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대군 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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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9월 27일 갑인(甲寅) 27/29 기사====
 
====『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9월 27일 갑인(甲寅) 27/29 기사====
  
{{Blockquote|又所啓, 京畿監司睦昌明, 西道各陵奉審後來言, 敬陵至近之處, 有一古塜, 見其碑則乃大君之塜, 而其名糞字也。其塜上有大松, 所見甚爲未安云, 故臣考見璿源譜略, 則睿宗朝仁城大君名字也。其下註云, 早卒贈大君, 諡孝昭, 墓在高陽。此古塜, 明是仁城大君之塜也。其塜上松木, 所當斯速斫伐, 而此是陵寢至近之地, 遣禮官斫伐, 似宜, 故敢此仰達。。|출처=『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9월 27일 갑인(甲寅) 27/29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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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又所啓, 京畿監司睦昌明, 西道各陵奉審後來言, 敬陵至近之處, 有一古塜, 見其碑則乃大君之塜, 而其名糞字也。其塜上有大松, 所見甚爲未安云, 故臣考見璿源譜略, 則睿宗朝仁城大君名字也。其下註云, 早卒贈大君, 諡孝昭, 墓在高陽。此古塜, 明是仁城大君之塜也。其塜上松木, 所當斯速斫伐, 而此是陵寢至近之地, 遣禮官斫伐, 似宜, 故敢此仰達。|출처=『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9월 27일 갑인(甲寅) 27/29 기사}}
 
 
  
 
====『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9월 28일 을미(乙未) 17/17 기사====
 
====『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9월 28일 을미(乙未) 17/17 기사====

2019년 9월 18일 (수) 01:4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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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대군 묘(仁城大君 墓)
사진출처
식별자 T002
분류 분묘
한글명 인성대군 묘
한자명 仁城大君 墓
영문명 Tomb of prince Inseong
피장자 명칭 인성대군(仁城大君)
피장자 이칭 이분(李糞)
피장자 부 예종(睿宗)
피장자 모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
피장자 생년월일 1461.11.30
피장자 몰년월일 1463.10.24
초장 연월일 1463.11.06
초장지 기록1 정인사(正因寺)에 있는 의경 세자(懿敬世子)의 묘(墓) 영역(塋域) 안 세조실록
초장지 기록2 고양현(高陽縣)의 의경 세자(懿敬世子)의 무덤 동쪽 가까운 땅 세조실록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장 연월일 1936.05.19
이장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지문 仁城大君之墓
지문 찬자 이왕직 예식과(李王職 禮式課)
지문 소장처 조선왕릉 서부지구관리소



목차

정의

조선의 제8대 왕인 예종(睿宗)과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장자인 인성대군 묘의 종합 정보 페이지.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27권, 세조 8년(1462) 2월 25일 경인(庚寅)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다음해에 임신하여 11월 정유에 갑자기 병에 걸리니, 양궁(兩宮)께서 진려(軫慮)하여 친히 납시어 병을 보살폈고, 의약(醫藥)과 기도(祈禱)를 극진히 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드디어 병이 위중하여 낫지 아니하다가 30일이 지난 병인에 원손(元孫)을 낳으시니, 양궁께서 크게 기뻐하여 경내(境內)의 죄인을 사유(赦宥)하고 백관(百官)의 자급(資級)을 내려 주는 등, 온 나라가 기뻐 날뛰었다.다음해에 임신하여 11월 정유에 갑자기 병에 걸리니, 양궁(兩宮)께서 진려(軫慮)하여 친히 납시어 병을 보살폈고, 의약(醫藥)과 기도(祈禱)를 극진히 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드디어 병이 위중하여 낫지 아니하다가 30일이 지난 병인에 원손(元孫)을 낳으시니, 양궁께서 크게 기뻐하여 경내(境內)의 죄인을 사유(赦宥)하고 백관(百官)의 자급(資級)을 내려 주는 등, 온 나라가 기뻐 날뛰었다.

翌年有身, 十一月丁酉忽遘疾, 兩宮軫慮, 親臨視疾, 醫藥祈禱無所不用其極。 遂彌留不痊, 越三十日丙寅, 誕元孫兩宮喜深, 宥境內, 賜百官資, 擧國懽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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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27권, 세조 8년(1462) 2월 25일 경인(庚寅) 3번째 기사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0월 23일 무신(戊申)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원손(元孫)이 풍질(風疾)을 앓으니, 명하여 호조 참판(戶曹參判) 임원준(任元濬)·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전순의(全循義)를 불러서 약(藥)을 쓸 것을 의논하게 하였다.

元孫得風疾, 命召戶曹參判任元濬、同知中樞院事全循義等議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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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0월 23일 무신(戊申) 1번째 기사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0월 24일 기유(己酉)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원손(元孫)이 졸(卒)하였다. 그 휘(諱)는 분(糞)이었고, 나이가 3세였는데, 윤사윤(尹士昀)의 집에서 염하였다.

元孫卒。 諱冀, 年三歲, 殯于尹士昀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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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0월 24일 기유(己酉) 1번째 기사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0월 24일 기유(己酉)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禮曹)에서 정조(停朝)·염빈(斂殯)·예장(禮葬)·주상(主喪) 등의 일을 의논하여서 아뢰니, 신숙주(申叔舟)·구치관(具致寬) 등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아뢰기를, "원손(元孫)은 나이가 매우 어리고 또 작질(爵秩)도 없으니, 정조(停朝)하는 것은 마땅치 않으며, 중국에서도 이러한 예는 없습니다. 빈장(殯葬)은 예조(禮曹)의 당상관(堂上官) 1원(員)이 낭관(郞官)을 거느리고 민효열(閔孝悅) 등과 의논하여 달을 넘겨 장사할 준비를 하며, 또 상장(喪葬)의 의물(儀物)의 수는, 청컨대 세종조(世宗祖)의 원손(元孫)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한 등급을 조금 더하소서." 하였다.

禮曹議停朝、斂殯、禮葬、主喪等事以啓, 命申叔舟、具致寬等議。 啓曰: "元孫年甚幼, 且無爵秩, 不宜停朝, 中朝亦無此例。 殯葬則禮曹堂上一員, 率郞官與閔孝悅等議辦, 逾月而葬, 且喪葬儀物之數, 請依世宗朝元孫故事, 而稍加一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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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0월 24일 기유(己酉) 3번째 기사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0월 25일 경술(庚戌)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전지(傳旨)하기를, "어제 원손(元孫)을 위하여 개경사(開慶寺) 부근의 땅을 상지(相地)하도록 명하였으나, 지금 다시 정인사(正因寺)에 있는 의경 세자(懿敬世子)의 묘(墓) 영역(塋域) 안에다 땅을 고르고 싶다." 하였다.

傳曰: "昨爲元孫, 命卜葬於開慶寺傍近之地, 今復欲於正因寺 懿敬世子墓兆域內擇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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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0월 25일 경술(庚戌) 3번째 기사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0월 29일 갑인(甲寅)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영천 부원군(鈴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우의정(右議政) 구치관(具致寬)·행 상호군(行上護軍) 이순지(李純之)·호조 참판(戶曹參判) 임원준(任元濬) 등에게 명하여 상지관(相地官)을 거느리고 정인사(正因寺)에 가서 원손(元孫)의 장지(葬地)를 상지(相地)하게 하였다.

命永順君 傅、鈴川府院君 尹師路、河東府院君 鄭麟趾、領議政申叔舟、右議政具致寬、行上護軍李純之、戶曹參判任元濬等, 率相地官, 往正因寺, 相元孫葬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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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0월 29일 갑인(甲寅) 1번째 기사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1월 5일 기미(己未)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시호(諡號)를 줄 것을 의논하니, 구치관(具致寬) 등이 말하기를, "시호법(諡號法)에 자혜(慈惠)롭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고 하니, 청컨대 시호를 효소(孝昭)라고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봉군(封君)을 추증(追贈)할 것을 의논하니, 구치관 등이 말하기를, "품계(品階)가 없이 또 봉군(封君)한다면 왕자(王子)와 같을 것이요, 종 1품으로 봉군(封君)한다면 대군(大君)의 아들과 같을 것이니, 그 중간을 택하여 정 1품으로 봉군(封君)하는 것이 편(便)하겠습니다." 하므로, 전지(傳旨)하기를, "좋다." 하고, 낭관(郞官)과 주서(注書)를 나누어 보내어서, 정인지(鄭麟趾)·정창손(鄭昌孫)·신숙주(申叔舟)·권남(權擥)에게 가서 의논하게 하니, 정인지·권남의 의견은 구치관 등과 같았으나, 정창손은 말하기를, "만약 원손(元孫)을 봉(封)한 예가 있다면 마땅히 원손(元孫)을 추봉(追封)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고, 신숙주는 말하기를, "마땅히 왕자(王子) 제군(諸君)의 예에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신숙주의 의견에 따라서 인성군(仁城君)으로 추봉(追封)하였다.

命議政府議元孫立後。 政府啓: "殤固未成人, 今元孫又不成殤, 晋立悼惠之子, 特一時事爾, 不宜立後。

" 傳曰: "殤之立後, 古人之議, 或有異同, 不必迂闊泥古。 且近日平原、潭陽、貞昭皆以殤立後, 以其有英靈, 可歆其祭也。 且不燒葬, 備禮葬之, 何計其老小哉?"

夜, 召右議政具致寬、禮曹判書朴元亨、參判金吉通等議之, 致寬等議曰: "伯叔兄弟不得爲後, 古今定論。 今見在宗室於元孫無姪若孫, 姑從權制立弟爲後, 於義似不大悖。 永順君 溥第二子誠善生二歲, 於元孫爲弟, 立以爲後何如?"

傳曰: "姑停立後, 廣考以啓。" 議贈諡, 致寬等曰: "諡法慈惠愛親 ‘孝’, 容儀恭美 ‘昭’, 請諡孝昭。" 從之。

又議追封之例, 致寬等曰: "無階封君, 則同於王子, 從一品封君則同於大君之子, 酌其中正, 一品封君爲便。"

傳曰: "可。"

分遣郞官注書, 往議於鄭麟趾、鄭昌孫、申叔舟、權擥。 麟趾、擥議與致寬等同, 昌孫曰: "若有封元孫之例, 宜追封元孫。"

叔舟曰: "宜從王子諸君之例。" 上從叔舟, 議追封爲仁城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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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1월 5일 기미(己未) 1번째 기사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1월 6일 경신(庚申)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원손(元孫)을 고양현(高陽縣)의 의경 세자(懿敬世子)의 무덤 동쪽 가까운 땅에 장사지냈다.

葬元孫于高陽縣 懿敬墓東近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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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31권, 세조 9년(1463) 11월 6일 경신(庚申) 1번째 기사


『세조실록』36권, 세조 11년(1465) 7월 24일 기사(己巳)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예기(禮記)》 증자문편(曾子問篇)의 ‘모든 상(殤)과 무후자(無後者)는 종자(宗子)의 집에서 제사지낸다.’고 하고, 주(註)에 말하기를, ‘무복(無服)의 상(殤)은 제사지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인성군(仁城君)은 본시 복(服)이 없는 상(殤)이니, 청컨대 고제(古制)를 따라 입묘(立廟)312) ·입후(立後) 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사당(祠堂)에 부제(祔祭)하게 하였다.

禮曹啓曰: "《禮記》曾子問, ‘凡殤與無後者, 祭於宗子之家。’ 註曰, ‘無服之殤, 不祭。’ 仁城君本無服之殤, 請依古制, 勿立廟立後。" 命祔平原大君祠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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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36권, 세조 11년(1465) 7월 24일 기사(己巳) 3번째 기사


『세조실록』37권, 세조 11년(1465) 11월 20일 갑자(甲子)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인성군(仁城君)의 신주(神主)를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사당(祠堂)에 부묘(祔廟)하고, 무릇 제사에 쓰이는 것은, 청컨대 평원 대군의 예에 의하여 제사(諸司)로 하여금 공진(供進)하게 하소서." 하니, 전지하기를, "입후(立後)하기 전에는 사당과 묘제(墓祭)를 아울러 제사(諸司)로 하여금 공설(供設)하게 하라." 하였다.

禮曹啓: "仁城君神主, 祔平原大君祠堂, 凡祭所需, 請依平原大君例, 令諸司供進。" 傳曰: "未立後間, 祠堂及墓祭, 竝令諸司供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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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37권, 세조 11년(1465) 11월 20일 갑자(甲子) 1번째 기사


『예종실록』7권, 예종 1년(1441) 9월 28일 무신(戊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옛 제도를 상고하건대, 《의례상복(儀禮喪服)》에는 전(傳)에 이르기를, ‘누구를 취하여 후사(後嗣)로 삼으면 되는가? 동종(同宗)이면 된다. 누구를 취하여 다른 사람의 후사로 삼으면 되는가? 지자(支子)이면 된다.’ 하였고, 그 소(疏)에 이르기를, ‘적자(嫡子)는 한 집에서 스스로 소종(小宗)이 되므로 남의 후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지자를 취하는 것이니, 지자는 차자(次子) 이하의 아들들을 뜻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두씨통전(杜氏通典)》에는, ‘진(晉)나라의 하기(何琦)가 의논하기를, 「경사(卿士)의 집에서 별종(別宗)에 후사가 없으면, 손자 또는 증손으로 후사를 삼는다.」 하고, 하순(賀循)이 이르기를, 「형제는 서로 후사가 되지 않는 것이니, 대를 이어서 세후(世後)로 삼을 수 없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제 종실(宗室) 안에는 인성군(仁城君)의 후사가 될 만한 자가 없으니, 청컨대 월산군(月山君) 이정(李婷)·자을산군(者乙山君) 【금상의 휘(諱).】 에게 아들이 있기를 기다려서 그 지자로 후사를 세우고, 아직은 인성군의 신주(神主)를 장순빈(章順嬪)의 혼궁(魂宮)에 옮겨서 부향(祔享)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 "謹稽古制, 《儀禮喪服》傳曰: ‘如何而可爲之後? 同宗可也。 如何而可爲之人後? 支子可也。’ 疏曰: ‘嫡子當家, 自爲小宗, 不可後他。 故取支子, 則第以下庶子也。’ 《杜氏通典》, 晋 何琦議: ‘以卿士之家, 別宗無後, 以孫若曾孫後之。’ 賀循曰: ‘兄弟不相爲後, 不得以承代, 以爲世後。’ 今宗室內, 無可爲仁城君後者, 請待月山君 婷、者乙山君 【上諱】 有後, 以支子立後, 姑移仁城君神主於章順嬪魂宮, 祔享。"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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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종실록』7권, 예종 1년(1441) 9월 28일 무신(戊申) 2번째 기사


『성종실록』3권, 성종 1년(1470) 2월 2일 신해(辛亥) 6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전에는 인성군(仁城君) 신주(神主)를 장순빈(章順嬪)의 혼궁(魂宮)에 부향(祔享)하였었는데, 지금은 장순빈을 왕후(王后)로 추숭(追崇)하였으니, 한곳에 부향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별실(別室)에 옮기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 "前此仁城君神主祔享于章順嬪魂宮, 今章順嬪追崇王后, 不可一處祔享。 請移別室。"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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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종실록』3권, 성종 1년(1470) 2월 2일 신해(辛亥) 6번째 기사


『성종실록』15권, 성종 3년(1427) 2월 23일 경인(庚寅)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종부시(宗簿寺)에서 인성군(仁城君)에게 대군(大君)을 추증(追贈)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宗簿寺請仁城君追贈大君,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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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종실록』15권, 성종 3년(1427) 2월 23일 경인(庚寅) 4번째 기사



『성종실록』35권, 성종 4년(1428) 10월 15일 계유(癸酉)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영의정 신숙주(申叔舟)가 계달하기를, "옛적에 삼상(三殤)에는 사당[廟]을 세운다는 예문(禮文)이 없는데, 인성 대군(仁成大君)이 일찍 죽자, 세조(世祖)께서 한때의 사랑하는 정으로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사당에 부식(祔食)하였다가, 그 뒤에 장순 왕후(章順王后)의 사당에 옮겨 부식하였는데, 이제 장순 왕후를 종묘(宗廟)에 합부(合祔)하므로 인성 대군(仁成大君)은 제사할 곳이 없습니다. 이제 새로 사당을 지어 제사하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니, 청컨대 신주(神主)를 묘소(墓所)에 묻고 속절(俗節) 때에만 제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領議政申叔舟啓曰: "古者三殤無立廟之文, 仁成大君早夭, 世祖特以一時情愛, 祔食於平原大君祠堂, 其後移祔章順王后廟, 今王后祔宗廟, 大君無祭享之所。 今作新廟祭之, 非舊制也, 請神主埋于墓所, 只於俗節致祭。"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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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종실록』35권, 성종 4년(1428) 10월 15일 계유(癸酉) 2번째 기사


『성종실록』44권, 성종 5년(1429) 윤6월 12일 을미(乙未)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禮曹)에 전지하기를 "3상(三殤)의 후사를 세우는 것은 예전에 그 예도(禮度)가 없는데, 인성 대군(仁城大君)은 나이 겨우 3세에 죽었으니, 후사를 세워 제사를 받드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 신주(神主)를 묘 곁에 사르고 절일(節日)을 당하거든 그 묘에 제사지내게 하라." 하였다.

傳于禮曹曰: "三殤立後, 古無其禮, 仁城大君年纔三歲而卒, 不宜立後奉祀。 其焚神主于墓側, 値節日但祭其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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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종실록』44권, 성종 5년(1429) 윤6월 12일 을미(乙未) 3번째 기사



『성종실록』219권, 성종 19년(1488) 8월 11일 임인(壬寅)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인성 대군(仁城大君)의 제사에 관한 일은 선조(先祖)로부터 행하였으니, 지금 폐(廢)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실(宗室)로 향사(香使)를 삼는 것은 의리로 보아 미안한데 어찌하면 옳겠는가? 그 일기(日記)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선왕조(先王朝)에 있어 인성 대군(仁城大君)의 상장(喪葬)에 관한 모든 일에 다 후한 예(禮)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제향(祭享)을 만세토록 통행할 수는 없습니다. 종실(宗室)로 향사(香使)를 삼는 것이 비록 미안한 것 같사오나, 제사를 폐하지 않는다면 향사는 종실로 임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영돈녕(領敦寧) 이상 및 예조(禮曹)에 의논하라." 하였다.

傳于承政院曰: "仁城大君祀事, 行自先朝, 今不可廢也。 然以宗室爲香使, 於義未安, 何如而可? 其考日記以啓。" 承政院啓曰: "在先王朝, 仁城大君喪葬諸事, 皆從厚禮。 然其祭享, 不可萬世通行也。 以宗室爲香使, 雖若未安, 若不廢祀, 則香使當差宗室。" 傳曰: "議于領敦寧以上及禮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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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종실록』219권, 성종 19년(1488) 8월 11일 임인(壬寅) 1번째 기사



『성종실록』220권, 성종 19년(1488) 9월 27일 정해(丁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이보다 앞서, 인성 대군(仁城大君)을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사당에 부제(祔祭)하고는 그 제사를 폐(廢)하고 다만 종친(宗親)을 그 무덤에 보내어 제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대군은 신하인데 관(官)에서 치제(致祭)하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 옳지 않고, 제사를 없애는 것도 옳지 않다.’ 하여, 예조(禮曹)에 명하여 옛 제도를 상고하게 하였는데, 예조에서 아뢰기를, "옛 제도가 없습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이렇게 하면, 나라의 제사로 하지 않더라도 그 제사를 끊지 않아서 예문(禮文)에 매우 합당할 것이다. 이 뜻으로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先是, 仁城大君祔祭于平原大君之廟, 旣而廢其祀, 只遣宗親祭於其墓。 至是, 上以爲大君人臣也, 而官爲致祭, 於義不可, 使之無祀亦不可, 命禮曹考古制。 禮曹啓曰: "無古制。" 傳曰: "如此則雖不以國祀, 而亦不絶其祀於禮文甚合。 其以此意議于領敦寧以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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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종실록』220권, 성종 19년(1488) 9월 27일 정해(丁亥) 1번째 기사



『성종실록』221권, 성종 19년(1488) 10월 8일 무술(戊戌)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인성 대군(仁城大君)을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가묘(家廟)에 부제(祔祭)하는 일의 가부(可否)를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정부(政府)에 의논하게 하였다. 심회(沈澮)·이극배(李克培)·이철견(李鐵堅) 등이 의논하기를, "인성 대군(仁城大君)은 선왕(先王)께서 이미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사당(祠堂)에 부제(祔祭)할 것을 허락하셨으니, 어찌 감히 다시 고치겠습니까?" 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인성 대군(仁城大君)은 3세의 어린이[孩兒]이니, 무복(無服)의 상(殤)835) 이 됩니다. 선왕(先王)께서 종애(鍾愛)하시어, 특별히 은전(恩典)을 내려 관원(官員)을 보내어 무덤에 제사하게 한 지 이미 10년입니다마는, 이제 의리(義理)로 보아서는 이를 폐(廢)함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무복(無服)의 상(殤)은 제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또 어찌 사당(祠堂)에 부제(祔祭)를 쓰겠습니까? 무릇 예(禮)는 모두 인정(人情)에 바탕을 두니, 예문(禮文)에 없는 것은 모름지기 행할 것 없습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동평왕(東平王)의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세조(世祖)의 명(命)하심이 이와 같으니,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사당에 부제함이 편합니다." 하고,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무복(無服)의 상(殤)은 예(禮)에 있어 마땅히 제사하지 않아야 하나, 그러나 선왕(先王)께서 그 정례(情禮)를 참작(參酌)하시어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사당(祠堂)에 부제케 하셨으니, 그대로 따름이 편합니다." 하고, 이숭원(李崇元)은 의논하기를, "《예기(禮記)》 상복 소기(喪服小記)에 ‘상(殤)과 무후(無後)한 자는 조(祖)를 따라 부식(祔食)한다.’고 한 것은, 유복(有服)의 상(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니, 무복(無服)의 상(殤)은 부제(祔祭)의 예(禮)가 없습니다. 선왕조(先王朝)에 인성 대군(仁城大君)을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사당에서 부제할 것을 명하셨으나, 그러나 이제 부제(祔祭)하지 못하는 것은 예(禮)가 마땅히 부제하지 않아야 하므로 정지(停止)하자는 것이니, 한결같이 예문(禮文)에 따라 제사를 정지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정난종(鄭蘭宗)은 의논하기를, "인성 대군(仁姓大君)은 나이 3세도 되지 않아서 졸(卒)하였으니, 삼상(三殤)의 열(列)에도 있지 못합니다. 예문(禮文)에 비록 조(祖)를 따라서 부식(祔食)한다고 하였으나, 이는 나이가 삼상(三殤)에 있는 자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인성 대군(仁城大君)은 무복(無服)의 상(殤)으로서 마땅히 제사하지 않아야 하니, 충왕(沖王)의 고사(故事)를 원인(援引)하여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사당에 부제함은 정례(情禮)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앞서 예조(禮曹)에서 아뢴 바에 의거(依據)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議仁城大君袝祭平原大君家廟可否于領敦寧以上及政府。 沈澮、李克培、李鐵堅議: "仁城, 先王旣已許袝平原祠堂, 何敢更改?" 洪應議: "仁城三歲孩兒, 是無服之殤, 先王鍾愛, 特垂恩典, 遣官祭墓已十餘年。 今以義起之, 廢之固當。 古云: ‘無服之殤不祭。’ 又何用袝祠堂? 凡禮皆本人情, 禮文所無者, 不須擧行。" 盧思愼議: "有東平王故事, 世祖之命如此, 袝平原祠堂爲便。" 孫舜孝議: "無服之殤, 禮當不祭。 然先王酌其情禮, 袝平原祠堂, 仍從爲便。" 李崇元議: "《禮》曰: ‘殤與無後者, 從祖袝食’ 者, 指有服之殤而言也。 無服之殤, 則無袝祭之禮。 先王朝仁城命袝平原祠堂, 然今不袝祭者, 必以禮不應袝祭而停之也。 一依禮文, 停祀何如?" 鄭蘭宗議: "仁城大君年未三歲而卒, 不得在三殤之列。 禮文雖曰: ‘從祖袝食’, 此指年在三殤者而言也。 仁城無服之殤, 不當祀。 援引沖王故事, 祔平原祠堂, 似乖情禮。 依前禮曹所啓何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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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종실록』221권, 성종 19년(1488) 10월 8일 무술(戊戌) 1번째 기사



『성종실록』221권, 성종 19년(1488) 10월 8일 무술(戊戌)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인성 대군(仁城大君)의 묘소(墓所)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함은 예(禮)에 있어 불편하니, 선왕(先王)의 정제(定制)에 의거하여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가묘(家廟)에 부제(祔祭)하라." 하였다.

傳旨禮曹曰: 仁城大君墓所遣官致祭, 於禮不便, 依先王定制, 袝于平原大君家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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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종실록』221권, 성종 19년(1488) 10월 8일 무술(戊戌) 2번째 기사


『순종실록부록』2권, 순종 4년(1911) 12월 2일 (양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이왕직 사무관(李王職事務官)을 파견하여 총독부(總督府) 농상공부(農商工部) 출장원들이 각릉(各陵) 각원(各園) 각묘(各墓)의 경계를 정하고 조정할 때 입회하게 하였다. 【광릉(光陵), 경릉(敬陵), 창릉(昌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泰陵), 효릉(孝陵), 강릉(康陵), 명릉(明陵), 익릉(翼陵), 홍릉(弘陵), 예릉(睿陵), 순창원(順昌園), 순강원(順康園), 소경원(昭慶園), 소녕원(昭寧園), 수길원(綏吉園), 휘경원(徽慶園), 숙의 나씨묘(淑儀羅氏墓), 안빈 이씨묘(安嬪李氏墓), 숙신 공주묘(淑愼公主墓), 소의 유씨묘(昭儀劉氏墓), 영빈 김씨묘(寧嬪金氏墓), 귀인 김씨묘(貴人金氏墓), 영조 대왕(英祖大王)의 첫째딸 묘(墓), 태왕 전하의 넷째아들 묘, 인성 대군묘(仁城大君墓), 명빈 김씨묘(明嬪金氏墓), 연산군묘(燕山君墓), 경빈 이씨묘(慶嬪李氏墓), 공빈 김씨묘(恭嬪金氏墓), 광해군묘(光海君墓)이다.】

派本職事務官, 立會于總督府農商工部出張員各陵園墓定界調製時。 【光陵、敬陵、昌陵、溫陵、禧陵、泰陵、孝陵、康陵、明陵、翼陵、弘陵、睿陵、順昌園、順康園、昭慶園、昭寧園、綏吉園、徽慶園、淑儀羅氏墓、安嬪李氏墓、淑愼公主墓、昭儀劉氏墓、寧嬪金氏墓、貴人金氏墓、英祖大王第一女墓、今太王第四男墓、仁城大君墓、明嬪金氏墓、燕山君墓、慶嬪李氏墓、恭嬪金氏墓、光海君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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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종실록부록』2권, 순종 4년(1911) 12월 2일 (양력)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9월 27일 갑인(甲寅) 27/29 기사

Quote-left blue.png 又所啓, 京畿監司睦昌明, 西道各陵奉審後來言, 敬陵至近之處, 有一古塜, 見其碑則乃大君之塜, 而其名糞字也。其塜上有大松, 所見甚爲未安云, 故臣考見璿源譜略, 則睿宗朝仁城大君名字也。其下註云, 早卒贈大君, 諡孝昭, 墓在高陽。此古塜, 明是仁城大君之塜也。其塜上松木, 所當斯速斫伐, 而此是陵寢至近之地, 遣禮官斫伐, 似宜, 故敢此仰達。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9월 27일 갑인(甲寅) 27/29 기사


『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9월 28일 을미(乙未) 17/17 기사

Quote-left blue.png 禮曹啓曰, 因左議政睦來善所啓, 敬陵至近之處仁城大君墓, 遣禮官伐木, 改封墓致祭事, 命下矣。改封墓及致祭吉日, 令日官推擇, 則來十月十六日卯時爲吉云。本曹郞廳處, 香祝下去, 當爲致祭之物及執事, 令本道預爲分定, 待其修墓後, 仍爲設祭, 而伐木及改封墓等事, 則亦令本道, 分付地方官擧行之事, 知委,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9월 28일 을미(乙未) 17/17 기사


『승정원일기』 343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10월 15일 임신(壬申) 3/11 기사

Quote-left blue.png 禮曹正郞韓後望, 仁城大君封墓伐木後, 致祭事, 高陽地出去。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43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10월 15일 임신(壬申) 3/11 기사



『승정원일기』 366책 (탈초본 19책) 숙종 22년(1696) 8월 9일 임진(壬辰) 11/17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仁城大君之墓, 年久荒蕪, 心甚衋傷, 其令禮官, 致祭後改莎草事, 分付。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43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 10월 15일 임신(壬申) 3/11 기사



『승정원일기』 366책 (탈초본 19책) 숙종 22년(1696) 8월 10일 계사(癸巳) 19/20 기사

Quote-left blue.png 禮曹啓曰, 今八月初九日陵幸時, 傳曰, 仁城大君墓, 年久荒蕪, 心甚衋傷, 其令禮官, 致祭改莎草事, 分付事, 命下矣。取見本曹文書, 則曾於庚午年間, 大臣因京畿監司所言, 陳達於榻前, 以爲敬陵至近之地, 有一古塜, 見其碑石, 則乃大君之塜, 而其名則字也。考見璿源譜略, 則睿宗朝仁城大君名字, 而其下註云, 早卒, 贈大君, 諡孝昭, 墓在高陽, 此明是仁城大君之塜也。塜上松木, 遣禮官, 斫伐似宜云, 故自上以特進禮官, 伐木改封, 而致祭可也爲敎, 其時卽遣禮官致祭, 仍爲修墓伐木矣。今此下敎, 出於臨視其墓, 特爲隱卒之意, 卽當依庚午例擧行, 今月二十三日發遣本曹郞廳, 受香祝, 致祭祭物及執事, 令本道, 分定待令, 而至於改莎草一款, 纔於庚午年, 旣已改封築, 則其間歲月無多, 至今應爲改莎與否, 使本邑守令往審後, 論移本曹, 更稟擧行, 宜當。以此意, 該道監司處, 竝爲分付, 何如? 傳曰, 允。出禮曹謄錄。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66책 (탈초본 19책) 숙종 22년(1696) 8월 10일 계사(癸巳) 19/20 기사



『승정원일기』 367책 (탈초본 19책) 숙종 22년(1696) 8월 15일 무술(戊戌) 20/23 기사

Quote-left blue.png 禮曹啓曰, 仁城大君墳墓改莎草與否, 使本邑守令往審後, 待其論移, 更稟擧行之意, 曾已覆啓蒙允矣。卽接京畿監司粘關內, 高陽郡守趙泰期牒報, 則同郡守, 親往墓所看審, 則墓上莎草及左右階砌莎草, 少無崩頹破缺處, 獨於墓前一二處莎草, 略有枯損, 而其廣僅如大貼許, 若用一二張莎草, 則可以改補, 陵軍等言內, 莎葉, 雖因旱枯損, 其根則不枯, 若得雨澤, 則必將依舊生葉云云。本郡所報如此, 似不必以此, 至於改莎草, 今姑勿改, 何如? 傳曰, 允。出禮曹謄錄。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67책 (탈초본 19책) 숙종 22년(1696) 8월 15일 무술(戊戌) 20/23 기사



『승정원일기』 679책 (탈초본 37책) 영조 5년(1729) 2월 29일 갑진(甲辰) 27/27 기사

Quote-left blue.png 台佐曰, 臣以看山事, 往昌陵, 傍見有仁城大君之墓, 而墳形陵夷, 石物頹圮矣。考見璿源譜略, 則乃睿宗朝大君, 而名糞, 三歲而夭矣。在昌陵傍, 而有短碣, 故尙可知, 不然, 作一無主古墳矣。上曰, 非昌陵, 乃敬陵傍也。台佐曰, 在敬陵傍, 而昌陵亦不遠矣。招問陵守護軍, 則以爲, 監司看審後, 不入狀啓中, 故如此云矣。問其修改所入, 則曰, 今歲穀貴, 以七八石米, 給守護軍, 則可得百數三十名, 以寒食時改封墳, 而一人一日一斗式出給, 則足以刈土負土改修云矣。上曰, 當初葬於陵寢傍, 似爲後日之慮矣。自戶曹量給米石, 趁寒食時修改事, 分付。台佐曰, 參奉眼同看役, 何如? 上曰, 參奉眼同, 似太着實, 不出擧條, 分付戶曹, 使之眼同看審爲之, 可也。出榻前下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679책 (탈초본 37책) 영조 5년(1729) 2월 29일 갑진(甲辰) 27/27 기사



『승정원일기』 778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4월 20일 을축(乙丑) 33/37 기사

Quote-left blue.png 尹淳曰, 貞陵曲墻後主脈及靑龍案沙汰處形止, 纔已書啓, 而其間不無稟定事, 故請對矣。主脈腦頭沙汰處, 所見極未安, 而役處不至甚鉅。若過今夏水潦, 則漸益浩大, 似當趁卽修補, 而此時農民調用, 殊涉重難。端午時陵軍合番, 腦頭被莎之役, 先爲了當後, 前面崩頹作坎處, 樹柵之役, 次第徐徐爲之, 似爲便好。而曲墻後事體重大, 只令陵官看董, 似未得當。禮曹堂郞, 當爲進去, 而堂郞進去之役, 全用陵軍, 亦涉苟艱, 必有商量下敎而後, 可以擧行矣。上曰, 禮曹堂郞, 不可不進, 而只令陵軍修改, 事體未安矣。尹游曰, 此時動民誠難, 役處不鉅, 則量用募軍, 似爲兩便矣。上曰, 兵判之言是矣。不必盡用募軍, 與合番陵軍, 竝力充役, 可也。出擧條 尹淳曰, 貞陵內案小麓, 有一表石仆地, 而觀其表刻, 則乃惠愼翁主之墓也。立石年月, 旣不刻識, 歸考璿譜, 亦無其號, 不詳其爲何代翁主。而第國初未下嫁公翁主, 皆不載錄。或是其時殤喪翁主, 而墳形已平, 左右沙汰逼近, 所見誠爲矜惻矣。陵所修補時, 立其舊表, 稍成墳形, 加以莎草, 未知如何。上曰, 旣在此陵之內, 則與敬陵內仁城大君墓相類, 疑是未成婚翁主之墓, 陵役時, 仍爲立表封墳, 可也。出擧條。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778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4월 20일 을축(乙丑) 33/37 기사



『승정원일기』 988책 (탈초본 54책) 영조 21년(1745) 7월 2일 임신(壬申) 14/14 기사

Quote-left blue.png 箕鎭曰, 臣待罪畿輔, 各陵奉審時見之。則翼陵·順懷墓之間, 有一古塚, 表石書以仁城大君糞之墓, 此是睿宗朝親王子早夭者。墓在松樹茂密中, 莎草盡爲剝脫, 只餘塚土, 所見慘然, 特命修改, 爲好矣。若魯曰, 臣曾以禮官, 奉審時見之, 歸奏筵中, 而宜有修補之道矣。上曰, 分付該曹, 卽爲修築, 可也。出擧條。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988책 (탈초본 54책) 영조 21년(1745) 7월 2일 임신(壬申) 14/14 기사



『승정원일기』 990책 (탈초본 54책) 영조 21년(1745) 8월 19일 무오(戊午) 12/16 기사

Quote-left blue.png 乾隆十年乙丑八月十九日巳末, 上詣順陵奉審時, 行都承旨金尙魯, 左副承旨鄭俊一, 右副承旨李成中, 同副承旨金光世, 注書李壽鳳, 假注書權崇, 記注官趙世選, 記事官朴徵佐, 順陵參奉柳誠之。上至紅箭門外降輿。通禮前導, 詣版位。上乃四拜訖。通禮前導, 至陵上奉審。上曰, 此莎草, 亦多枯損處。竝已報禮曹耶? 誠之曰, 已報禮曹矣。上曰, 土鼠穴, 亦甚多矣。誠之曰, 此近處土鼠特甚多, 有此患矣。上曰, 參奉誰耶? 成中曰, 故察訪柳逸之子, 卽全昌尉柳廷亮之後孫也。上仍自曲墻循下, 至丁字閣奉審訖。還至紅箭門外, 上乘輿, 仍往孝章墓, 百官步從。上曰, 上黨府院君韓明澮後孫有之耶? 此人兩爲國舅, 卽恭陵·順陵也。今行展謁, 不勝愴感。韓明澮後孫, 令該曹訪問, 相當窠調用, 可也。出榻敎 上曰, 仁城大君, 卽恭陵誕生也。頃以仁城大君墓, 有修治處, 自該曹草記矣。今又至恭陵, 事適相會, 尤覺愴然。待其修治, 卽爲遣禮官致祭, 可也。出榻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990책 (탈초본 54책) 영조 21년(1745) 8월 19일 무오(戊午) 12/16 기사



『승정원일기』 990책 (탈초본 54책) 영조 21년(1745) 8월 19일 무오(戊午) 15/16 기사

Quote-left blue.png 上曰, 仁城大君墓致祭事, 旣已下敎, 而此近處, 或有王子·大君·公翁主墓與否問達, 可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990책 (탈초본 54책) 영조 21년(1745) 8월 19일 무오(戊午) 15/16 기사



『승정원일기』 990책 (탈초본 54책) 영조 21년(1745) 8월 26일 을축(乙丑) 14/17 기사

Quote-left blue.png 金尙魯, 以禮曹言啓曰, 今八月十九日, 大駕詣孝章墓時, 仁城大君墓, 待其修治, 卽爲遣禮官致祭事, 及故相臣李健命墓, 待回鑾, 遣禮官致祭事, 及今八月卄日長陵祭罷後, 楊州地贈領議政金漢佑夫人墓, 寧城君墓, 竝遣禮官致祭事, 下敎矣。致祭吉日, 令日官推擇, 則仁城大君墓致祭來九月十七日, 故相臣李健命墓致祭同月十一日, 贈領議政金漢佑夫人墓致祭同月初六日, 寧城君墓致祭同月初四日設行, 而祭文, 令藝文館撰進, 祭物及執事官, 令本道差定進排事, 分付,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990책 (탈초본 54책) 영조 21년(1745) 8월 26일 을축(乙丑) 14/17 기사



『승정원일기』 1146책 (탈초본 63책) 영조 33년(1757) 7월 12일 임인(壬寅) 31/33 기사

Quote-left blue.png 尙魯曰, 仁城君墓, 在於近處而崩頹矣。上曰, 此君名字, 米下異字也。上曰, 今聞摠護使所奏, 仁城大君墓崩頹云, 令本官, 秋成後卽爲修築, 仍伐雜木, 明嬪墓在於陵內, 故昔年下問, 何朝後宮? 而其無知者事, 仰聞慈敎矣, 一體修築事, 分付畿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146책 (탈초본 63책) 영조 33년(1757) 7월 12일 임인(壬寅) 31/33 기사



『승정원일기』 1796책 (탈초본 95책) 정조 22년(1798) 9월 2일 임술(壬戌) 68/69 기사

Quote-left blue.png 戊午九月初二日午時, 上御重熙堂。左承旨入侍時, 左承旨李肇源, 假注書洪奭周, 記注官金景煥, 記事官金履永, 以次進伏訖。上曰, 文衡牌去來催促, 都堂會坐與否知入。賤臣承命出問, 回奏曰, 文衡又爲違牌, 都堂姑未齊會云矣。命書榻敎曰, 知敦寧李秉鼎批下, 牌招察任。又命書傳敎曰, 昨日問安班, 在家不參之諸玉堂, 先遞差後禁推, 時在監印所者許遞。又命書榻敎曰, 月山大君孝文公風月亭先生墓致祭, 初八日爲之, 承旨則左副承旨進去, 仁城大君孝昭公墓致祭, 亦於初八日爲之, 承旨則左副承旨兼進, 齊安大君靈孝公墓致祭, 初六日爲之, 承旨則左承旨兼進。又命書榻敎曰, 皇明光祿少卿本朝靖難佐翼功臣議政府左議政西原府院君襄節公韓確, 南陽府夫人洪氏墓致祭, 初六日爲之, 承旨則左承旨進去, 靖難佐翼翊戴佐理功臣議政府領議政四道都體察使上黨府院君忠成公韓明澮, 黃驪府夫人閔氏墓致祭, 十五日爲之, 承旨則右承旨進去, 翊戴佐理功臣議政府右議政淸川府院君襄惠公韓伯倫, 西河府夫人任氏墓致祭, 初四日爲之, 承旨則右副承旨進去。又命書榻敎曰, 唐陽尉昭夷公洪常墓致祭, 初六日爲之, 該牧使曾經承宣, 使之受香, 豐川尉任光載·顯肅公注之墓致祭, 初十日遣內侍爲之。又命書傳敎曰, 故領敦寧家宣諡, 旣令葬前爲之, 撰狀催促, 期於旬前議諡, 大臣逝後, 心焉不忘, 卽欲宣諡, 今聞主家尙未受狀云, 何其稽甚? 其爲駭然者重臣也, 隱卒之敎, 他人猶且爲之榮感, 則其家官尊祿厚, 卽重臣, 而撰狀不是難事, 如彼玩愒, 致有更煩飭敎, 豈成說乎? 此意使主家及重臣知之。上曰, 順川府使入來與否知入。賤臣承命出問, 回奏曰, 姑未入來云矣。上曰, 連爲催促辭朝也。賤臣承命出, 回奏曰, 今纔入來矣。上曰, 大提學更爲出牌, 使之無敢違召, 招致政府錄事, 以卽速完圈, 以除酬應之意, 傳于左相也。仍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796책 (탈초본 95책) 정조 22년(1798) 9월 2일 임술(壬戌) 68/69 기사



『승정원일기』 1796책 (탈초본 95책) 정조 22년(1798) 9월 3일 계해(癸亥) 37/37 기사

Quote-left blue.png 上曰, 京畿監司入侍。奭周承命出傳, 與京畿監司李在學偕入進伏。敎在學曰, 西道巡審, 今日發程耶? 在學曰, 明日發程, 先往金浦矣。上曰, 淸川府院君致祭, 當遣承旨, 而卿旣發巡, 則仍爲致祭, 可也。旣有所重, 則雖道伯爲祭官, 有何不可, 但無所妨於行部耶? 在學曰, 別無相妨者矣, 仁城大君墓所, 遍尋道內, 無指的處, 至今未得矣。上曰, 俄已聞之矣。大抵大君·王子, 公·翁主無後之墳山, 考諸璿源譜略, 載之邑志, 而今番巡路, 亦爲尋問以來, 可也。本道所經處年事, 何如? 在學曰, 陽城等邑外, 間有稍勝處, 至今退霜, 大是幸矣。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796책 (탈초본 95책) 정조 22년(1798) 9월 3일 계해(癸亥) 37/37 기사



『승정원일기』 1796책 (탈초본 95책) 정조 22년(1798) 9월 4일 갑자(甲子) 30/31 기사

Quote-left blue.png 上曰, 高陽郡守進前。行直進奏職姓名。上曰, 下往善爲之, 災實各別執定, 可也。明淑公主, 卽敬陵朝公主, 而成廟朝, 仰體敬陵遺意, 葬於本陵火巢內, 今番仁城大君致祭時, 因以搜覓, 而公主墓塋域頹圮, 碑石中折云, 爾之赴任後, 卽往看審, 來報於政院, 可也。命先退。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796책 (탈초본 95책) 정조 22년(1798) 9월 4일 갑자(甲子) 30/31 기사



『승정원일기』 1796책 (탈초본 95책) 정조 22년(1798) 9월 7일 기묘(己卯) 61/63 기사

Quote-left blue.png 戊午九月初七日辰時, 上御重熙堂。左承旨入侍時, 行左承旨李益運, 假注書李允謙, 記注官金景煥·承膺祚, 以次進伏訖。上曰, 金領敦寧議諡, 幾盡爲之否? 問于弘文館以入。賤臣承命出問, 回奏曰, 諡狀自禮曹越送於太常, 而太常姑未越送於本館, 今若來到, 則當卽擧行云矣。上曰, 速爲催促。命書榻敎曰, 政官牌招開政。又命書榻敎曰, 兩司牌招, 故領敦寧諡號署經。上曰, 仁城大君致祭, 何承旨進去乎? 知入。景煥承命出問, 回奏曰, 同副承旨進去云矣。命書傳敎曰, 仁城大君墓致祭, 使之設行於昌陵親祭之後, 而墓道未尋, 今日始因地方官來奏, 知在順懷墓局內, 先朝戊午, 持命修治, 其後抛置, 以致該道之不卽考奏, 若不別般定式, 又當泯沒, 寒食一祭, 依壽進宮所掌他墳山例, 遣內侍設祭, 祭品該宮措備, 墓道, 地方官每年一番掃除事, 令該曹分付, 明淑公主墳山, 在於敬陵局內, 卽陪葬之意, 而墓道頹夷, 碑碣剗缺, 聞致祭承宣言, 所見甚於所聞云, 雖令封築, 更爲豎碑, 其主祀子孫在嶺外, 其能及期, 未可知, 亦令該道卽爲給糧料鋪馬起送, 使之眼同看檢事, 分付。益運曰, 高麗忠臣故平海知郡事金濟宣諡日, 設祭海上事, 命下矣。金濟旣乘桴浮海, 不知所終, 故朝家德意, 欲設綫牓, 宣諡於蹈海之地, 以寓曠感之思, 而聞其書院在安東地, 兄弟竝享, 扁以雙節祠云, 臣意則宣諡於其祠, 賜祭於平海海上恐好, 故敢此仰達矣。上曰, 依爲之。出擧條 仍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796책 (탈초본 95책) 정조 22년(1798) 9월 7일 기묘(己卯) 61/63 기사



『승정원일기』 1797책 (탈초본 95책) 정조 22년(1798) 9월 17일 정축(丁丑) 18/19 기사

Quote-left blue.png 肇源曰, 臣於向日, 承命致祭于齊安大君墓, 則商山府夫人金氏袝葬, 而後夫人朴氏墓所, 不知所在, 且聞祠版亦不在於壽進宮, 初不得與於節享之時云, 實爲闕典, 向者仁城大君墓, 亦因畿營之廣探而尋得, 今此朴氏墓所, 亦令畿營一禮搜訪似好, 故敢此, 仰達矣。上曰, 依爲之。出擧條。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797책 (탈초본 95책) 정조 22년(1798) 9월 17일 정축(丁丑) 18/19 기사



『승정원일기』 1797책 (탈초본 95책) 정조 22년(1798) 9월 30일 경인(庚寅) 28/37 기사

Quote-left blue.png 李翼晉, 以禮曹言啓曰, 因內需司所報, 仁城大君墓寒食祭祭物器數, 磨鍊別單以入之意, 敢啓。傳曰, 知道。壽進宮所在宮內祀版及山所祭品祭儀祭日, 一竝詳問別單, 而禮曹無不檢察, 獨不知該宮之擧行, 殊非宮府一體之義, 卿其取考後, 可以釐正者, 具意見草記, 可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797책 (탈초본 95책) 정조 22년(1798) 9월 30일 경인(庚寅) 28/37 기사



『승정원일기』 2774책 (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3월 8일 임진(壬辰) 4/26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李敎復曰, 誠寧大君內外墓, 月山大君內外墓, 仁城大君墓, 鳳安君內外墓, 利城君內外墓, 慶安君內外墓, 遣宗臣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774책 (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3월 8일 임진(壬辰) 4/26 기사



『승정원일기』 2785책 (탈초본 130책) 고종 10년(1873) 2월 22일 신미(辛未) 4/17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列聖朝大君·王子·嫡王孫中無後者, 今旣繼後矣。 德安大君祠版, 安平大君內外祠版, 仁城大君祠版, 平原大君·齊安大君內外祠版, 永昌大君·龍城大君祠版, 錦平君·永豐君·興安君內外祠版, 綾豐君祠版, 義昌君·樂善君內外祠版, 慶完君祠版, 福善君內外祠版, 遣宗臣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785책 (탈초본 130책) 고종 10년(1873) 2월 22일 신미(辛未) 4/17 기사



일성록

『일성록』 정조 22년(1798) 9월 7일 정묘(丁卯)

Quote-left blue.png 인성대군(仁城大君)의 묘는 한식(寒食)에 올리는 제사의 경우 수진궁(壽進宮)에서 관장하는 다른 분산(墳山)의 예대로 내시를 보내 제사를 설행하게 하고 지방관이 1년에 한 번 소제(掃除)하며, 명숙공주(明淑公主)의 묘는 비석을 세울 때 영남에 있는 자손에게 양료(糧料)와 역마를 지급하여 올라오게 해서 함께 간심(看審)하고 점검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 전교하기를, “인성대군 묘소의 치제를 창릉(昌陵)에 친히 제사 지낸 뒤에 설행하게 하였는데 묘도(墓道)를 찾지 못하다가 오늘에서야 지방관이 와서 아룀에 따라 순회묘(順懷墓) 국내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조(先朝) 무오년(1738, 영조14)에 특별히 정비하라고 명하고 그 뒤 방치한 결과 해당 도가 즉시 살펴 아뢰지 못하게 되었다. 만약 별도로 정식을 만들지 않으면 또 없어지게 될 것이니, 한식에 올리는 제사는 수진궁이 관장하는 다른 분산의 예대로 내시를 보내 제사를 설행하게 하고 제품(祭品)은 해당 궁에서 마련하며 묘도는 지방관이 1년에 한 번 소제하라고 해당 조에 분부하라. 명숙공수의 분산이 경릉(敬陵) 국내에 있는 것은 배장(陪葬)의 뜻인데 묘도는 무너지고 비갈(碑碣)은 파손돼서 치제를 거행한 승지의 말을 들으니 말로만 들은 것보다 상태가 심각하다고 하였다. 비록 흙을 쌓아 올리고 다시 비석을 세우게 하였지만, 영남에 있는 봉사손(奉祀孫)이 기한에 맞춰 올라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에 대해서도 해당 도로 하여금 즉시 양료와 역마를 지급하여 올라오게 해서 함께 간심하고 점검하게 하라고 공문을 보내 알리라.”하였다.

命仁城大君墓寒食一祭依壽進宮所掌他墳山例遣內侍設祭地方官每年一番掃除明淑公主墓竪碑時其子孫在嶺外者給糧鋪馬起送使之眼同看檢 敎曰仁城大君墓致祭使之設行於昌陵親祭之後而墓道未尋今日始因地方官來奏知在順懷墓局內先朝戊午特命修治其後拋置以致該道之不卽考奏若不別般定式又當泯沒寒食一祭依壽進宮所掌他墳山例遣內侍設祭祭品該宮措備墓道地方官每年一番掃除事令該曺分付明淑公主墳山在於敬陵局內卽陪葬之意而墓道頹夷碑碣剗缺聞致祭承宣言所見甚於所聞云雖令封築更爲竪碑其主祀子孫在嶺外其能及期上來未可知亦令該道卽爲給糧料鋪馬起送使之眼同看檢事行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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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22년(1798) 9월 7일 정묘(丁卯)



『일성록』 정조 22년(1798) 9월 17일 정축(丁丑)

Quote-left blue.png 제안대군(齊安大君)의 후부인(後夫人) 박씨의 묘소를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널리 탐문하여 찾아보게 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이조원(李肇源)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명을 받들고 제안대군의 묘에 치제(致祭)하였더니 상산부부인(商山府夫人) 김씨는 부장(祔葬)되어 있었으나 후부인 박씨의 묘소는 소재를 알 수 없었습니다. 또 듣건대 사판(祠版)도 수진궁(壽進宮)에 있지 않아서 절향(節享) 때 애당초 함께 제사를 올리지 못하였다고 하니 실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지난번에 인성대군(仁城大君)의 묘도 경기 감영이 널리 탐문해서 찾았으니 지금 박씨의 묘소도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똑같이 찾아보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하기에 우러러 아룁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命齊安大君後夫人朴氏墓所令畿營廣探搜訪 承旨 李肇源啓言臣於向日承命致祭于齊安大君墓則商山府夫人金氏祔葬而後夫人朴氏墓所不知所在且聞祠版亦不在於壽進宮初不得與於節享之時云實爲闕典向者仁城大君墓亦因畿營之廣探而尋得今此朴氏墓所亦令畿營 一體搜訪似好故仰達矣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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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22년(1798) 9월 17일 정축(丁丑)



『일성록』 정조 22년(1798) 9월 30일 경인(庚寅)

Quote-left blue.png 인성대군(仁城大君) 묘제의 제품(祭品), 제의(祭儀), 제사일을 자세하게 물어 별단으로 들이고, 이어 점검하여 살펴서 바로잡은 다음 의견을 갖추어 초기(草記)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내수사(內需司)의 보고로 인하여 인성대군 묘에 대해 한식제(寒食祭) 때의 제물(祭物)과 기수(器數)를 마련하여 별단으로 들입니다.” 하여, 전교하기를, “수진궁(壽進宮)에 있는 궁내의 사판(祀版) 및 산소의 제품, 제의, 제사일도 모두 자세하게 묻고 별단으로 들이라. 예조에서 점검하여 살피지 않는 것이 없는데 해당 궁의 거행만 모르고 있으니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경이 별단을 가져다 살펴본 뒤 바로잡을 만한 것은 의견을 갖추어 초기하라.” 하였다.

命仁城大君墓祭祭品祭儀祭日詳問別單仍令檢察釐正具意見草記 禮曹啓言因內需司所報仁城大君墓寒食祭祭物器數磨鍊別單以入敎以壽進宮所在宮內祀版及山所祭品祭儀祭日一竝詳問別單而禮曹無不檢祭則獨不知該宮之擧行殊非宮府一體之義卿其取考後可以釐正者具意見草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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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22년(1798) 9월 30일 경인(庚寅)



홍재전서

『홍재전서』권24, 제문(祭文) 6

Quote-left blue.png 인성대군 이분(李糞) 묘소치제문(仁城大君 糞 墓致祭文)

우리 예종대왕께서 / 惟我睿廟 이 큰 경사를 길렀으니 / 毓玆大慶 아, 기린이여 / 于嗟麟兮 그 발굽이며 그 이마였네 / 之趾之定 아름다운 효소가 있어 / 有美孝昭 성군의 사랑을 몹시 받았으니 / 偏鍾聖愛 일어나서 겨우 상을 짚을 무렵부터 / 起才扶床 패옥(佩玉)을 차고 금대를 둘렀네 / 玉佩金帶 아침에 능침(陵寢)에 제사를 드리매 / 鼂禋仙寢 사무치게 남은 생각이 있으니 / 耿有餘懷 무엇으로 이를 쏟을까 / 曷云瀉之 새로 빚은 예주(醴酒)가 잔에 가득하네 / 新醴盈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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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재전서』권24, 제문(祭文)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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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

1.고문서

  • 인성대군 효소공 묘 치유문(仁城大君孝昭公墓致侑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인성대군묘소북역조사(仁城大君墓所北域調査)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능원묘천봉안(陵園墓遷奉案)』, 1929 ~ 194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