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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년(태종 1) 하륜(河崙)을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삼아 가봉하려 하였으나 농번기이고 가뭄이 심하다는 이유로 문하부 낭사에서 반대를 했다. 그러나 하륜을 증고사로 삼고 지관(地官) 윤신달(尹莘達)을 붙여 태실지를 물색하게 하였고, 이후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로 안태사(安胎使)를 삼아 함주(咸州)에 있던 태함을 받들고 와 경산부(京山府) 조곡산(祖谷山)에 태(胎)를 봉안하였다. 이 일로 경산부는 성주목(星州牧)이 되었다. | 1401년(태종 1) 하륜(河崙)을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삼아 가봉하려 하였으나 농번기이고 가뭄이 심하다는 이유로 문하부 낭사에서 반대를 했다. 그러나 하륜을 증고사로 삼고 지관(地官) 윤신달(尹莘達)을 붙여 태실지를 물색하게 하였고, 이후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로 안태사(安胎使)를 삼아 함주(咸州)에 있던 태함을 받들고 와 경산부(京山府) 조곡산(祖谷山)에 태(胎)를 봉안하였다. 이 일로 경산부는 성주목(星州牧)이 되었다. | ||
− | 현재 태실지에는 분묘가 조성되어있으며, | + | 현재 태실지에는 분묘가 조성되어있으며, 태실을 구성했던 석물은 성주군청이 2012년 대동문화재연구원에 「성주 태종·단종 태실 학술(지표)조사」를 의뢰하여 태석함의 함개(函蓋) 일부와 팔각대석, 개첨석, 주석, 동자석, 전석, 횡죽석 등 다수의 잔존 석물을 수습해 별도로 보관중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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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종 태실의 원당으로는 태봉사(胎峰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앞서 대동문화재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대봉1리 마을 남서면 골짜기 일대에 ‘절골’이라는 지명을 확인한 바가 있다. 아울러 해당 일대의 지표상에서 분청자편, 백자편 등 자기편과 파상문 등이 시문된 기와편 등이 다수 확인되면서 사지와 관련된 건물지, 기단선축 등은 확인이 불가하나 조선전기에 해당하는 분청자편 등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다수 확인되어 해당 지역이 태봉사지일 가능성이 높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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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9일 (수) 17:50 기준 최신판
태종 태실(太宗 胎室) | |
식별자 | PC003 |
---|---|
분류 | 국왕 태실 |
한글명 | 태종 태실 |
한자명 | 太宗 胎室 |
영문명 | Placenta Chamber of King Taejong |
피안자 명칭 | 태종(太宗) |
피안자 이칭 | 이방원(李芳遠)·정안군(靖安君)·공정대왕(恭定大王)·헌릉(獻陵) |
피안자 부 | 태조(太祖) |
피안자 모 |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
피안자 생년월일 | 1367.05.16 |
피안자 몰년월일 | 1422.05.10 |
안태 연월일 | 1401.10.08가봉 |
안태지 기록1 | 경산부(京山府) 조곡산(祖谷山) 태종실록 |
안태지 기록2 | 경산부 남쪽 30리 조곡산 세종실록지리지 |
안태지 좌표(위도) | 35°84'0.2"N |
안태지 좌표(경도) | 128°27'97.8"E |
안태지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2리 조곡산 |
문화재 지정여부 | 미지정 |
이안 연월일 | 1929.05 |
이안지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
이안지 좌표(위도) | 37°66'45.61"N, |
이안지 좌표(경도) | 126°86'06.29"E |
지문 | 高麗恭愍王三十六年丁未,五月十六日生,太宗大王胎,藏于星州郡聖巖面,昭和四年月日移藏 |
지문 찬자 | 이왕직 예식과(李王職 禮式課) |
지문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유물1 | 태종 태실 석재 유구(성주군청) |
태항아리 | 태종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
태항아리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내용[편집]
조선 제3대 국왕 태종의 태실이다.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로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뒤 세자로 책봉되었고 그해 11월 정종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1401년(태종 1) 하륜(河崙)을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삼아 가봉하려 하였으나 농번기이고 가뭄이 심하다는 이유로 문하부 낭사에서 반대를 했다. 그러나 하륜을 증고사로 삼고 지관(地官) 윤신달(尹莘達)을 붙여 태실지를 물색하게 하였고, 이후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로 안태사(安胎使)를 삼아 함주(咸州)에 있던 태함을 받들고 와 경산부(京山府) 조곡산(祖谷山)에 태(胎)를 봉안하였다. 이 일로 경산부는 성주목(星州牧)이 되었다.
현재 태실지에는 분묘가 조성되어있으며, 태실을 구성했던 석물은 성주군청이 2012년 대동문화재연구원에 「성주 태종·단종 태실 학술(지표)조사」를 의뢰하여 태석함의 함개(函蓋) 일부와 팔각대석, 개첨석, 주석, 동자석, 전석, 횡죽석 등 다수의 잔존 석물을 수습해 별도로 보관중에 있다.
태종 태실의 원당으로는 태봉사(胎峰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앞서 대동문화재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대봉1리 마을 남서면 골짜기 일대에 ‘절골’이라는 지명을 확인한 바가 있다. 아울러 해당 일대의 지표상에서 분청자편, 백자편 등 자기편과 파상문 등이 시문된 기와편 등이 다수 확인되면서 사지와 관련된 건물지, 기단선축 등은 확인이 불가하나 조선전기에 해당하는 분청자편 등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다수 확인되어 해당 지역이 태봉사지일 가능성이 높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태종실록』1권, 태종 1년(1401) 5월 5일 계사(癸巳) 2번째 기사[편집]
『태종실록』2권, 태종 1년(1401) 7월 23일 경술(庚戌) 2번째 기사[편집]
『태종실록』2권, 태종 1년(1401) 9월 24일 경술(庚戌) 2번째 기사[편집]
《여흥 부원군 민제를 안태사로 삼다》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로 안태사(安胎使)를 삼았다. 以驪興府院君 閔霽爲安胎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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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종실록』2권, 태종 1년(1401) 9월 24일 경술(庚戌) 2번째 기사 |
『태종실록』2권, 태종 1년(1401) 10월 8일 계해(癸亥) 3번째 기사[편집]
『세종실록』150권, 「지리지」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성주목(星州牧)[편집]
태종 원년 신사에 어태(御胎)를 부(府) 남쪽 30리의 조곡산(祖谷山)에 안장하고, 성주목(星州牧)으로 올렸다.
太宗元年辛巳, 安御胎于府南三十里祖谷山, 陞爲星州牧,屬縣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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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50권, 「지리지」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성주목(星州牧) |
지식 관계망[편집]
태실 지식 관계망[편집]
계보도 지식 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파노라마[편집]
현재의 태실[편집]
안태 추정지[편집]
스틸샷 갤러리[편집]
전자지도[편집]
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