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원자 태실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미지 마커와 커스텀 오버레이 + 지도에 지형도 표시하기
잔글 |
잔글 |
||
(사용자 3명의 중간 판 14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15번째 줄: | 15번째 줄: | ||
|피안자 생년월일=1497.12.18 | |피안자 생년월일=1497.12.18 | ||
|피안자 몰년월일=1506.09.24 | |피안자 몰년월일=1506.09.24 | ||
− | |안태 연월일=1501.07. | + | |안태 연월일=1501.07.02 |
|안태지 기록= | |안태지 기록= | ||
|안태지 기록1= | |안태지 기록1= | ||
38번째 줄: | 38번째 줄: | ||
|태항아리 소장처=국립고궁박물관}} | |태항아리 소장처=국립고궁박물관}} | ||
− | ==''' | + | =='''내용'''== |
+ | 연산군과 폐비 신씨의 소생으로 연산군의 왕세자 이황의 태실이다. | ||
+ | |||
+ |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이 안태사의 직을 맡았으며, 정인인을 종사관으로 삼아 태실을 조성하였다. | ||
+ | |||
+ | 현재 태실지에는 안태비와 석함이 남아 있다. 최근까지 이 태실을 연산군의 태실로 오인하였다. | ||
+ | |||
=='''관련 기록'''== | =='''관련 기록'''== | ||
===조선왕조실록=== | ===조선왕조실록=== | ||
312번째 줄: | 318번째 줄: | ||
施官爵之一事乎? 臺諫之言是也。"|출처=『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22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 施官爵之一事乎? 臺諫之言是也。"|출처=『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22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 ||
+ | |||
+ |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6월 10일 병술(丙戌) 1번째 기사==== | ||
+ | {{Blockquote|《승지 권주를 시켜 안태사 신수근을 제천정에서 전송하게 하고 어제시 한 절구를 내리다》 | ||
+ | |||
+ | 승지 권주(權柱) 등에게 명해서 '''안태사(安胎使) 신수근(愼守勤)'''을 제천정(濟川亭)에서 전송하도록 하고, 어제시(御製詩) 한 절구(絶句)를 내리기를, | ||
+ | |||
+ | 짙어가는 더운 기운이 바야흐로 깊어만 가는데 | ||
+ | |||
+ | 멀고 먼 장안까지 몇 개의 바다위 묏부리던가 | ||
+ | |||
+ | 오늘 사람을 시켜 정자 위에서 전송하노니 | ||
+ | |||
+ | 몇 달 동안 소식 듣지 못함이 근심스럽구나 | ||
+ | |||
+ | 하였다. 신수근(愼守勤)이 정인인(鄭麟仁)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홍문관에서 상소하여 시사(時事)와 외척에 관한 일을 의논하면서, 정인인으로 하여금 기초(起草)하게 했는데, 정인인(鄭麟仁)은 다만 다른 일만 범론(泛論)하고 외척에 관한 일은 한 마디 말도 없었는데, 저작(著作) 안처선(安處善)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 ||
+ | |||
+ | "상소가 이 정도에 그칠 바에야 그만두는 것보다 못하다." | ||
+ | |||
+ | 하니, 정인인(鄭麟仁)이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처선(安處善)은 천성이 순정(醇正)하고 지조가 확실해서 세쇄(細瑣)한 일에 구애되지 않고 대인의 기상이 있었다. | ||
+ | |||
+ | 命承旨權柱等, 往餞安胎使愼守勤于濟川亭, 賜御製詩一絶曰: "沈沈暑氣正方深, 路隔長安幾海岑。 今日使人亭上餞, 還愁數月不聞音。" 守勤以鄭麟仁爲從事官。 弘文館上疏, 論時事, 幷及外戚, 令麟仁草之, 麟仁但泛論他事, 無一語屬外戚者。 著作安處善見之曰: "疏止是, 不如且已。" 麟仁有慙色。 處善天性醇正, 所守確然。 不拘細瑣, 有大人氣象。|출처=『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6월 10일 병술(丙戌) 1번째 기사}} | ||
====『연산군일기』41권, 연산군 7년(1501) 12월 18일 임술(壬戌) 1번째 기사==== | ====『연산군일기』41권, 연산군 7년(1501) 12월 18일 임술(壬戌) 1번째 기사==== | ||
401번째 줄: | 428번째 줄: | ||
{{Blockquote|《우참찬 윤효손에게 쌀 20섬을 하사하다》 | {{Blockquote|《우참찬 윤효손에게 쌀 20섬을 하사하다》 | ||
− | 우참찬 윤효손(尹孝孫)에게 쌀 20섬을 내려주었는데, 이때 원자(元子)를 그 집에서 양육했다. | + | 우참찬 윤효손(尹孝孫)에게 쌀 20섬을 내려주었는데, 이때 '''원자(元子)'''를 그 집에서 양육했다. |
賜右參贊尹孝孫米二十碩。 時元子養于其家。|출처=『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2일 계축(癸丑) 3번째 기사}} | 賜右參贊尹孝孫米二十碩。 時元子養于其家。|출처=『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2일 계축(癸丑) 3번째 기사}} | ||
− | |||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4일 을묘(乙卯) 2번째 기사==== |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4일 을묘(乙卯) 2번째 기사==== | ||
556번째 줄: | 582번째 줄: | ||
傳曰: "自明日世子, 可於書筵受學。 世子𩔇性沈毅嚴峻。 王幸慶會樓, 與興淸燕樂, 召世子語曰: 吾萬歲後, 汝善視此輩未?" 世子默然。 王自是憚之。|출처=『연산군일기』58권, 연산군 11년(1505) 7월 29일 임자(壬子) 2번째 기사}} | 傳曰: "自明日世子, 可於書筵受學。 世子𩔇性沈毅嚴峻。 王幸慶會樓, 與興淸燕樂, 召世子語曰: 吾萬歲後, 汝善視此輩未?" 世子默然。 王自是憚之。|출처=『연산군일기』58권, 연산군 11년(1505) 7월 29일 임자(壬子) 2번째 기사}} | ||
+ | |||
+ | |||
+ | ====『연산군일기』59권, 연산군 11년(1505) 8월 26일 무인(戊寅) 1번째 기사==== | ||
+ | {{Blockquote|《군신·왕세자 등이 책보를 받들어 존호와 축하 전문을 올리고, 왕이 반사하다》 | ||
+ | |||
+ | 왕이 명정전(明政殿)에 임어(臨御)하고, 군신(君臣)이 책보(冊寶)를 받들어 존호(尊號)를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 ||
+ | |||
+ | ... (중략) ... '''왕세자'''도 반열(班列)에 따랐는데, 따로 전문(箋文)을 올리기를, | ||
+ | |||
+ | "큰 기업을 운전하시매 모두가 건곤(乾坤)의 조화(造化)를 우러르며, 큰 미덕을 드날리매 일월(日月)의 빛처럼 밝으니 조야(朝野)가 함께 반기고 신인(神人)이 모두 기뻐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헌천 홍도 경문 위무하신 전하께서는 총명이 순(舜)과 가지런하고 용지(勇智)가 탕(湯)보다 지나시어, 성만(成滿)을 유지하고 수성(守成)을 잘하시어 삼왕(三王)의 치화(治化)를 밝히고, 예법(禮法)을 제정하고 음악(音樂)을 지어서 일대(一代)의 규모(規模)를 새로이 하시니, 풍속이 다 순후(淳厚)로 돌아가고 문물(文物)이 환히 갖추어졌습니다. 이에 현호(顯號)를 받아 여정(輿情)에 따르시매, 누옥(鏤玉)·이금(泥金)이 어찌 털끝만큼인들 묘사해내리까마는, 영명(英名)을 드날리고 사실을 기록하여 간편(簡編)385) 에 빛내고자 함이니, 이는 종사(宗社)의 복에 관계되고 국가의 경사를 더욱 펴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외람되이 용렬한 자질로 욕되게 저궁(儲宮)을 지키매, 춤추고 뛰어 지척(咫尺)에서 기쁨을 길이 받들고, 오래오래 강릉(岡陵)의 수(壽)를 늘 빕니다." | ||
+ | |||
+ | 하였다. | ||
+ | |||
+ | ... (중략) ... | ||
+ | |||
+ | '''왕세자'''가 전문을 올려 축하하기를, | ||
+ | |||
+ | "보책(寶冊)이 크게 드날리매 건곤(乾坤)의 덮어 기르심을 우러르고, 홍명(鴻名)이 나타나게 올려지매 일월(日月)의 밝음을 바라보게 되니, 경사가 국가에 모이고 기쁨이 조야(朝野)에 고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자순 화혜 왕대비 전하께서는 근검을 몸소 솔선하고 인애(仁愛)가 본성(本性)과 더불어 성장하시어, 육궁(六宮)에 음교(陰敎)로 베푸시어 능히 선왕(先王)의 치화(治化)를 돕고, 일국(一國)에 모의를 바루어 길이 장락의 존귀를 누리시니, 이에 욕의의 거행을 당하여 지극히 큰 복을 무성히 받으소서.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외람되게 용렬한 자질로 부끄러이 저위(儲闈)를 지키매, 강릉의 수를 늘 빌며, 춤추고 뛰는 기쁨이 더욱 더합니다." | ||
+ | |||
+ | 하였다. | ||
+ | |||
+ | ... (중략) ... | ||
+ | |||
+ | '''왕세자'''가 전문(箋文)을 올려 축하하기를, | ||
+ | |||
+ | "위(位)를 초위(椒闈)에 정하여 일찍부터 자범(慈範)을 드러내시매, 보책(寶冊)이 뜰에서 드날리어 현칭(顯稱)을 크게 받으시니, 경사가 종방(宗祊)에 연하고 기쁨이 조야(朝野)에 넘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제인 원덕 왕비(齊人元德王妃) 전하께서는 제장(齊莊)·연의(燕懿)하고 정숙(貞淑)·유가(柔嘉)하시어, 덕(德)이 도산(塗山)에 맞아서 안을 다스리는 풍화(風化)를 크게 밝히시고, 혜택은 규목(樛木)을 갖추어 아래에 미치는 인애(仁愛)를 길이 융성히 하시며, 신극(宸極)의 화함을 얻고 장락(長樂)의 기쁨을 받드시매, 이에 욕례(縟禮)를 올리오니 순연한 복을 더욱 맞이하소서.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외람되이 용렬한 자질로 다행히 성사(盛事)를 보게 되어, 손발이 절로 춤추어 감히 하례(賀禮)에 나가는 반열(班列)에 참여하매, 오래 수(壽)하고 창성(昌盛)하시도록 기리고 비는 정성을 다합니다." | ||
+ | |||
+ | 하였다. | ||
+ | |||
+ | ... (중략) ... | ||
+ | |||
+ | '''왕세자''' 및 백관이 또 전문(箋文)을 올려, 전하가 대비에게 존호를 더 올리고 왕비에게 휘호를 책명한 것을 하례하였는데, '''왕세자'''의 전문에 이르기를, | ||
+ | |||
+ | "홍도(鴻圖)를 어루만지기를 수의(垂衣)로 하여 바야흐로 경운(景運)을 열으시고, 고전을 상고하되 예문을 참작하여 비로소 욕의(褥儀)를 밝히시니, 경사가 종방(宗祊)에 가득하고 기쁨이 조야에 넘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헌천 홍도 경문 위무하신 전하께서는 강건(剛健)·중정(中正)하고 제성(齊聖)·광연(廣淵)하시어, 나라를 다스림에는 반드시 집을 다스림에 비롯하여야 하고, 어버이를 섬김에는 마땅히 양지(養地)를 앞세워야 한다 하여 장락(長樂)에 휘호를 받들어 효사(孝思)를 잘 드리우고, 초정(椒庭)에 옥책(玉冊)을 드날려 곤화(壼化)451) 를 밝히시니, 여망(輿望)에 맞추어 홍휴(鴻休)를 밝힌 것이며, 하물며 이에 보정(寶鼎)이 이룩되매 경명(景命)의 내려짐이 더욱 정함에리까.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외람되이 못난 자질로 과분하게 저궁(儲宮)에 있으매, 하루에 세 번 뵙고 문안하옴이 문왕(文王)의 효행(孝行)에는 미치지 못하오나, 백관(百官)에 앞서서 하례를 드리어 화봉(華封)의 축사(祝辭)를 올리기 원하옵니다." | ||
+ | |||
+ | 하였다. | ||
+ | |||
+ | 王御明政殿, 群臣奉冊寶, 獻尊號, 其文曰 ... (略) ... 王世子亦隨班(別)〔列〕 , 進箋曰 | ||
+ | |||
+ | 誕撫鴻圖, 咸仰乾坤之造。 載揚景鑠, 式昭日月之光。 朝野交欣, 神人胥悅。 恭惟憲天弘道經文緯武殿下, 聰明齊舜, 勇智邁湯。 持盈守成, 闡三王之治化。 制禮作樂, 新一代之規模。 風俗盡歸於淳, 文物煥然而備。 玆膺顯號, 用副輿情。 鏤玉泥金, 詎摹畫於毫末。 蜚英紀實, 庶焜燿於簡編。 寔關宗社之休, 益衍邦家之慶。 伏念臣猥以庸資, 叨守儲宮。 舞之蹈之, 長奉歡於咫尺。 悠也久也, 恒祝壽於岡陵。 | ||
+ | |||
+ | ... (略) ... 王世子上箋陳賀曰 | ||
+ | |||
+ | 寶冊光揚, 仰乾坤之覆燾。 鴻名顯上, 瞻日月之昭明。 慶輯邦家, 歡均朝野。 恭惟慈順和惠王大妃殿下, 儉以身率, 仁與性成。 肅陰敎於六宮, 克贊先王之化。 端母儀於一國, 永享長樂之尊。 玆當縟儀之稱, 茂膺純嘏之至。 伏念臣猥以庸資, 叨守儲闈。 壽恒祝於岡陵, 喜益深於舞蹈。 | ||
+ | |||
+ | ... (略) ... 王世子上箋陳賀曰 | ||
+ | |||
+ | 位正椒闈, 夙著慈範。 庭揚寶冊, 光膺顯稱。 慶緜宗祊, 喜溢朝野。 恭惟齊仁元德王妃殿下, 齊莊淵懿, 貞淑柔嘉。 德協塗山, 丕闡治內之化。 惠給樛木, 永隆逮下之仁。 得宸極之怡愉, 奉長樂之懽悅。 玆陳縟禮, 益迓純禧。 伏念臣猥將庸資, 幸覩盛事。 手之舞足之蹈, 叨參趨賀之班。 壽而艾熾而昌, 倍殫頌禱之懇。 | ||
+ | |||
+ | ... (略) ... 王世子及百官, 又上箋賀殿下加上尊號於大妃, 冊徽號於王妃。 王世子箋曰 | ||
+ | |||
+ | 撫鴻圖而垂衣, 方開景運。 稽古典而酌禮, 肇講縟儀。 慶衍宗祊, 歡騰朝野。 恭惟憲天弘道經文緯武殿下, 剛健中正, 齊聖廣淵。 謂治國必始於齊家, 而事親當先於養志。 奉徽號於長樂, 克綏孝思。 揚玉冊於椒庭, 式彰壼化。 聿孚輿望, 載闡鴻休。 矧玆寶鼎之成, 益凝景命之錫?。 伏念臣猥將孱質, 濫居儲宮。 日三朝而問安, 雖乏文王之孝行。 首百官而稱賀, 願上華封之祝辭。 |출처=『연산군일기』59권, 연산군 11년(1505) 8월 26일 무인(戊寅) 1번째 기사}} | ||
+ | |||
+ | ====『연산군일기』61권, 연산군 12년(1506) 2월 1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 | ||
+ | {{Blockquote|《정세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정하게 하다》 | ||
+ | |||
+ |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 ||
+ | |||
+ | "정세명(丁世明)의 딸을 '''세자빈(世子嬪)'''으로 정하라." | ||
+ | |||
+ | 하였다. | ||
+ | |||
+ | 下御書曰: | ||
+ | |||
+ | 丁世明女子, 定世子嬪。|출처=『연산군일기』61권, 연산군 12년(1506) 2월 1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 | ||
581번째 줄: | 672번째 줄: | ||
朴元宗等啓曰: "廢世子及昌寧、陽平等, 近在城外, 未爲穩當。 擇幽僻郡邑安置, 官給其食, 禁雜人出入。" 傳曰: "可。" 僉啓曰: "𩔇 旌善、仁 遂安、誠 堤川、敦壽 牛峯, 竝於官家近處置之, 高其垣墻, 常令鎖閉。 凡出納衣食等物, 令官人監掌。 其支供, 以所在官倉之米, 炊爨, 使其官奴婢, 又令軍士、守直有無事, 守令每月季, 報觀察使。" 傳曰: "依啓。"|출처=『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辛巳) 5번째 기사}} | 朴元宗等啓曰: "廢世子及昌寧、陽平等, 近在城外, 未爲穩當。 擇幽僻郡邑安置, 官給其食, 禁雜人出入。" 傳曰: "可。" 僉啓曰: "𩔇 旌善、仁 遂安、誠 堤川、敦壽 牛峯, 竝於官家近處置之, 高其垣墻, 常令鎖閉。 凡出納衣食等物, 令官人監掌。 其支供, 以所在官倉之米, 炊爨, 使其官奴婢, 又令軍士、守直有無事, 守令每月季, 報觀察使。" 傳曰: "依啓。"|출처=『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辛巳) 5번째 기사}} | ||
+ | |||
+ |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辛巳) 11번째 기사==== | ||
+ | {{Blockquote|《폐세자 등이 유배 갈 때 들것에 태우게 하다》 | ||
+ | |||
+ | 전교하기를, | ||
+ | |||
+ | "'''폐세자 이황'''·창녕·양평·이돈수 등은 모두 나이가 어려서 말을 타고 먼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니, 가마를 타고 가게 하는 것이 어떤가?" | ||
+ | |||
+ | 하니, 모두 아뢰기를, | ||
+ | |||
+ | "죄인은 가마를 탈 수 없습니다. 만약 말을 타고 못한다면 들것[舁]으로 들고 가게 하는 것이 무방합니다." | ||
+ | |||
+ | 하니, ‘알았다.’ 전교하였다. | ||
+ | |||
+ | 傳曰: "廢世子𩔇、昌寧、陽平、敦壽等, 俱以幼稚, 必不能騎馬遠行, 令乘轎以去何如?" 僉啓曰: "罪人不可乘轎。 若不能騎馬, 則使之舁去無妨。" 傳曰: "知道。"|출처=『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辛巳) 11번째 기사}} | ||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24일 경자(庚子) 3번째 기사==== |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24일 경자(庚子) 3번째 기사==== | ||
633번째 줄: | 739번째 줄: | ||
傳曰: "𩔇等雖已賜死, 厚葬何如?" 領議政柳洵、右議政朴元宗啓曰: "葬制, 以其官爵高下, 差等之耳。 今𩔇等旣爲庶人, 以棺槨埋葬, 可謂厚矣, 若令其道觀察使致奠, 則此極矣。"|출처=『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25일 신축(辛丑) 2번째 기사}} | 傳曰: "𩔇等雖已賜死, 厚葬何如?" 領議政柳洵、右議政朴元宗啓曰: "葬制, 以其官爵高下, 差等之耳。 今𩔇等旣爲庶人, 以棺槨埋葬, 可謂厚矣, 若令其道觀察使致奠, 則此極矣。"|출처=『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25일 신축(辛丑) 2번째 기사}} | ||
+ | =='''지식 관계망'''== | ||
+ | |||
+ | ===태실 지식관계망=== | ||
+ | {{NetworkGraph | title=연산군_원자_태실.lst}} | ||
− | == | + | ===계보도 지식관계망=== |
+ | {{NetworkGraph | title=연산군_원자_계보도.lst}} | ||
=='''시각자료'''== | =='''시각자료'''== | ||
+ | ===파노라마=== | ||
+ | <html> | ||
+ | <iframe width="100%" height="800" src="http://dh.aks.ac.kr/~ssn/pavilion/Field_PC/PC029/PC029.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
+ | </html> | ||
+ | |||
+ | ===스틸샷 갤러리=== | ||
<gallery> | <gallery> | ||
− | File:SSNPC_Geumdol01.JPG|서삼릉 태실 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실 | + | File:SSNPC_Geumdol01.JPG|서삼릉 태실 집안지 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실 전면 |
− | File:SSNPC_Geumdol02.JPG|서삼릉 태실 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실 후면 | + | File:SSNPC_Geumdol02.JPG|서삼릉 태실 집안지 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실 후면 |
− | File:OGPC_Geumdol_Front_close1.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 + | File:OGPC_Geumdol_Front_close1.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석함 ① |
− | File:OGPC_Geumdol_Front_close2.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 + | File:OGPC_Geumdol_Front_close2.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석함 ② |
− | File:OGPC_Geumdol_right_side.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 + | File:OGPC_Geumdol_right_side.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석함 ③ |
− | File:OGPC_Geumdol_right_close.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 + | File:OGPC_Geumdol_right_close.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석함 ④ |
− | File:OGPC_Geumdol_biseok.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 + | File:OGPC_Geumdol_biseok.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원자아기씨태실비 |
− | File:OGPC_Geumdol_board .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안내판 | + | File:OGPC_Geumdol_board .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안내판 |
− | File:OGPC_Geumdol_Tabongjung_Front.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태봉정 전경 | + | File:OGPC_Geumdol_Tabongjung_Front.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봉정 전경 |
− | File:OGPC_Geumdol_Tabongjung_signboard.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태봉정 현판 | + | File:OGPC_Geumdol_Tabongjung_signboard.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봉정 현판 |
− | File:OGPC_Geumdol_Tabongjung_board.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태봉정 건립취지문 | + | File:OGPC_Geumdol_Tabongjung_board.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봉정 건립취지문 |
</gallery> | </gallery>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gallery mode="slideshow"> |
− | + | File:SSNPC_Geumdol01.JPG|서삼릉 태실 집안지 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실 전면 | |
− | + | File:SSNPC_Geumdol02.JPG|서삼릉 태실 집안지 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실 후면 | |
− | + | File:OGPC_Geumdol_Front_close1.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석함 ① | |
− | </ | + | File:OGPC_Geumdol_Front_close2.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석함 ② |
− | + | File:OGPC_Geumdol_right_side.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석함 ③ | |
− | + | File:OGPC_Geumdol_right_close.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석함 ④ | |
+ | File:OGPC_Geumdol_biseok.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원자아기씨태실비 | ||
+ | File:OGPC_Geumdol_board .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안내판 | ||
+ | File:OGPC_Geumdol_Tabongjung_Front.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봉정 전경 | ||
+ | File:OGPC_Geumdol_Tabongjung_signboard.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봉정 현판 | ||
+ | File:OGPC_Geumdol_Tabongjung_board.JPG|상주 화서면 금돌이 태실 초안지 태봉정 건립취지문 | ||
+ | </gallery> | ||
=='''전자지도'''== | =='''전자지도'''== |
2020년 7월 29일 (수) 19:20 기준 최신판
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실(燕山君 元子 金乭伊 胎室) | |
식별자 | PC029 |
---|---|
분류 | 왕자공주 태실 |
한글명 | 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실 |
한자명 | 燕山君 元子 金乭伊 胎室 |
영문명 | Placenta Chamber of Prince Geumdol |
피안자 명칭 | 금돌이(金乭伊) |
피안자 이칭 | 이황(李𩔇) · 폐세자(廢世子) |
피안자 부 | 연산군(燕山君) |
피안자 모 |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愼氏) |
피안자 생년월일 | 1497.12.18 |
피안자 몰년월일 | 1506.09.24 |
안태 연월일 | 1501.07.02 |
안태지 좌표(위도) | 36°44'40.8"N |
안태지 좌표(경도) | 127°94'65.8"E |
안태지 주소 |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
문화재 지정여부 | 미지정 |
이안 연월일 | 1930.05 |
이안지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
이안지 좌표(위도) | 37°39'52.9"N |
이안지 좌표(경도) | 126°51'38.0"E |
지문 | 皇明弘治十年,十二月二十九日,子時生,元子金乭伊阿只氏胎,弘治十四年,七月初二日,未時藏 |
지문 찬자 | 조선 예조(禮曹) |
지문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유물1 | 원자 금돌이 부속유물(동전)(국립고궁박물관) |
태항아리 | 원자 금돌이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
태항아리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목차
- 1 내용
- 2 관련 기록
- 2.1 조선왕조실록
- 2.1.1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18일 을유(乙酉) 3번째 기사
- 2.1.2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25일 임진(壬辰) 2번째 기사
- 2.1.3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26일 계사(癸巳) 1번째 기사
- 2.1.4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29일 병신(丙申) 1번째 기사
- 2.1.5 『연산군일기』29권, 연산군 4년(1498) 1월 4일 경자(庚子) 1번째 기사
- 2.1.6 『연산군일기』29권, 연산군 4년(1498) 1월 20일 병진(丙辰) 1번째 기사
- 2.1.7 『연산군일기』32권, 연산군 5년(1499) 1월 27일 정해(丁亥) 1번째 기사
- 2.1.8 『연산군일기』34권, 연산군 5년(1499) 8월 20일 정미(丁未) 2번째 기사
- 2.1.9 『연산군일기』38권, 연산군 6년(1500) 8월 29일 신해(辛亥) 4번째 기사
- 2.1.10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5일 임오(壬午) 2번째 기사
- 2.1.11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21일 무술(戊戌) 1번째 기사
- 2.1.12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22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 2.1.13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6월 10일 병술(丙戌) 1번째 기사
- 2.1.14 『연산군일기』41권, 연산군 7년(1501) 12월 18일 임술(壬戌) 1번째 기사
- 2.1.15 『연산군일기』42권, 연산군 8년(1502) 1월 24일 정유(丁酉) 2번째 기사
- 2.1.16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3월 20일 임진(壬辰) 2번째 기사
- 2.1.17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2일 계축(癸丑) 2번째 기사
- 2.1.18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2일 계축(癸丑) 3번째 기사
- 2.1.19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4일 을묘(乙卯) 2번째 기사
- 2.1.20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7일 무오(戊午) 1번째 기사
- 2.1.21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21일 임술(壬戌) 1번째 기사
- 2.1.22 『연산군일기』46권, 연산군 8년(1502) 9월 15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 2.1.23 『연산군일기』49권, 연산군 9년(1503) 4월 17일 계축(癸丑) 1번째 기사
- 2.1.24 『연산군일기』52권, 연산군 10년(1504) 3월 4일 을축(乙丑) 1번째 기사
- 2.1.25 『연산군일기』58권, 연산군 11년(1505) 7월 29일 임자(壬子) 2번째 기사
- 2.1.26 『연산군일기』59권, 연산군 11년(1505) 8월 26일 무인(戊寅) 1번째 기사
- 2.1.27 『연산군일기』61권, 연산군 12년(1506) 2월 1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
- 2.1.28 『연산군일기』63권, 연산군 12년(1506) 9월 2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 2.1.29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辛巳) 5번째 기사
- 2.1.30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辛巳) 11번째 기사
- 2.1.31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24일 경자(庚子) 3번째 기사
- 2.1.32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25일 신축(辛丑) 2번째 기사
- 2.1 조선왕조실록
- 3 지식 관계망
- 4 시각자료
- 5 전자지도
- 6 참고 자료
- 7 주석
내용[편집]
연산군과 폐비 신씨의 소생으로 연산군의 왕세자 이황의 태실이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이 안태사의 직을 맡았으며, 정인인을 종사관으로 삼아 태실을 조성하였다.
현재 태실지에는 안태비와 석함이 남아 있다. 최근까지 이 태실을 연산군의 태실로 오인하였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18일 을유(乙酉) 3번째 기사[편집]
《밤에 원자가 탄생하다》
밤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 夜, 元子生。 |
||
출처: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18일 을유(乙酉) 3번째 기사 |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25일 임진(壬辰) 2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26일 계사(癸巳) 1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28권, 연산군 3년(1497) 12월 29일 병신(丙申) 1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29권, 연산군 4년(1498) 1월 4일 경자(庚子) 1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29권, 연산군 4년(1498) 1월 20일 병진(丙辰) 1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32권, 연산군 5년(1499) 1월 27일 정해(丁亥) 1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34권, 연산군 5년(1499) 8월 20일 정미(丁未) 2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38권, 연산군 6년(1500) 8월 29일 신해(辛亥) 4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5일 임오(壬午) 2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21일 무술(戊戌) 1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4월 22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40권, 연산군 7년(1501) 6월 10일 병술(丙戌) 1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41권, 연산군 7년(1501) 12월 18일 임술(壬戌) 1번째 기사[편집]
《나례와 잡희를 원자가 피접해 있는 곳으로 보내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나례(儺禮) 궁중에서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베풀던 의식 와 잡희(雜戲) 여러 가지 놀이 를 원자(元子)가 피접(避接)해 있는 곳으로 보내라." 하였다. 傳曰: "儺禮雜戲, 送於元子避寓處。" |
||
출처: 『연산군일기』41권, 연산군 7년(1501) 12월 18일 임술(壬戌) 1번째 기사 |
『연산군일기』42권, 연산군 8년(1502) 1월 24일 정유(丁酉) 2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3월 20일 임진(壬辰) 2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2일 계축(癸丑) 2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2일 계축(癸丑) 3번째 기사[편집]
《우참찬 윤효손에게 쌀 20섬을 하사하다》
우참찬 윤효손(尹孝孫)에게 쌀 20섬을 내려주었는데, 이때 원자(元子)를 그 집에서 양육했다. 賜右參贊尹孝孫米二十碩。 時元子養于其家。 |
||
출처: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2일 계축(癸丑) 3번째 기사 |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4일 을묘(乙卯) 2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7일 무오(戊午) 1번째 기사[편집]
《원자의 유부 조인을 서방색으로 임명하다》
전교하기를, "원자(元子)의 유부(乳父) 조인(趙麟)에게 등차를 올려 서방색(書房色)으로 임명하라." 하였다. 傳曰: "元子乳父趙麟加次, 差書房色。" |
||
출처: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17일 무오(戊午) 1번째 기사 |
『연산군일기』43권, 연산군 8년(1502) 4월 21일 임술(壬戌) 1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46권, 연산군 8년(1502) 9월 15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49권, 연산군 9년(1503) 4월 17일 계축(癸丑) 1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52권, 연산군 10년(1504) 3월 4일 을축(乙丑) 1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58권, 연산군 11년(1505) 7월 29일 임자(壬子) 2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59권, 연산군 11년(1505) 8월 26일 무인(戊寅) 1번째 기사[편집]
『연산군일기』61권, 연산군 12년(1506) 2월 1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편집]
《정세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정하게 하다》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정세명(丁世明)의 딸을 세자빈(世子嬪)으로 정하라." 하였다. 下御書曰: 丁世明女子, 定世子嬪。 |
||
출처: 『연산군일기』61권, 연산군 12년(1506) 2월 1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 |
『연산군일기』63권, 연산군 12년(1506) 9월 2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편집]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辛巳) 5번째 기사[편집]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辛巳) 11번째 기사[편집]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24일 경자(庚子) 3번째 기사[편집]
『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25일 신축(辛丑) 2번째 기사[편집]
지식 관계망[편집]
태실 지식관계망[편집]
계보도 지식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파노라마[편집]
스틸샷 갤러리[편집]
전자지도[편집]
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이규상, 『한국의 태실』, 청원문화원, 200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