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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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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조선 9대 왕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 소생의 조선 11대 왕, 중종(中宗)의 안태지(安胎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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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의 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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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 시점은 전하는 태지석을 통해 파악이 가능하다. 또한 태지석에는 중종의 아명이 기록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종 태실과 관련한 사료의 내용은 특별히 발견되지는 않는다. 1507년(중종 2) 박원종이 태봉을 봉심했다는 기록과 같은 해 가평현을 군으로 올려 삼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 해에 가봉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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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일제에 의해 태가 서삼릉으로 반출 된 이후 방치되었던 듯 하다. 그러다 1982년 12월 이 곳에 분묘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태실의 석물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태실의 석물들이 수습되었다. 이후 1986년 가평군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1987년 본래의 위치에 석물들을 모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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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전하는 석물들은 마모가 있지만 모양을 크게 잃지는 않았다. 다만 가봉비의 경우 비신의 훼손이 크게 이루어졌으며, 판독 가능한 글자도 10자 미만이다. 또한 묻혀있어야 하는 태석함이 지면에 노출된 채 복원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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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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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태실은 1492년 아기태실로 처음 조성되었다.<ref>『大君隱金伊阿只氏胎室碑』, 1492, 弘治五年九月初七日亥時立;  『中宗胎誌石』, 1492, 皇明弘治元年三月初五日丑時生 大君仇等隱金伊阿只氏胎 弘治五年九月初七日亥時藏.</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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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지는 가평 서면(西面)으로<ref>『正祖實錄』 8년(1784) 9월 15일 정묘, 中宗大王胎封加平西面.</ref> 가봉은 1507년에 이루어졌다.<ref>『中宗實錄』 2년(1507) 10월 16일 병술, 陞京畿 加平縣爲郡 仍遞縣監柳沔 蓋以主上胎室所在也.</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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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이왕직에서 전국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이안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태실 석물은 흩어져 본래의 경관을 한 차례 잃게 됐다. 이후 1982년 12월 1일 중종 태실이 위치한 태봉산의 산주인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작업을 하던 중 태함(胎函)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흩어져 있던 여러 석물을 상색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전시하다가 1986년 6월 가평군에서 향토유적 6호〔명칭 : 중종대왕태봉(中宗大王胎封)〕으로 지정하여 태실 보호의 제도적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듬해 1987년 원래 태실이 조성되었던 현 위치로 석물들을 옮겨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정비하였다.<ref>가평군, 강원대학교 박물관 공편, 『가평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강원대학교 박물관, 1999, 254쪽; 가평군사편찬위원회, 『가평군지 2 내력과 자취-역사·유물·유적』, 2006, 42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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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종 태실은 1987년 원래의 위치에 복원된 이후로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산112에 위치한다. 잔존하고 있는 태실 관련 석물은 연엽주석(蓮葉柱石), 횡죽석(橫竹石), 상석(裳石) 및 아기태실비와 가봉태실비가 전시되어있으며 잘못된 복원으로 인해 지면으로 태함이 노출되어 중앙태석으로 설치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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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태실비는 비수(碑首)의 높이 50cm, 비신(碑身)의 높이 75.5cm, 폭 48cm, 두께 19cm이다. 비수가 반원형으로 연꽃 문양을 새겨져 있으며 상부의 보주는 원좌 없는 연봉을 장식하였다. 측면은 3단으로 되어있으며, 물끊이 홈이 있다. 비대(碑臺)는 문양이 없으며 비신은 글자가 쪼아져 판독이 불가능하나 『중종태지석』을 근거로 명문을 유추할 수 있다. 비신의 앞면은 ‘大君隱金伊阿只氏胎室’이며 뒷면은 ‘弘治五年九月初七日亥時立’이다. 이를 통해 중종의 아명(兒名)은 은금이(隱金伊)라는 사실과 아기태실비의 입비년도가 1492년임을 확인할 수 있어 중종의 생년인 1488년에서 5년이 지난 후 태실이 조성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ref>가평군사편찬위원회, 위의 책, 42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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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봉태실비는 이수(螭首)의 높이 45.5cm, 비신은 중간 부분이 잘려나가 이를 보충한 52cm를 포함해 높이가 116cm이다. 비신의 두께는 21.5cm, 폭은 53cm이다. 비대인 귀룡대석(龜龍臺石)는 마멸이 심해 귀갑문이 육안으로 겨우 보일 정도이며 머리 부분은 잘려 나간 상태이다. 비신은 중간부분이 잘려나가 ‘主’, ‘胎藏’과 같은 일부 글자만 판독이 가능하기에 이를 종합하였을 때 ‘主上殿下胎藏’이 앞면에 새겨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뒷면의 입비년도 역시 비신이 잘려나간 연유로 전문을 확인할 수 없으나 ‘正’이라는 글자가 판독되므로 『중종실록』의 1507년 가봉기사를 통해 ‘正德十年二月日立’이 본래의 명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f>이주환, 이진훈, 조원교 공저, 『朝鮮의 胎室 Ⅰ』,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48쪽; 가평군, 강원대학교 박물관 공편, 앞의 책, 25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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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함은 함개(函蓋)가 평면 원형으로 상부는 원형(圓形)이나 정상부가 약간 편평하게 되어있다. 하부는 편평한 단면 반원형으로 함개의 하부 내부에는 평면 원형의 얕은 감실(龕室)을 팠다. 함신(函身)은 평면 원형의 원통형으로 내부에 평면 원형의 감실을 깊게 파고 그 바닥 가운데에 작은 구멍을 관통하였다.<ref>태함 감실 바닥에 구멍을 관통하는 이유는 습기로 인해 물이 고일 경우 이를 배출하기 위한 배수(排水)의 역할도 있으나 아기의 태와 태봉산의 지기(地氣)가 서로 소통하도록 하고자 한 주술적인 의미도 함께 내포되어있다. 이주환, 이진훈, 조원교 공저, 위의 책, 196쪽; 심현용, 앞의 논문, 191쪽.</ref>
  
 
=='''관련 기록'''==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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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1일 (금) 22:48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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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태실(中宗 胎室)
경기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의 중종 태실 전경
식별자 PC009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중종 태실
한자명 中宗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Jungjong
피안자 명칭 중종(中宗)
피안자 이칭 이역(李懌)·자(字) 낙천(樂天)·공희대왕(恭僖大王)·정릉(靖陵)
피안자 부 성종(成宗)
피안자 모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
피안자 생년월일 1488.04.16
피안자 몰년월일 1544.11.29
안태 연월일 1492.09.07 『중종 태지석』
안태지 기록 경기 가평현(加平縣) 『중종실록』
안태지 기록1 가평(加平) 서면(西面) 『정조실록』
안태지 기록2 경기 가평군 군내면 『서삼릉 중종 태실 후면 각자』
안태지 좌표(위도) 37°80'45.20"N
안태지 좌표(경도) 127°47'84.62"E
안태지 주소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산112
문화재 지정여부 가평군 향토유적 제6호
이안 연월일 1929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皇明弘治元年,三月,初五日,丑時生,大君仇等隱金伊阿只氏胎,弘治五年,九月,初七日,亥時藏
지문 찬자 조선 예조(朝鮮 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중종 가봉태실 태석함이 노출된 상태로 복원
태항아리 중종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내용[편집]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의 태실이다.

안태 시점은 전하는 태지석을 통해 파악이 가능하다. 또한 태지석에는 중종의 아명이 기록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종 태실과 관련한 사료의 내용은 특별히 발견되지는 않는다. 1507년(중종 2) 박원종이 태봉을 봉심했다는 기록과 같은 해 가평현을 군으로 올려 삼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 해에 가봉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930년 일제에 의해 태가 서삼릉으로 반출 된 이후 방치되었던 듯 하다. 그러다 1982년 12월 이 곳에 분묘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태실의 석물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태실의 석물들이 수습되었다. 이후 1986년 가평군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1987년 본래의 위치에 석물들을 모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남아 전하는 석물들은 마모가 있지만 모양을 크게 잃지는 않았다. 다만 가봉비의 경우 비신의 훼손이 크게 이루어졌으며, 판독 가능한 글자도 10자 미만이다. 또한 묻혀있어야 하는 태석함이 지면에 노출된 채 복원되어있다.

상세[편집]

중종 태실은 1492년 아기태실로 처음 조성되었다.[1]

초안지는 가평 서면(西面)으로[2] 가봉은 1507년에 이루어졌다.[3]

1929년 이왕직에서 전국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이안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태실 석물은 흩어져 본래의 경관을 한 차례 잃게 됐다. 이후 1982년 12월 1일 중종 태실이 위치한 태봉산의 산주인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작업을 하던 중 태함(胎函)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흩어져 있던 여러 석물을 상색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전시하다가 1986년 6월 가평군에서 향토유적 6호〔명칭 : 중종대왕태봉(中宗大王胎封)〕으로 지정하여 태실 보호의 제도적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듬해 1987년 원래 태실이 조성되었던 현 위치로 석물들을 옮겨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정비하였다.[4]

현재 중종 태실은 1987년 원래의 위치에 복원된 이후로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산112에 위치한다. 잔존하고 있는 태실 관련 석물은 연엽주석(蓮葉柱石), 횡죽석(橫竹石), 상석(裳石) 및 아기태실비와 가봉태실비가 전시되어있으며 잘못된 복원으로 인해 지면으로 태함이 노출되어 중앙태석으로 설치되어있다.

아기태실비는 비수(碑首)의 높이 50cm, 비신(碑身)의 높이 75.5cm, 폭 48cm, 두께 19cm이다. 비수가 반원형으로 연꽃 문양을 새겨져 있으며 상부의 보주는 원좌 없는 연봉을 장식하였다. 측면은 3단으로 되어있으며, 물끊이 홈이 있다. 비대(碑臺)는 문양이 없으며 비신은 글자가 쪼아져 판독이 불가능하나 『중종태지석』을 근거로 명문을 유추할 수 있다. 비신의 앞면은 ‘大君隱金伊阿只氏胎室’이며 뒷면은 ‘弘治五年九月初七日亥時立’이다. 이를 통해 중종의 아명(兒名)은 은금이(隱金伊)라는 사실과 아기태실비의 입비년도가 1492년임을 확인할 수 있어 중종의 생년인 1488년에서 5년이 지난 후 태실이 조성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5]

가봉태실비는 이수(螭首)의 높이 45.5cm, 비신은 중간 부분이 잘려나가 이를 보충한 52cm를 포함해 높이가 116cm이다. 비신의 두께는 21.5cm, 폭은 53cm이다. 비대인 귀룡대석(龜龍臺石)는 마멸이 심해 귀갑문이 육안으로 겨우 보일 정도이며 머리 부분은 잘려 나간 상태이다. 비신은 중간부분이 잘려나가 ‘主’, ‘胎藏’과 같은 일부 글자만 판독이 가능하기에 이를 종합하였을 때 ‘主上殿下胎藏’이 앞면에 새겨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뒷면의 입비년도 역시 비신이 잘려나간 연유로 전문을 확인할 수 없으나 ‘正’이라는 글자가 판독되므로 『중종실록』의 1507년 가봉기사를 통해 ‘正德十年二月日立’이 본래의 명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

태함은 함개(函蓋)가 평면 원형으로 상부는 원형(圓形)이나 정상부가 약간 편평하게 되어있다. 하부는 편평한 단면 반원형으로 함개의 하부 내부에는 평면 원형의 얕은 감실(龕室)을 팠다. 함신(函身)은 평면 원형의 원통형으로 내부에 평면 원형의 감실을 깊게 파고 그 바닥 가운데에 작은 구멍을 관통하였다.[7]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중종실록』2권, 중종 2년(1507) 4월 22일 을미(乙未)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좌의정 박원종이 유자광의 일을 아뢰다》

좌의정 박원종(朴元宗)이 태봉(胎峯)을 봉심(奉審)한 일을 마치고 와서 복명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대간·홍문관·승정원·예문관과 태학생에 이르기까지 유자광의 일을 논계(論啓)하여 마지않는다 합니다. 이것은 온 나라의 공론을 들어 말하는 것이니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 자광은 이미 큰 공로가 있으므로 극형에는 처할 수 없으니, 멀리 귀양보내서 공론을 쾌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자광이 비밀히 원종에게 서간을 보내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옛말이 있다. 어찌하여 감싸주지 않는가?" 하니, 원종이 회답하기를 "사림(士林)이 그대에게 이를 간 지 이미 오랜데, 어찌 일찌감치 물러가지 않는가?" 하였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광은 누대 조정에 두루 벼슬하였다. 지금 이미 조정에 의논하여 파직한 것도 너무 과한데, 더 죄를 줄 것 없다."

하였다.

左議政朴元宗奉審胎峯, 事完來復命。

仍啓曰: "今聞子光之事, 臺諫、弘文館、承政院、藝文館以至大學生, 論啓不已。 此擧一國言之, 不可不聽。 但子光旣有大功, 不可置極刑, 可遠竄以快公論。"

【子光潛致簡于元宗曰: "唇亡齒寒。 古有其言。 何不庇護耶?" 元宗答曰: "士林向君切齒已久, 何不早退乎?"】

上曰: "子光歷仕累朝。 今已議諸朝廷, 罷職已過, 不須加罪。“

Quote-right blue.png
출처: 『중종실록』2권, 중종 2년(1507) 4월 22일 을미(乙未) 1번째 기사



『중종실록』4권, 중종 2년(1507) 10월 16일 병술(丙戌) 5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경기 가평현을 올려 군으로 삼고, 현감 유면을 체임시키다》

경기 가평현(加平縣)을 올려 군(郡)으로 삼고, 현감(縣監) 유면(柳沔)을 체임시켰으니, 이 곳은 주상(主上)의 태실(胎室)이 있는 곳이다.

陞京畿 加平縣爲郡, 仍遞縣監柳沔, 蓋以主上胎室所在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중종실록』4권, 중종 2년(1507) 10월 16일 병술(丙戌) 5번째 기사



『중종실록』4권, 중종 2년(1507) 10월 25일 을미(乙未)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대사헌 이유청 등이 강혼의 추문을 청하다》

조강을 하였다. 대사헌 이유청(李惟淸)이 아뢰기를,

"강혼(姜渾)의 일은, 타인(他人)이 듣기에는 과연 모해(謀害)하는 것 같습니다. 김응기(金應箕)는 상의원 제조(尙衣院提調)로서 태실 석난간(胎室石欄干)을 설치하는 일로 가평에 가고, 신은 승지(承旨)로서 부제조(副提調)였는데, 강혼은 신 등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홀로 아뢰어 폐조 때 사람을 그대로 상의원에 환속(還屬)하기를 청하니, 마음 쓰는 것이 계획적이라 마땅히 추문(推問)하셔야 되겠습니다."

하고, 대사간(大司諫) 권홍(權弘)이 아뢰기를,

"전하(殿下)의 처음 정사(政事)에서 대신(大臣)은 의당 어진 사람을 천거해야 될 터인데, 강혼(姜渾)은 폐조(廢朝) 때 기괴한 방술과 부정한 기교를 부리던 자를 상의원에 환속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제 이유청(李惟淸)이 아뢴 바를 들어 보면, 마음 쓰는 것이 과연 간사하니, 추문(推問)을 명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강혼(姜渾)을 추문(推問)하도록 명하였다.

御朝講。 大司憲李惟淸曰: "姜渾事, 他人聞之, 果似謀害。 金應箕爲尙衣院提調, 而以造排胎室石欄干, 往加平, 臣以承旨爲副提調, 而不與同議, 獨啓請還屬尙衣院, 用心綢繆, 推問甚當。" 大司諫權弘曰: "殿下初政, 大臣義當薦賢, 而姜渾擧廢朝奇技淫巧之人, 啓請還屬尙衣院。 今聞李惟淸所啓, 用心果譎, 命推爲當。" 上命推問姜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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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4권, 중종 2년(1507) 10월 25일 을미(乙未) 1번째 기사



지식 관계망[편집]

태실 지식 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파노라마[편집]

스틸샷 갤러리[편집]

수치지형도[편집]

전자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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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

  1. 『大君隱金伊阿只氏胎室碑』, 1492, 弘治五年九月初七日亥時立; 『中宗胎誌石』, 1492, 皇明弘治元年三月初五日丑時生 大君仇等隱金伊阿只氏胎 弘治五年九月初七日亥時藏.
  2. 『正祖實錄』 8년(1784) 9월 15일 정묘, 中宗大王胎封加平西面.
  3. 『中宗實錄』 2년(1507) 10월 16일 병술, 陞京畿 加平縣爲郡 仍遞縣監柳沔 蓋以主上胎室所在也.
  4. 가평군, 강원대학교 박물관 공편, 『가평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강원대학교 박물관, 1999, 254쪽; 가평군사편찬위원회, 『가평군지 2 내력과 자취-역사·유물·유적』, 2006, 421쪽.
  5. 가평군사편찬위원회, 위의 책, 422쪽.
  6. 이주환, 이진훈, 조원교 공저, 『朝鮮의 胎室 Ⅰ』,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48쪽; 가평군, 강원대학교 박물관 공편, 앞의 책, 255쪽.
  7. 태함 감실 바닥에 구멍을 관통하는 이유는 습기로 인해 물이 고일 경우 이를 배출하기 위한 배수(排水)의 역할도 있으나 아기의 태와 태봉산의 지기(地氣)가 서로 소통하도록 하고자 한 주술적인 의미도 함께 내포되어있다. 이주환, 이진훈, 조원교 공저, 위의 책, 196쪽; 심현용, 앞의 논문, 1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