊聖, 尙賴左右之臣, 繩愆糾繆, 格其非心然〔後〕 , 能紹前烈。 今臣等所啓, 非徒爵賞僭濫, 君子、小人進退之幾, 而國家治亂、安危係焉。 臣等正爲此懼, 累月論執, 而殿下固拒不允, 反敎曰: ‘爾等罪不容誅, 當被極刑。’ 又敎 : ‘曰爾等之言, 反不如微微宦者。’ 且侍從論之, 則敎曰: ‘今之弘文館, 職兼臺諫乎?’ 政府言之, 則敎曰: ‘卿等尙幼矣。’ 又曰: ‘嗣王則聽之矣, 予則不可聽也。’ 殿下愎諫至此, 外宰相、臺諫、侍從, 而誰與謀議政事, 維持國家乎? 臣等又啓內農作之弊, 而敎曰: ‘此所以知稼穡之艱難, 不可廢也。’ 臣等按, 《無逸》之書曰: ‘先知稼穡之艱難, (乃)〔無〕 逸則知小民之依。’ 古之聖王知小民之依者, 莫過於文王也, 未聞有虛費人力, 以爲戲翫之資。 如欲知稼穡之艱難, 則當作《豳風》、《無逸》圖, 揭諸座右, 朝夕觀省。 又春而省耕, 秋而省斂, 不奪民力, 不違農時, 則自然家給人足矣, 何必作此無益之事, 以爲玩好之具乎?" 不聽。 永貞等上疏曰:

臣等謹案, 《書》曰: "天命有德, 五服五章哉; 天討有罪, 五刑五用哉, 政事懋哉懋哉。" 蓋人君代天理物, 有善而賞之曰天賞之, 非私與也; 有罪而罰之曰天罰之也, 非私怒也。 苟或爵賞、刑威一毫僭濫, 則人將曰: "此非天命、天討, 徒以私意賞罰之耳。" 由是, 善者以怠, 惡者以肆, 小人進而君子退, 天命去而人心離, 甚可懼也。 今天佑我國家, 誕生元子, 國本已定, 人心攸屬, 孰不相與慶於市朝以爲, 朝鮮億萬年無(彊)〔疆〕 之休也? 恭惟我主上殿下, 頒赦中外, 加階百僚, 思與一國臣民共享大慶, 其君臣上下懽欣悅樂之意, 藹然於其間, 豈非昇平莫大之慶乎? 但殿下心有所好樂, 而不得其正, 故賞罰之施, 頗失其當。 如藥房微尠之勞, 皆職分當爲, 則賜物可也, 而遽命賞加。 功臣及嫡長陞階者, 有凶邪、不正之人, 則斥逐不敍可也, 而使之親授其資。 崇班、極品曾不重惜, 視之如草芥, 賤之如泥沙, 天麻一下, 物論駭愕, 臣等恐連車斗量之譏, 復起於今日矣。 洪貴達位高宰相, 陞資不由於賢德, 斯可恥也。 愼守勤旣無功勞, 又乏才德, 徒以肺腑之親, 長喉舌之任, 一歲之中, 連受三資, 如拾地芥。 愼承福亦以戚畹, 治郡數載, 別無聲績, 而驟陞堂上, 此臣等所謂殿下一家之政事, 固非天命有德之意也。 金興守起身醫流, 陞爲嘉善, 固已濫矣, 而今又陞資, 俾居名宰相之右, 非所以尊朝廷也。 任士洪亂政之小人, 鄭崇祖壠斷之鄙夫, 韓懽狂蕩暴戾之人也。 此皆曾竄遐荒, 以示天討, 而只緣勳盟, 還授爵位, 天恩已足, 而又加崇班。 趙得琳奴隷之賤, 薛柱、曺獻、李致南庸劣無識, 而或授一品, 或陞堂上, 天命有德之意, 果如是乎? 宦竪之任, 所以守門傳命, 奉掃除之役而已。 故唐 太宗於內侍省, 不置三品官。 其後玄宗輕變太宗之制, 宦官除三品將軍者寢多, 而唐室之禍, 基於開元, 此已然之龜鑑也。 今者金孝江、李存命、安仲敬、徐敬生亦霑殊渥, 位至崇品則不特唐之三品官也。 況金孝江城府深密, 奸巧有餘, 是秦之趙高, 漢之恭、顯也。 曩者洛山之鹽, 奉安之隷, 擅啓予奪, 欺君罔上, 死有餘辜, 反授優秩, 不次超陞, 天命有德之意, 亦安在哉? 且沈湄敗常之罪人也。 原情定罪, 當被重刑, 而只錄案禁錮, 恩至渥也。 今者違法許通, 其於天討有罪之意何如? 殿下近因大慶, 凡功臣之裔, 醫、宦、戚里之流, 悉加陞擢, 或有疊授峻秩者, 或有歲陞三級者, 名器之濫, 前古所未聞。 不知聖心蔽於私, 而不悟其非耶? 臺諫言焉, 侍從言焉, 宰相言焉, 亦可省矣, 而拒諫愈甚, 謂臺評不及宦寺之言, 謂廟謨無異兒童之見, 嘻! 宦寺、兒童, 豈所以待宰相、臺諫者哉? 賤名器、辱朝廷, 已失爲政之體, 而加以自廣、狹人, 雖政府大臣, 不少假借, 何悖理之甚耶? 此必殿下深居宴安, 倦御經筵, 起居動靜, 有違存養、省察之實, 故其發於外者, 有不可撿也如是, 可不戒哉? 《書》曰: "敢有逆忠直、遠耆德, 比頑童, 時謂亂風。 邦君有一于身, 國必亡。" 今臺諫公論所在, 其忠言、讜議, 未嘗不爲宗社計, 而殿下猶云如此, 則其不幾於逆忠直乎? 三公累朝元老, 與國家同休戚。 先王以遺殿下, 而殿下猶云如此, 則其不幾於遠耆德乎? 奸邪、狂悖之輩, 貪汚、奴隷之賤, 醫、宦、外戚之徒, 不可與共國家也, 而殿下是崇是長, 猶恐不及, 則其不幾於比頑童乎? 且敎曰: "不幸慶事不早, 母后專政, 引用匪人, 則其禍將不有大於此者乎?" 殿下此敎, 其有見於兩漢之事乎? 兩漢之亂, 蓋有所自。 外戚專擅於外, 宦寺盤據於中, 而瑕釁禁錮, 無賴之人因緣黨附, 交相煽熾, 倒持主柄, 貪立幼少, 以固權寵, 至於亡漢, 此皆履霜不謹之禍也。 聖慮及此, 而甘蹈覆轍, 曾不覺悟, 自爲基禍之主, 豈不悖哉? 伏願念殷湯三風之戒, 採臺諫、大臣之論, 舍己從人, 以廣聰明: 愛惜名器, 以尊朝廷; 戒愼言行, 以立民極, 則實宗社萬世無窮之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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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29권, 연산군 4년(1498) 1월 4일 경자(庚子)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29권, 연산군 4년(1498) 1월 20일 병진(丙辰)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대사헌 권경우 등이 소인과 내시를 멀리하고 외척을 쓰지 말 것을 간하다》

대사헌 권경우(權景祐), 대사간 김영정(金永貞) 등이 아뢰기를,

"대저 소인과 내시는 어느 때나 등용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오늘의 경사는 바로 원자(元子)를 위한 것이오니, 정시(正始)의 처음인지라, 마땅히 소인과 내시를 멀리하시고 외척을 쓰지 말아 공도(公道)를 보여야 하옵니다."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大司憲權景祐、大司諫金永貞等啓: "大抵小人、宦寺, 無時而可用。 今慶事乃爲元子, 則正始之初, 當遠絶小人、宦(世)〔寺〕 , 勿用外戚, 以示公道。" 不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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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29권, 연산군 4년(1498) 1월 20일 병진(丙辰)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32권, 연산군 5년(1499) 1월 27일 정해(丁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원자가 천연두를 앓자 건양문을 닫고 통행하지 못하게 하다》

윤필상·정문형·한치형·성준 등을 불러 전교하기를,

"원자(元子)가 천연두를 앓고 있으니, 기휘(忌諱)하지 않을 수 없소. 마침 관이 빈소에 있어 조석으로 이 기휘할 때에 곡읍(哭泣)하니, 온당한 일이 아니오. 경 등의 의견은 어떠하오? 상사(喪事)가 비록 중하다 할지라도 이도 또한 중한 것이니 이를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겠소?"

하매, 윤필상 등이 아뢰기를,

"지금 하교하신 바 두 일은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하다고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일반 상인의 집이라면 그 곳만 기휘할 뿐입니다. 지금 원자께서 비록 정미수의 집에 계신다고는 하오나 궐내의 일은 외간과는 다르옵니다. 신 등의 뜻으로는 전(奠)을 드리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조석으로 드리는 곡만은 우선 정지하고, 또 사람의 왕래도 금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가하다. 건양문(建陽門)을 닫고 통행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召尹弼商、鄭 文炯、韓 致亨、成俊, 傳曰: "元子得痘證, 不可不忌諱。 今者柩方在殯, 朝夕哭泣, 於忌諱之時恐未穩, 卿等意何如? 喪事雖大, 此亦大矣, 當如何處之?" 弼商等啓: "今所敎兩事, 難以輕重, 然常人之家, 則止於所在忌諱而已。 今元子雖寓鄭眉壽家, 然闕內事, 異於外間。 臣等意以爲, 祭奠則不可廢也, 朝夕哭臨則姑停。 且禁人往來似當。" 傳曰: "可。 其閉建陽門, 使不相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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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32권, 연산군 5년(1499) 1월 27일 정해(丁亥)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34권, 연산군 5년(1499) 8월 20일 정미(丁未)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원자를 모시는 사람에게 줄 물품을 대궐에 들이게 하다》

호조에 전지하기를,

"상의원(尙衣院)의 생황초(生黃綃) 30필과 제용감(濟用監)의 면포(綿布) 1백 필과 수주(水紬) 50필을 궐내에 들이라."

하고 이어서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경들은 지용이 번거롭다고 생각하지 말라. 원자(元子)를 시측(侍側)하는 사람에게 사급하고자 한다."

하였다. 傳旨戶曹曰: "尙衣院生黃綃三十匹, 濟用監綿布一百匹、水紬五十匹入內。" 仍傳于承政院曰: "卿等毋以用煩爲意。 欲賚元子侍側之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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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34권, 연산군 5년(1499) 8월 20일 정미(丁未) 2번째 기사



『연산군일기』38권, 연산군 6년(1500) 8월 29일 신해(辛亥)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의정부가 당시의 폐단을 조목별로 아뢰다》

... (전략) ... 상주고 벌주는 것은 군주(君主)의 큰 권한이므로 옛날의 명철한 군주는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것도 아꼈던 것입니다. 한(韓)나라 소후(昭侯)는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범상한 군주인데도 오히려 한 개의 해진 바지를 간수해 두었다가 공로 있는 사람은 기다렸던 것입니다. 가만히 보옵건대, 근래 사여(賜與)가 조금 잦으십니다. 왕녀(王女)와 원자(元子)가 월산 대군(月山大君)의 사제(私第)에 피접(避接)해 있을 적에 대군(大君)이 잠시 질병에 걸렸으나 곧 회복되었는데, 부인(夫人)과 태의(太醫)·환시(宦侍)가 무슨 공로가 있었기에 금은(金銀)과 쌀·포백을 함부로 절제가 없이 내리시는 것입니까. 근년에 쓸데없는 비용이 너무 심하여 대궐 안에서 먹이는 천인(賤人)의 수효가 금년 정월 이후로 많기가 2만 2천여 명이나 되오며 내수사에 미곡(米穀)을 실어 보내라는 명령이 잦은데, 근일에는 더욱 심하오니 알 수 없사오나, 하는 것이 무슨 일이기에 용도(用度)의 빈번함이 이 지경에 이르옵니까. 창름(倉廩)의 저축은 귀신이 운반해 오는 것이 아니고 모두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오니 이익이 없는 소비는 줄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賞罰人主之大柄。 古之明王, 愛一嚬一笑。 韓昭侯戰國之中主, 猶能藏一敝袴, 以待有功。 竊觀, 近來賜與稍煩。 王女、元子避寓月山大君夫人之第, 大君暫遘疾病, 旋卽平愈。 夫人與太醫、宦侍, 有何功勞, 而金、銀、米、布, 濫賜無節乎? 近年靡費太甚。 闕內所饋賤人之數, 自今年正月以後, 多至二萬二千餘。 內需司米穀輸送之敎頻數, 而近日尤甚, 未知所做何事, 而用度之煩至此? 倉廩之儲, (班)〔非〕 神運鬼輸, 皆出於民, 無益之費, 不可不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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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38권, 연산군 6년(1500) 8월 29일 신해(辛亥) 4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5일 임오(壬午)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원자의 역질을 치료한 의원 하종해 등에게 품계를 올려주다》

전교하기를,

"원자(元子)가 역질(疫疾)을 앓을 때 보호한 의원 하종해(河宗海)·고세보(高世輔)·김공저(金公著)와 내관 박성림(朴成林) 등에게 각각 한 품계씩 올려 주고, 월산 대군(月山大君) 부인에게 면포·정포 각 2백 필과, 쌀 50석, 콩 30석을 내려 주라."

하였다.


傳曰: "元子疫疾時, 保護醫員河宗海、高世輔、金公著, 內官朴成林各加一資。 月山大君夫人賜緜布、正布各二百匹, 米五十碩、黃豆三十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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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5일 임오(壬午) 2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21일 무술(戊戌)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장령 이효문 등이 건항 지방 백성의 어살을 내수사에 이관한 잘못이 크다고 아뢰다》

조참을 받고 경연에 납시었다. 장령 이효문(李孝文)·정언 조세당(曺世唐)이 아뢰기를,

"김계종(金繼宗)의 불충한 죄는 이미 추국을 했으니, 녹안(錄案)을 고칠 수 없습니다. 하종해(河宗海) 등이 원자(元子)의 병을 간호한 것에는 물건으로 상을 주어도 족하오며, 당상으로 승진시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진상(進上)하는 어물(魚物)과 사재감(司宰監)에서 바치는 어물은 오로지 건항(乾項) 지방의 어살[魚箭]에 의해 잡는 것입니다. 지금 그 어살은 내수사(內需司)에 이관되었는데, 경비는 전일과 다름이 없으므로, 부득이 백성들로 하여금 자담(自擔)케 한 것입니다. 폐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受朝參, 御經筵。 掌令李孝文、正言曺世唐曰: "金繼宗不忠之罪, 旣已推鞫, 錄案不可改也。 河宗海等侍元子疾, 賞之以物足矣, 陞堂上則不可。 進上及司宰監所納魚物, 專賴乾項魚箭。 今移屬內需司, 而經費則如舊, 不得已令民自辦, 弊孰大焉?" 不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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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21일 무술(戊戌)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22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헌납 정환 등이 의원과 내관 등에게 내린 관작이 지나치다고 하다》

상참을 받고 경연에 납시었다. 헌납 정환(鄭渙)이 아뢰기를,

"김계종(金繼宗)의 녹안(錄案) 삭제의 일과 의원과 내관 등의 가자가 외람된 일과 건항(乾項)의 어살의 폐단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일들은 신 등이 여러 날 합사(合司)해서 아뢰었는데, 아직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대저, 국가를 유지함에는 오로지 강상(綱常)을 중히 여기는데, 김계종은 국상(國喪) 기간에 음란한 짓을 했으니, 불충의 죄가 막대합니다. 녹안은 진실로 마땅합니다. 옛날 주(周)나라 여왕(厲王)이 나쁜 시호를 얻었는데도 그의 아들인 선왕(宣王)이 끝내 능히 고치지 못했습니다.

김계종의 아들이 그 아비를 위하는 마음은 비록 간절하겠지마는, 이미 작성된 녹안(錄案)을 가볍게 고칠 수 있습니까. 또 원자(元子)의 역질(疫疾)이 이미 나은 것이 어찌 하종해(河宗海) 등이 약을 써서 효험을 본 공로이겠습니까. 상을 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관작은 군주가 덕 있는 사람과 재능 있는 사람의 공로에 대우하는 도구이니, 마땅히 아껴야 되고 함부로 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해주(海州)에서 천진(薦進) 하는 것은 모두 건항(乾項) 지방에서 나는 것이온데, 지금 천진하는 일은 전대로 하면서 어살은 내수사에 이관(移管)했으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고, 성준(成俊)이 아뢰기를,

"노중례(盧仲禮)는 세종 때에 당상관에 승진되었는데, 그는 무과 출신이었음에도 벼슬은 오히려 첨지(僉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臣)은 일찍이 듣자옵건대, 세종(世宗)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나라는 금은 보배가 없으니, 별수 없이 관작을 가지고 권상(勸賞)해야 한다. 그러니 비록 한 품계 반 등급(等級)이라도 마땅히 중하게 아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후세에 본받아야 할 훈계입니다. 지금 고세보(高世輔) 등에게 비록 성명(成命)이 이미 내렸다고 하지마는, 그러나 성종(成宗) 때에도 화원(畫員) 최경(崔璟)·안효례(安孝禮)가 잡류(雜類)로서 당상(堂上)이 되었다가 뒤따라 고쳐진 예가 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의원들이 원자(元子)에게 시병(侍病)한 것은 국본(國本)이 중하기 때문에 관작(官爵)을 더 준 것뿐이다."

하였다. 성준(成俊)은 이뢰기를,

"의원들은 다만 원자를 시위했을 뿐이며 또한 약을 쓰지 않았는데,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또한 의원들을 가자하는 일은 국본을 튼튼히 하는 데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전하께서 국본을 튼튼하게 하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관작을 아껴서 뒷 임금에게 보여야 합니다. 성종 때에 본받아야 할 일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닌데, 어찌 유독 관작을 가볍게 주는 이 한 가지 일만을 본받으려고 하십니까. 대간들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受常參, 御經筵。 獻納鄭渙曰: "金繼宗削案, 醫員、內官等加資猥濫, 乾項魚箭弊及於民事, 臣等累日合司以啓, 而未蒙允兪。 夫維持國家者, 專以綱常爲重。 金繼宗於國恤宣淫, 不忠之罪莫大, 錄案固其宜也。 昔周 厲王得惡謚, 宣王終不能改。 繼宗之子爲父心雖切, 然旣錄案, 其可輕改乎? 且元子疫疾已瘳, 豈宗海等用藥得効之功乎? 賞物足矣。 官爵人君所以待賢能、功勞之具, 在所當惜, 不可濫施。 海州薦新進上, 皆出於乾項。 今薦新仍舊, 而魚箭則移屬內需司, 甚未便。" 領事成俊曰: "盧仲禮在世宗朝陞爲堂上官, 然仲禮武科出身, 猶且不過僉知。 臣嘗聞之, 世宗曰: ‘我國無金銀、寶貝, 必以官爵爲勸賞, 雖一資半級, 當重惜之。’ 此後世可法之訓。 今世輔等雖曰成命已下, 然成宗朝畫員崔璟、安孝禮以雜類爲堂上, 而隨卽改之。" 王曰: "醫員等侍病元子。 國本爲重, 故加爵賞耳。" 俊曰: "醫員等但侍衛元子, 亦不用藥, 何功之有? 且醫員之加資, 其於固國本, 何預焉? 殿下欲固國本, 當重惜官爵, 以示後王。 成宗朝可法之事, 不爲不多, 而何獨法此輕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燕山君)과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愼氏)소생으로, 연산군의 적장자인 폐세자 이황 태실에 관한 종합 정보 페이지. 施官爵之一事乎? 臺諫之言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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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22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1권, 연산군 7년(1501) 12월 18일 임술(壬戌)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나례와 잡희를 원자가 피접해 있는 곳으로 보내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나례(儺禮) 궁중에서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베풀던 의식 와 잡희(雜戲) 여러 가지 놀이원자(元子)가 피접(避接)해 있는 곳으로 보내라."

하였다.

傳曰: "儺禮雜戲, 送於元子避寓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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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1권, 연산군 7년(1501) 12월 18일 임술(壬戌)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2권, 연산군 8년(1502) 1월 24일 정유(丁酉)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영의정 한치형 등이 흙비로 인하여 사피와 용도를 절약하기 등을 청하다》

... (전략) ... 치형(致亨) 등이 다시 아뢰기를,

"원자(元子)를 책봉할 날짜가 가까우니 여염(閭閻)에 거처하게 할 수가 없으므로 궁내로 옮기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군주도 또한 옮겨 거처하는 때가 있는데, 원자는 비록 여염에 있더라도 범인의 집과는 같지 않으니, 이미 책봉한 후에도 그대로 그곳에 있게 하는 것이 또한 무방할 것이오."

하였다. 이때 원자가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의 집에 있었다.

致亨等更啓曰: "元子冊封日近, 不可處於閭閻, 請移宮內。" 傳曰: "人君亦有移御之時, 元子雖在閭閻, 非如凡人家。 旣封後, 因在其處亦無妨。" 時, 元子在月山大君 婷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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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2권, 연산군 8년(1502) 1월 24일 정유(丁酉) 2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3월 20일 임진(壬辰)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지평 최숙생 둥이 구수영의 일로 논계하다》

지평 최숙생(崔淑生), 정언 이숭로(李崇老)가 구수영의 일을 논계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최숙생이 아뢰기를,

"작명(爵命)은 본디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상사(賞賜) 같은 것은 오히려 줄 곳이 있겠지마는 또한 함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요즈음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부인에게 이미 상사(賞賜)를 내리시고 또 구수영에게도 상사를 내리시니, 국고(國庫)의 재물은 백성들의 고혈(膏血)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 이와 같이 쓸 수 있겠습니까.

원자(元子)가 오랫동안 여염(閭閻)집에 있으며 부녀자나 아이들과 함께 거처하니 보는 것이 사특한 행동이 아닌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태자(太子)가 나서 강보(襁褓) 속에 있어도 바른 말을 듣고 바른 도(道)를 듣게 한 까닭으로, 강보에 있을 때부터 교육이 실로 행해졌던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의 선악(善惡)은 습관이 몸에 젖으면 천성(天性)처럼 되는[習與性成] 것이므로 이미 장성한 뒤에는 착해지거나 악해지는 것이 변하기 어려운 것이니, 대궐 안에 거처시키소서. 음식을 보살피고 문안을 드리는 예절을 어찌 반드시 세자로 책봉된 뒤에만 가르치겠습니까?

과거(科擧) 방(榜)을 내걸 때에 급제한 사람의 족친(族親)들이 다투어 서로 사사로이 하례하느라 동서(東西)로 뛰어다녀 반열이 차례를 잃고 정승과 시종(侍從)들도 또한 모두 분주히 다니게 되니, 이 풍습은 그 유래가 비록 오래되었으나 조정 하례가 있으므로 사사로이 하례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이렇게 못하도록 하소서.

또 성세원(成世源)은 좌랑(佐郞)이 된 지 다섯 달 만에 갑자기 충청도 도사로 임명되었는데, 남행(南行) 출신(出身)인 사람은 남보다 뛰어난 재덕(才德)이 없으면 반드시 임기가 차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성세원은 본래 재덕도 없고 또한 전부터 술을 즐기니 빨리 승진시킬 수 없습니다. 개정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상사(賞賜)의 일은 공주(公主)의 길례(吉禮)를 거행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한 일이다. 원자(元子)의 일은 사람의 인품이란 똑같지 않아, 나면서 아는 사람도 있고, 배워서 아는 사람도 있고, 노력하여 아는 사람도 있는 것이니, 기질(氣質)이 아름답지 못하면 비록 부지런히 가르쳐도 오히려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8살 때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는데, 아직 일을 해득(解得)하지 못했고 비록 서연(書筵)에서 공부를 해도 또한 공부가 성취하지 못했다. 지금 원자가 비록 여염집에 있지마는 대궐 안과 다름이 없다. 이런 일은 아래서 의논할 바가 아니니, 내가 마땅히 짐작해서 할 것이다. 사사로이 하례하는 일은 그 유례가 오래되었으니 가벼이 폐지할 수 없다. 성세원은 비록 술을 즐기는 과실이 있으나 누군들 이런 과실이 없겠는가. 이 때문에 사람을 버릴 수는 없다."

하였다. 이숭로(李崇老)가 또 나뭇갓의 일을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최숙생·이숭로가 다시 구수영의 일을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최숙생이 아뢰기를,

"근래에 해마다 흉년이 드니, 만약 용도를 절약하지 않고 상사(賞賜)를 절도 없이 하면 백성들이 소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품(人品)은 본래 같지 않은 것이지만, 나면서 아는 사람은 배울 필요가 없고, 그 다음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의 힘을 힘입은 뒤에야 고명(高明)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제왕은 반드시 어릴 적부터 가르쳤던 것인데, 지금 원자(元子)의 나이가 6살이니, 이미 어린애 시절은 지났습니다. 비록 하교(下敎)에 ‘있는 곳이 대궐안과 다름이 없다.’ 하시지마는, 함께 거처하는 사람들이 모두 부녀자와 어린애뿐이고 단정한 선비가 없는데, 어떻게 바른 말을 듣고 바른 일을 보겠습니까. 대궐 안에 거처하며 날마다 단정한 일만 보게 하여, 옳은 방법으로 인도하고 학문을 가르치게 하소서.

성세원(成世源)은 신 등이, 술마시는 것을 허물삼는 것이 아닙니다. 육조의 낭관(郞官)은 임기가 만료된 뒤에 승진시키는 것인데, 성세원은 좌랑(佐郞)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도사(都事)로 임명되어 지극히 외람되오니, 개정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성세원은 체차(遞差)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듣지 않겠다."

하였다.

持平崔淑生、正言李崇老論啓壽永事, 不聽。 淑生啓: "爵命固不可濫也。 若賞賜則猶或有所施之處, 而亦不可濫也。 近日旣賜永膺大君夫人, 又賜具壽永, 府庫之財, 皆出於民之膏血, 豈宜用之如是哉? 元子久處閭閻之中, 與婦人小子同處, 所見無非邪慝之行。 古者太子生而在襁褓之中, 使之聞正言、見正道, 故自在襁褓, 敎固已行。 大抵人之善惡, 習與性成。 及其旣長, 爲善爲惡, 難可移易, 請處之闕內。 視膳、問安, 豈必冊封之後敎之乎? 放榜時, 新恩族親, 競相私賀, 趨走東西, 班次失序, 至於政丞、侍從亦皆奔走。 此風其來雖久, 然旣有朝賀, 不必私賀, 今後請勿令如是。 且成世源爲佐郞五朔, 輒除忠淸道都事。 南行出身者無出衆才德, 則必待箇滿。 世源素無才德, 又嘗嗜酒, 不宜徑陞, 請改正。"

傳曰: "賞賜事, 方擧公主吉禮, 不得已也。 元子事, 人品不同, 有生而知之者, 有學而知之者, 有困而知之者。 氣質不美, 則雖敎之勤勤, 尙難化也。 予方八歲, 封爲世子, 猶未能解事, 雖講書筵, 亦不能就學。 今元子雖在閭閻, 與闕內無異。 此等事, 非下之所議, 予當斟酌爲之。 私賀事, 其來已久, 不可輕廢。 世源雖有嗜酒之失, 誰無此失? 不可以此廢人。"

崇老又啓柴場事, 不聽。

淑生、崇老更啓壽永事, 不聽。

淑生啓: "近來連歲飢饉, 若不節用, 而賞賜無節, 則民不得蘇息矣。 人品固有不同, 然生而知之者, 無待於學, 其下則必資學力然後, 至於高明, 故古之帝王, 必自孩提敎之。 今元子年已六歲, 已過孩提。 雖敎云: ‘在處與闕內無異。’ 所與居處者, 皆婦人小子而已, 無端正之士, 何從而聞正言、見正事乎? 請處之闕內, 日近端正之事, 導以義方, 保養學問。 世源臣等非以飮酒爲咎也, 六曹郞官, 箇滿後陞敍。 世源爲佐郞未久, 而輒授都事, 至爲猥濫, 請改正。"

傳曰: "世源遞差, 餘皆不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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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3월 20일 임진(壬辰) 2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2일 계축(癸丑)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원자를 배종하는 사람에게 줄 면포 2백 필 등을 대내로 들이도록 하다》

호조에 전지하기를,

"원자(元子)를 배종(陪從)하는 사람들에게 줄 면포(綿布) 2백 필, 정포(正布) 1백 50필, 수주(水紬)318) 30필, 백면포(白綿布) 30필, 목화 30근, 호초 5섬을 대내로 들여오라."

하였다.


傳旨戶曹曰: "元子陪從人等所給緜布二百匹、正布一百五十匹、水紬三十匹、白緜布三十匹、常緜子三十斤、胡椒五碩入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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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2일 계축(癸丑) 2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2일 계축(癸丑)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우참찬 윤효손에게 쌀 20섬을 하사하다》

우참찬 윤효손(尹孝孫)에게 쌀 20섬을 내려주었는데, 이때 원자(元子)를 그 집에서 양육했다.

賜右參贊尹孝孫米二十碩。 時元子養于其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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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2일 계축(癸丑) 3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4일 을묘(乙卯)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월산 대군의 아내 박씨에게 쌀 50섬 등을 하사하다》

월산 대군(月山大君)의 아내 박씨(朴氏)에게 쌀 50섬, 면포 1백 50필, 정포(正布) 1백 필을 내려주고, 전교하기를,

"근래에 조세(租稅)를 운반하는 배가 침몰했으니 진실로 용도를 절약해야 하지마는, 국본(國本)322) 과 비교하면 절로 경중(輕重)이 있다. 이 때문에 내려주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 원자(元子)가 그의 집에서 우거(寓居)하고 있었다.

賜月山大君妻朴氏米五十碩、緜布一百五十匹、正布一百匹。 傳曰: "近來漕船覆沒, 固當節用, 然以國本而較之, 自有輕重, 故賜之。" 時元子出寓其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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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4일 을묘(乙卯) 2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7일 무오(戊午)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원자의 유부 조인을 서방색으로 임명하다》

전교하기를,

"원자(元子)의 유부(乳父) 조인(趙麟)에게 등차를 올려 서방색(書房色)으로 임명하라."

하였다.

傳曰: "元子乳父趙麟加次, 差書房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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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7일 무오(戊午)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21일 임술(壬戌)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지평 최숙생이 조인에게 가자한 일을 개정하도록 아뢰다》

지평 최숙생(崔淑生)이 아뢰기를,

"제왕은 작명(爵命)을 비록 한 자(資) 한 급(級)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조인(趙璘)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셨습니다. 조인은 본래 미천하고 용렬한 사람인데, 무슨 공로와 재능이 있기에 이같이 하십니까? 조정의 소문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으니 개정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원자(元子)의 유부(乳父)인 까닦으로 가자한 것이다."

하였다. 최숙생이 다시 아뢰기를,

"전일 구수영(具壽永) 등에게 함부로 가자한 것을 신 등이 여러 날 논계(論啓)하매, 전하께서도 또한 외람함을 아시고 하교하시기를 ‘이 뒤에는 이와 같이 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신 등이 명령을 들은 날이 오래되지 않았는데 또 사사로운 은총 베풀기를 이와 같이 하시니, 원자의 유부에게 무슨 갚을 만한 공이 있습니까? 만약 상을 주고 싶다면 포백(布帛)을 주는 것은 괜찮지마는, 어찌 관작(官爵)을 함부로 줄 수 있겠습니까. 개정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성종 때에도 나의 유부 김영우(金永愚)에게 또한 군직(軍職)을 주었으니, 내 자신이 예(例)를 만든 것은 아니다."

하였다. 최숙생이 다시 아뢰기를,

"전례는 신이 감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원자는 아직 혈기가 정해지지 않아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데, 만약 사사로운 은총으로 가자한다면 원자도 또한 벼슬을 주는 것이 모두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니, 너무도 옳은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이 못됩니다. 빨리 개정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 일은 너희 들이 말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최숙생이 다시 아뢰기를,

"조인(趙璘)에게는 전일에 주신 녹과 벼슬로도 은총이 또한 지극했으니, 비록 가자하지 않더라도 기한(飢寒)에 이르지는 않을 것인데, 근일에 관작(官爵)이 외람하여 공의(公議)가 시끄럽고 재변이 거듭 나타납니다. 이야말로 마땅히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되 사사로운 마음을 힘써 끊어야 할 때이오니, 개정하소서. 옛날부터 유부(乳父)의 무리들이 임금의 은총을 빙자해서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힌 자가 많았으니, 조인은 비록 이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폐단의 징조를 조장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른바 ‘어지럽혔다’는 자는 재능(才能)이 있어서 조종(操縱)할 수 있었던 사람이니, 어찌 조인과 같은 무리가 할 바이겠는가."

하였다.

持平崔淑生啓: "王者於爵命, 雖一資一級, 不可濫授。 近者趙璘特許加資, 璘本微劣, 有何功能, 而若是乎? 朝廷聽聞, 莫不喧騰, 請改正。"

傳曰: "以元子乳父, 故加資。"

淑生更啓: "前日具壽永等濫授加資, 臣等累日論啓, 殿下亦知猥濫,

敎曰: ‘今後不如是。’ 臣等聞命未久, 而又施私恩如是。 元子乳父, 何功可報乎? 如欲論賞, 賜之布帛猶可也, 官爵豈宜濫施? 請改正。"

傳曰: "成宗朝予之乳父金永愚亦授軍職, 非予自成例也。"

淑生更啓: "古例則臣不敢知, 然元子血氣未定, 是非不辨。 如以私恩而加資, 則元子亦以謂: ‘除職皆自己出。’ 甚非所以敎之義方也, 請速改正。"

傳曰: "此事非爾輩所言也。"

淑生更啓: "趙璘前授祿職, 恩亦至矣。 雖不加資, 不至飢寒。 近日官爵猥濫, 公議喧騰, 災變疊見。 此當殿下敬天勤民, 務絶私意之時, 請改正。 自古乳父之輩, 憑藉主寵, 濁亂朝政者多。 璘雖不至於此, 其漸不可長。"

傳曰: "所謂濁亂者, 有才能, 堪爲操縱者, 豈如璘輩所爲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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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21일 임술(壬戌)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6권, 연산군 8년(1502) 9월 15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백관의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내리다》

백관(百官)의 하례를 받고 사면령(赦免令)을 반포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옛날의 명철한 군주들이 천하와 국가를 소유함에 있어서 미리 세자(世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바루지 않음이 없는 것은, 위로는 종묘(宗廟)를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소망을 편안하게 하는 까닭이다. 내가 박덕으로 조종(祖宗)의 기업(企業)을 이어받아 끝없는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또한 끝없는 근심을 한다. 짊어진 것이 무거우므로 공경하고 부지런히 하고 복종하고 힘써서 길이 조종의 세업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마땅히 왕세자 정할 것을 열겠다.

지금 원자(元子) 황(𩔇)은 자질이 온화하고 도량이 원대하며, 〈어릴 때부터〉 높게 빼어나서 이미 성인(成人)의 도량이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훌륭한 덕망으로써 진실로 구가(謳歌)의 돌아감에 응할 만하였다. 마침내 홍치(弘治) 15년 1502년 9월 15일 갑신에 황(𩔇)왕세자로 책봉하고, 감국 무군(監國撫軍)의 권한을 맡겨서 이에 신(神)과 사람의 소망에 보답한다.

이 막대한 경사에 마땅히 비상(非常)한 은전을 베푼다. 이 달 15일 새벽 이전에 모반(謀反)·대역(大逆)·모반(謀叛)과 자손(子孫)이 조부모(祖父母)와 부모를 모살(謀殺)하였거나 구타·욕설을 한 일, 처첩(妻妾)이 남편을 모살한 일, 노비(奴婢)가 주인을 모살한 일, 사람을 계획적으로 모살한 일, 독약으로 사람을 해치거나 주문(呪文) 또는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 저주한 일, 삼강(三綱)·오륜(五倫)에 관계된 일, 강도(强盜)를 범한 일 이외는, 이미 도형(徒刑)·유형(流刑)·중도 부처(中途付處)·정속(定屬) ·안치(安置)·충군(充軍)에 배정된 사람 등을 이미 발각이 되었거나 아직 발각이 되지 않았거나 이미 판결이 났거나 아직 판결이 나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사면(赦免)하되, 감히 사면령이 내리기 전의 일로써 서로 일러바치는 사람은 마땅한 죄율(罪律)로 죄를 주라.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각각 한 품계씩 올려주되, 당하관(堂下官)의 품계에서 다시 더 올라갈 수 없는 사람은 〈아들·사위 등인 다른 사람에게〉 대신 더해 주라. 아! 오늘 이후로는 튼튼한 기업(基業)을 더욱 공고히 하여 경사를 우리 백성들과 함께 하고, 모두 유신(維新)의 정치를 누리도록 하라."

하였다.

受百官賀, 頒赦。 王若曰:

予惟, 古先哲王之有天下國家也, 莫不預建儲貳, 以正國本, 所以上奉宗祧, 下安群望。 予以涼德, 纉祖宗之緖, 惟無疆休, 亦無疆恤。 負荷斯重, 祗勤若厲, 永惟堂構之難, 宜啓冡嗣之定。 今以元子𩔇資性溫文, 器宇英遠, 克岐克嶷, 已有成人之度, 以地以德, 允膺謳歌之歸。 肆於弘治十五年九月十五日甲申, 冊封𩔇爲王世子, 以寄監撫之權, 庸答神之望。 屬玆莫大之慶, 宜布非常之恩。 自今月十五日昧爽以前, 除謀反、大逆、謀叛, 子孫謀殺、敺罵祖父母、父母, 妻妾謀殺夫, 奴婢謀殺主, 謀故殺人, 蠱毒魘魅, 關係綱常, 但犯强盜外, 已配徒流、付處、定屬、安置、充軍人, 已發覺未發覺, 已決正未決正, 咸宥除之。 敢以宥旨前事, 相告言者, 以其罪罪之。 在官者各加一資, 資窮者代加。 於戲! 繼自今日, 益鞏不拔之基, 嘉與吾民, 共享維新之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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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6권, 연산군 8년(1502) 9월 15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9권, 연산군 9년(1503) 4월 17일 계축(癸丑)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중국 사신이 세자 책봉하는 칙서를 가지고 서울에 오다》

태감(太監) 김보(金輔)·이진(李珍)이 세자 책봉하는 칙서를 받들고 서울에 오니, 왕이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맞이하여 경복궁에 이르러 칙서를 받았는데, 세자가 왕을 따라 행례(行禮)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두 사신이 칙서를 반포하고 태평관(太平館)으로 갔는데, 왕이 태평관에 가서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다.

칙서에,

"짐(朕)이 생각건대 적자(嫡子)를 장자(長子)로 세우는 것은 예부터의 도리이니, 관작과 영토를 가진 자가 미리 후사[繼嗣]를 정하여 국민들의 정을 결속시키는 것 역시 이 도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받아 하고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아야 군신(君臣) 부자(父子)의 윤리가 바르게 된다.

근자에 왕의 주청(奏請)을 보니, 온 나라 신민들의 요청에 의하여 적장자(嫡長子) 이황(李𩔇)으로 왕세자를 삼는 일이므로 예관(禮官)에게 내려 의논해서 아뢰게 하여 특별히 윤허해 준다. 이에 태감 김보(金輔)를 정사(正使), 이진(李珍)을 부사로 명하여 칙서와 함께 저사·사라(紵絲紗羅) 등 물건을 가지고 가서 을 봉하여 조선국 왕세자를 삼는 것이다.

대범 번방(藩邦)의 직책을 위를 섬기고 아래를 돌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왕은 조부 이래 성실하게 실천해 왔다. 지금 이미 세자를 세웠으니 왕은 마땅히 이 훈계를 분명히 보여주어 세자의 습관이 천성과 함께 이루어지고 학업이 덕에 따라 진취되어 예절을 지키고, 의리를 따르게 하여야 대대로 나라를 누리게 되어 짐의 명을 저버리지 않게 되고 또한 선대에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조심할지어다. 그러므로 깨우치는 것이다."

하였다.

太監金輔、李珍奉封世子勑至京, 王詣慕華館郊迎, 至景福宮受勑。 世子從王, 行禮如儀。 兩使頒勑, 往太平館, 王如太平館, 設下馬宴。 勑曰:

朕惟, 立嫡以長, 古之義也。 有爵土者, 豫定繼嗣, 以繫群情, 亦率是道。 然必請命于朝, 而不敢專, 則君臣父子之倫正矣。 比得王奏, 欲因擧國臣民之請, 立嫡長子𩔇爲王世子事, 下禮官議奏, 特賜允兪。 玆命太監金輔爲正使, 李珍爲副使, 齎勑幷紵絲紗羅等件, 封𩔇爲朝鮮國王世子。 夫藩邦之職, 莫先乎事上恤下, 王自祖父以來, 允克蹈之。 今旣立世子, 王宜明示玆訓, 俾習與性成, 業由德進, 秉禮遵義, 世享有邦, 庶幾不負朕命, 亦無忝于前人。 欽哉! 故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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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9권, 연산군 9년(1503) 4월 17일 계축(癸丑)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52권, 연산군 10년(1504) 3월 4일 을축(乙丑)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물품을 월산 대군 집에 보내고 세자가 입학하여 죄인을 사면하다》

전교하기를,

"제용감(濟用監)의 무명·삼베 각 2백 50필, 호초 10섬을 대궐로 들이라. 월산 대군(月山大君) 처에게 쌀 1백 섬, 황두(黃豆) 50섬, 제용감의 무명 2백 50필, 삼베 1백 50필, 호초 3섬을 주고, 승전색(承傳色) 김자원(金子猿)에게 쌀 10섬, 황두 5섬을 주라. 지금 내리는 물품이 많기는 하지만, 경사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세자의 입학을 계기로 중외에 사면령를 반포하였는데, 그 하교에,

"세자 이황(李𩔇)가 나이 점점 자라 학문이 날마다 성취된다. 이에 지금 입학시켜 차례따라 사양하는 예[齒讓之禮]를 강하여, 스승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의기를 알게 하니, 만대토록 태평할 터전을 여는 길이 바로 지금부터 시작된다. 국가의 경사가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 이달 4일 동트기 이전의, 국가 강상(綱常)에 관계되거나 탐장 부정, 강도·절도 이외는 모두 용서하여 놓아주라."

하였다.

傳曰: "濟用監緜布、麻布各二百五十匹、胡椒十石入內。 其賜月山大君妻米一百石、黃豆五十石、濟用監緜布二百五十匹、麻布一百五十匹、胡椒三石, 賜承傳色金子猿米十石、黃豆五石。 今賜物雖多, 爲慶事耳。" 以世子入學, 頒赦中外, 敎曰: "世子𩔇年齒漸長, 學問日就。 玆今入學, 以講齒讓之禮, 使知尊師、重道之義, 開萬世太平之基, 正自今始。 國家之慶, 孰大於斯? 自今月初四日昧爽以前, 關係國家綱常、贓汚、强竊盜外, 竝皆宥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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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52권, 연산군 10년(1504) 3월 4일 을축(乙丑)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58권, 연산군 11년(1505) 7월 29일 임자(壬子)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세자를 서연에서 학업 받게 하다》

전교하기를,

"내일부터 세자(世子)는 서연(書筵)에서 학업을 받도록 하라."

하였다.

세자 이황(李𩔇)는 성품이 침중하고 굳세며 엄숙하였다. 왕이 경회루에 거둥하여 흥청과 더불어 잔치하며 주악(奏樂)하다가, 세자를 불러서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 네가 이들을 잘 돌보겠느냐?"

하였는데, 세자는 묵묵히 있었다. 왕은 그때부터 꺼렸다.

傳曰: "自明日世子, 可於書筵受學。 世子𩔇性沈毅嚴峻。 王幸慶會樓, 與興淸燕樂, 召世子語曰: 吾萬歲後, 汝善視此輩未?" 世子默然。 王自是憚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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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58권, 연산군 11년(1505) 7월 29일 임자(壬子) 2번째 기사



『연산군일기』59권, 연산군 11년(1505) 8월 26일 무인(戊寅)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군신·왕세자 등이 책보를 받들어 존호와 축하 전문을 올리고, 왕이 반사하다》

왕이 명정전(明政殿)에 임어(臨御)하고, 군신(君臣)이 책보(冊寶)를 받들어 존호(尊號)를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 (중략) ... 왕세자도 반열(班列)에 따랐는데, 따로 전문(箋文)을 올리기를,

"큰 기업을 운전하시매 모두가 건곤(乾坤)의 조화(造化)를 우러르며, 큰 미덕을 드날리매 일월(日月)의 빛처럼 밝으니 조야(朝野)가 함께 반기고 신인(神人)이 모두 기뻐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헌천 홍도 경문 위무하신 전하께서는 총명이 순(舜)과 가지런하고 용지(勇智)가 탕(湯)보다 지나시어, 성만(成滿)을 유지하고 수성(守成)을 잘하시어 삼왕(三王)의 치화(治化)를 밝히고, 예법(禮法)을 제정하고 음악(音樂)을 지어서 일대(一代)의 규모(規模)를 새로이 하시니, 풍속이 다 순후(淳厚)로 돌아가고 문물(文物)이 환히 갖추어졌습니다. 이에 현호(顯號)를 받아 여정(輿情)에 따르시매, 누옥(鏤玉)·이금(泥金)이 어찌 털끝만큼인들 묘사해내리까마는, 영명(英名)을 드날리고 사실을 기록하여 간편(簡編)385) 에 빛내고자 함이니, 이는 종사(宗社)의 복에 관계되고 국가의 경사를 더욱 펴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외람되이 용렬한 자질로 욕되게 저궁(儲宮)을 지키매, 춤추고 뛰어 지척(咫尺)에서 기쁨을 길이 받들고, 오래오래 강릉(岡陵)의 수(壽)를 늘 빕니다."

하였다.

... (중략) ...

왕세자가 전문을 올려 축하하기를,

"보책(寶冊)이 크게 드날리매 건곤(乾坤)의 덮어 기르심을 우러르고, 홍명(鴻名)이 나타나게 올려지매 일월(日月)의 밝음을 바라보게 되니, 경사가 국가에 모이고 기쁨이 조야(朝野)에 고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자순 화혜 왕대비 전하께서는 근검을 몸소 솔선하고 인애(仁愛)가 본성(本性)과 더불어 성장하시어, 육궁(六宮)에 음교(陰敎)로 베푸시어 능히 선왕(先王)의 치화(治化)를 돕고, 일국(一國)에 모의를 바루어 길이 장락의 존귀를 누리시니, 이에 욕의의 거행을 당하여 지극히 큰 복을 무성히 받으소서.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외람되게 용렬한 자질로 부끄러이 저위(儲闈)를 지키매, 강릉의 수를 늘 빌며, 춤추고 뛰는 기쁨이 더욱 더합니다."

하였다.

... (중략) ...

왕세자가 전문(箋文)을 올려 축하하기를,

"위(位)를 초위(椒闈)에 정하여 일찍부터 자범(慈範)을 드러내시매, 보책(寶冊)이 뜰에서 드날리어 현칭(顯稱)을 크게 받으시니, 경사가 종방(宗祊)에 연하고 기쁨이 조야(朝野)에 넘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제인 원덕 왕비(齊人元德王妃) 전하께서는 제장(齊莊)·연의(燕懿)하고 정숙(貞淑)·유가(柔嘉)하시어, 덕(德)이 도산(塗山)에 맞아서 안을 다스리는 풍화(風化)를 크게 밝히시고, 혜택은 규목(樛木)을 갖추어 아래에 미치는 인애(仁愛)를 길이 융성히 하시며, 신극(宸極)의 화함을 얻고 장락(長樂)의 기쁨을 받드시매, 이에 욕례(縟禮)를 올리오니 순연한 복을 더욱 맞이하소서.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외람되이 용렬한 자질로 다행히 성사(盛事)를 보게 되어, 손발이 절로 춤추어 감히 하례(賀禮)에 나가는 반열(班列)에 참여하매, 오래 수(壽)하고 창성(昌盛)하시도록 기리고 비는 정성을 다합니다."

하였다.

... (중략) ...

왕세자 및 백관이 또 전문(箋文)을 올려, 전하가 대비에게 존호를 더 올리고 왕비에게 휘호를 책명한 것을 하례하였는데, 왕세자의 전문에 이르기를,

"홍도(鴻圖)를 어루만지기를 수의(垂衣)로 하여 바야흐로 경운(景運)을 열으시고, 고전을 상고하되 예문을 참작하여 비로소 욕의(褥儀)를 밝히시니, 경사가 종방(宗祊)에 가득하고 기쁨이 조야에 넘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헌천 홍도 경문 위무하신 전하께서는 강건(剛健)·중정(中正)하고 제성(齊聖)·광연(廣淵)하시어, 나라를 다스림에는 반드시 집을 다스림에 비롯하여야 하고, 어버이를 섬김에는 마땅히 양지(養地)를 앞세워야 한다 하여 장락(長樂)에 휘호를 받들어 효사(孝思)를 잘 드리우고, 초정(椒庭)에 옥책(玉冊)을 드날려 곤화(壼化)451) 를 밝히시니, 여망(輿望)에 맞추어 홍휴(鴻休)를 밝힌 것이며, 하물며 이에 보정(寶鼎)이 이룩되매 경명(景命)의 내려짐이 더욱 정함에리까.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외람되이 못난 자질로 과분하게 저궁(儲宮)에 있으매, 하루에 세 번 뵙고 문안하옴이 문왕(文王)의 효행(孝行)에는 미치지 못하오나, 백관(百官)에 앞서서 하례를 드리어 화봉(華封)의 축사(祝辭)를 올리기 원하옵니다."

하였다.

王御明政殿, 群臣奉冊寶, 獻尊號, 其文曰 ... (略) ... 王世子亦隨班(別)〔列〕 , 進箋曰

誕撫鴻圖, 咸仰乾坤之造。 載揚景鑠, 式昭日月之光。 朝野交欣, 神人胥悅。 恭惟憲天弘道經文緯武殿下, 聰明齊舜, 勇智邁湯。 持盈守成, 闡三王之治化。 制禮作樂, 新一代之規模。 風俗盡歸於淳, 文物煥然而備。 玆膺顯號, 用副輿情。 鏤玉泥金, 詎摹畫於毫末。 蜚英紀實, 庶焜燿於簡編。 寔關宗社之休, 益衍邦家之慶。 伏念臣猥以庸資, 叨守儲宮。 舞之蹈之, 長奉歡於咫尺。 悠也久也, 恒祝壽於岡陵。

... (略) ... 王世子上箋陳賀曰

寶冊光揚, 仰乾坤之覆燾。 鴻名顯上, 瞻日月之昭明。 慶輯邦家, 歡均朝野。 恭惟慈順和惠王大妃殿下, 儉以身率, 仁與性成。 肅陰敎於六宮, 克贊先王之化。 端母儀於一國, 永享長樂之尊。 玆當縟儀之稱, 茂膺純嘏之至。 伏念臣猥以庸資, 叨守儲闈。 壽恒祝於岡陵, 喜益深於舞蹈。

... (略) ... 王世子上箋陳賀曰

位正椒闈, 夙著慈範。 庭揚寶冊, 光膺顯稱。 慶緜宗祊, 喜溢朝野。 恭惟齊仁元德王妃殿下, 齊莊淵懿, 貞淑柔嘉。 德協塗山, 丕闡治內之化。 惠給樛木, 永隆逮下之仁。 得宸極之怡愉, 奉長樂之懽悅。 玆陳縟禮, 益迓純禧。 伏念臣猥將庸資, 幸覩盛事。 手之舞足之蹈, 叨參趨賀之班。 壽而艾熾而昌, 倍殫頌禱之懇。

... (略) ... 王世子及百官, 又上箋賀殿下加上尊號於大妃, 冊徽號於王妃。 王世子箋曰

撫鴻圖而垂衣, 方開景運。 稽古典而酌禮, 肇講縟儀。 慶衍宗祊, 歡騰朝野。 恭惟憲天弘道經文緯武殿下, 剛健中正, 齊聖廣淵。 謂治國必始於齊家, 而事親當先於養志。 奉徽號於長樂, 克綏孝思。 揚玉冊於椒庭, 式彰壼化。 聿孚輿望, 載闡鴻休。 矧玆寶鼎之成, 益凝景命之錫?。 伏念臣猥將孱質, 濫居儲宮。 日三朝而問安, 雖乏文王之孝行。 首百官而稱賀, 願上華封之祝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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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59권, 연산군 11년(1505) 8월 26일 무인(戊寅)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61권, 연산군 12년(1506) 2월 1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정세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정하게 하다》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정세명(丁世明)의 딸을 세자빈(世子嬪)으로 정하라."

하였다.

下御書曰:

丁世明女子, 定世子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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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61권, 연산군 12년(1506) 2월 1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63권, 연산군 12년(1506) 9월 2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에 옮기다》

... (전략) ... 신시(申時)에 근정전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중외해 내렸으며, 대비의 명에 의하여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李𩔇)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베니, 도중(都中)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들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申時卽位于勤政殿, 受百官賀, 大赦中外, 以大妃命, 廢前王降封燕山君, 遷于喬桐, 廢王妃愼氏, 出處私第, 安置世子𩔇及諸王子于諸邑, 誅田非、綠水、白犬于軍器寺前, 都人爭以瓦礫, 擲其陰戶曰: ‘一國膏血, 盡於此。’ 須臾成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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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63권, 연산군 12년(1506) 9월 2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辛巳) 5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박원종 등이 폐세자 등의 안치 문제를 아뢰니 그대로 윤허하다》

박원종 등이 아뢰기를,

"폐세자 및 창녕(昌寧)·양평(陽平) 등이 성밖 가까이에 있어서는 온당하지 못하니, 외진 군읍을 골라 안치하고 관에서 먹는 것을 주며, 잡인 출입을 금하소서."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이황(李𩔇)은 정선(旌善), 이인(李仁)은 수안(遂安), 이성(李誠)은 제천(堤川), 이돈수(李敦壽)는 우봉(牛峯)에 보내어 모두 관가 근처에 안치하되, 그 담을 높직이 쌓고 항상 문을 잠그게 하소서. 그리고 옷과 먹는 물품의 출납은 관인(官人)으로 하여금 감독 관장하게 하고 그 공급은 소재처 관창(官倉)의 쌀로 하되, 관노비(官奴婢)를 시켜 음식을 마련하며, 또 군사로 하여금 수직(守直)하게 하고, 일이 있건 없건 수령은 매월 월말에 관찰사에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전교하였다.

朴元宗等啓曰: "廢世子及昌寧、陽平等, 近在城外, 未爲穩當。 擇幽僻郡邑安置, 官給其食, 禁雜人出入。" 傳曰: "可。" 僉啓曰: "𩔇 旌善、仁 遂安、誠 堤川、敦壽 牛峯, 竝於官家近處置之, 高其垣墻, 常令鎖閉。 凡出納衣食等物, 令官人監掌。 其支供, 以所在官倉之米, 炊爨, 使其官奴婢, 又令軍士、守直有無事, 守令每月季, 報觀察使。" 傳曰: "依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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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辛巳) 5번째 기사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辛巳) 1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폐세자 등이 유배 갈 때 들것에 태우게 하다》

전교하기를,

"폐세자 이황·창녕·양평·이돈수 등은 모두 나이가 어려서 말을 타고 먼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니, 가마를 타고 가게 하는 것이 어떤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죄인은 가마를 탈 수 없습니다. 만약 말을 타고 못한다면 들것[舁]으로 들고 가게 하는 것이 무방합니다."

하니, ‘알았다.’ 전교하였다.

傳曰: "廢世子𩔇、昌寧、陽平、敦壽等, 俱以幼稚, 必不能騎馬遠行, 令乘轎以去何如?" 僉啓曰: "罪人不可乘轎。 若不能騎馬, 則使之舁去無妨。" 傳曰: "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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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辛巳) 11번째 기사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24일 경자(庚子)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폐세자 이황·창녕 대군 이성·양평군 이인·이돈수 등을 사사하다》

영의정 유순·좌의정 김수동·우의정 박원종·청천 부원군 유순정·무령 부원군 유자광·능천 부원군 구수영 및 여러 재추(宰樞) 1품 이상이 빈청에 모여, 의논하여 아뢰기를,

"폐세자 이황(李𩔇)·창녕 대군 이성(李誠)·양평군 이인(李仁) 및 이돈수(李敦壽) 등을 오래 두어서는 안 되니, 모름지기 일찍 처단하소서. 또 연산군의 폐비 신씨가 지금 정청궁(貞淸宮)에 있는데 선왕의 후궁과 함께 거처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동대문 밖 광평 대군(廣平大君) 집에 옮겨 안치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 등은 나이가 모두 어리고 연약하니,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다. 폐비는 스스로 허물이 없는데, 문밖으로 내쳐 보내기가 정의상 몹시 가련하니, 성안에 옮겨 안치한다고 무슨 안 될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정승들이 다시 아뢰기를,

" 등의 일을 전하께서 측은한 마음으로 차마 결단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그 형세가 오래 보존되지 못할 것이니, 혹 뜻밖의 일이 있어서 재앙이 죄 없는 이에게까지 미치면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 비록 인심이 이미 정하여졌으나, 원대한 염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 모름지기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뭇사람의 마음에 응답하소서. 폐비는 신승선의 집을 수리해서 옮겨 두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폐비는 그렇게 하고, 등은 나이 연약하고 형세가 고단하니, 비록 있은들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하였다. 정승들이 다시 아뢰기를,

"이는 국가의 큰일이니,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써 대체(大體)에 누가 있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대의로써 결단하여야 합니다. 이는 신 등의 뜻일 뿐만 아니라 곧 일국 신민의 뜻입니다. 신 등이 전하께서 차마 못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뜻이 이와 같으므로 마지못하여 감히 품달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 등의 일은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으나, 정승이 종사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므로 과감히 좇겠다."

하였다. 명하여 ·성·인·돈수를 아울러 사사(賜死)하였다.

領議政柳洵、左議政金壽童、右議政朴元宗、菁川府院君 柳順汀、武靈府院君 柳子光、陵川府院君 具壽永及諸宰樞一品以上, 會賓廳議啓曰: "廢世子 𩔇、昌寧大君 誠、陽平君 仁及敦壽等, 不宜久存, 須早處斷。 且燕山君廢妃愼氏, 今在貞淸宮, 不可與先王後宮同處, 移置東大門外廣平大君家何如?" 傳曰: "𩔇等, 年皆幼弱, 不忍處斷。 廢妃則自無愆咎, 門外黜送, 情甚可憐, 移置城內, 有何不可?" 政丞等更啓曰: "𩔇等事, 殿下以惻隱之心, 不忍斷之, 然其勢不可久存。 脫有意外之事, 禍及無罪, 則誠非細故。 今雖人心已定, 不可不遠慮, 須斷以大義, 以答群心。 廢妃則於愼承善家, 修理移置何如?" 傳曰: "廢妃則然矣, 𩔇等年弱、勢孤, 雖在何妨?" 政丞等更啓曰: "此國家大事, 不可以不忍之心, 有累大體, 須當以大義斷之。 非特臣等之意, 乃一國臣民之意也。 臣等非不知殿下之不忍, 衆意如此, 故不得已敢達。" 傳曰: "𩔇等事, 不忍處斷, 政丞以爲事關宗社, 故敢從之。" 命𩔇、誠、仁、敦壽竝賜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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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24일 경자(庚子) 3번째 기사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25일 신축(辛丑)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폐세자 이황 등을 후히 장례하고자 하였으나 정승들이 막다》

전교하기를,

" 등은 비록 이미 사사되었으나 후히 장례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유순·우의정 박원종이 아뢰기를,

"장례 제도는 관작의 고하로써 차등을 둘 뿐입니다. 등은 이미 서인이 되었으니 관곽(棺槨)으로 매장하면 후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만약 그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전(奠)을 드리게 하면 그것만으로도 극진합니다."

하였다.

傳曰: "𩔇等雖已賜死, 厚葬何如?" 領議政柳洵、右議政朴元宗啓曰: "葬制, 以其官爵高下, 差等之耳。 今𩔇等旣爲庶人, 以棺槨埋葬, 可謂厚矣, 若令其道觀察使致奠, 則此極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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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25일 신축(辛丑) 2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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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이규상, 『한국의 태실』, 청원문화원, 200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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