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태실지
성종 태실(成宗 胎室) | |
식별자 | PC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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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국왕 태실 |
한글명 | 성종 태실 |
한자명 | 成宗 胎室 |
영문명 | Placenta Chamber of King Seongjong |
피안자 명칭 | 성종(成宗) |
피안자 이칭 | 이혈(李娎)·강정대왕(康靖大王)·선릉(宣陵) |
피안자 부 | 덕종(德宗) |
피안자 모 |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 |
피안자 생년월일 | 1457.08.19 |
피안자 몰년월일 | 1495.01.19 |
안태 연월일 | 1458.03.01 『성종 태지석』 |
안태지 기록 | 광주(廣州) 경안역(慶安驛) 뒤 『정조실록』 |
안태지 기록1 | 광주부(廣州府) 『순조실록』 |
안태지 기록2 | 경기 광주군 경안면 『서삼릉 성종 태실 후면 각자』 |
안태지 좌표(위도) | 37°39'23.25"N |
안태지 좌표(경도) | 127°23'19.34"E |
안태지 주소 | 경기도 광주시 태전동 265-1 |
문화재 지정여부 | 미지정 |
이안 연월일 | 1929 추정 |
이안지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
이안지 좌표(위도) | 37°66'45.61"N, |
이안지 좌표(경도) | 126°86'06.29"E |
지문 | 皇明天順元年,七月,三十日,戌時生,懿敬世子男慶新胎,天順二年,三月,初一日戊子,子時藏 |
지문 찬자 | 조선 예조(朝鮮 禮曹) |
지문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석물 | 성종 가봉태실 창경궁 내 이건(移建) |
태항아리 | 성종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
태항아리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내용
조선 제9대 국왕 성종의 태실이다.
사료에서는 성종의 안태와 가봉시기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태지석과 가봉비의 기록을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성종의 안태 시기는 1458년(세조 4) 3월 1일이며 가봉 시기는 1578년(성종 2) 윤9월이다. 다만 가봉비는 몇 차례에 걸쳐 고쳐 세워졌다. 가봉비의 음기에 태실 가봉 이후 1578년(선조 11)·1652년(효종 3)·1823년(순조 23)에 각각 개립(改立)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성종 태실의 석물들은 창경궁 안에 위치한다. 조선전기 태실 중 몇 안되게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경기도 광주가 서울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1930년 서삼릉으로 이안하면서 그 석물은 창경궁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태실의 원래 위치에는 별다른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인근 주민들이 태실이 있었던 사실을 주지하고 있으며, 성종 태실과 관련한 안내판도 세워두었다. 또한 태봉 아래에는 태봉의 명칭을 딴 교회가 있어 지역민들의 성종 태실에 대한 인식을 가늠할 수 있다.
창경궁 성종 태실
성종 태실은 1458년 아기태실로 처음 조성되었다. [1]
초안지는 경기도 광주부 경안역(慶安驛) 뒤로[2] 가봉은 1471년에 이루어졌다.[3] 1578년, 1625년, 1823년에 걸쳐 태실비가 개수된 사실이 『성종대왕태실비』에 기록되어있어 성종 태실이 지속적인 관리를 받아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4]
1928년 9월경 이왕직에서는 전국의 태실을 체계적 관리하겠다는 명목으로 서삼릉으로 이안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성종태실과 태실비를 창경궁 내로 이전하였다. 그 이유는 역대 국왕의 가봉태실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이 성종태실이기에 이를 옮겨 향후 조성할 서삼릉 태실의 표본으로 삼고 연구 자료로 활용하기 위함이라 선전했다. 하지만 실제 서삼릉 이안지에는 이왕직의 선전과 달리 태주의 이름과 초안지 주소, 건립연도만을 단순히 기입한 표석비를 다수 조성해 이를 나열하여 태실이 가졌던 역사경관적 의미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재 성종 태실은 일제강점기 이전된 이후로 지금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1번지 창경궁 경내에 위치한다. 이왕직에 의해 이전되어 보존되었기에 가봉태실 석물이 원형으로 남아있다.
중동석(中童石)의 기단인 사방석(四方石)의 1층은 사각형으로 옆면의 가운데는 안으로 홈을 파서 상석을 끼우게 하였으며, 옆면 상부에는 앙련(仰蓮)을 장식하였다. 이 앙련은 사방석 상부에서도 확인된다. 중앙태석의 역할을 하는 중동석은 원통형으로 문양은 발견되지 않으며 태실의 지붕 역할을 하는 개첨석(蓋簷石)과는 일체형이 아닌 별석으로 제작되었다.
개첨석은 평면 팔각형으로 낙수면(落水面)에 연꽃 줄기와 뒤짚은 모양의 연잎을 장식하였는데, 상부 또한 이와 같은 형태이다. 정상의 보주(寶珠)는 이중의 연봉(蓮峰)이 개첨석과 일체형인 일석으로 제작되었다. 상층은 연잎으로 되어있으며, 하층은 염주형 원좌(圓座)가 위치한다.
성종 태실 인근에는 태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부기된 안내판이 설치되어 창경궁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성종 태실이 이곳에 위치하게 된 연유를 말해주고 있다.
관련 기록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2166책 (탈초본 111책) 순조 23년(1823) 5월 6일 갑술(甲戌) 14/25 기사
『승정원일기』 2166책 (탈초본 111책) 순조 23년(1823) 5월 10일 무인(戊寅) 19/21 기사
林東鎭以觀象監領事, 提調意啓曰, 今此廣州地成宗大王胎室碑石改豎時, 書標官當爲差送, 取考謄錄, 則監董之臣, 兼進擧行, 多有已例, 本府留守洪羲臣, 書標官差下, 使之擧行, 何如?
傳曰, 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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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166책 (탈초본 111책) 순조 23년(1823) 5월 10일 무인(戊寅) 19/21 기사 |
『승정원일기』 2166책 (탈초본 111책) 순조 23년(1823) 5월 29일 정유(丁酉) 8/34 기사
李止淵啓曰, 卽見廣州留守洪羲臣·禮曹參判金鎌·成宗大王胎室碑石改豎狀啓, 則霑濕之痕, 如是狼藉, 狀啓封裏, 何等愼審, 而不能堅緻, 有此水沈之境, 事甚疎忽。 原狀啓係是祀典, 雖不得不捧入, 當該守臣及禮曹堂上, 不可無警, 竝推考, 何如?
傳曰, 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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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166책 (탈초본 111책) 순조 23년(1823) 5월 29일 정유(丁酉) 8/34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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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