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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詣璿源殿展拜仍詣懿昭墓及宣禧墓行酌獻禮歷臨孝昌墓行奠酌禮
 
詣璿源殿展拜仍詣懿昭墓及宣禧墓行酌獻禮歷臨孝昌墓行奠酌禮
 
…(전략)…乘輿臨墓上行奠酌禮仍臨宜嬪墓奠酌訖乘便輿巡後岡至萬里倉後麓少頃還齋室召見閣臣 承旨乘馬出齋室入崇禮門至敦化門外命隨駕軍兵解嚴至協陽門下馬乘輿還內|출처=『일성록』, 정조 14년(1790) 3월 15일 을미(乙未)}}
 
…(전략)…乘輿臨墓上行奠酌禮仍臨宜嬪墓奠酌訖乘便輿巡後岡至萬里倉後麓少頃還齋室召見閣臣 承旨乘馬出齋室入崇禮門至敦化門外命隨駕軍兵解嚴至協陽門下馬乘輿還內|출처=『일성록』, 정조 14년(1790) 3월 15일 을미(乙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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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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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묘지명(宜嬪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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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문효가 병오(1786년) 5월에 죽고 여섯 달이 지나고 나서 9월 14일 갑신에 빈 또한 죽고 말았다. 석 달 뒤 11월 20일 경인에 율목동 문효의 묘 왼쪽 언덕 묏자리에 장사 지냈다. 빈은 자신을 잃고 문효를 따라 죽기를 늘 소원하더니 비로소 이제 문효의 무덤 곁으로 떠나가 버렸다. 빈은 장차 한을 풀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능히 이름을 구별할 줄 알고, 단정한 태도와 자세를 수양하고, 맑고 올곧고, 더욱 상서로이 화기로우며 온화했다. 열 살(영조 38년, 1762년)에 궁중에 들어왔는데 임금의 친척 집안 여인들이 모두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혈통으로 알았다. 타고난 기품이 아주 훌륭하게 뛰어나 능히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췄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용 했다. 심지어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길을 도회지에서 똑똑하게 분별하고 확고하게 지키니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내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에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마음을 느끼고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거절 했다. 이에 빈의 노비를 꾸짖고 벌을 내렸고 그러한 뒤에 비로소 내 명을 받들어 당석 했다. 그 달에 임신함으로써 임인(1782년) 9월에 세자를 낳았다. 이해 소용으로 봉해졌고 귀한 아들로 하여금 빠르게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다. 빈은 자기 의견만 옳다고 여기는 바를 더욱 스스로 억눌렀다. 내전을 대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를 갖추고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섬겼다. 시침 할 때는 "이제부터 국세를 의탁할 데가 있지만 위로 내전이 있고 또 후궁이 있습니다."라며 또 번번이 당석이 잘못 되었다며 사양하고 거절하며 피했다. 내전은 그 자식을 이미 받아들였고, 양육 할 때는 반드시 생모에게 맡겼는데 조정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규칙과 정례였다. 빈은 감히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여 처리하지 않고 내전을 따랐고 내전은 빈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고 점차 자라기를 기다렸다. 빈은 세자를 어루만질 때는 생각하여 몸과 마음가짐을 조심했고, 밤에는 반드시 아침이 밝을 때까지 밝은 촛불을 두었고, 잘 때는 옷을 벗은 적이 없었는데 5년 동안 한 결 같았다. 또 나날이 천한 일을 몸소 했고, 말을 할 때는 극진히 존중히 여기고 공경했다.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면 빈은 "왕세자는 내전의 아들입니다. 내가 낳았다고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겠습니까?"라고 했다. 빈의 거처는 겨우 비바람을 가리어 막고, 의복과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얼마 되지 않아 변변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지금 지체가 높고 귀한 신분은 이미 나에게는 과분합니다. 도리어 스스로를 자랑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다면 어찌 더욱이 몸에만 재앙이 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궁이 복을 오래 누릴 수 있도록 생활을 검소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처음 5월에 변고가 일어나고 떠나보낼 때 말과 얼굴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이 혹 괴이하게 여겨 어찌 개의치 아니하냐고 물어보니 "내 몸은 내 몸이 아닙니다. 지금 보는 나라는 위태함이 위엄이 머리카락과 같습니다. 다행히 내가 임신 했지만 늘어놓고 슬퍼하고 이와 같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내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과 같아 나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헌데 어찌하여 병이 들었단 말인가? 증세는 의술과 약으로 고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았는데 매일 세수할 때 내가 가서 보고 살폈다. 정신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사지는 움직일 수 없어도 나를 대할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고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기운을 내서 메아리처럼 응답했다. 임종하기 전날 저녁에 내가 가자 갑자기 슬퍼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며 청했다. 이에 내가 꾸짖으며 "평상시 나를 볼 때는 근심 어린 얼굴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라고 물었다. 빈이 말하기를 "앞서서 내전께 아들이 생긴 경사는 축복이었습니다. 천신이 다시 자식을 가져서 종사는 매우 다행이지만, 사심을 마음속으로 억눌러 견뎌내지 못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복이 지나치게 과분해서 끝내 병이 중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마음에 차지 않으나 오직 오래도록 지닌 소원은 죽을 고비에 임하여도 아직 얻지 못하여 근심입니다. 그러니 정전에 자주 가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하면 경사가 있을 것이니, 장차 땅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감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내가 들어가서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전(효의왕후)은 빈이 진실로 나라를 위했다며 정성스럽게 말했는데 거짓됨이 없었다. 지난날을 생각하건대 어찌 아닐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죽음을 잊지 아니하고 맛보는 일과 언행을 조심했는데 빈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성껏 임하는 태도와 마음은 매우 친밀하여 자매를 잃은 마음이었다. 온 궁 안 사람이 모두 빈의 죽음을 한탄하여 한숨 쉬고 슬퍼하며 애처로워했고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빈이 작위를 받고나서 나는 더 엄하게 단단히 단속하여 이따금 사람이 견디지 못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빈은 한 뜻을 기쁘고 좋게 웃어른의 명령을 좇았다. 일이 혹 더욱 은혜에 해당 되면 위축되어 더욱 멀리하고 견지 했으니 자못 겸손했다. 빈의 선산 터가 이롭지 못하여 의논하여 이장하자고 하자 빈이 간하여 말하기를 "천한 집안의 일에 감히 마음대로 안배하여 번잡하게 관청의 돈을 쓰는 것은 사사로운 개인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중한 바인데 네가 불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바라건대 스스로 의복을 팔아서 이장 비용에 보태라."고 일렀다. 동궁의 외가 사친은 규정에 따라 증 찬성에 추증하지만 나는 이전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5월에 문효세자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교지를 내렸는데 빈은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한 집안 사람으로서 분황을 예로서 중지 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벼슬을 더 높여서 내려주는 것은 곧 국가의 법전이 있는 바인데 감히 전하께서 내려주는 물건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뜻밖에도 어찌 감히 장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가 빈이 매양 애석해서 따뜻한 밥과 비단, 모시를 내렸으나 도리어 궁의 희빈(姬嬪)만 못하였다. 비록 자기를 굽히고 의지를 꺾어 검소함을 따랐으나 오히려 가난하고 군색함을 염려하며 궁중 사람에게 늘 너그러이 빌려줬다. 결국에 가서는 세상을 떠나자 상자에는 남은 비단이 없어서 염습할 때 모두 시장에서 가져왔고, 살아생전에는 은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염습 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림)을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 했다. 궁인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하기를 "빈이 그 청빈함을 잘 알고 지키니 마침내 이에 이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빈의 두 오라버니는 곤궁하여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으나 사심으로 관여한 적이 없었다. 내가 "조정의 관작은 진실로 부당하게 남수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남는 녹봉으로 저 배고픔과 추위를 구원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빈이 걱정하는 모양으로 대답하길 "궁방이 세워진 이후 한 물건도 제멋대로 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사가의 천인에게 재물의 은덕을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빈의 장례 때 그 친족은 다른 사람에게서 옷과 신발을 빌렸다. 궁빈의 사친은 관직명이 없는 사람은 궁중 출입을 허락을 받을 수 없으나 오래 전부터 본궁에서 접견하라고 허락했었다. 그러나 빈이 본궁에 나가 기거 하면서 사친과 여러 해 동안 격조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문 앞에 이르지 못하게 했다. 말하기를 "올 때 임금에게 여쭈고 아뢰어 뜻을 받들지 아니 하고서는 감히 불러내어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릇 형제가 몹시 가난하여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의탁하고자 하면 가족과 떨어지고자 했다. 단란함은 사람이 항상 품고 있는 심정인데 빈은 어찌 오직 다른 사람과 다르단 말인가. 내가 내린 명령은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조심히 정성껏 지켰는데, 이는 실제로 사실을 경험했다. 궁에서 산지 20여년인데 일찍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좋지 않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혹여 말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거나 의심을 접하면 반드시 자세하고 소상하게 하여 스스로 완전히 타당함에 이르게 했다. 나는 보통 때 집안 밖의 일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빈도 역시 상황을 따르며 술잔을 주고받는데 익숙하고 내명부에 대해 꺼내지 않았다. 내가 혹 처소에 도착할 때면 궁중의 계집종들은 모두 황급히 숨어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뉘우치고 경계함에 힘썼고 아랫사람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았다.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 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기예도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아, 빈의 장사(葬事)에 반드시 내가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지었다. 어찌 재주와 얼굴을 잊지 아니하겠는가. 나는 궁액을 엄히 다스리고 가까운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하는데 일을 주면 헤아려서 명령을 받드는 일이 적었다. 빈을 후궁 반열에 둔지 20년인데 단단히 타일러서 잘못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게 했다. 이에 곧 명심하고 작은 실수도 하지 않고 조심하며 응대하였는데 법도가 저절로 있었고,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마땅히 출중했다. 이것은 뛰어난 현인도 분명히 어렵다. 본분을 각별히 정성껏 지키며 신분의 엄격함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하였다. 사사로이 윗사람을 찾아가서 청탁하는 일을 경계하고 엄히 끊어내고 가득 이루어놓음에 있어서 염려하였는데 이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에 이른 것이 크고 옳고 그름이 매우 분명하지만 감히 입을 열 수 없고, 일이 되어가는 형세는 손을 댈 수 없으면 능히 오랫동안 정성을 쌓고 있는 힘을 다해 곧바로 나아가 물러서지 않았다. 가진 것의 의리로 하여금 끝내 마땅히 바른 곳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는 책을 읽은 사대부가 쉽게 갖추지 못하는 바이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일에 능하고 절개와 지조가 있다고 여기고 전하여져서 당대의 미담이 될 것이다. 후일 빈의 상론은 이와 같다. 빈의 출신은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하여 스승에게 배우지 못하고 후궁이 되었지만 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알았다. 내전을 위해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한 것은 하늘과 땅이 마땅히 알고 금석도 가히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빈은 높음과 귀함, 임금의 은덕을 입은 영광을 즐거움으로 삼기에 거듭 부족하다고 했다. 마음에 잊히지 않는 정성으로 매우 간절히 청하며 반드시 내전에게 정성을 다하겠다고 하며 더구나 장차 상심하고 슬피 울면서 평생 동안 내전을 따르겠다고 지극히 바랐다. 비록 옛날에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충정이지만 배에 칼을 꽂은 정성도 이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음을 경험 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낳은 어진 아들은 영광된 왕세자가 되고, 공을 세워서 국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하고, 경사로이 자식을 길러 왕족이 번창되어야 할 터인데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 문효세자가 죽은 변이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이에 대략 찬차 하였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 글이 길어졌다. 그대 빈은 계유년생이고 향년 34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해를 못 넘기고 죽었다. 빈의 본관은 창녕이고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시조이다. 인보의 아들은 문하시중으로 지낸 송국이다. 그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고 자는 여완이다. 여완의 큰 아들은 석린이고, 둘째 아들은 석용이며, 셋째 아들은 석인이다. 성석인은 예조판서와 대제학 직위에 올랐었고 시호는 정평인데 이 사람이 빈의 선조다. 그러나 이후 집안이 중간에 계보를 잃어버렸다. 7대조 만종은 제릉 참봉이고, 고조 성경은 군자감 정이다. 빈의 아버지는 증 찬성 윤우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임씨인데 통례원 인의 임종주의 딸이다.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하늘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말을 하면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몸은 정중하게 행동하고 입은 극진한 말을 했으나 복록이 은덕에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운명인가보다. 저 고요한 율곡의 언덕은 문효세자가 잠든 곳이니 영원토록 서로를 지켜줄 것이다. 생각하건대 멀고 오랜 세월동안 배회하며 탄식하고 근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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宜嬪成氏是文孝世子之母也文孝以丙午五月逝越六月甲申嬪又歿歿之越三月庚寅葬于高陽郡之栗木洞實文孝墓左岡壬坐之原也嬪自失文孝常願死則歸葬于其墓側今乃遂其願尙能紓嬪之恨而慰文孝之靈乎嗚呼悲夫嬪生而瑩慧甫周歲能卞姓名字容儀脩潔端凝祥和藹然踰十歲選入掖庭戚里家婦女之出入大內者皆認以閥閱種子天稟絶異能持謙恭而行儉約至於義理大處明辨確守不少變也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自是益自抑畏事內殿備盡誠禮侍寢則曰從今國勢有托而上有內殿且有嬪御其又敢當夕乎輒切諫而辭避焉內殿旣取其子子之若其養育之節必任於其所生母卽國朝故事也嬪惟罔敢自專而聽於內殿內殿使自養以待稍長則撫視惟謹夜必明燭達朝未嘗解衣而寢者五年如一日躬執賤役言語極其尊敬或言其太過則曰儲君也內殿之子也我何敢以己出而自尊乎居處僅蔽風雨服食務從菲薄曰我之有今日榮貴分已侈矣顧益自誇而自肆豈惟於身爲災尙可曰爲東宮惜福云乎哉及遭五月之變能以理譬遣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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嘗形于辭色人或恠其恝然則曰吾身非自有也見今宗國之危凜然如髮而幸吾有娠若任情肆悲縱吾不自恤如得罪宗國何其遘疾也症形非醫藥所治彌月沈頓而日必盥頮爲予之臨視也雖在精神迷亂四體不能運動之時對予則輒斂容作氣應答如響屬纊之前夕予臨問則忽辭致悽惋淚隨言零予責之曰平日未嘗以慽容見予今反如是何也嬪曰內殿之慶膺斯男生前至祝也賤臣之復有子雖爲宗社深幸而竊不勝私心之憂畏今果福逾分而病至革矣一死不足怛而惟以宿願之未獲爲臨死之慽焉或望頻御正殿勤求嗣續則方來之慶亦將懽忭於地下云予感而頷之及詰朝起正衣就席而訖予入視已無奈矣嬪所以爲宗國爲內殿者苟非至誠無僞則顧何能之死不忘若是其惓惓乎內殿嘗服其誠意親愛無間悼喪之懷若失同氣一宮之人皆咨嗟稱惜至於痛哭奔號焉嬪自受爵予之操切益嚴往往有人所不堪而處之怡然一意承順或事係干恩尤瑟縮斂遠愈執其謙嘗以嬪家山地之不利方議改葬嬪諫曰以賤家事至煩公費實非私意之所敢安予言其有所重而不可獲已則曰願自賣衣服以補葬需云東宮外家私親例贈贊成而予曾不許至五月喪後始降官敎嬪懼不自勝家人請行焚黃之禮嬪止之曰䝯贈卽國典所在不敢不祗受而又安敢張大乃爾予於嬪每惜其恩數饎爨絲枲之用反不如宮姬嬪雖折節從儉乎尙患艱窘輒假貸於宮中人及其歿也篋無餘帛斂襲之具皆取於市生時不造銀匙其飯含也以柳代之宮人輩瞠然相語曰固知嬪之守約而其貧乃至此乎有二娚窮窶無以自存而未嘗有私與焉予詔之曰朝家官爵固不當濫授而爾獨不以俸餘救其飢寒乎嬪蹙然而對曰設宮房以後不敢擅用一物況敢爲私家賤人沾丐之資乎故嬪之喪其親屬率借其衣靴於人云宮嬪私親之無職名者雖不通籍於禁中而許接見於本宮故事則然嬪之出寓本宮也私親之積年貽阻者使不得造門起居曰來時未敢稟承不可召見云夫兄弟之顚連欲其庇覆親懿之離闊欲其團欒此人之常情嬪豈獨異於人哉其謹守予敎令無一事自專斯足以驗也處宮闈二十有餘年未曾與人睢盱或事有難言地偪嫌疑而必委曲宛轉自至妥當予居常不以外言入內而嬪亦習於循默酬酢不出於戶庭予或臨止則所使之宮婢皆惶匿不敢前其自飭之勤而嚴於御下亦如此敏女紅善烹餁卽其餘事而筆翰亦自超凡旁通數理之學便能領會蓋其神識開悟觸處皎如非特才藝之全備而已嗚呼嬪之葬必用予銘豈爲才色之不忘乎哉予御宮掖嚴而近苛給事承令少可於意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而佩訓飭則尺寸無失愼應對則規度自有夙夜匪懈終始如一此其出類之賢固已難矣恪守常分明乎等級之嚴痛絶私謁戒其盈成之懼此其尤難者也今夫義理之關係至大是非孔彰而地處之有不敢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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口事勢之有莫可容手猶能積誠竭力直前無退使所執之義理終歸於至當至正之地者此讀書士夫之所未易辨而一有其人則指以爲能事大節傳爲當世之美談後日之尙論若嬪者出自寒微不資師承小星之女歸妹之娣初未學而知之而若其爲內殿之苦心血忱神祗可質也金石可透也一身之尊貴恩榮曾不足以爲樂而耿耿之衷懇懇之辭必欲自效於內殿乃以將死之哀鳴獲遂平生之至願雖古之尸諫之忠剚腹之誠不是過也而其執德持心純然出於本然之公有可徵矣宜其篤生賢子光承儲位功存國勢之磐泰慶毓公族之熾昌而邦運不幸神理多舛遽見今夏之喪變又未幾何與其在腹之兒一朝歸化嬪之跡其將泯沒於斯世矣其言行之卓卓可紀非予述之有孰傳之而知其爲泯沒之可惜乎此不惟爲嬪之恨而爲文孝之恨也遂撰次梗槪不覺其言之長云爾嬪以癸酉月日生得年三十有四擧一男一女男卽文孝女生未踰歲而矢嬪昌寧人昌寧之成以高麗中尹仁輔爲鼻祖中尹之子曰松國門下侍中傳三世而始入本朝曰汝完檢校政丞諡文靖文靖長子石璘次石瑢次石因禮曹判書大提學諡靖平是爲嬪之先而因中微間失譜系云七代祖萬種齊陵參奉高祖景軍資監正父曰胤祐贈贊成母曰林贈貞敬夫人引儀宗胄女也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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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之循乎天者敦行言之感乎人者至言躬敦行而口至言祿之不酬德殆命焉彼窈栗阡文孝攸藏兮永言相守想百世徊徨而咨傷兮|출처=의빈묘지명(宜嬪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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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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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묘표(宜嬪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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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내가 즉위한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일(1786년 음력 9월 14일)에 의빈 성씨가 사망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문효세자가 죽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달에 이르렀는데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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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효의왕후가 아닌 천한 몸에서 나왔는데 병에 걸려 죽으니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효의왕후에게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지내지 못 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탄식했다. 승은을 받기 시작할 때는 감히 효의왕후를 대신 하여 당석 할 수 없다며 간절히 사양했다. 내가 잠시 틈을 타서 무언가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해도 한 결 같이 온통 매우 간절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시침하는 것을 보면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은 항상 정위(정실)가 자신을 핍박하고 근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에 정실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였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빈의 권력과 부귀는 스스로 높여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빈은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한 결 같이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 현명함이 어찌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 생이고 득년 34세다.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비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으로 시사했다. 나는 빈의 집안 맏아들이 조상이 엄습하여 세상이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가 제릉참봉 성만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시 삼대 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성정경이 군자감으로 지냈는데 곧 빈의 7대조로 고조부와 같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다. 빈의 부모는 법도에 따라 추증 되었는데 이는 문효세자의 외조부모였다. 저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워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찾아오는 사람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해 하도록 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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予卽阼之十年丙午九月甲申宜嬪成氏歿是歲五月喪文孝世子嬪方有娠幾臨月而嬪遂歿矣其歿之前夕敷袵垂涕而告予曰國家螽斯之望不于正殿而于賤身賤身病且死此不稱之災也繼自今頻御正殿勤求嗣續則死無足恨蓋以內殿之未始誕育居常憂歎承恩之初苦辭不敢當夕而乘間諷切懇懇如一乃於綿綴之際猶且作氣力致宛轉言出肝膈有足感動人者予不覺改容而許之予觀從古妾御之居榮貴者常嫌正位之偪己從而有凌嫡蔑分之患其臨死之托鮮不係戀乎私屬以徼身後之寵光焉嬪則榮不以自尊死不以自慽而斷斷苦心只知有內殿必伸其志願而後已其賢豈易得哉文孝嬪之出也嬪自爲儲君母益自謙抑所處之室不加修葺被服飮食務從儉約曰我之有今日非我敢期復欲一毫侈大于前吾身之有災不暇論此豈爲東宮惜福之道哉予嚴於操切未嘗假以恩寵往往有不可堪處而略無難色謹守飭令恐恐然如有失終始罔懈處宮闈二十餘年未或與人睢盱特蒙內殿之親愛內殿哭其歿慽甚孔懷其賢於人者不亦多乎嬪生于英宗二十九年癸酉七月八日得年三十有四系籍昌寧以高麗中尹仁輔爲鼻祖中尹之子曰門下侍中松國侍中之曾孫曰檢校政丞文靖公汝完始仕我朝圭組相襲爲世望族其後中衰至齊陵參奉萬種始通仕又三世而爲軍資監正景卽嬪七世祖若高祖贈贊成胤祐贈貞敬夫人林卽嬪父母也贈秩之典以文孝外親也夫以閭巷卑微之地生此拔類之賢載誕元良寵承嬪位殆若有不偶然者而文孝之墓土未乾嬪又與在腹之子遽殞其命予所衋傷匪特爲嬪之一身而已歿越三月庚寅葬于高陽郡之栗木洞壬坐原距文孝墓百步而近以從嬪之願也死而有知庶以其孔邇爲慰也歟予以嬪之言行本末誌于壙又書其梗槪于墓石使來者惜嬪之賢而哀其命之不幸云爾|출처=의빈묘표(宜嬪墓表)}}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20년 7월 31일 (금) 23:4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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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성씨묘(宜嬪成氏墓)
서삼릉 빈·귀인 분묘 집장지 의빈성씨 묘
식별자 RT037
분류 분묘
한글명 의빈성씨묘
한자명 宜嬪成氏墓
영문명 Tomb of Royal Noble Consort Ui of the Changnyeong Sung clan
피장자 명칭 의빈(宜嬪) 창녕성씨(昌寧成氏)
피장자 이칭 정조 후궁 의빈 성씨
피장자 부 성윤우(成胤祐)
피장자 모 임종주(林宗冑)의 딸
피장자 생년월일 1753.07.08
피장자 몰년월일 1786.09.14
초장 연월일 1786.11.20
초장지 기록 고양군 율목동 임좌원(壬坐原)의빈성씨묘비
초장지 기록1 효창묘(孝昌墓) 좌강(左岡)정조실록
초장지 기록2 경성부 금정(錦町) 이정목(二丁目)능원묘천봉안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장 연월일 1940.05.15
이장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장지 좌표(위도) 37°66'56.84"N
이장지 좌표(경도) 126°85'84.06"E
지문 宜嬪昌寧成氏之墓
지문 찬자 정조(正祖)
지문 소장처 조선왕릉 서부지구관리소



목차

내용

조선 22대 왕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1753~1786)의 묘 이다. 의빈 성씨의 본관은 창녕이고, 아버지는 성윤우(成胤祐)이며, 어머니는 임종주(林宗冑)의 딸이다.

1782년(정조 6) 상의(尙儀)의 신분으로 왕자를 출산한 뒤 소용(昭容)에 봉해졌다. 1783년(정조 7) 2월에는 의빈에 봉해졌고, 1784년(정조 8) 옹주를 출산하였다. 1786년(정조 10) 9월 사망하였다.

사망 이후 의빈 성씨는 아들의 묘인 효창묘 좌강(左岡)에 안장되었다. 정조를 비롯해 이후 국왕들의 전알 및 치제 등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1940년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8월 26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서유경을 권초관으로 삼다》

서유경(徐有慶)을 권초관(捲草官)으로 삼았다. 이때 상의(尙儀) 성씨(成氏)가 해산할 달이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以徐有慶爲捲草官。 是時, 尙儀成氏彌月將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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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8월 26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9월 7일 신축(辛丑)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문효 세자의 탄생을 기뻐하다》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170) 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王子生。 上召見承旨ㆍ閣臣, 敎曰: "宮人成氏有娠, 今曉分娩。 宗英之自此蕃衍。 非但一己之幸, 繼此邦慶, 明知其非久, 益切顒企。 後宮有娠, 然後封爵, 旣有受敎, 成氏爲昭容。" 諸臣陳慶忭之忱。 上曰: "始聞爲人父之稱, 是可幸也。" 又召見時原任大臣。 僉曰: "皇天祖宗, 眷佑邦家, 乃有斯男之慶。 況是月, 卽我先大王誕彌之月, 我殿下流虹之節, 王子誕生, 又在是月, 不勝慶忭之至。 大臣欲行庭候。" 敎曰: "凡事自有次序, 名號未定之前, 設庭候, 旣無前例可據。 況乙卯年, 亦無是例, 其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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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9월 7일 신축(辛丑)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12월 28일 경인(庚寅)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성씨를 소용으로 삼다》

성씨(成氏)를 소용(昭容)으로 삼았다. 영의정 서명선이 또 건의하자, 윤허한 것이다.

以成氏爲昭容, 領議政徐命善, 又建請。 允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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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12월 28일 경인(庚寅)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5, 정조 7년(1783) 2월 19일 경진(庚辰)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소용 성씨에게 의빈의 칭호를 내리다》

소용 성씨(昭容成氏)에게 의빈(宜嬪)이란 칭호를 내렸다.

賜昭容成氏號曰宜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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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5, 정조 7년(1783) 2월 19일 경진(庚辰) 4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7, 정조 8년(1784) 윤3월 20일 을해(乙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호산청을 설치하다》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였는데, 당시 의빈 성씨(宜嬪成氏)가 딸을 낳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設護産廳。 時宜嬪成氏生女, 故有是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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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7, 정조 8년(1784) 윤3월 20일 을해(乙亥)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의빈 성씨의 졸기》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

宜嬪成氏卒。 敎曰: "嬪喪, 依甲申年例, 以後庭一等例行之。" 初宜嬪有身, 藥房都提調洪樂性, 請設護産廳。 命待當朔, 至是遘疾而卒。 上企待方切, 不勝悼惜。 朝野莫不以國本爲憂。 樂性奏曰: "五月以後, 一國係望, 惟在於此, 而又遭此變, 誠罔措矣。" 上曰: "病情奇怪, 竟至於此。 從今國事尤靡托矣。" 蓋嬪病症非常, 時疑其有祟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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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6일 병술(丙戌)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안현의 본궁에 의빈의 빈소를 차리다》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다 의빈의 빈소를 차렸다. 상구(喪柩)를 소난상(小欄床)에다 봉안하고 흰 비단 보자기로 덮고 난 다음 유장(帷帳)을 설치하였다. 단양문(端陽門)을 거처 단봉문(丹鳳門)을 나와서 견여(肩輿)로 옮겨 나아갔다.

殯宜嬪于安峴本宮。 以喪柩, 安于小欄床, 覆素錦褚, 設行帷帳。 由端陽門, 出丹鳳門, 移安肩輿以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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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6일 병술(丙戌)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의빈의 장사날을 맞아 궁과 묘소에 제사를 전례에 따라 정하다》

예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의빈(宜嬪)의 장사날이 머지 않았으니, 궁과 묘소에 제사를 지금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의열궁의 전례를 상고해 보니, 궁에는 사중삭(四仲朔)과 사명일(四名日)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제사를 지냈고 묘소에는 기신과 사명일에 본궁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따라 거행할 것입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체모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으니, 그에 따라서 거행하라." 하였다.

禮曹判書徐有隣啓言: "宜嬪禮葬不遠, 宮墓祭享, 當趁今酌定, 而取考義烈宮前例, 宮享則四仲朔、四名日, 自太常擧行; 墓享則忌辰四名日, 自本宮擧行。 今番亦依此擧行乎?" 敎曰: "體貌不可不顧, 依此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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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20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효창묘의 왼쪽 산등성이에 의빈 성씨의 장사를 치르다》

의빈(宜嬪) 성씨(成氏)의 장사를 치렀는데, 효창묘(孝昌墓)의 왼쪽 산등성이였다.

葬宜嬪成氏。 卽孝昌墓左岡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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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20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3,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선혜청 제조 서유린이 의빈묘의 위전을 절수하는 일로 아뢰다》

선혜청 제조 서유린(徐有隣)이 의빈묘(宜嬪墓)의 위전(位田)을 절수(折受)하는 일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어찌 버려져 있는 땅이 있겠는가? 산허리를 침범해 경작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이어서 도끼로 베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곳곳마다 산이 벌거숭이다. 이는 모두 수령들이 공가(公家)에서 세금을 매기지 않는 것을 이롭게 여겨 백성들에게 경작하기를 허락한 것이니, 읍력(邑力)으로 손을 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만약 이를 빙자하여 향으로 쓸 향나무와 숯을 만들 참나무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사방에서 널리 구하는데 뒤따라 모리(牟利)하는 자들이 동쪽 서쪽을 가리키며 소란을 피우며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내 뜻이겠는가? 경 등은 이런 뜻을 본받아서 궁방(宮房)이나 혹은 영문(營門)·아문(衛門)을 가리키며 소란을 피우며 시장(柴場) 가운데서 유명 무실한 곳은 혁파하고, 만일 합당한 곳을 얻으면 품처하라. 그렇지 않으면 비록 기일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절대로 외읍(外邑)에 양안(量案) 밖의 명색(名色)을 획정(劃定)하지 못하게 하라." 하니, 서유린이 말하기를, "이천부(伊川府)에 마땅한 송산(松山) 한 곳이 있기에 처음에는 황장 봉산(潢腸封山)으로 여겼었는데, 작년 본주(本州)의 백성이 소송으로 인하여 예조에서 봉산안(封山案)을 조사해 보니 원래 기록된 일이 없어서 효창묘(孝昌墓)의 위전(位田)으로 의정(擬定)하였습니다. 본 부사(府使)의 말을 듣건대, 소나무는 아주 무성하나 토지는 척박하여 개간할 수가 없으며, 또 그 옆에 삼화세(蔘火稅) 몇 결(結)이 있어서 장차 모두 넣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송정(松政)과 삼세(蔘稅)의 두 가지 일에 대해서는 성상의 뜻을 여러 차례 사륜(絲綸)에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연교(筵敎)를 받들건대 더욱 향탄(香炭)·송전(松田)에 대하여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음을 깨달았으니 그대로 봉산(封山)을 만들고 삼화세는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전대로 수세(收稅)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읍민(邑民)이 진고(陳告)한 것은 처음부터 경청(傾廳)할 일이 아니었고, 설사 또 땅이 척박하지 않고 옆에 삼세가 없었더라도 지금 산목(山木)이 곳곳마다 민둥산이 되어 있을 때에 크고 작은 나무 천만 주(株)를 베어 내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삼화세는 실로 적자(赤子)의 목숨과 관계되는데, 이제 만약 공가(公家)에 소속시킨다면 급대(給代)할 밑천을 어디서 만들어 내겠는가? 그리고 읍지(邑誌)를 상고하건대, 고미탄(古味灘) 근처에 끼어 있으니 관방(關防)의 중요한 땅이 됨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그곳에는 일찍이 성(城)을 쌓고 소나무를 심은 일이 있었으니 설치한 법의(法意)가 매우 면밀하였다. 이런 곳들은 거론하지 말아야 할 뿐만이 아니라, 진고(陳告)한 사람을 마땅히 먼저 엄중히 다스려서 간사한 백성들이 무엇을 엿보고 바라는 습성을 막아야 할 것이다. 대저 산택(山澤)의 정사는 나라의 중대한 일인데, 근래에 백성들의 습성이 아주 교활하여 이런 폐단이 있게 된 듯하니, 반드시 이 한 곳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후에는 비록 사사로운 양산(養山)의 절수(折受)라도 비변사를 거쳐서 계하(啓下)해서 행회(行會)한 것이 아니면 궁방(宮房) 및 영문·아문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스스로 조치해 주지 말라는 일을 탁지(度支)의 등록(謄錄)에 기재하라." 하였다.

宣惠廳提調徐有隣啓宜嬪墓位田折受事。 上曰: "近來豈有曠棄之地? 山腰犯耕, 誠一痼弊, 不待斧斤, 在在童濯。 此蓋守令, 利其無公家之定稅, 許民耕作, 可知邑力之無着手也。 今若藉此, 香炭之名, 四處廣求, 從以牟利者, 指東指西, 紛紜不止, 則是豈予意? 卿等體此, 就罷宮房或營、衙門柴場中有名無實處, 如得可合者, 稟處。 否則雖未及期, 切勿以外邑量外名色劃定也。" 有隣曰: "伊川府有宜松山一處, 初認以黃腸封山, 昨年本州民訴, 禮曹考見封山案, 則元無載錄之事, 擬定孝昌墓位田矣。 聞本府使之言, 則松木頗茂密, 而土地則瘠薄, 無以起墾, 且其傍有蔘火稅幾結, 將竝入云。 蓋松政、蔘稅兩事, 聖意屢形於絲綸, 而今承筵敎, 益覺其不可輕議於香炭、松田, 則仍作封山, 蔘火稅, 則請令本官, 依前收稅。" 上曰: "邑民之陳告, 初非傾聽之事, 設又土不瘠薄, 傍無蔘稅, 以今山木在處濯濯之時, 斫出大小千萬株, 且非得計。 況蔘火稅, 實關赤子之命脈, 今若屬之公家, 則給代之資, 將何辦出? 且考邑誌, 介在古味灘近處, 可知爲關防重地。 況其地曾有築城植松之擧, 設置法意, 至爲縝密。 此等處, 非惟勿擧論, 陳告人宜先嚴治, 以杜奸民覬覦之習。 大抵山澤之政, 有國重事, 近來民習至巧, 似此弊端, 必當不止此一處。 此後雖於私養山折受, 如非關由備局啓下行會, 則宮房及營衙門, 無得擅自劃屬事, 載之度支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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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3,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3, 정조 11년(1787) 1월 10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문희묘를 의빈묘 근처로 복지하고 사당터를 의빈궁 서쪽 담장 밖으로 정하다》

하교하기를, "문희묘(文禧廟)를 처음에는 경모궁(景慕宮) 남쪽 담장 밖에다 정했었는데, 작년 9월 이후에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으로 헤아려서 의빈묘(宜嬪廟) 근처로 복지(卜地)하는 것이 실로 편리하고 합당하여 사당 터를 의빈궁 서쪽 담장 밖으로 옮겨 정했었다. 이번에는 청(廳)을 설치하지 말고, 호조·공조의 당상(堂上)과 낭관(郞官) 각 1원(員)씩이 감독하라." 하였다.

敎曰: "文禧廟, 初定於景慕宮南墻外, 昨年九月後, 揆以神理、人情, 就宜嬪廟近處卜地, 實爲便當, 廟基以宜嬪宮西墻外移定。 今番勿設廳, 戶、工曹堂郞, 各一員監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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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3, 정조 11년(1787) 1월 10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6, 정조 12년(1788) 7월 8일 무진(戊辰)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각신을 보내 효창묘에 전작례를 행하고, 승지로 하여금 의빈묘에 치제케 하다》

각신(閣臣)을 보내어 효창묘(孝昌墓)에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승지를 보내어 의빈묘(宜嬪墓)에 치제(致祭)하였다.

遣閣臣, 行奠酌禮于孝昌墓, 遣承旨, 致祭于宜嬪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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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6, 정조 12년(1788) 7월 8일 무진(戊辰)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7, 정조 13년(1789) 4월 25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문희묘가 완성되다. 문효 세자 혼궁·효창묘·의빈묘에서 다례를 행하다》

문희묘가 완성되었다. 상이 왕림하여 재실에서 영건청(營建廳)의 당상과 낭관을 불러 보았다. 경희궁(慶熙宮)에 가서 문효 세자 혼궁(文孝世子魂宮)에 다례를 행하고서 이어 효창묘(孝昌墓)와 의빈묘(宜嬪墓)에 가서 다례를 행하였다.

文禧廟成。 上駕臨, 召見營建堂郞于齋室。 詣慶熙宮, 行茶禮于文孝世子魂宮, 仍臨孝昌墓、宜嬪墓, 行茶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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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7, 정조 13년(1789) 4월 25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7, 정조 13년(1789) 4월 26일 임자(壬子)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문효 세자의 신위를 문희묘로 옮겨 봉안하고, 봉안제와 별다례를 행하다》

문효 세자의 신위(神位)를 문희묘로 옮겨 봉안하였다. 상이 친히 구묘(舊廟)에서 고동련제(告動輦祭)를 행하고, 옮겨 봉안한 뒤에는 신묘(新廟)에서 봉안제(奉安祭)를 행하고 또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이어 의빈묘로 가서 별다례를 행하였다. 중궁전(中宮殿)은 문희묘에 갔다가 예가 끝나자 환궁하였다.

移奉文孝世子神位于文禧廟。 上親行告動輦祭于舊廟, 移奉後, 親行奉安祭于新廟, 又行別茶禮。 仍臨宜嬪廟, 行別茶禮。 中宮殿臨廟, 禮畢還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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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7, 정조 13년(1789) 4월 26일 임자(壬子)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8, 정조 13년(1789) 12월 28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경모궁에 전배하고 문희묘, 의빈묘에 전작례를 행하다》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고, 지나는 길에 문희묘(文禧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들러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展拜景慕宮, 歷臨文禧廟、宜嬪廟, 行奠酌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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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8, 정조 13년(1789) 12월 28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9, 정조 14년(1790) 3월 24일 갑진(甲辰)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경모궁에 전배하다》

경모궁(景慕宮)에 전배(殿拜)하였다. 문희묘(文禧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고, 이어 의빈묘(宜嬪廟)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집 앞에 이르러 그의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사관(史官)을 보내 병문안을 하였다.

展拜于景慕宮, 詣文禧廟, 行奠酌禮, 仍臨宜嬪廟, 駕還錦城尉 朴明源家前, 聞其病甚, 遣史官存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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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9, 정조 14년(1790) 3월 24일 갑진(甲辰) 1번째 기사



『순조실록』권6, 순조 4년(1804) 9월 1일 정해(丁亥)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궐리사에 정경을 보내 전작하고, 효령 대군 등의 묘에 사람을 보내 치제하다》

(전략)……창빈(昌嬪)·명빈(䄙嬪)·의빈(宜嬪)·연령군(延齡君)·해창위(海昌尉)의 묘에는 내시(內侍)를 보내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命…(중략)…昌嬪、䄙嬪、宜嬪、延齡君、海昌尉墓, 遣內侍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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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6, 순조 4년(1804) 9월 1일 정해(丁亥) 2번째 기사



『순조실록』권10, 순조 7년(1807) 9월 1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효창묘에 나아가 작헌례하고 김재찬을 소견하다》

효창묘(孝昌墓)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의빈묘(宜嬪墓)에 역림(歷臨)하였다가, 이어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詣孝昌墓, 行酌獻禮, 歷臨宜嬪墓, 仍詣南關王廟, 行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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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10, 순조 7년(1807) 9월 1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순조실록』권13, 순조 10년(1810) 8월 28일 경술(庚戌)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명빈 등의 묘소와 조광조 등의 사판과 서원에 사람을 보내 제사지내도록 하다》

명빈(䄙嬪)과 의빈(宜嬪)의 묘에 내시를 보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命䄙嬪、宜嬪墓, 遣內侍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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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13, 순조 10년(1810) 8월 28일 경술(庚戌) 2번째 기사



『철종실록』권13, 철종 12년(1861) 2월 6일 갑자(甲子)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능창 대군 등의 묘에 치제하게 하다》

하교하기를, "능창 대군(綾昌大君) 묘(墓)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영온 옹주(永溫翁主) 묘(墓)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 묘(墓)는 연로(輦路)에 있고 또 면례(緬禮)가 멀지 않았다고 하니, 지방관(地方官)을 보내어 치제하고, 의빈묘(宜嬪墓)에는 내시를 보내어 치제하며, 현절사(顯節祠)에는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토록 하라." 하였다.

敎曰: "綾昌大君墓, 遣禮官致祭, 永溫翁主墓, 遣內侍致祭, 正文公ㆍ金洙根墓, 在輦路, 且緬禮不遠云, 遣地方官致祭, 宜嬪墓, 遣內侍致祭, 顯節祠, 遣承旨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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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종실록』권13, 철종 12년(1861) 2월 6일 갑자(甲子) 2번째 기사



『고종실록』권7, 고종 7년(1870) 1월 2일 무진(戊辰)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인빈, 영빈, 화빈, 희빈, 정빈, 의빈, 영빈 등의 사당의 신주를 옮기다》

전교하기를, "친진(親盡)하여 조천(祧遷)하는 것은 어길 수 없는 제도이며 역시 옛날부터 전해오는 제왕들의 가법(家法)이다. 그런데 유독 의소묘(懿昭廟)의 사우(祠宇)를 아직 옮기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겨를이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각궁(各宮)에 따로 사당을 세운 것은 당시로서는 없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만, 오늘에 와서는 어느 한 곳의 별묘(別廟)에 합쳐 봉안(奉安)하는 것이 사리에 부합되는 것이다. 인빈 김씨(仁嬪金氏)·영빈 김씨(寧嬪金氏)·화빈 윤씨(和嬪尹氏)의 사우는 경우궁(景祐宮) 안의 별묘에 함께 모시고, 희빈 장씨(禧嬪張氏)·정빈 이씨(靖嬪李氏)·영빈 이씨(暎嬪李氏)·의빈 성씨(宜嬪成氏)의 사우는 육상궁(毓祥宮) 안의 별묘에 함께 모시며, 문효 세자(文孝世子)의 사우는 의소묘 안의 별묘에 이봉(移奉)하여야 할 것이다. 제반 의식 절차는 호조(戶曹)와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으로 하여금 대원군(大院君)에게 품처(稟處)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敎曰: "親盡而祧, 卽莫越之制, 而亦自古帝王家法。 然而惟獨懿昭廟之尙未祧遷, 實是未遑之事也。 且各宮之別立廟貌, 在當時雖不可闕而然矣, 到今則合奉於一處別廟, 正合事宜。 仁嬪金氏、寧嬪金氏、和嬪尹氏祠宇, 合奉於景祐宮內別廟; 禧嬪張氏、靖嬪李氏、暎嬪李氏、宜嬪成氏祠宇, 合奉於毓祥宮內別廟; 文孝世子祠宇, 移奉於懿照廟內別廟。 諸般儀節, 令戶禮堂, 稟處於大院君前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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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7, 고종 7년(1870) 1월 2일 무진(戊辰) 2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1, 고종 11년(1874) 3월 5일 정미(丁未)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영의정 이유원이 재정을 절약할 것을 아뢰다》

또 하교하기를, "무과(武科)에서 삭천(削薦)된 자 가운데 육상궁(毓祥宮), 선희궁(宣喜宮)의 본가(本家) 사람으로서 삭천된 자는 모두 다시 추천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것이야말로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연석에 나온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장수는 이러한 내용으로 거행하라." 하니, 이경하(李景夏)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하신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최가(崔哥) 성을 가진 사람은 이미 장임(將任)이었고, 이가(李哥) 성을 가진 이도 또한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일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손들이 선천(宣薦)이 되지 못하였으니 사실 매우 억울한 일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군공(軍功)이 있는 사람은 상민(常民)이든 천민(賤民)이든 오히려 불차탁용(不次擢用)하는데, 하물며 두 궁(宮)의 사친(私親)의 본가 사람이야 더 말할 게 있는가? 의빈 성씨(宜嬪成氏)의 가문도 또한 삭천되었으니, 일체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일체로 다시 추천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다시 추천해야 할 사람을 합하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합하면 200여 인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모두 다시 추천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세 성(姓)에 대해서는 전부 다시 추천하고, 그 나머지는 적합한 사람에게 시행하도록 하라."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又敎曰: "武科削薦中, 毓祥宮、宣禧宮本家人削薦者, 竝復薦好矣。" 裕元曰: "此誠當行之事, 分付登筵將臣, 使之擧行, 恐好矣。" 敎曰: "將臣以此擧行也。" 景夏曰: "謹當依下敎擧行矣。 崔姓旣爲將任, 李姓亦有爲平安兵使者。 其後裔之不得爲宣薦, 果甚抑鬱矣。" 敎曰: "軍功人雖常賤, 尙得不次擢用, 況兩宮私親之本家人乎? 宜嬪成氏家, 亦入削薦中, 一體擧行可也。" 景夏曰: "謹當一體復薦矣。" 敎曰: "可合復薦者, 合爲幾人乎?" 景夏曰: "合爲二百餘人, 而有難一朝遽然竝復矣。" 敎曰: "三姓則盡爲復薦, 其餘則隨可合人施之可也。" 景夏曰: "謹依下敎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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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11, 고종 11년(1874) 3월 5일 정미(丁未) 1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5, 고종 15년(1878) 1월 29일 기묘(己卯)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육상궁과 경우궁의 제관은 옛 규례를 회복하여 삼헌관으로 마련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영소묘(永昭廟), 문희묘(文禧廟)에는 우승지(右承旨)를 보내어 봉심(奉審)하게 하고 희빈묘(禧嬪廟), 의빈묘(宜嬪廟)에는 내시(內侍)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게 하라." 하였다.

敎曰: "永昭廟、文禧廟, 遣右承旨奉審, 禧嬪、宜嬪, 遣內侍看審以來。" 又敎曰: "毓祥宮、景祐宮祭官, 復舊例, 三獻官磨鍊。 而初獻官, 從二品; 亞獻官, 堂上三品; 終獻官堂, 下三品。 塡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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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15, 고종 15년(1878) 1월 29일 기묘(己卯) 2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8, 고종 18년(1881) 4월 9일 경자(庚子)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영소묘와 문희묘, 희빈묘와 의빈묘를 간심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영소묘(永昭廟)와 문희묘(文禧廟)에 도승지(都承旨)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敎曰: "永昭廟、文禧廟, 遣都承旨; 禧嬪、宜嬪, 遣內侍, 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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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18, 고종 18년(1881) 4월 9일 경자(庚子) 2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1517책(탈초본 82책), 정조 6년(1782) 9월 7일 신축(辛丑) 9/20 기사

Quote-left blue.png 尙衣成氏, 昭容封爵事, 承傳。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517책(탈초본 82책), 정조 6년(1782) 9월 7일 신축(辛丑) 9/20 기사



『승정원일기』 1608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8월 12일 임자(壬子) 44/47 기사

Quote-left blue.png 上曰, 何爲請對? 樂性曰, 宜嬪産期, 只隔數月, 慶幸之忱, 不可勝達。當此八域臣民顒祝企待之日, 護産設廳, 不可膠守常例。雖以藥院事言之, 設廳, 然後方有隨時診察之道, 護産廳吉日, 今月內擧行, 何如? 上曰, 産室廳·護産廳, 體貌各異。雖以産室廳言之, 前期三朔, 設廳內殿外無是例, 至於護産廳, 例於當朔設廳。以卿等企待之忱, 有此拔例設廳之請, 乙卯年所未行之擧, 今何敢創始? 待當朔, 設護産廳, 可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08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8월 12일 임자(壬子) 44/47 기사



『승정원일기』 1610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13/13 기사

Quote-left blue.png 上命書傳敎曰, 宜嬪喪, 依甲申年例, 以後庭一等禮擧行事, 分付。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0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13/13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4일 갑신(甲申) 13/14 기사

Quote-left blue.png 上命書傳敎曰, 宜嬪喪發靷日, 臨壙等奠, 遣承旨致祭, 今番祭品, 不煩外邑, 執事官, 亦勿以列邑守令塡差, 以都事及地方官察訪, 附近守令爲之事, 分付。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4일 갑신(甲申) 13/14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6일 병술(丙戌) 10/12 기사

Quote-left blue.png 上曰, 今番禮葬, 倣用甲申已例, 則墓所當有典監, 而一局之內, 不必別置, 仍以守衛官兼察似好, 錦城尉之意, 何如? 明源曰, 玆事便同官制, 臣不敢遽然仰對, 而今番墓所, 雖與孝昌墓, 同在一局, 義烈墓旣有典監, 則仍令守衛官兼管, 恐涉如何矣。上曰, 禮判亦陳所見, 可也。有隣曰, 昭寧園·綏吉園, 同奉於一局之內, 故守奉官, 兼管擧行, 此可爲旁照之端, 而義烈墓, 旣有典監, 援用此例, 亦似無妨矣。上曰, 然則以典監差出, 可也。明源曰, 若以典監差出, 則例有復戶矣。有隣曰, 復戶, 分付該廳, 考例劃給,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有隣曰, 宜嬪墓所守護軍, 今當磨鍊矣, 額數, 依義烈墓例, 以三十名充定之意, 分付畿營, 給復等節, 亦令該廳, 擧行, 何如? 上曰, 依爲之。此墓係是孝昌墓一局, 原定額數, 雖以三十名磨鍊定式, 而責立則以二十名爲之, 以除畿民簽丁苟艱之弊, 可也。出擧條 有隣曰, 宜嬪禮葬不遠, 返虞後, 內廟, 多有擧行之事, 守僕, 依甲申例, 差定, 雇立名色, 亦依甲申例定送,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有隣曰, 宜嬪墓所諸節, 不可不趁今擧行, 而香炭及位田, 取倣甲申前例, 望定劃給, 何如? 上曰, 香炭則卿與戶判, 相議望定後, 草記, 位田則錦城尉, 旣管本事, 從便求得, 仍令言送于卿等, 亦爲草記, 可也。上曰, 孝昌墓香炭位田, 尙未決定, 事甚苟艱, 卿等斯速探問稟定, 卿等官職, 有遞易之時, 有難專意主管, 亦令錦城尉, 知此意, 使之主管往復, 期於從速歸一, 可也。出擧條 有隣曰, 文禧廟, 分設禁漏溫水木, 當爲磨鍊上下, 而此時加定, 有難如例爲之, 自本廳, 參量容入, 直下本所, 恐合事宜, 故敢此仰達矣。上曰, 依爲之。出擧條 鼎修曰, 臣於日前, 以獻官進詣孝昌墓, 則享官入接等節, 全然未備, 鋪陳柴油之屬, 係是應行之事, 而初不措置, 外此凡百, 亦不成樣, 非但所見之可悶, 抑亦事體之苟艱。臣意則亟令該曹下帖, 知委於本墓守衛官, 來頭祭享時, 使之一依各陵園墓例擧行, 恐合事宜, 故適因言端, 敢此仰達矣。上曰, 依爲之。出擧條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6일 병술(丙戌) 10/12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23/24 기사

Quote-left blue.png 丙午十一月十八日午時, 上御重熙堂。禮房承旨入侍時, 左承旨徐鼎修, 假注書金祖淳, 記事官尹行任·李相璜, 以次進伏訖。上曰, 禮判使之入來。賤臣承命出與禮曹判書徐有隣偕入進伏。上曰, 柳文養·洪元燮, 亦爲入侍。賤臣承命出, 與兵曹佐郞柳文養, 戶曹正郞洪元燮, 偕入。上曰, 諸凡擧行之事, 何以爲之乎? 元燮曰, 自本曹, 措備者, 盡爲擧行矣。上曰, 道路能無狹隘之患否? 文養曰, 臣往來看審, 則別無汚穢之物, 而獨校洞兩邊, 甚多且隘矣, 然皆設房堗, 無以除治, 是甚可悶矣, 有隣曰, 元嬪廟墓, 劃送祭需設行等節, 更考可合前例, 登對稟處事, 命下矣。遍考本曹謄錄及惠廳祭需劃送式例, 實無可合前例, 而太常祭圖中, 國舅家忌日仲朔祭物, 備送一款, 或可爲傍照之端, 旣不折受, 又不設宮, 則似不得不依此擧行, 而亦非十分襯當之例。臣不敢指的仰對, 至於設行日字及祭官, 倣用各宮房已例, 恐合事宜, 故敢此仰達矣。上曰, 宮則時享日字, 以二至二分磨鍊, 而時享懿昭墓典祀廳, 自可竝設, 熟設後, 入給中使, 使之行祭。墓則忌辰及俗節, 輸送祭物于本墓, 墓監, 監視熟設, 獻官則不必別差, 當遣中使設行。若此, 則倣用國舅家輸送太常祭物之例, 參用宮房行祀之制, 依此定式施行, 祭品則自本曹, 別單書入, 以爲量減之地, 可也。有隣曰, 廟墓祭品, 比前自當減省, 尊罍等不用祭器, 竝使之還下戶曹, 何如? 上曰, 依爲之。有隣曰, 伏承筵敎, 墓監已命自內差定矣, 料布等節, 何以爲之乎? 上曰, 料布, 參酌磨鍊, 量宜給復, 可也。有隣曰, 廟墓修改等節, 今則不當自戶曹及繕工主管, 而旣無該宮, 以何處定式擧行乎? 上曰, 宮與墓, 春秋季朔, 自內需司, 別定官員, 看審有無頉, 形止, 仍自該司, 草記稟旨, 可也。有隣曰, 宜嬪禮葬不遠, 宮墓祭享, 所當趁今磨鍊, 而取考義烈宮前例宮享, 則四仲朔四名日, 自太常擧行。墓享則忌辰四名日, 自本宮擧行, 今番亦依此擧行乎? 上曰, 體貌不可不顧, 依此爲之。有隣曰, 祭享旣已如是定式, 義烈宮及本宮四仲朔肉膳價米, 自惠廳, 直送, 各自本宮, 措備擧行乎? 上曰, 依爲之。出擧條 命書傳敎曰, 今日卽義烈宮封爵設宮之回甲也。先朝癸酉年, 毓祥宮封爵回甲日, 上謚封園, 以予追感之意, 逢今日, 豈無表意之擧? 然因事故未得躬拜宮墓, 已令承旨奉審, 而不可虛度此日。本家人中李仁康, 雖已甄用, 其子前兵使李性默, 尙無職名, 今日政, 相當職調用, 如無窠, 三營門中堂上窠, 作闕調用事, 分付。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23/24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9일 기축(己丑) 11/12 기사

Quote-left blue.png 丙午十一月十九日辰時, 上御重熙堂。奉命承旨入侍時, 左承旨徐鼎修, 右承旨洪仁浩, 右副承旨洪明浩, 假注書金祖淳, 記事官尹行任·李相璜, 以次進伏訖。上曰, 宜嬪葬時, 各樣笏記, 已爲成出耶? 鼎修曰, 然矣。上曰, 笏記已成, 則引儀崔慶鎭, 率去, 使之臚唱, 可也。發靷當在二更末三更初云, 致祭承旨, 早往本宮, 香祝則安於舍廊大廳, 而靷具凡百, 亦須看檢也。鼎修·仁浩·明浩等, 承命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9일 기축(己丑) 11/12 기사



『승정원일기』 1617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23/24 기사

Quote-left blue.png 丁未正月初九日酉時, 上御會慶堂。戶房承旨, 與錦城尉戶曹判書惠堂入侍時, 行左承旨李在學, 假注書李德鉉, 記事官李相璜·金祖淳, 錦城尉朴明源, 戶曹判書趙璥, 宣惠廳堂上徐有隣, 以次進伏訖。有隣曰, 宜嬪墓位田, 有戶惠堂相議, 略倣義烈宮例望定之命, 而前後聖敎, 每以覓得不關於民邑之地, 丁寧諄複, 故雖有數三可合處, 而不敢提達矣。日前始聞金海府, 有量舊陳中, 還起處及草場百餘結, 曾爲折受於宮房, 己亥年間, 適因事端, 屬之戶曹云矣。量舊陳及草場, 便是量外, 而自來官房之土, 於民邑俱不關係, 以此移作宜嬪墓位田, 最爲無弊。戶判, 今方入侍, 下詢處之, 何如? 上曰, 戶判之意, 何如? 璥曰, 此旣是陳荒處起耕, 而曾前折受於宮房者, 以此作爲宜嬪墓位田, 則事勢便好, 誠如惠堂所奏矣。上曰, 依爲之。文禧廟·孝昌墓香炭, 尙未望定, 此亦戶惠堂, 更加詳探, 後日登對時稟處, 而近來豈有空閒曠棄之地? 山腰犯耕, 誠一痼弊, 不待斧斤, 在在童濯, 此蓋守令, 利其無公家之定稅, 許民耕作, 共睹沾潤, 可知邑力之無着手也。今若藉此香炭之名, 四處廣求, 從以牟利者, 指東指西, 紛紜不止, 則是豈予前此防塞量外火田於宜嬪房之意也? 卿等, 體予此意, 就罷宮房或營門衙門柴場中, 有名無實處, 抄出摘奸, 如得可合者, 從近稟處, 否則雖未能及期劃屬, 切勿以外邑量外名色, 望定, 可也。出擧條 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7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23/24 기사



『승정원일기』 1617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1월 10일 기묘(己卯) 54/56 기사

Quote-left blue.png 丁未正月初十日卯時, 上御會慶堂。來待諸臣入侍時, 右承旨徐鼎修, 假注書李德鉉, 記事官李相璜·金祖淳, 錦城尉朴明源, 戶曹判書趙璥, 宣惠廳堂上徐有隣, 以次進伏訖。上曰, 昨日看審則卿等所見, 何如? 僉曰, 宜嬪墓西墻近處, 實合卜地矣。上曰, 今則以此完定爲好, 而始役則何間爲之耶? 璥曰, 臣等未敢質定仰對矣。上命書傳敎曰, 文禧廟基址, 初定於景慕宮南墻外矣。昨年九月以後, 揆以神理, 人情, 就宜嬪廟近處卜地, 實爲便當。戶判昨旣進往, 看審廟基, 以宜嬪宮西墻外家舍移定, 始役日子, 今秋來春間, 待下敎擇吉擧行。今番勿設廳, 戶工曹堂上郞廳, 各一員, 以文禧廟營建堂上郞廳, 自吏曹, 臨時啓下, 至於入啓及行會文書之事係廟役者, 以營建廳稱號, 昨年不但已有筵敎, 以今經費, 許多物力, 豈可責之度支? 甲辰冊禮後, 常供之儲留該廳者, 數必不少, 廟役時, 以此取用於惠聽事, 分付戶曹, 命入外辦。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7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1월 10일 기묘(己卯) 54/56 기사



『승정원일기』 1625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5월 1일 정묘(丁卯) 22/23 기사

Quote-left blue.png 丁未五月初一日辰時, 上詣孝昌墓。擧動入侍時, 行都承旨沈豐之, 左承旨李亨元, 右承旨徐鼎修, 左副承旨趙衍德, 右副承旨徐有成, 同副承旨曺允大, 記事官金孝建, 假注書李德鉉, 記事官李相璜·金祖淳, 閣臣徐龍輔·尹行任, 以次侍立訖。上具戎服, 乘輿以出, 至降輿所, 左通禮啓請降輿乘馬, 上降輿乘馬, 自興化門, 由敦義門出詣孝昌墓。命宣傳官李永喆汰去分揀。亨元曰, 今日動駕時, 交龍旗奉持馬, 不善把立, 致有不實之患, 事極駭然。當該次知宣傳官及兵曹摠府郞廳, 所當重勘, 而本院請推之外, 無他可施之罰, 何以爲之乎? 上曰, 拿處, 可也。出擧條 上曰, 行祭後, 朝廷問安勿爲之。駕至墓所作門外, 左通禮啓請下馬乘輿, 上下馬乘輿。左右通禮前導入大次, 行祭時至, 左通禮詣大次前, 啓請外辦。上具衰服, 出詣丁字閣, 行禮如儀儀註見上 訖。豐之曰, 莫重親祭, 香盒不盛香, 事極驚駭。守僕, 令攸司科治, 當該官司, 所當重勘, 而本院請推之外, 無他可施之罰, 何以爲之乎? 上曰, 推考, 可也。出擧條 仍哭臨墓所, 次詣宜嬪墓哭臨, 還大次。還宮時至, 左通禮啓請外辦, 上改具戎服, 乘輿出至降輿所, 左通禮啓請降輿乘馬。上降輿乘馬。命書傳敎曰, 自墓所洞口, 至敦義門捧上言。上曰, 守禦使金鍾秀, 仍佩往來。自敦義門, 由敦化門, 至降馬所, 左通禮啓請降馬乘輿, 上降馬乘輿, 由協陽門還內,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25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5월 1일 정묘(丁卯) 22/23 기사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2일 병자(丙子) 13/13 기사

Quote-left blue.png 命仁浩書傳敎曰, 十四日孝昌墓, 遣官攝祭, 初獻官, 曾經輔養官中爲之, 宜嬪宮墓, 遣都尉致祭, 以此, 分付。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2일 병자(丙子) 13/13 기사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3일 정축(丁丑) 11/12 기사

Quote-left blue.png 丁未九月十三日辰時, 上御重熙堂。右副承旨入侍時。右副承旨洪仁浩, 假注書趙台榮, 記事官李相璜·金祖淳, 以次進伏訖。上曰, 宜嬪宮致祭, 錦城尉已受香出去耶? 仁浩曰, 已爲傳香矣。上曰, 祥祭祭文, 曾有親撰者, 承旨出往該宮, 使忠義, 依祝式書之, 而孝昌墓香祝及宜嬪墓香祝, 權安於書題所, 待明曉出往墓所, 朝上食時, 兼行攝祭, 可也。攝祭祭官, 皆令徑詣好矣。仁浩曰, 祥祭則有三獻, 致祭則只單獻, 何以擧行乎? 上曰, 致祭行三獻可也。仁浩曰, 孝昌墓, 旣已塡差大祝, 祭文何以爲之乎? 上曰, 藝文提學牌招, 製進, 可也, 昨年冬宜嬪葬禮時, 多賴承旨之檢擧, 得免紛雜之患云, 今亦依前爲之, 可也。仁浩曰, 昨年臣亦以承旨, 奉命護喪矣。上曰, 本宮致祭時, 則承旨, 依昨年例參班, 明日則參班於孝昌墓攝祭, 可也。仍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3일 정축(丁丑) 11/12 기사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4일 무인(戊寅) 18/18 기사

Quote-left blue.png 丁未九月十四日巳時, 上御重熙堂。右副承旨入侍時。右副承旨洪仁浩, 假注書趙台榮, 記事官李相璜·金祖淳, 以次進伏訖。仁浩曰, 臣承命馳詣孝昌墓參班矣。上曰, 不必畢說矣。奉審無頉, 而享事俱利成乎? 仁浩曰, 然矣。孝昌墓上食, 例爲設行於丁字閣, 別茶禮則排設於床石事, 曾有下敎, 而今番則攝祭爲重, 故雖兼上食, 亦爲過行於象設矣。上曰, 善爲之矣。聞孝昌墓所屬, 謂與宜嬪墓分定境界, 初不管攝, 且多侵侮紛鬧之患云。若知所重之有在, 渠輩焉敢如此? 此後則勿分境界, 令孝昌墓所屬, 兼管宜嬪墓守護等節。若有如前爭鬧之弊, 隨現重繩之意, 禮判出往墓所, 各別申飭, 下帖書付於各其直所, 戶判亦爲出往, 看審墓下當買之田土爲好。禮·戶判今日出去, 過夕上食後入來之意, 招致戶·禮吏分付。筵敎一通, 亦爲錄送, 可也。下番翰林, 亦爲出去奉審, 可也。仍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4일 무인(戊寅) 18/18 기사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5일 기묘(己卯) 14/16 기사

Quote-left blue.png 曺允大, 以禁衛營言啓曰, 臣有大, 昨日依下敎馳往孝昌墓時得聞, 植木監官, 與宜嬪墓山直起鬧之說, 捉入監官金德龜, 問其委折, 則渠雖飾辭發明, 誠有難掩之跡。禁標近地當陳之處, 以渠田疇相連之故, 冒禁犯耕, 山直言于典監, 至有禁止之擧, 因此含嫌, 語侵典監, 非止一再, 仍又告訴於守墓官。守墓官, 奪其山直帖文, 使之斥退, 而山直則旣無所失, 公然見除, 監官則不知宜嬪墓事體之重, 恣意凌侮於典監者。究厥所爲, 其心實由於局內禁養, 渠獨自專, 不使他人管攝於其間, 致有此紛紜之弊矣, 敢啓。傳曰, 知道。此後摘奸, 更或如前起鬧, 各別痛治後, 草記, 可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5일 기묘(己卯) 14/16 기사



『승정원일기』 1642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5월 11일 임신(壬申) 27/30 기사

Quote-left blue.png 戊申五月十一日午時, 上御重熙堂。魂宮堂上入侍時, 右副承旨洪仁浩, 假注書白慶楷, 記事官李相璜·金祖淳, 魂宮堂上徐有隣, 以次進伏訖。上曰, 王大妃殿進御香砂六君子湯一貼, 更爲煎入。出榻敎 有隣曰, 兩墓香炭可合處, 望定於順天·同福矣。兩邑稅納, 今始上來, 順天稅錢, 輸送孝昌墓, 以爲自今望日以後香炭之需, 同福稅錢, 依義烈宮例, 輸送宜嬪宮, 以爲廟墓香炭之需, 恐合事宜, 故敢此仰達矣。上曰, 依爲之。出擧條 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42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5월 11일 임신(壬申) 27/30 기사



『승정원일기』 1644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7월 6일 병인(丙寅) 28/28 기사

Quote-left blue.png 書傳敎曰, 再明日孝昌墓, 遣閣臣替行奠酌禮, 執事曾經宮銜人爲之, 宜嬪墓, 遣承旨致祭, 承旨·右副進去, 命鶴聞進伏。命書孝昌墓奠酌禮祭文, 旣酹又酹知不是日, 隔岡之阡, 其冤壹鬱, 宜嬪墓致祭祭文, 忍臨昨夜, 又侑今日, 慟徹幽明, 是日何日? 敎曰, 祭文一本精寫, 送于內閣, 一本送于香室, 可也。行祭時至, 上臨文禧廟, 行祭如儀, 祭畢。命書傳敎曰, 明日朝廷問安勿爲之。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44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7월 6일 병인(丙寅) 28/28 기사



『승정원일기』 1644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7월 7일 정묘(丁卯) 12/22 기사

Quote-left blue.png 南鶴聞, 以戶曹言啓曰, 文禧廟四名日, 四仲朔祭, 孝昌墓忌辰祭, 四名日祭祭物, 宜嬪宮忌日祭四名日, 四仲朔祭祭物各種, 依例加定事, 陳達蒙允矣。文禧廟·孝昌墓祭物別單一件及宜嬪宮祭物別單一件, 分道磨鍊書入, 依此給價之意, 分付宣惠廳,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44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7월 7일 정묘(丁卯) 12/22 기사



『승정원일기』 1646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9월 7일 을축(乙丑) 14/15 기사

Quote-left blue.png 至孝昌墓洞口, 下馬乘輿入齋室, 改具翼善冠黲袍, 臨墓上行奠酌禮, 仍臨宜嬪墓奠酌, 還入齋室, 改具戎服, 乘轎出齋室, 至紅箭門外, 命漢城判尹徐有防, 招集五江民人, 敎曰, 爾等兩日曳船, 其勞不些, 宜有酬勞之擧, 玆今賑廳, 每名下各給兩日料米, 而或有中間縻費之慮, 以錢代給爲好, 以此分付, 可也。駕由崇禮門, 入敦化門至協陽門外, 降轎乘輿, 還內,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46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9월 7일 을축(乙丑) 14/15 기사



『승정원일기』 1648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11월 5일 계해(癸亥) 25/29 기사

Quote-left blue.png 戊申十一月初五日辰時, 上詣孝昌墓擧動入侍時, 行左承旨李時秀, 右承旨李亨元, 左副承旨李祖承, 同副承旨李敏采, 假承旨鄭東浚·李敏輔, 記事官金孝建, 假注書趙台榮, 記事官李相璜·金祖淳, 一提學金鍾秀, 檢校直提學徐有防·李秉模, 檢校直閣金載瓚·徐鼎修, 待敎尹行任, 以次隨駕。上具戎服, 乘輿出廣達門, 降輿乘轎, 出興化門, 由敦義門, 詣孝昌墓齋室, 降轎, 御齋室。少頃, 乘輿臨孝昌墓, 行奠酌禮如儀。命左議政李性源, 行望燎禮。仍詣宜嬪墓, 行奠酌禮, 還御齋室。命書榻敎曰, 今日還宮時, 嚴時刻置之, 待下敎, 只入外辦。又命書榻敎曰, 兩墓守僕以下及守護軍, 依例施賞。上曰, 京畿監司入侍。賤臣承命出, 與京畿監司趙鼎鎭, 偕入進伏。上曰, 卿之一番辭疏, 無或爲怪, 而至於所引太過矣。鼎鎭曰, 終始生成之澤, 偏及臣身, 無容更達, 而旣被傷風敎之目, 則何敢晏然於旬宣之任乎? 上曰, 在卿非同堂之親, 有何傷於風敎乎? 更勿爲引也。命鼎鎭先退。上曰, 還宮後, 朝廷問安, 勿爲之。出榻敎 命書傳敎曰, 朝廷問安, 旣命停之, 今夜行祭時, 明日行禮時, 只東西班隨駕堂郞, 參班事, 分付。命書榻敎曰, 明日親祭罷後, 朝廷問安及經宿問安, 竝勿爲之。少頃, 乘輿出齋室, 降輿乘轎進發, 由敦義門, 入興化門, 入廣達門, 還內, 諸臣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48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11월 5일 계해(癸亥) 25/29 기사



『승정원일기』 1655책(탈초본 88책), 정조 13년(1789) 4월 30일 병진(丙辰) 16/16 기사

Quote-left blue.png 己酉四月三十日辰時, 上御誠正閣。右副承旨入侍時, 右副承旨韓用龜, 假注書李海隣, 編修官曺亨壽, 記事官金鳳顯, 以次進伏訖。上曰, 兵曹參判入侍。賤臣承命出, 與兵曹參判柳誼偕入。上曰, 左副承旨入侍。出榻敎 賤臣承命出傳。左副承旨李家煥進伏。仍命書傳敎曰, 政官牌招開政。誼曰, 文禧廟同奉宜嬪廟, 兩廟奉安之地, 大門軍士之雇軍一名, 極涉疎虞。本曹留營鄕軍中, 限三名定送, 與雇軍一名合爲四名, 而若値科場之時, 則限二名使用, 過場後還爲守直事, 定式,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誼曰, 文禧廟員役章標, 待報來卽爲造送似好, 敢此仰達矣。上曰, 依爲之。出擧條 仍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55책(탈초본 88책), 정조 13년(1789) 4월 30일 병진(丙辰) 16/16 기사



『승정원일기』 1664책(탈초본 88책), 정조 13년(1789) 9월 6일 기축(己丑) 37/38 기사

Quote-left blue.png 己酉九月初六日巳時, 上御重熙堂。右承旨入侍時, 行右承旨徐鼎修, 記事官徐有聞·李相璜·金祖淳, 以次進伏訖。上曰, 都承旨·左副承旨·入侍。出榻敎 賤臣承命出傳, 行都承旨金載瓚, 左副承旨鄭東浚, 追入進伏。上命載瓚書榻敎曰, 進御香吉茶前方中, 人蔘減五分, 一貼式煎入, 命鼎修書傳敎曰, 明日孝昌墓, 遣閣臣, 替行奠酌禮, 宜嬪墓, 遣近侍致祭。仍敎東浚曰, 明日進去孝昌墓, 可也。命書傳敎曰, 左承旨·左副承旨, 許遞。命書傳敎曰, 龍媒僉使黃重錫, 不但有礴石善輸之勞, 以差員長在路上, 奚暇護送? 論罪一款, 非所可論, 置之, 此意回諭。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64책(탈초본 88책), 정조 13년(1789) 9월 6일 기축(己丑) 37/38 기사



『승정원일기』 1675책(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3월 24일 갑진(甲辰) 15/17 기사

Quote-left blue.png 上詣文禧廟, 行奠酌禮訖, 仍詣宜嬪廟, 行奠酌禮後, 乘輿出廟門, 由觀象監峴備邊司, 至敦化門, 下標信解嚴, 由進善門·肅章門, 入協陽門, 至宣化門還內。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75책(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3월 24일 갑진(甲辰) 15/17 기사



『승정원일기』 1884책(탈초본 100책), 순조 4년(1804) 9월 1일 정해(丁亥) 5/9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李文會曰, 闕里祠, 遣正卿奠酌, 孝寧大君·讓寧大君·永昌大君墓, 文正公趙光祖祠, 靑海伯李之蘭, 故學士李皐, 左議政柳灌, 領議政鄭太和, 左議政鄭惟吉, 文貞公姜碩基, 六臣墓, 遣禮官致祭。 梅谷·鳴皐·鷺江·四忠·忠賢書院, 遣承旨致祭。 昌嬪墓·䄙嬪墓·宜嬪墓·延齡君墓·海昌尉墓, 遣內侍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884책(탈초본 100책), 순조 4년(1804) 9월 1일 정해(丁亥) 5/9 기사



『승정원일기』 1908책(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2월 16일 갑오(甲午) 13/21 기사

Quote-left blue.png 金會淵, 以戶曹言啓曰, 謹奉傳敎, 宜嬪墓祭廳以下雨漏與頹圮處及簾帳等修改吉日, 令日官池景興推擇, 則今二月二十九日卯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08책(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2월 16일 갑오(甲午) 13/21 기사



『승정원일기』 1919책(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1월 5일 무신(戊申) 15/19 기사

Quote-left blue.png 柳畊, 以禮曹言啓曰, 卽接孝昌墓守衛官所報, 則墓所南邊相望之地, 蔓草川路傍, 自丁未年, 列植柳木, 以爲蔽遮行人, 而宜嬪墓典監, 犯斫九株發賣云, 聞極驚駭, 發遣郞廳摘奸, 則此距墓所, 爲三里許, 而路傍田畔, 從前有柳木之列植者, 丁未以後, 自墓所間間補植, 以爲叢翳之地, 而其傍店舍之後, 又有如干散植之柳木, 此則以其民家之後, 雖不補植, 亦在於墓所管領中, 而卽者宜嬪墓典監尹光殷, 斫取其大柳木十株, 發賣的實矣。 雖非火巢近地, 又與補植有異, 而旣在墓所禁養之內, 則身爲典監, 無難犯斫, 究厥所爲, 萬萬痛駭。 其罪狀, 令攸司照法嚴處,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19책(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1월 5일 무신(戊申) 15/19 기사



『승정원일기』 1919책(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1월 6일 기유(己酉) 18/20 기사

Quote-left blue.png 柳畊, 以刑曹言啓曰, 禮曹啓辭內, 卽接孝昌墓守衛官所報, 則墓所南邊相望之地, 蔓草川路傍, 自丁未年, 列植柳木, 以爲蔽遮行人, 而宜嬪墓典監, 犯斫九株發賣云。 聞極驚駭, 發遣郞廳摘奸, 則此距墓所, 爲三里許, 而路傍田畔, 從前有柳木之列植者, 丁未以後, 自墓所, 間間補植, 以爲叢翳之地, 而其傍店舍之後, 又有如干莎植之柳木, 此則以其民家之後, 雖不補植, 亦在於墓所管領中, 而卽者宜嬪墓典監尹光殷, 斫取其大柳木十株, 散賣的實矣。 雖非火巢近地, 又與補植有異, 而旣在墓所禁養之內, 則身爲典監, 無難犯斫, 究厥所爲, 萬萬痛駭。 其罪狀, 令攸司照法嚴處, 何如? 傳曰, 允事, 命下矣。 謹按律文, 則大典通編栽植條有曰, 京城內外山立標處代[伐]木者, 杖九十。 尹光殷, 依此律照勘, 決杖九十後, 放送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19책(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1월 6일 기유(己酉) 18/20 기사



『승정원일기』 1924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3월 2일 갑진(甲辰) 16/17 기사

Quote-left blue.png 丁卯三月初二日辰時, 上御誠正閣。 在院承旨入侍時, 行都承旨鄭東觀, 行左承旨洪義浩, 右承旨李文會, 左副承旨柳畊, 同副承旨金魯敬, 假注書趙庭和·金學淳, 記注官盧KC04283, 記事官鄭觀綏, 檢校待敎朴宗薰, 以次進伏訖。 上曰, 昨日黃海監司狀啓封進委折, 果已査實耶? 文會曰, 監司今方行巡云, 以其巡到所之距京稍近, 故似如是速到矣。 上命都承旨·左副承旨先退, 東觀·畊退出。文會曰, 昨日禁府啓目啓下者, 合爲五度, 而院吏出給該府之際, 一度漏落, 不知去處, 達宵終朝, 連爲査實, 終未推得, 臣之矇然不飭, 不勝惶悚, 而院吏及院隷, 令攸司, 從重科治, 何如? 上曰, 其委折, 同副承旨出去, 更爲詳査以入, 魯敬承命退出。少頃, 還入奏曰, 出去査實, 則啓目五度, 昨日昏後, 院吏授院隷, 院隷從門隙出給當直書吏, 而該吏受而照檢, 則一度漏落云, 故卽爲入來, 推尋院中, 則書吏置簿, 明有出給五度之文蹟, 而一度漏落者, 終無推覓之道云矣。 上曰, 禁府啓目, 異於他文書, 則今此閪失, 有關後弊, 不可歇勘, 院吏·院隷及當直書吏, 竝令秋曹, 嚴査究問以啓, 可也。 上命義浩, 書傳敎曰, 健元陵·元陵親祭祭文, 顯陵·穆陵·徽陵·崇陵·懿陵·惠陵遣大臣攝行祭祭文, 竝當親撰以下矣, 仍命義浩, 書健元陵親祭祭文, 淸晨駕發, 兩陵祗謁, 感慕冞深, 周旋怳惚, 久未展誠, 其年也四, 祗薦洞酌, 小子誠至, 元陵親祭祭文, 三霜已畢, 四來展誠, 仙寢密邇, 天氣和淸, 感慕之極, 愈往愈深, 有淚加瀉, 不覺沾襟, 六陵遣大臣攝行祭祭文, 兩陵展謁, 松楸密邇, 情無間焉, 理或俯只, 孝安殿禫祭親祭祭文, 日月易邁, 三霜已畢, 俯仰穹壤, 靡逮如失, 吉祥變易, 惟禮之禫, 祗薦泂酌, 小子孝感。孝安殿望祭親祭祭文, 禫祀已過, 望祭其至, 銜恤靡逮, 小子誠意。孝安殿朔祭兼告動駕祭文, 祔廟時近, 靈駕將戒, 祗告事由, 小子其拜。文禧廟酌獻禮親祭祭文, 維嘉慶十二年歲次, 丁卯三月癸卯朔十七日己未, 國王敢昭告于文孝世子, 伏以仁孝其德, 溫文其姿, 未逮承顔, 孔懷我思, 壬年之慶, 溢于八方, 甲辰儲位, 磐泰宗祊, 先王歡悅, 殿宮祝嘏, 臣民不弔, 嗚呼, 丙午嗣服之後, 不遑躬來, 齎志未遂, 耿耿懷哉。八年之闕, 三月其謁, 幽明豈隔, 若覿音容, 周旋怳惚, 同氣之情, 一宮之內, 未能進拜, 咫尺之地, 瞻望興喟, 替斟其酌, 遣官致祭, 二南其化, 極盡小嘒, 具告事由, 展拜之夕, 昭薦苾馨, 庶幾歆格, 謹以淸酌庶羞, 式陳明薦尙饗。宜嬪廟遣內侍致祭祭文, 小星其職, 德冠後宮, 先王曰嘉, 克追周風, 嗣服之後, 感于心衷, 諸宮展謁, 今日其同, 甲辰邦慶, 壬寅之功, 月建甲辰, 若有期逢, 文禧廟拜, 其親也兄, 敬薦𨡜酭, 酌獻禮成, 未能進拜, 咫尺之地, 遣官替酌, 庶幾歆只。上命義浩, 書傳敎曰, 近來兵曹之擧行, 全不成樣, 政院之察飭, 反致生頉, 兵曹判書, 從重推考, 旣在一院之長, 都承旨亦爲從重推考。上命文會, 讀奏刑曹罪人文璘聖議律啓目, 文會曰, 似此罪犯, 關係甚重, 當以極律施行矣。 義浩·魯敬·宗薰等, 齊聲奏曰, 文璘聖之屢次作罪於莫重之地, 此與眚災有異, 斷當施以極律矣。 上命文會書判付。義浩曰, 今番生進謝恩日, 與幸行日子相値, 進定退行間, 合有變通之道矣。 上曰, 進定, 可也。 上命閣臣先退, 宗薰退出。 仍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24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3월 2일 갑진(甲辰) 16/17 기사



『승정원일기』 1925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4월 11일 계미(癸未) 23/23 기사

Quote-left blue.png 丁卯四月十一日酉時, 上御誠正閣。 坐直承旨入侍時, 左承旨李文會, 同副承旨朴宗薰, 假注書趙奎昇, 記事官李若洙·鄭觀綏, 以次進伏訖。 上敎曰, 今日大臣入來乎? 宗薰曰, 左議政未及入來, 而鰲恩君入來矣。 上敎文會曰, 鄭萬始揭板事, 果知之乎? 文會曰, 此是年久之事, 故未能詳知, 而雖以兵曹一處言之, 蓋聞揭板尙存云矣。 上曰, 自在先朝, 有撤去揭板之敎, 而未及撤去者也。 分付各司, 一竝撤去揭板, 自政院, 申飭, 使之斯速承牌, 可也。 因敎曰, 放未放冊子中, 刑曹所關發掘群塚, 强奸未成已成魘魅蠱毒, 凌辱士夫之類, 抄錄以入, 可也。 敎宗薰曰, 再明日擧動時, 當先行文禧廟酌獻禮, 而次詣毓祥宮, 輦路果順便乎? 宗薰曰, 然矣。 因命書傳敎曰, 今番宜嬪廟, 遣內侍致祭, 祭物, 令各該司措備。 文會奏曰, 向日傳敎中, 文武科唱榜, 以便殿爲之事命下, 而今番唱榜, 則異於生進唱榜, 百官例皆陳賀矣, 不無狹窄之慮, 何以爲之乎? 上命書傳敎曰, 十八日文武科放榜, 處所, 以春塘臺親臨磨鍊。 又命書傳敎曰, 十九日文武新恩謝恩, 當親受, 處所, 以便殿爲之, 該房知悉。 敎于宗薰曰, 唱榜時軒架節次, 依例擧行。 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25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4월 11일 계미(癸未) 23/23 기사



『승정원일기』 1925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4월 13일 계미(癸未) 23/23 기사

Quote-left blue.png 丁卯四月十一日酉時, 上御誠正閣。 坐直承旨入侍時, 左承旨李文會, 同副承旨朴宗薰, 假注書趙奎昇, 記事官李若洙·鄭觀綏, 以次進伏訖。 上敎曰, 今日大臣入來乎? 宗薰曰, 左議政未及入來, 而鰲恩君入來矣。 上敎文會曰, 鄭萬始揭板事, 果知之乎? 文會曰, 此是年久之事, 故未能詳知, 而雖以兵曹一處言之, 蓋聞揭板尙存云矣。 上曰, 自在先朝, 有撤去揭板之敎, 而未及撤去者也。 分付各司, 一竝撤去揭板, 自政院, 申飭, 使之斯速承牌, 可也。 因敎曰, 放未放冊子中, 刑曹所關發掘群塚, 强奸未成已成魘魅蠱毒, 凌辱士夫之類, 抄錄以入, 可也。 敎宗薰曰, 再明日擧動時, 當先行文禧廟酌獻禮, 而次詣毓祥宮, 輦路果順便乎? 宗薰曰, 然矣。 因命書傳敎曰, 今番宜嬪廟, 遣內侍致祭, 祭物, 令各該司措備。 文會奏曰, 向日傳敎中, 文武科唱榜, 以便殿爲之事命下, 而今番唱榜, 則異於生進唱榜, 百官例皆陳賀矣, 不無狹窄之慮, 何以爲之乎? 上命書傳敎曰, 十八日文武科放榜, 處所, 以春塘臺親臨磨鍊。 又命書傳敎曰, 十九日文武新恩謝恩, 當親受, 處所, 以便殿爲之, 該房知悉。 敎于宗薰曰, 唱榜時軒架節次, 依例擧行。 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25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4월 11일 계미(癸未) 23/23 기사



『승정원일기』 1932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8월 24일 계사(癸巳) 12/12 기사

Quote-left blue.png 丁卯八月二十四日辰時, 上御誠正閣。 右副承旨·同副承旨入侍時, 右副承旨申絢, 同副承旨朴宗薰, 假注書李憲琦, 記注官李昌心, 記事官朴周壽, 以次進伏訖。 上曰, 上番出去, 在院公事持入, 可也。 昌心承命出去, 持公事還入進伏。 上命讀公事。 宗薰, 絢分讀訖。 上命書判付。 絢曰, 俄者懿陵·宗廟·景慕宮奉審有命, 而臣今入侍矣。 小臣當先退奉審, 故敢此仰達矣。 上曰, 入侍罷後, 出去奉審, 可也。 上曰, 嬪墓歷臨與否, 考例以入, 宜嬪墓致祭祭文, 同副製進, 可也。 仍命書傳敎曰, 孝昌墓展拜後, 宜嬪墓, 當遣內侍致祭, 祭文, 令閣臣代撰以入。 仍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32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8월 24일 계사(癸巳) 12/12 기사



『승정원일기』 1933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9월 1일 기해(己亥) 12/14 기사

Quote-left blue.png 丁卯九月初一日辰時, 上自始興行宮, 還詣孝昌墓, 親祭擧動入侍時, 行都承旨鄭東觀, 行左承旨韓致應, 右承旨李文會, 左副承旨柳畊, 右副承旨洪樂淵, 同副承旨申絢, 記事官洪起燮, 假注書李憲琦, 記注官盧KC04283, 記事官朴周壽, 檢校直閣沈象奎·洪奭周, 檢校待敎朴宗薰, 待敎朴綺壽以次侍立。 時至, 通禮啓外辦。 上具軍服, 出幄次。 左議政李時秀進曰, 連日勞動, 聖體, 若何? 上曰, 一樣矣。 時秀曰, 俄聞右相, 進詣輦路, 故敢此仰達矣。 通禮啓請乘馬。 上乘馬, 仍進發, 至龍驤鳳翥亭。 通禮啓請下馬。 上下馬, 入御幄次。 少頃, 通禮啓外辦。 上具戎服, 出幄次, 通禮啓請乘馬, 上乘馬, 臨鷺梁舟橋。 兵曹判書韓晩裕, 跪稟渡涉節次, 宣傳官如法擧行訖。 大駕渡橋, 至孝昌墓洞外。 右議政金載瓚祇迎路左。 上駐馬, 敎曰, 聞卿入來, 誠爲萬幸, 而路次入侍, 亦多非便, 當於齋室入侍, 注書出往, 傳諭于右議政。 賤臣承命出傳。 載瓚曰, 旣伏承昨日下敎, 他不暇顧, 進伏輦路, 而咫尺之地, 轉動無路, 齋室入侍之命, 不敢承當矣。 賤臣以此還奏。 上曰, 旣已入來, 則事當入侍, 旣入侍則不可以野服進見, 以戎服入侍, 而肅拜單子, 亦爲進呈之意, 更爲傳諭, 可也。 賤臣承命出傳。 載瓚曰, 連伏承下敎, 感激隕越, 不知所達, 而入侍之命, 萬萬不敢當, 惟鈇鉞之誅是俟矣。 賤臣以此還奏。 上曰, 墓所行禮, 不可遲滯, 聞卿承膺之語, 然後當進發, 此意更諭, 可也。 賤臣承命出傳, 載瓚曰, 聖敎至此, 臣謹當於前席陳達矣。 上進發, 入墓所洞口, 通禮啓請下馬, 上下馬乘輿, 至齋室門外, 通禮啓請降輿, 上降輿入齋室門, 入御幄次。 入齋室後問安勿爲之。 出榻敎 傳曰, 孝昌墓展拜後, 宜嬪墓當歷臨, 該房知悉。 出傳敎 少頃, 通禮啓外辦。 上具翼善冠·衮龍袍, 出幄次。 至齋室門外。 通禮啓請乘輿, 上乘輿, 至紅箭門外。 通禮啓請降輿, 上降輿入展拜版位。 引儀唱鞠躬再拜興平身, 上行再拜禮。 仍詣墓上, 奉審一回, 詣碑閣奉審訖。 通禮啓請行禮。 上詣親祭版位。 引儀唱鞠躬再拜興平身, 上行再拜禮。 上詣尊所。 東觀酌酒, 絢受酒。 上詣神位前。 贊禮啓請三上香。 東觀奉香, 絢奉爐, 上三上香。 贊禮啓請執爵·獻爵。 東觀奉爵以進, 上執爵授絢, 絢奉奠于神座前。 大祝呂東植跪讀祝文訖。 上降復位。 亞獻官·終獻官, 行亞獻·終獻禮如儀訖。 引儀唱鞠躬再拜興平身, 上行再拜禮。 贊禮導上詣望燎位, 燎訖。 贊禮導上詣版位。 引儀唱鞠躬再拜興平身, 上行再拜禮。 出紅箭門。 通禮啓乘輿。 上乘輿, 仍詣宜嬪墓。 通禮啓請降輿, 上降輿詣墓上, 巡審一回訖。 通禮啓請乘輿。 上乘輿, 還詣齋室。 親祭罷後, 問安勿爲之。 出榻敎 諸臣以次侍立。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33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9월 1일 기해(己亥) 12/14 기사



『승정원일기』 1986책(탈초본 104책), 순조 10년(1810) 7월 1일 계축(癸丑) 10/62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金宗善曰, 還宮日, 當詣孝昌墓展拜親祭, 宜嬪墓遣內侍祭, 該房知悉。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86책(탈초본 104책), 순조 10년(1810) 7월 1일 계축(癸丑) 10/62 기사



『승정원일기』 1987책(탈초본 104책), 순조 10년(1810) 8월 28일 경술(庚戌) 17/33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洪義浩曰, 䄙嬪墓·宜嬪墓, 遣內侍致祭, 愍懷墓, 遣禮堂致祭, 延齡君墓·永昌大君墓·海昌尉墓·闕里祠·文正公趙光祖·靑海伯李之蘭·故學生李皐祠版·梅谷書院·明皐書院, 竝遣禮官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87책(탈초본 104책), 순조 10년(1810) 8월 28일 경술(庚戌) 17/33 기사



『승정원일기』 2030책(탈초본 106책), 순조 13년(1813) 7월 2일 병인(丙寅) 12/14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尹命烈曰, 宜嬪宮回甲, 在於今年今月初八日, 當日遣內侍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87책(탈초본 104책), 순조 10년(1810) 8월 28일 경술(庚戌) 17/33 기사



『승정원일기』 2220책(탈초본 113책), 순조 27년(1827) 8월 21일 갑오(甲午) 13/22 기사

Quote-left blue.png 權敦仁, 以戶曹言達曰, 謹奉下令, 宜嬪廟正堂雨漏, 正門風板, 移安廳薍簾修改吉日, 令日官崔福基推擇, 則九月初一日卯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之意, 敢達。 令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220책(탈초본 113책), 순조 27년(1827) 8월 21일 갑오(甲午) 13/22 기사



『승정원일기』 2266책(탈초본 114책), 순조 31년(1831) 6월 10일 경인(庚寅) 20/22 기사

Quote-left blue.png 權敦仁, 以戶曹言啓曰, 謹奉傳敎, 宜嬪廟正堂簾帳等修改吉日, 令日官李秉源推擇, 則今六月十二日辰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266책(탈초본 114책), 순조 31년(1831) 6월 10일 경인(庚寅) 20/22 기사



『승정원일기』 2412책(탈초본 119책), 헌종 9년(1843) 3월 16일 기미(己未) 8/15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金學性曰, 昌嬪·䄙嬪·宜嬪·延齡君·海昌尉墓, 遣內侍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412책(탈초본 119책), 헌종 9년(1843) 3월 16일 기미(己未) 8/15 기사



『승정원일기』 2412책(탈초본 119책), 헌종 9년(1843) 3월 29일 임신(壬申) 11/12 기사

Quote-left blue.png 鄭㝡朝, 以戶曹言啓曰, 謹奉傳敎, 宜嬪廟·文禧廟正堂簾帳等修改吉日時, 令日官金昌勳推擇, 則來四月十九日巽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412책(탈초본 119책), 헌종 9년(1843) 3월 29일 임신(壬申) 11/12 기사



『승정원일기』 2455책(탈초본 120책), 헌종 12년(1846) 9월 12일 갑오(甲午) 11/11 기사

Quote-left blue.png 鄭㝡朝, 以戶曹言啓曰, 謹奉傳敎, 宜嬪廟·文禧廟正堂簾帳等修改吉日時, 令日官金昌勳推擇, 則來四月十九日巽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455책(탈초본 120책), 헌종 12년(1846) 9월 12일 갑오(甲午) 11/11 기사



『승정원일기』 2455책(탈초본 120책), 헌종 12년(1846) 9월 12일 갑오(甲午) 15/11 기사

Quote-left blue.png 上曰, 輦路過此, 墓所入望, 是年是月, 尤增興懷, 明日宜嬪墓, 遣內侍致祭。 出駕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455책(탈초본 120책), 헌종 12년(1846) 9월 12일 갑오(甲午) 15/11 기사



『승정원일기』 2507책(탈초본 122책), 철종 1년(1850) 7월 11일 신축(辛丑) 27/32 기사

Quote-left blue.png 又以戶曹言啓曰, 宜嬪廟正堂簾帳等修改吉日時, 令日官田佑說推擇, 則七月二十日辰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507책(탈초본 122책), 철종 1년(1850) 7월 11일 신축(辛丑) 27/32 기사



『승정원일기』 2598책(탈초본 124책), 철종 8년(1857) 12월 21일 무진(戊辰) 6/9 기사

Quote-left blue.png 備邊司啓曰, 頃因京畿繡單, 通津復戶結, 令道臣定價報來之意, 覆啓行會矣。 卽見該監司李晉翼所報, 則以爲, 宣禧墓·宜嬪墓·孝昌墓軍復戶, 靑川府院君房, 咸原府院君房復戶, 每結以十二兩五錢, 定價遵行, 實爲便當爲辭矣。 道臣所報, 必有斟量而然矣。 依此施行之意, 永爲著式,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598책(탈초본 124책), 철종 8년(1857) 12월 21일 무진(戊辰) 6/9 기사



『승정원일기』 2637책(탈초본 125책), 철종 12년(1861) 2월 6일 갑자(甲子) 17/17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宜嬪墓, 遣內侍致祭。 出傳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637책(탈초본 125책), 철종 12년(1861) 2월 6일 갑자(甲子) 17/17 기사



『승정원일기』 2747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월 2일 무진(戊辰) 12/27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대수(代數)가 지난 후 위판을 옮기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제도이며 제왕들의 가법인데, 지금까지 의소(懿昭)의 묘를 옮기지 않은 것은 실로 처리할 여유가 없어서 그랬던 것이며, 각궁에 별도로 사당을 세운 것도 당시에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별묘에 합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니, 인빈(仁嬪) 김씨, 영빈(寧嬪) 김씨, 화빈(和嬪) 윤씨의 사우는 경우궁 내의 별묘에, 희빈(禧嬪) 장씨, 정빈(靖嬪) 이씨, 영빈(暎嬪) 이씨, 의빈(宜嬪) 성씨의 사우는 육상궁내의 별묘에 합봉하고,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사우는 의소묘 내의 별묘에 이봉할 것이니, 제반 의절을 호조와 예조 당상으로 하여금 대원군에게 품정하게 하여 거행토록 분부하라.” 하였다.

傳曰, 親盡而祧, 卽莫越之制, 而亦自古帝王家法然, 而惟獨懿昭墓之尙未祧遷, 實是未遑之事也。 且各宮之別立廟貌, 在當時, 雖不可闕, 而然矣。 到今, 則亦宜合奉於一處別廟, 正合事宜, 仁嬪金氏·寧嬪金氏·和殯尹氏祠宇, 合奉於景祐宮內別廟, 禧嬪張氏·靖嬪李氏·暎嬪李氏·宜嬪成氏祠宇, 合奉於毓祥宮內別廟, 文孝世子祠宇, 移奉於懿昭墓內別廟, 諸般儀節, 令戶禮堂稟定於大院君前, 擧行事, 分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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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47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월 2일 무진(戊辰) 12/27 기사



『승정원일기』 2747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월 3일 기사(己巳) 19/25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가 아뢰기를, “전일 전교하시기를, ‘대수가 지난 뒤 묘주를 옮기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제도이거니와 예로부터 재왕들의 가법인데, 유독 지금까지 의소의 묘를 옮기지 않은 것은 실로 처리할 여유가 없어서였으며, 각궁에 사당을 세운 것도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한 곳의 별묘에 합봉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니, 인빈 김씨, 화빈 윤씨의 사우는 경우궁 내의 별묘에, 희빈 장씨, 정빈 이씨, 영빈 이씨, 의빈 성씨의 사우는 육상궁 내의 별묘에 합봉하고, 문효세자의 사우는 의소묘 내 별묘에 옮길 것이니, 제반 의절을 호조와 예조의 당상으로 하여금 대원군에게 품정하게 하여 거행토록 분부하라.’고 명하였으며, 또 전교하기를 ‘의소 세손의 대수가 지났으니 순회ㆍ소현 두 세자의 예에 따라 문주를 묻어야 할 것이나 자교가 있었으니 우선 영녕전으로 옮기라.’고 명하였습니다. 이에 진오(鎭五)가 하교를 받들어 대원군에게 품정하니, 대원군이 이르기를, ‘의소 묘주는 이미 옮겼으니, 향사의 규식은 저경궁이나 연호궁의 예를 따르고, 각궁 묘주의 합봉 절차는 모두 성교를 따라 거행하라. 그리고 대빈궁(大嬪宮)에서 아직껏 사시 절향을 거행하는 것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이라고는 하나 저경궁이나 연호궁의 예를 따라 정하여 행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하니 의소묘(懿昭廟)에는 금년부터 춘추 향사만 거행하게 하고, 의소묘(懿昭廟)에는 한식의 제사만 거행하게 하며, 문희묘와 의소묘의 합봉 절차는 예조에서 날짜를 가리어 거행하게 하고, 대빈궁 향사도 금년부터는 저경궁이나 연호궁의 예를 따라 거행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禮曹啓曰, 傳曰, 親盡而祧, 卽莫越之制, 而亦自古帝王家法也。 惟獨懿昭廟之尙未祧遷, 實是未遑之事也。 且各宮之各立廟貌, 在當時雖不可闕而然矣, 到今則亦宜合奉於一處別廟, 正合事宜。 仁嬪金氏·和嬪尹氏祠宇, 合奉于景祐宮內別廟, 禧嬪張氏·靖嬪李氏·暎嬪李氏·宜嬪成氏祠宇, 合奉于毓祥宮內別廟, 文孝世子祠宇, 移奉于懿昭廟內別廟, 諸般儀節, 令戶·禮堂稟定于大院君前, 擧行事, 分付事, 命下。 又傳曰, 懿昭世孫, 旣已親盡, 則當依順懷·昭顯兩世子例, 祧埋廟主, 而旣承慈敎, 姑以祧遷爲之事, 命下矣。 臣鎭五, 謹奉下敎, 稟定于大院君前, 則懿昭廟主, 旣行祧遷, 則享祀規式, 一依儲慶宮·延祐宮[延祜宮]例爲之, 各宮廟主合奉之節, 竝依聖敎擧行, 而大嬪宮之尙行四時節享, 係是未遑之事也, 亦依儲慶宮·延祐宮[延祜宮]例定行, 實合事宜爲敎矣。 懿昭廟, 自今年爲始, 只行春秋享, 懿昭墓, 只行寒食一祭, 而文禧廟合奉懿昭廟節次, 自臣曹擇日擧行, 大嬪宮享事, 亦自今年爲始, 一依儲慶宮·延祐宮[延祜宮]例擧行事, 分付,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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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47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월 3일 기사(己巳) 19/25 기사



『승정원일기』 2747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월 20일 병술(丙戌) 17/19 기사

Quote-left blue.png 호조가 아뢰기를, “저경궁, 화빈묘,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의빈묘의 사우를 합봉할 터 마련하는 일을 이달 20일부터 시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안과 환안의 고유(告由)를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戶曹啓曰, 儲慶宮·和嬪廟·大嬪宮·延祜宮·宣禧宮·宜嬪廟祠宇, 合奉基址始役, 今正月二十一日擧行事, 命下矣。 移還安告由, 令該曹擧行,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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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47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월 20일 병술(丙戌) 17/19 기사



『승정원일기』 2748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2월 26일 임술(壬戌) 4/7 기사

Quote-left blue.png 호조가 아뢰기를, “대빈궁(大嬪宮)ㆍ연호궁(延祜宮)ㆍ선희궁(宣禧宮)ㆍ의빈(宜嬪) 사우(祠宇)의 정초(定礎)는 4월 9일, 입주(立柱)는 같은 달 13일, 상량(上樑)은 14일 묘시, 화빈(和嬪) 사우의 정초는 4월 9일, 입주는 같은 달 13일, 상량은 17일 자시가 특별히 길하다고 합니다. 모두 이 일시(日時)로 정하여 행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戶曹啓曰, 大嬪宮·延祜宮·宣禧宮·宜嬪祠宇定礎, 四月初九日, 立柱, 同月十三日, 上樑, 十四日卯時, 和嬪祠宇定礎, 四月初九日, 立柱, 同月十三日, 上樑, 十七日子時爲吉云。 竝以此日時, 定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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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48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2월 26일 임술(壬戌) 4/7 기사



『승정원일기』 2751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5월 20일 을유(乙酉) 10/11 기사

Quote-left blue.png 이어 적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봉심하게 하고,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게 하라.”하였다.

仍命書傳敎曰, 禧嬪廟, 遣內侍奉審, 宜嬪廟, 遣內侍看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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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51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5월 20일 을유(乙酉) 10/11 기사



『승정원일기』 2756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0월 7일 기해(己亥) 7/31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의빈묘(宜嬪墓)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라.” 하였다.

傳曰, 宜嬪墓, 遣內侍, 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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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56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0월 7일 기해(己亥) 7/31 기사



『승정원일기』 2756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0월 7일 기해(己亥) 32/31 기사

Quote-left blue.png 이어,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의빈묘(宜嬪墓), 흥인군 부인(興寅君夫人)묘, 영온옹주(永溫翁主)묘, 박 숙의(朴淑儀)묘, 화빈묘(和嬪墓)에 내시를 보내 간심하고 오라.”하였다.

仍命書傳敎曰, 宜嬪墓·興寅君夫人墓·永溫翁主·朴淑儀墓·和嬪墓, 遣內侍, 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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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56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0월 7일 기해(己亥) 32/31 기사



『승정원일기』 2761책(탈초본 129책), 고종 8년(1871) 2월 30일 경인(庚寅) 8/22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의빈(宜嬪)의 사우(祠宇)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라.” 하였다.

傳曰, 宜嬪祠宇,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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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61책(탈초본 129책), 고종 8년(1871) 2월 30일 경인(庚寅) 8/22 기사



『승정원일기』 2761책(탈초본 129책), 고종 8년(1871) 2월 30일 경인(庚寅) 21/22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의빈의 사우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傳曰, 宜嬪祠宇, 遣內侍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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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61책(탈초본 129책), 고종 8년(1871) 2월 30일 경인(庚寅) 21/22 기사



『승정원일기』 2775책(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4월 2일 을묘(乙卯) 8/19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의빈(宜嬪)의 사우(祠宇)에 중관을 보내 간심하여 오게 하라.” 하였다.

傳曰, 宜嬪祠宇,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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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75책(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4월 2일 을묘(乙卯) 8/19 기사



『승정원일기』 2775책(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4월 2일 을묘(乙卯) 18/19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여 오도록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傳曰, 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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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75책(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4월 2일 을묘(乙卯) 18/19 기사



『승정원일기』 2786책(탈초본 130책), 고종 10년(1873) 3월 22일 경자(庚子) 12/12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와 의빈묘를 내시가 봉심하고 오라.” 하였다. - 전교를 냄

傳曰, 禧賓廟·宜嬪廟, 遣內侍, 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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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86책(탈초본 130책), 고종 10년(1873) 3월 22일 경자(庚子) 12/12 기사



『승정원일기』 2799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5일 정미(丁未) 36/38 기사

Quote-left blue.png 상이 이르기를, “무과(武科)에서 삭천(削薦)된 사람들 가운데 육상궁(毓祥宮)과 선희궁(宣禧宮)의 본가 사람으로서 삭천된 자들은 모두 천망을 복구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는 진실로 응당 행해야 할 일입니다. 연석에 오른 장신에게 분부하여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신은 이를 거행하라.”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최성(崔姓)도 이미 장수의 직임을 맡고 있고 이성(李姓)도 또한 평안 병사가 된 사람이 있으니, 그 후예로서 선천(宣薦)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과연 매우 억울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에서 공을 세운 사람은 비록 상민이나 천민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차례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여 등용할 수 있는데, 하물며 양궁(兩宮)의 사친(私親) 본가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의빈 성씨(宜嬪成氏)의 가문도 또한 삭천 가운데 들어 있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성씨 가문도 또한 마찬가지로 천망을 복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찬가지로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마찬가지로 천망을 복구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응당 천망을 복구해야 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합하여 200여 명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모두 복구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 성씨는 모두 천망을 복구하고, 그 나머지는 합당한 사람이 있을 때마다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문관 괴원(槐院)의 선발과 서로 같다. 그러므로 문무(文武)에 각각 삼천(三薦)이 있는 것이다.”하니, 이유원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천망을 복구하면 삼군부에서 단자로 입계해야 하는가?”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천망을 복구하는 것은 선전관청에서 하고, 단자는 삼군부에서 계하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연전의 새로운 정식이다. 서북인(西北人)으로서 삭천된 자는 관안(官案)에 있을 듯하다.”하니, 이유원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신의 분관(分館)에도 또한 선택하는 일이 있다.”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그전에는 분관한 뒤에 대신(大臣)이 선택하여 과연 올리고 내리는 거조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괴원에서 혹 국자감으로 내려가고, 국자감에서 혹 운각으로 내려가는 것은 그 가운데에 매양 공론에 흡족하지 못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매번 이 때문에 소란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먼 지방의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문벌을 상세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정말 그렇습니다. 서울의 사부(士夫) 집에 대해서야 어찌 이런 소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上曰, 武科削薦中, 毓祥宮·宣禧宮, 本家人之削薦者, 竝復薦, 好矣。 裕元曰, 此誠當行之事, 分付登筵將臣, 使之擧行, 恐好矣。 上曰, 將臣, 以此擧行也。 景夏曰, 謹當依下敎擧行矣。 崔姓旣爲將任, 李姓亦有爲平安兵使者, 其俊裔之不得爲宣薦, 果甚抑鬱矣。 上曰, 軍功人, 雖常賤, 尙得不次擢用, 況兩宮私親之本家人乎? 宜嬪成氏家, 亦入削薦中矣。 裕元曰, 成氏家, 亦可一體復薦矣。 上曰, 一體擧行, 可也。 景夏曰, 謹當一體復薦矣。 上曰, 可合復薦者, 合爲幾人乎? 景夏曰, 合爲二百餘人, 而有難一朝遽然竝復矣。 上曰, 三姓則盡爲復薦, 其餘則隨其可合人, 施之, 可也。 景夏曰, 謹依下敎矣。 上曰, 此與文官槐選, 相同, 故文武各有三薦矣。 裕元曰, 然矣。 上曰, 若復薦則當自三軍府, 單子入啓乎? 裕元曰, 復薦, 自宣傳官廳爲之, 而單子, 自三軍府啓下矣。 上曰, 此是年前新定式也。 西北人削薦者, 似在官案矣。 裕元曰, 然矣。 上曰, 文臣分館, 亦有揀擇之事矣。 裕元曰, 其前分館後, 大臣揀擇, 果有陞降之擧矣。 上曰, 槐或降國, 國或降芸者, 其中每有不協公論故也。 珪壽曰, 每以此紛紜矣。上曰, 遠方人則其地閥, 未可詳知故也。 裕元曰, 誠然矣。 京華士夫家, 豈有此紛紜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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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99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5일 정미(丁未) 36/38 기사



『승정원일기』 2799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7일 기유(己酉) 27/27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賓廟)에는 내시를 보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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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99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7일 기유(己酉) 27/27 기사



『승정원일기』 2811책(탈초본 131책), 고종 12년(1875) 3월 29일 병인(丙寅) 27/27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대빈묘(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게 하라.” 하였다.

上命書傳敎曰, 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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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11책(탈초본 131책), 고종 12년(1875) 3월 29일 병인(丙寅) 27/27 기사



『승정원일기』 2824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4월 12일 계유(癸酉) 16/16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 의빈묘에 내시를 보내 살펴보고 오게 하라.”하였다. - 전교를 냄 -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 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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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24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4월 12일 계유(癸酉) 16/16 기사



『승정원일기』 2828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7월 18일 병자(丙子) 14/14 기사

Quote-left blue.png 쓰라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賓廟)에 내시를 보내서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하였다.

命書傳敎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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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28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7월 18일 병자(丙子) 14/14 기사



『승정원일기』 2836책(탈초본 131책), 고종 14년(1877) 3월 9일 을축(乙丑) 19/22 기사

Quote-left blue.png 이어 봉심을 한 뒤에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파견하여 간심하고 오게 하라.”하였다.

仍爲奉審後,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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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36책(탈초본 131책), 고종 14년(1877) 3월 9일 을축(乙丑) 19/22 기사



『승정원일기』 2846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월 29일 기묘(己卯) 9/9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 간심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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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46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월 29일 기묘(己卯) 9/9 기사



『승정원일기』 2855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0월 15일 신묘(辛卯) 12/22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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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55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0월 15일 신묘(辛卯) 12/22 기사



『승정원일기』 2855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0월 15일 신묘(辛卯) 22/22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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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55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0월 15일 신묘(辛卯) 22/22 기사



『승정원일기』 2879책(탈초본 133책), 고종 17년(1880) 9월 6일 경오[신미] 20/20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 의빈묘(宜嬪廟)를 내시를 보내 간심하여 오도록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傳曰, 禧嬪廟·宜嬪廟遣內侍, 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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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79책(탈초본 133책), 고종 17년(1880) 9월 6일 경오[신미] 20/20 기사



『승정원일기』 2886책(탈초본 133책), 고종 18년(1881) 4월 9일 경자(庚子) 10/27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로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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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86책(탈초본 133책), 고종 18년(1881) 4월 9일 경자(庚子) 10/27 기사



『승정원일기』 2898책(탈초본 133책), 고종 19년(1882) 3월 20일 병오(丙午) 24/24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탈이 없는지 살펴보고 오게 하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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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98책(탈초본 133책), 고종 19년(1882) 3월 20일 병오(丙午) 24/24 기사



『승정원일기』 2907책(탈초본 134책), 고종 19년(1882) 12월 15일 정묘(丁卯) 48/49 기사

Quote-left blue.png 또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賓廟)는 내시(內侍)를 보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又命書傳敎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 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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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907책(탈초본 134책), 고종 19년(1882) 12월 15일 정묘(丁卯) 48/49 기사



『승정원일기』 2908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1883) 1월 29일 신해(辛亥) 42/42 기사

Quote-left blue.png 또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又命書傳敎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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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908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1883) 1월 29일 신해(辛亥) 42/42 기사



『승정원일기』 2916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1883) 9월 28일 을사(乙巳) 23/23 기사

Quote-left blue.png 또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又命書傳敎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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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916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1883) 9월 28일 을사(乙巳) 23/23 기사



『승정원일기』 2922책(탈초본 134책), 고종 21년(1884) 4월 5일 기유(己酉) 17/17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 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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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922책(탈초본 134책), 고종 21년(1884) 4월 5일 기유(己酉) 17/17 기사



『승정원일기』 2935책(탈초본 135책), 고종 22년(1885) 4월 30일 무술(戊戌) 45/45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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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935책(탈초본 135책), 고종 22년(1885) 4월 30일 무술(戊戌) 45/45 기사



『승정원일기』 2946책(탈초본 135책), 고종 23년(1886) 3월 27일 경신(庚申) 16/16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라.” 하였다. - 전교를 냄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待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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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946책(탈초본 135책), 고종 23년(1886) 3월 27일 경신(庚申) 16/16 기사



『승정원일기』 2959책(탈초본 135책), 고종 24년(1887) 4월 29일 병술(丙戌) 18/18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간심하여 오도록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奉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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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959책(탈초본 135책), 고종 24년(1887) 4월 29일 병술(丙戌) 18/18 기사



『승정원일기』 2988책(탈초본 136책), 고종 26년(1889) 8월 30일 계묘(癸卯) 26/26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看審)하여 오라.” 하였다.

傳曰, 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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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988책(탈초본 136책), 고종 26년(1889) 8월 30일 계묘(癸卯) 26/26 기사



『승정원일기』 3027책(탈초본 138책), 고종 29년(1892) 10월 4일 무오(戊午) 22/22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라.”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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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3027책(탈초본 138책), 고종 29년(1892) 10월 4일 무오(戊午) 22/22 기사



『승정원일기』 3028책(탈초본 138책), 고종 30년(1893) 9월 11일 경인(庚寅) 33/33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의빈묘(宜嬪廟)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傳曰, 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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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3028책(탈초본 138책), 고종 30년(1893) 9월 11일 경인(庚寅) 33/33 기사



『승정원일기』 3119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1900) 3월 19일 [양력 4월 18일] 신유(辛酉) 7/16 기사

Quote-left blue.png 조령을 내리기를, “의빈묘(宜嬪廟)에 봉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詔曰, 宜嬪廟, 遣奉侍, 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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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3119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1900) 3월 19일 [양력 4월 18일] 신유(辛酉) 7/16 기사



일성록

『일성록』, 정조 7년(1783) 2월 19일 경진(庚辰)

Quote-left blue.png 또 아뢰기를,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 수(綏) 자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

又啓言。依下敎。以昭容宮嬪號事。往問于左議政 李福源。右議政 金熤。則以爲。哲字泰字裕字興字綏字似好。而不敢指一仰對云矣。敎以。以宜字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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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7년(1783) 2월 19일 경진(庚辰)



『일성록』, 정조 10년(1786) 8월 12일 임자(壬子)

Quote-left blue.png 도제조 홍낙성이 아뢰기를, “의빈(宜嬪)의 산기(産期)가 몇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온 나라 백성들이 앙망하는 때에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는 데 상례(常例)를 고집할 것이 없습니다. 약원의 일로 말하더라도 호산청을 설치한 뒤에야 비로소 수시로 진찰할 수 있는 길이 있게 되니, 호산청을 설치할 길일을 이달 내로 잡아서 거행하소서.” 하여, 하교하기를, “산실청(産室廳)과 호산청은 체모(體貌)가 각각 다르다. 산실청으로 말하자면 3개월 전에 내전(內殿)에 청을 설치하는 것 외에는 이런 예가 없다. 그리고 호산청은 으레 당월(當月)에 청을 설치하는 것이다. 경들이 고대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격례를 초월하여 청을 설치하자는 청을 하는데, 을묘년에도 행하지 않았던 일을 지금 어찌 감히 창시할 수 있겠는가. 당월을 기다려 호산청을 설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都提調 洪樂性啓言。宜嬪產期。只隔數月。當此八域顒待之日。護產設廳。不可膠守常例。雖以藥院事言之。設廳然後。方有隨時診察之道。請護產廳吉日。今月內推擇擧行。敎以。產室廳 護產廳。體貌各異。雖以產室廳言之。前期三朔設廳內殿外。無是例。至於護產廳。例於當朔設廳。以卿等企待之忱。有此拔例設廳之請。乙卯年所未行之擧。今何敢創始。待當朔設護產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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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0년(1786) 8월 12일 임자(壬子)



『일성록』,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Quote-left blue.png 하교하기를, “의빈(宜嬪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생모)의 상례(喪禮)는 갑신년(1764, 영조40)의 규례대로 후정(後庭) 1등의 예로 거행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敎曰。宜嬪喪。依甲申年例。以後庭一等禮擧行事。分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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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일성록』, 정조 10년(1786) 9월 16일 병술(丙戌)

Quote-left blue.png 의빈(宜嬪)의 상구(喪柩)를 본궁(本宮)에 옮겨 봉안(奉安)하였다.

묘시에 입관(入棺)하고, 술시에 상구를 소란 평상(小欄平床)에 안치하여 소금장(素錦裝)으로 덮고 행유장(行帷帳)을 설치하였다. 단양문(端陽門)을 거쳐 단봉문(丹鳳門)을 나가 견여(肩輿)에 옮겨 봉안하여 본궁으로 갔다. 宜嬪喪柩移奉于本宮。 卯時入棺。戍時喪柩安于小欄平床。覆以素錦裝。設行帷帳。由端陽門出丹鳳門。移奉肩輿。往本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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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일성록』, 정조 10년(1786) 9월 17일 정해(丁亥)

Quote-left blue.png 의빈(宜嬪)을 예장(禮葬)할 때 경기의 고을이 거행해야 하는 것을 일절 제감(除減)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예장할 때 경기의 고을이 거행해야 하는 것들은 지금과 같은 흉년을 맞아 어찌 규례를 따라 할 수가 있겠는가. 5월에 도감(都監)을 설치했을 때에도 오히려 제감하였는데, 하물며 산지(山地)를 서울과 가까운 곳으로 정하려고 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장례에 필요한 물품, 묘소를 만드는 일, 발인(發靷)을 할 때 진배(進排)해야 하는 각항의 물종(物種)과 지공(支供) 등의 일은 갑신년(1764, 영조40)의 《등록》을 쓰지 말고 일절 제감하며, 경사(京司)에서 편리한 대로 거행하여 혹시 조그만 일로라도 민읍(民邑)에 폐를 끼치지 말게 하라고 호조와 선혜청에 분부하라. 이어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본도(本道)에 행회(行會)하여 유념해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命宜嬪禮葬時。畿邑擧行。一切除減。 敎曰。今番禮葬時。凡係畿邑擧行。値今災歲。豈可循例爲之乎。五月設都監時。猶且除之。況山地欲定於近京之地。葬需山役靷行時。各項應進排物種及支供等事。勿用甲申謄錄。一切除減。自京司從便擧行。無或以一事半事。貽弊民邑事。分付戶惠廳。仍令廟堂。行會本道。惕念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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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0년(1786) 9월 17일 정해(丁亥)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14일 갑신(甲申)

Quote-left blue.png 의빈(宜嬪)의 상여를 발인하는 날 하관(下棺)할 때 등의 제전(祭奠)에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여가 발인하는 날 하관할 때 등의 제전에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하라. 이번 제수는 외읍(外邑)을 번거롭게 할 것이 없으며, 집사관 역시 열읍의 수령으로 채워 차임하지 말고 도사, 지방관, 찰방, 부근 수령으로 차임하라.” 하였다. 命宜嬪發靷日臨壙等奠。遣承旨致祭。 敎曰。宜嬪喪發靷日臨壙等奠。遣承旨致祭。今番祭品。不煩外邑。執事官亦勿以列邑守令塡差。以都事及地方官察訪附近守令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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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14일 갑신(甲申)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16일 병술(丙戌)

Quote-left blue.png 중희당(重煕堂)에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예조 판서 서유린(徐有隣), 경기 감사 서유방(徐有防)을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 예장(禮葬)을 지난 갑신년의 규례에 따라 치르게 된다면 묘소에 마땅히 전감(典監)이 있어야 하지만, 한 지역 안에 굳이 별도로 설치할 필요는 없고 수위관(守衛官)이 겸하여 살피는 것이 좋을 듯한데, 금성위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박명원이 아뢰기를, “이번 묘소가 비록 효창묘(孝昌墓)와 한곳에 있기는 하지만, 의열묘(義烈墓)에 이미 전감이 있다면 수위관으로 하여금 겸하여 관리하게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예조 판서도 견해를 말해 보라.” 하니, 서유린이 아뢰기를, “소녕원(昭寧園)과 수길원(綏吉園)이 한곳에 봉안되어 있어서 수봉관이 겸하여 관할하고 있는데, 의열묘에 이미 전감이 있다면 이 규례를 원용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그렇다면 전감을 차출하라.” 하니, 박명원이 아뢰기를, “만약 전감을 차출한다면, 규례상 복호(復戶)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서유린이 아뢰기를, “복호는 의당 해청에 분부하여 규례를 고찰하여 획급해야 합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서유린이 아뢰기를, “의빈(宜嬪)의 예장이 멀지 않았으니, 반우(反虞)한 뒤에 내묘(內廟)에서 거행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수복(守僕)은 갑신년의 규례에 따라 차정(差定)하고 고립(雇立)의 명색 역시 갑신년의 규례에 따라 정하여 보내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의빈 묘소의 향탄(香炭)과 위전(位田)은 갑신년의 규례에 따라 망(望)을 정하여 획급하소서.” 하여, 하교하기를, “향탄은 경과 호판(戶判)이 상의하여 망을 정한 뒤 초기하고, 위전은 금성위가 이미 본 업무를 관할하고 있으니 편의대로 찾아보라. 이어 경들에게 구두로 전달하게 하고 역시 초기하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효창묘의 향탄과 위전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니 그 일이 매우 난처하다. 경들은 속히 탐문하여 품정(稟定)하라. 경들이 관직을 교체하는 때라 이를 전념하여 주관하기 어려울 터이니, 이 일도 금성위로 하여금 주관하고 의논하게 하여 기어이 속히 결말이 나도록 하라.” 하였다. 서유린이 아뢰기를, “의빈 묘소의 수호군은 의열묘의 규례에 따라 30명으로 충원하도록 경기 영에 분부하고, 급복(給復) 등의 절차 또한 해청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이 묘는 효창묘와 한곳에 있으니, 원래 정한 인원이 30명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책임질 인원은 20명으로만 하여 경기 백성을 징집하는 점에 있어서의 곤란한 폐단을 없애라.” 하였다. 召見錦城尉朴明源。禮判 徐有隣。畿伯 徐有防于重熙堂。 敎曰。今番禮葬。倣用甲申已例。則墓所當有典監。而一局之內。不必別置。仍以守衛官兼察似好。錦城尉之意何如。明源曰。今番墓所。雖與李昌墓同在一局。義烈墓旣有典監。則仍令守衛官兼管。恐涉如何矣。敎以禮判亦陳所見。有隣曰。 昭寧園 綏吉園。同奉於一局之內故。守奉官兼管擧行。而義烈墓旣有典監。援用此例。亦似無妨矣。敎以然則以典監差出。明源曰。若以典監差出。則例有復戶矣。有隣曰。復戶宜分付該廳。考例劃給。從之。有隣啓言。宜嬪禮葬不遠。反虞後內廟多有擧行之事。守僕則依甲申例差定。雇立名色。亦依甲申例定送。從之。又啓言。宜嬪墓所香炭及位田。請依甲申例。望定劃給。敎以香炭則卿與戶判相議。望定後草記。位田則錦城尉旣管本事。從便求得。仍令言送于卿等。亦爲草記。仍敎曰。孝昌墓香炭位田。尙未決定。事甚苟艱。卿等斯速探問稟定。卿等官職有遞易之時。有難專意主管。亦令錦城尉主管往復。期於從速歸一。 有隣啓言。宜嬪墓所守護軍。依義烈墓例。以三十名充定之意。請分付畿營。給復等節。亦令該廳擧行。從之。敎以此墓係是孝昌墓一局。原定額數。雖以三十名磨鍊。而責立則以二十名爲之。以除畿民簽丁苟艱之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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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16일 병술(丙戌)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Quote-left blue.png 중희당(重煕堂)에서 예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을 소견하였다.

서유린이 아뢰기를, “의빈(宜嬪)의 예장이 멀지 않았으니, 궁(宮)과 묘(墓)의 제향을 지금 마련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의열궁(義烈宮)의 전례(前例)를 살펴보면 궁향(宮享)은 사중삭(四仲朔)과 사명일(四名日)에 태상시(太常寺)가 거행하였고, 묘향(墓享)은 기일(忌日)과 사명일에 본궁이 거행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준하여 거행합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체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향에 대해 이미 이처럼 정식을 정했으니, 의열궁과 본궁의 사중삭에 마련할 제물 등의 값을 선혜청에서 곧바로 보내어 각 본궁에서 준비하여 거행합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원빈(元嬪)의 사당과 묘(墓)에 제수를 획송(劃送)하고 설행하는 등의 절차를 규례를 고찰하여 품처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본조의 《등록(謄錄)》과 선혜청의 획송 규례를 두루 고찰해 보아도 실로 합당한 전례가 없습니다. 단지 태상시의 제도(祭圖) 안에 ‘국구 집안의 기일 및 중삭(仲朔)에 제물을 갖추어 보낸다.’는 한 가지 항목만이 참조할 만한 단서가 되는데, 더욱이 궁(宮)을 설치하지도 않았고 또 절수(折受)도 없으니 이에 근거하여 거행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히 들어맞는 규례도 아니니, 신이 감히 확정하여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설행(設行) 일자와 제관(祭官)은 각궁의 전례를 참고하여 시행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궁(宮)의 경우 시향(時享) 일자는 동지와 하지, 춘분과 추분으로 마련하고, 시향과 속절(俗節)은 의소묘(懿昭廟)의 전사청(典祀廳)에 함께 설치하여 제수를 마련한 뒤 들어와 중사(中使)에게 주어서 중사로 하여금 제례를 행하게 하라. 묘의 경우 기일(忌日)과 속절 때 제물은 본묘 묘감(墓監)에게 보내 묘감이 제수를 장만하게 하고, 헌관은 굳이 별도로 차임할 것 없이 중사를 보내 설행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국구의 집안에 보내는 제물에 대한 태상시의 전례를 응용하는 것이 되고 궁방에서 제사를 행하는 규례를 참고하는 것이 되니 이에 따라 정식으로 삼아 시행하고, 제품(祭品)은 본조에서 별단을 써서 들여 적당히 절감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당과 묘의 제품은 의당 이전보다 줄여야 하니, 준(尊)과 뇌(罍) 등 쓰지 않을 제기는 다시 호조로 내리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연석에서 내린 하교를 받들고 보니 묘감은 대내(大內)에서 차정(差定)하는 것으로 명하셨습니다. 요포 등의 절차는 어떻게 마련해야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요포는 참작하여 마련하고, 적절히 헤아려 급복(給復)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당과 묘(墓)를 수리하는 등의 일을 이번의 경우 호조와 선공감(繕工監)이 주관해서는 안 되는데, 이미 해궁(該宮)도 없으니 어느 곳을 정식으로 삼아 거행해야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궁과 묘는 봄가을 마지막 달에 내수사에서 별도로 관원을 정하여 탈이 있는지 없는지를 간심(看審)하고 이어 해사(該司)에서 초기하여 품지(稟旨)하게 하라.” 하였다. 召見禮曹判書 徐有隣于重熙堂。 有隣啓言。 宜嬪禮葬不遠。宮墓祭享。當趁今磨鍊。而取考 義烈宮前例。宮享則四仲朔四名日。自太常擧行。墓享則忌辰四名日。自本宮擧行。今番亦依此擧行乎。敎以體貌不可不顧。依此爲之。又啓言。祭享旣如是定式。 義烈宮及本宮四仲朔肉饍價米。自惠廳直送。各自本宮措備擧行乎。從之。又啓言。元嬪廟墓劃送祭需設行等節。有考例稟處之命矣。遍考本曹謄錄及惠廳劃送式例。實無可合前例。而太常祭圖中。國舅家忌日仲朔祭物備送一款。或可爲傍照之端。旣不設宮。又無折受。則似不得不依此擧行。而亦非十分襯當之例。臣不敢指的仰對。至於設行日子及祭官。倣用各宮已例。恐合事宜。故敢達。敎以宮則時享日子。以二至二分磨鍊。而時享俗節。 懿昭廟 典祀廳。自可竝設熟設後。人給中使。使之行祭。墓則忌辰及俗節。輸送祭物于本墓墓監。監視熟設。獻官則不必別差。當遣中使設行。若此。則倣用國舅家輸送太常祭物之例。參用宮房行祀之規。依此定式施行。祭品則自本曹別單書入。以爲量減之地。又啓言。廟墓祭品。比前自當減。省尊罍等不用祭器。請使之還下戶曹。從之。又啓言。狀承筵敎。墓監已命自內差定矣。料布等節。何以爲之乎。敎以料布參酌磨鍊。量宜給復。又啓言。廟墓修改等節。今則不當自戶曹及繕工主管。而旣無該宮。以何處定式擧行乎。敎以宮與墓。春秋季朔。自內需司別定官員。看審有無頉形止。仍自該司草記稟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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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19일 기축(己丑)

Quote-left blue.png 의빈(宜嬪)의 발인 행렬이 묘소로 향하였다.

○ 사시(巳時)에 계빈전(啓殯奠)을 의주(儀註)대로 행하였다. - 헌관은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고, 대축(大祝)은 돈녕부 직장(直長) 김재창(金在昌)이다. - 전(奠)을 올리고 나서 집사자가 영좌(靈座)와 전을 당(堂) 안 서남쪽으로 옮겼다. 종척 집사(宗戚執事) -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 황기옥(黃基玉)이다. - 가 동쪽 계단으로부터 올라와 영좌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계빈(啓殯)을 고하였다. 예장관(禮葬官)이 그 속관(屬官)들을 이끌고 올라와 빈소의 병풍을 거두자 집사 - 수어사 서유녕(徐有寧)이다. - 가 건(巾)으로 구(柩)를 닦고 구의(柩衣)를 덮었다. 이어 소금저(素錦褚)를 설치한 뒤 다시 처음처럼 영좌와 영침(靈寢)을 설치하고 대곡(代哭)을 하였다. 집사 - 홍릉 영(弘陵令) 서유풍(徐有豐)이다. - 가 신주를 받들어 상(箱)에 담은 뒤 덮개를 덮고서 교의(交椅) 위 신백(神帛) 뒤에 안치하였다. 포시(晡時)에 조전(祖奠)을 의주대로 행하였다. - 헌관은 금성위 박명원이고, 대축은 제용감 판관 황기옥이다. - 삽선(翣扇)ㆍ명정(銘旌)ㆍ공포(功布)를 뜰 안쪽 좌우에 진열하고, 전설사(典設司)가 유장(帷帳)을 궁문 밖 동구(洞口) 예장소(禮葬所)에 설치하였다. 견여(肩轝)를 유장 안에 진열하고 이어 평상(平床)과 마목(馬木)을 여(轝) 뒤에 설치하였으며, 산륜(散輪)과 판(板)을 여 뒤의 강(杠) 위에 깔아 소방상(小方床)에 이어지게 하였다. 요여(腰轝)ㆍ채여(彩轝)ㆍ향정자(香亭子)ㆍ신백여(神帛轝)와 소란평상(小欄平床)을 중문(中門) 안에 진열하였다. 전설사가 영장(靈帳)을 견여 앞길에 설치하고, 영좌 의탁(靈座椅卓)을 여 앞에 설치하고, 준탁(尊卓)을 영좌의 동남쪽에 설치하고, 종척 이하의 자리를 영장 앞에 설치하고, 또 유장을 주위에 둘러쳤다. ○ 하교하기를, “소의문(昭義門)과 숭례문(崇禮門)은 자물쇠를 잠그지 말고 때에 임하여 표신을 내 달라고 청해 그대로 유문(留門)하며, 상여가 지나간 뒤에 하교를 기다려 다시 닫도록 병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순라 영문(巡邏營門)과 순라청(巡邏廳)ㆍ포도청(捕盜廳)에 오늘 밤 통금을 해제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 술시(戌時)에 발인하였다. 지방관과 당부관(當部官)이 길을 열며 앞에서 인도하자 연번(烻燔)과 촉롱(燭籠)이 좌우로 나뉘어 앞서 가고 그 다음에 고훤 부장(考喧部將)이 뒤를 잇고, 그 다음에 안롱(按籠), 그 다음에 상마대(上馬隊), 그 다음에 주피편(朱皮鞭), 그 다음에 인로 납패(引路鑞牌), 그 다음에 안보(按袱), 그 다음에 부함(負函), 그 다음에 대함(戴函), 그 다음에 경대 입갑(鏡臺笠匣), 그 다음에 향관지(香串之), 그 다음에 향화로(香火爐), 그 다음에 덕응(德應), 그 다음에 방상시(方相氏), 그 다음에 삼색촉롱(三色燭籠), 그 다음에 전열 만장(前列輓章), 청홍수 안마(靑紅繡鞍馬), 그 다음에 오색촉롱(五色燭籠) - 이상은 전열(前列)이다. - 이 따르고, 그 다음에 유촉롱(油燭籠), 그 다음에 철촉롱(鐵燭籠), 그 다음에 후열 만장(後列輓章) - 이상은 후열(後列)이다. - 이 뒤따랐다. 먼저 전열이 출발하였다. 궁문 밖에서부터 빈소의 계단 아래에 이르기까지 사촉롱(紗燭籠)을 좌우에 배열하였다. 요여가 빈소의 계단 앞에 나오자 집사 - 돈녕부 직장 김재창이다. - 가 관교궤(官敎樻)를 요여에 안치하여 출발하고, 다음에 채여가 나오자 집사 -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 조관진(趙觀鎭)이다. - 가 현훈함(玄纁函)을 채여에 안치하여 출발하고, 그 다음에 향정자가 나오자 집사 -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김지묵(金持默)과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 서정순(徐鼎淳)이다. - 가 향로와 향합(香盒)을 향정자에 안치하여 출발하였다. 그 다음에 신백여(神帛轝)를 빈소청(殯所廳)에 진열하였다. 집사가 조전(祖奠)을 거두었다. - 상과 탁자를 모두 거두었다. - 대축이 영좌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여에 싣게 됨을 고하고, 신백(神帛)을 받들어 여에 안치하고, 신주상(神主箱)을 그 뒤에 두었다. 이어 영좌를 거두었다. 대축이 집사를 거느리고 신백여를 모시고 나와서 동구에 이르러 영장(靈帳) 안에 내려서 안치하고, 소란평상을 빈소청에 내놓았다. - 행유장(行帷帳)은 대문 밖에 정렬하여 기다리고 앙장(仰帳)은 중문 밖에서 정렬하여 기다렸다. - 액례(掖隷)가 구(柩)를 받들어 평상 위에 안치하였다. 집사가 명정과 공포를 들고 나가고 액례가 평상을 받들어 나갈 때, 보삽(黼霎)이 앞서 가고 운삽(雲翣)이 뒤따랐으며 종척 이하가 곡하며 그 뒤를 따랐다. 중문 밖에 이르러 앙장을 설치하고, 대문 밖에 이르러 행유장을 설치하였다. 동구에 설치한 유장 안에 이르러 평상을 견여 뒤 마목 위에 안치하고, 그 다음에 산륜을 판(板) 위에 설치하였다. 그 다음에 평상 앞면의 난간을 열고 이어 백면포(白綿布)의 띠 양쪽 끝을 소방상 위에 늘여 둔 뒤 끈으로 묶었다. 대축이 신백(神帛)을 받들고 나와 처음처럼 의(椅) 위에 안치하고, 견전(遣奠)을 의식대로 행하였다. - 헌관은 수어사 서유녕이고, 대축은 돈녕부 판관 황기옥이다. - 견전을 마치자 대축이 신백을 받들어 요여에 안치한 뒤 출발하였고, 그 다음에 소란평상, 그 다음에 명정, 그 다음에 공포, 그 다음에 행자(行者)와 곡비(哭婢)가 차례로 따랐다. 마침내 영좌를 거둔 뒤 견여를 받들고 떠나자 호상(護喪) 인원이 차례대로 뒤따랐다. 후열의 만장(輓章)과 촉롱도 모두 출발하여 소의문을 나가 숭례문 밖에 이르렀다. 앞 열이 잠시 멈추어 신백여를 내려 노제소(路祭所)의 영장 안에 봉안하고, 대축이 신백을 받들고 나와 영좌에 안치하였다. 견여가 이르자 다시 내려서 영유(靈帷) 안에 받들고, 노제(路祭)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 헌관은 행 부사직 서유경(徐有慶)이고, 대축은 병조 정랑 유문양(柳文養)이다. - 노제를 마치자 대축이 다시 신백을 여 안에 받들고 처음 의식대로 차례로 출발하였다. 전열이 묘소에 이르자 연번과 촉롱은 외홍살문(外紅箭門) 밖에 멈췄다. 요여, 채여, 향정자가 이르자 집사자가 각기 관교궤, 현훈(玄纁), 향로, 향합을 받들어 제청(祭廳) 안에 놓았다. 신백여가 이르자 대축이 처음처럼 신백을 받들고 나와 영좌에 안치하고 신주상을 그 뒤에 안치하였다. 견여가 예장소에 이르자 마목을 여 뒤에 설치하고 소란평상을 마목 위에 안치하였다. 그 다음 판(板)과 윤여(輪轝)를 설치하고, 그 다음 평상의 앞면 난간을 열고서 구(柩)를 잡아당겨 평상 위에 안치한 뒤 앙장(仰帳)을 설치하였다. 액례가 평상을 받들고 들어오자 행유장을 설치하였다. 제청의 문밖에 이르러 내려서 안치하였다. 액례가 평상을 받들어 정당(正堂)에 안치하였다. 이어 성빈전(成嬪奠)을 의주대로 행하였다. - 헌관은 승지 홍인호(洪仁浩)이고, 대축은 경기 도사(京畿都事) 장지면(張至冕)이다. 宜嬪靷行。發向墓所。 巳時。行啓殯奠如儀。 獻官 錦城尉朴明源。 大祝 敦寧直長 金在昌 。奠訖。執事者遷靈座及奠於堂內西南。宗戚執事 濟用判官 黃基玉 。陞自東階。進詣靈座前。跪告啓殯。禮葬官帥其屬。陞撤殯所屛障執事 守禦使 徐有寧 。以巾拭柩。覆以柩衣。仍設素錦褚。還設靈座靈寢。幷如初。乃代哭。執事 弘陵令 徐有豊 。奉神主。盛以箱覆帕。安於交椅上神帛之後。晡時行祖奠如儀。 獻官 錦城尉朴明源。 大祝 濟用判官 黃基玉 。陳翣扇銘旌功布於庭內左右。 典設司設帷帳於宮門外洞口禮葬所。陳肩擧於帷內。仍設平床馬木於輿後。鋪散輪板於擧之後杠上。接於小方床。次陳腰擧彩輿香亭子神帛輿小欄平床於中門之內。典設司設靈帳於肩輿前路。設靈座椅卓於輿前。設尊卓於靈座東南。設宗戚以下位於靈帳之前。又以帳周圍。○敎曰。 昭義門 崇禮門。勿爲下鑰臨時。請出標信仍留。行喪後待下敎還閉事。分付兵曹。又敎曰。今夜弛禁事。分付巡邏營門及巡廳 捕廳。○戌時發靷。地方官及當部官治道前導。烻燔燭籠。分列左右先行。次考喧部將。次按籠。次上馬隊。次朱皮鞭。次引路鑞牌次按袱次負亟次戴亟次鏡臺笠匣次香串之。次香火爐。次德應。次方相氏。次三色燭籠。次前列輓章。次靑紅繡鞍馬。次五色燭籠。以上前列。次油燭籠。次鐵燭籠。次後列輓章以上後列。先以前列進發。自宮門外。至殯所階下。以紗燭籠左右排列。進腰輿於殯所階前。執事 敦寧直長 金在昌 。以官敎樻。安于腰輿進發。次進彩輿。執事掌花別提 趙觀鎭 。以玄緟函。安于彩輿進發。次進香亭子。執事 掌樂僉正 金持默。 內資直長 徐鼎淳 。以香爐 香盒。安于香亭進發。次陳神帛輿於殯所廳上。執事撤祖奠。 竝撤床卓。大祝就靈座前。跪告就輿。奉神帛安于輿。以神主箱。置其後。仍撤靈座。大祝率執事。奉神帛輿而出。至洞口靈帳內降安。進小欄平床於殯所廳上。行惟帳則整待於大門外。仰帳則整待於中門外。以掖隸奉柩。安于平床上。執事以銘旌功布出。掖隸奉平床而出。 黼翣在前。雲翣在後。宗戚以下哭從。至中門外設仰帳。至大門外設行帷帳。至洞口帷內。以平床安于肩輿後馬木上。次設散輪於板上。次開平床前面欄干。仍以白綿布帶兩端。曳奉於小方床上。加以維結。大祝奉出神帛。安于椅上如初。行遣尊如儀。 獻官 守禦使 徐有寧。大祝 敦寧判官 黃基玉 。奠畢。大祝奉神帛安于腰輿進發。次以小欄平床。次以銘旌。次以功布。次以行者哭婢。遂撤靈座。奉肩輿而行。護喪人員以次隨之。後列輓章及燭籠。亦皆進發。出昭義門。至崇禮門外。前列小駐。降奉神帛輿于路祭所靈帳內。 大祝奉出神帛。安于靈座。肩輿至。亦降奉于靈帷內。行路祭如儀。 獻官 行副司直 徐有慶。大祝 兵曹正郞 柳文養 。祭畢。大祝還奉神帛于輿內。以次進發如初儀。前列至墓所。烻燔燭籠。止於外紅箭門外。腰彩輿及香亭子至。執事者各奉官敎樻及玄纁香爐 香盒。入置於祭廳之內。神帛輿至。 大祝奉出神帛。安于靈座。置神主箱於其後如初。肩輿至禮葬所。設馬木于輿後。以小欄平床安于馬木上。次設板及輪輿。次開平床前面欄干。曳而奉柩。安于平床上。設仰帳。掖隸奉平床而入。設行帷帳。至祭廳門外降安訖。掖隸奉平床入安于正堂。仍行成殯奠如儀。 獻官 承旨 洪仁浩。 大祝 京畿都事 張至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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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19일 기축(己丑)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20일 경인(庚寅)

Quote-left blue.png 의빈 성씨(宜嬪成氏)를 효창묘의 왼쪽 언덕 임좌(壬坐)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 미시(未時)에 계빈전(啓殯奠)을 행하였다. - 헌관은 승지 홍명호(洪明浩)이고, 대축은 과천 현감(果川縣監) 이현도(李顯道)이다. - 마침내 계빈(啓殯)을 하였다. 대축이 종척 집사(宗戚執事)를 거느리고 영좌(靈座)를 제주청(題主廳)에 옮기자 액례(掖隷)가 평상(平床)을 받들고 앙장(仰帳)과 행유장(行帷帳)을 설치하였다. 마침내 묘(墓)에 올랐다. 명정(銘旌)과 공포(功布)가 차례대로 앞에 있었으며, 삽(霎)을 의주(儀註)대로 진열하였다. 구(柩)를 받들어 머리를 북쪽으로 한 채 금정틀의 횡강(橫杠) 위에 안치하고, 집사가 묶은 끈을 풀었다. 임광전(臨壙奠)을 광(壙) 앞에서 행하였다. - 헌관은 승지 서정수(徐鼎修)이고, 대축은 경기 도사 장지면(張至冕)이다. 유시(酉時)에 녹로(轆轤)로 구를 내리자 집사 - 부사직 김노영(金魯永)이다. - 가 건(巾)으로 구를 닦았다. 집사 -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 서홍보(徐弘輔)이다. - 가 유의(遺衣)를 구 위에 두고 그 다음에 구의(柩衣)를 정리하고 삽을 광 안에 기대어 두었다. 그 다음에 명정을 정리하고 종척 이하가 모두 곡하였다. 현훈(玄纁)을 올리고, - 봉교 증현훈(奉敎贈玄纁)은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고, 봉현훈 집사(奉玄纁執事)는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 조관진(趙觀鎭)이고, 전현훈 집사(奠玄纁執事)는 돈녕부 판관 김노성(金魯成)이다. - 횡대판(橫帶板)을 올려놓고서 회(灰)를 넣고 또 흙을 넣어 점차 다져 갔다. 묘 왼쪽에서 후토(后土)에 제사 지냈다. - 헌관은 총융사 김사목(金思穆)이고, 대축은 과천 현감 이현도(李顯道)이다. - 광 앞에서 엄광전(掩壙奠)을 행하였다. - 헌관은 승지 서정수이고, 대축은 경기 도사 장지면이다. - 마침내 제주(題主)하였다. 집사가 먼저 영좌 동쪽에 탁자를 설치하고 벼루와 필묵을 놓았다. 집사가 손을 씻고 신주를 꺼내어 탁자 위에 안치하였다. - 봉주독 집사(奉主櫝執事)는 홍릉 영(弘陵令) 서유풍(徐有豐)이고, 봉신백 집사(奉神帛執事)는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 황기옥(黃基玉)이다. - 제주관(題主官)으로 하여금 손을 씻고 서쪽으로 향하여 서게 한 뒤 먼저 파인 곳을 쓰고 그 다음에 분을 칠한 면을 쓰게 했다. 쓰기를 마치자 영좌에 받들어 놓고, 신백(神帛)을 상(箱) 안에 넣고 그 뒤에 놓았다. 이어 제주전(題主奠)을 행하였다. - 헌관은 승지 홍인호(洪仁浩)이고, 대축은 과천 현감 이현도이다. - 제주전을 마치자 종척 집사가 영좌를 제청(祭廳) 정 중앙에 옮겼다. 해시(亥時)에 초우제(初虞祭)를 행하였다. - 헌관은 금성위 박명원, 총융사 김사목, 부사직 서용보(徐龍輔)이고, 대축은 형조 좌랑 조응진(趙應鎭)이다. - 초우제를 마치자 대축이 신백상(神帛箱)을 받들어 보(褓)로 싼 뒤 궤에 안치하여 묘 앞의 한적한 곳에 묻었다. 葬宜嬪成氏于孝昌墓左岡壬坐原。 未時行啓殯奠。 獻官 承旨 洪明浩。大祝 果川縣監 李顯道 。遂啓殯。 大祝率宗戚執事。遷靈座於題主廳。以掖隸奉平床。設仰帳及行帷帳。遂上墓。銘旌功布。以次在前。陳翣如儀。奉柩安於金井橫杠上北首。執事解結裹。行臨壙奠於壙前。 獻官 承旨 徐鼎修。大祝 京畿都事 張至冕 。酉時。以轆轤下柩。執事 副司直 金魯永 。以巾拭柩。執事 尙衣主薄 徐弘輔 。置遺衣于柩上。次整柩衣。倚翣於壙內。次整銘旌。宗戚以下皆哭。贈玄纁。 奉敎贈玄纁錦城尉朴明源。奉玄纁執事掌苑別提 趙觀鎭。奠玄纁執事敦寧判官 金魯成 。加橫帶板實以灰。又實土而漸築之。祠后土於墓左。 獻官 總戎使 金思穆。大祝 果川縣監 李顯道 。行掩壙奠於壙前。 獻官 承旨 徐鼎修。大祝 京畿都事 張至冕 。遂題主。執事先設卓子於靈座東。置硯及筆墨。執事盥手。奉出神主置卓上。奉主櫝執事 弘陵令 徐有豊。奉神帛執事濟用判官 黃基玉 。使題主官。盥手西向立。先題陷中。次題粉面。題訖。奉置靈座。藏神帛於箱中。置于其後。仍行題主奠。 獻官 承旨 洪仁浩 大祝 果川縣監 李顯道 。奠畢。宗戚執事。奉遷靈座於祭廳正中。亥時行初虞祭。 獻官 錦城尉朴明源。總戎使 金思穆。副司直 徐龍輔。 大祝 刑曹佐郞 趙應鎭 。祭畢。大祝奉神帛箱。裹以褓盛于樻。埋於墓前屛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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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20일 경인(庚寅)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21일 신묘(辛卯)

Quote-left blue.png 본궁에서 의빈(宜嬪)의 반우(返虞)를 행하였다.

○ 아침에 당부관(當部官)과 고훤 부장(考喧部將)이 의주(儀註)대로 앞에서 인도하고 이에 길례(吉禮)의 의물(儀物)을 진설(陳設)하였다. 시배(侍陪)가 전열(前列)을 나누어 끌고 안롱(按籠), 상마대(上馬隊), 주피편(朱皮鞭), 인로 납패(引路鑞牌), 청홍수 안마(靑紅繡鞍馬), 안보(按褓), 부함(負函), 대함(戴函), 입갑(笠匣), 경대(鏡臺), 향관지(香串之), 화로(火爐), 덕응(德應), 요여(腰轝), 채여(彩轝), 향정자(香亭子)가 차례로 출발하였다. 대축이 신주를 받들어 요여에 안치한 다음 마침내 출발하였고, 삼색촉롱(三色燭籠)을 좌우에 벌여 놓았으며, 호상(護喪)으로서 응당 따라가야 할 사람들이 차례대로 뒤따랐다. 본궁에 이르러 재우제(再虞祭)를 의주대로 행하였다. - 헌관은 금성위 박명원(朴明源), 행 부사직 서용보(徐龍輔)ㆍ김노영(金魯永)이고, 대축은 돈녕부 직장 김재창(金在昌)이다. 行宜嬪返虞于本宮。 平明。當部官及考喧部將前導如儀。乃陳吉儀。侍陪分引前列。按籠上馬隊朱皮鞭引路鑞牌靑紅繡鞍馬按褓負亟載亟笠匣鏡臺香串之火罏德應腰輿彩輿香亭以次進。大祝奉神主安于腰輿。遂進發。三色燭籠。列於左右。護喪應從人。以次隨之。至于本宮。行再虞祭如儀。 獻官 錦城尉朴明源。 行副司直 徐龍輔 金魯永。大祝 敦寧府直長 金在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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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21일 신묘(辛卯)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22일 임진(壬辰)

Quote-left blue.png 의빈(宜嬪)의 삼우제(三虞祭)를 행하였다. 헌관은 행 부사직 서유경(徐有慶), 부사직 서용보(徐龍輔), 장악원 첨정 김지묵(金持默)이고, 대축은 돈녕부 판관 김노성(金魯成)이다.

行宜嬪三虞祭。 獻官 行副司直 徐有慶。副司直 徐龍輔。掌樂僉正 金持默。 大祝 敦寧判官 金魯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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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22일 임진(壬辰)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24일 갑오(甲午)

Quote-left blue.png 의빈(宜嬪)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헌관은 수어사 서유녕(徐有寧), 총융사 김사목(金思穆), 부사직 김노영(金魯永)이고, 대축은 돈녕부 직장 김재창(金在昌)이다.

行宜嬪卒哭祭。 獻官 守禦使 徐有寧。總戎使 金思穆。副司直 金魯永。大祝 敦寧直長 金在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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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24일 갑오(甲午)



『일성록』,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1)

Quote-left blue.png 효창묘(孝昌墓)에 임하여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도로 경희궁(慶煕宮)에 나아가 문희묘(文禧廟)에 전작례를 행하였다.

흑립(黑笠)에 백포철릭(白布天翼)을 갖추고 여(輿)를 타고 협양문(協陽門)을 거쳐 말을 타고 돈화문(敦化門)을 나갔다. 효창묘에 나아가 재실(齋室)에 들어가서 최복(縗服)으로 갈아입고 여를 타고 묘소(墓所)에 이르렀다. 여에서 내려 정자각(丁字閣)에 나아가 전작례를 행하였다. 여를 타고 의빈묘(宜嬪墓)에 이르러 전작례를 행하였다. 여를 타고 다시 효창묘에 나아가 곡하였는데, 배종관(陪從官)도 곡하고 재배(再拜)하였다. 여를 타고 재실에 이르렀다. 동구(洞口)에서 숭례문(崇禮門) 밖에 이르기까지 상언(上言)을 받아들이라고 명하였다. 흑립에 백포철릭으로 갈아입고 말을 타고 경희궁에 나아갔다. 금상문(金商門)으로 들어가 여를 타고 태녕문(泰寧門)을 거쳐 우문각(右文閣)에 나아갔다. 최복으로 갈아입고 문희묘에 이르러 전작례를 행하였다. - 전사관(典祀官)은 봉상시 정 유광천(柳匡天), 집례(執禮)는 부사과 이태형(李太亨), 대축(大祝)은 대교 윤행임(尹行任)이다. - 도로 우문각에 나아갔다. 흑립에 백포철릭으로 갈아입고 여를 타고 태녕문을 거쳐 숭현문(崇賢門)으로 들어와 대내로 돌아왔다. 臨孝昌墓行奠酌禮。還詣慶熙宮。行奠酌禮于文禧廟。 具黑笠 白布天翼。乘輿由協陽門。乘馬出敦化門。詣孝昌墓。入齋室改具縗服。乘輿至墓所。下輿詣丁字閣。行奠酌禮。乘輿至宜嬪墓。行奠酌禮。乘輿更詣孝昌墓哭。陪從官亦哭。再拜。乘輿至齋室。命自洞口至崇禮門外。捧上言。改具黑笠 白布天翼。乘馬詣慶熙宮。入金商門乘輿。由泰寧門。詣右文閣。改具縗服。至文禧廟行奠酌禮。 典祀官 奉常正。柳匡天 執禮副司果李太亨。大祝 待敎 尹行任 。還御右文閣。改具黑笠 白布天翼。乘輿由泰寧門。入崇賢門還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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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1)



『일성록』,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2)

Quote-left blue.png 재전(齋殿)에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호조 판서 조경(趙璥), 선혜청 당상 서유린(徐有隣)을 소견(召見)하였다.

○ 문희묘를 의빈묘 근처에 정하고자 하여, 금성위 및 호조 판서로 하여금 형국을 가서 살펴보도록 했기 때문이다. ○ 선혜청 당상 서유린이 아뢰기를, “의빈묘의 위전(位田)은 대략 의열궁(義烈宮)의 예를 본떠서 망정(望定)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매양 민읍(民邑)과 관계되지 않은 땅을 찾아내도록 간곡히 하교하셨습니다. 일전에 비로소 듣건대, 김해부(金海府) 양안(量案)의 구진(舊陳) 중에 도로 기경(起耕)한 곳 및 초장(草場) 100여 결(結)이 있어 일찍이 궁방(宮房)에 절수(折受)하였는데, 기해년 연간에 마침 일이 생겨 호조로 소속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을 옮겨서 의빈묘의 위전으로 삼는 것이 가장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하고, 호조 판서 조경은 아뢰기를, “이것은 묵힌 황무지를 기경하여 전에 궁방에 절수한 것이니, 이것으로 위전을 만드는 것이 형편상 좋겠습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문희묘와 효창묘의 위전을 미처 망정하지 못하였는데, 이것 또한 호조와 선혜청 당상이 더욱 자세히 살펴서 뒷날 등대(登對)할 때 품처(稟處)하라. 하지만 근래에 어찌 버려져 있는 땅이 있겠는가. 산허리를 침범해 경작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서 도끼로 베지 않더라도 곳곳마다 산들이 벌거숭이이다. 이는 수령들이 조정에서 매기는 세금이 없는 것을 이롭게 여겨 백성들에게 경작하기를 허락하여 함께 그 잇속을 노리는 것이니, 고을의 힘으로는 손을 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만약 이 위전의 명목을 빙자하여 사방에서 널리 구하고, 따라서 모리(牟利)하는 자들이 동쪽 서쪽을 가리키며 소란을 피우면서 그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내가 이전에 의빈방(宜嬪房)에 대해 양안 밖의 화전(火田)을 막은 뜻이겠는가. 경들은 나의 이러한 뜻을 체득하여 혁파한 궁방이나 혹은 영문(營門), 아문(衙門)의 시장(柴場) 가운데서 유명무실한 곳을 골라내어 적간(摘奸)해서, 만일 합당한 곳을 얻으면 가까운 데 있는 것으로 품처하라. 합당한 곳이 없으면 비록 기일에 미쳐 획속(劃屬)하지 못하더라도 절대 외읍(外邑)의 양안 이외의 명색으로 망정하지는 말라.” 하였다. 召見錦城尉朴明源。戶曹判書 趙璥。宣惠堂上徐有隣于齋殿。 蓋文禧廟。欲定於宜嬪廟近處。使錦城尉及戶判。往審形止故也。○宣惠堂上徐有隣啓言。宜嬪墓位田。有略倣 義烈宮例望定之命。而每以覓得不關民邑之地。丁寧爲敎。日前始聞。金海府。有量舊陳中還起處及草場百餘結。曾爲折受於宮房。己亥年間。適因事端屬戶曹。以此移作宜嬪墓位田。最爲無弊矣。戶曹判書 趙璥曰。此是陳荒起耕。曾前折受宮房者。以此作爲位田。事勢便好矣。從之。敎曰。文禧廟 孝昌墓香炭。尙未望定。此亦戶惠堂更加詳探。後日登對時稟處。而近來豈有空閑曠棄之地。山腰犯耕。誠一痼弊。不待斧斤。在在童濯。此蓋守令利其無公家之定稅。許民耕作。共賭沾潤。可知邑力之無着手也。今若籍此香炭之名。四處廣求。從以牟利者。指東指西。紛紜不止。則是豈予前此防塞量外火田於宜嬪房之意也。卿等體予此意。就罷宮房或營門衙門柴場中有名無實處。抄出摘奸。如得可合者。從近稟處。否則雖未能及期劃屬。切勿以外邑量外名色望定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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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2)



『일성록』, 정조 11년(1787) 1월 10일 기묘(己卯)

Quote-left blue.png 문희묘(文禧廟)를 의빈궁(宜嬪宮) 서쪽 담장 밖에 짓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문희묘의 터를 처음에 경모궁(景慕宮) 남쪽 담장 밖에 정했었는데, 작년 9월 이후에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으로 헤아려 의빈묘 근처에 터를 정하였으니, 실로 편리하고 마땅하다고 하겠다. 호조 판서가 어제 이미 나아가서 묘(廟)의 터를 간심(看審)하여 의빈궁 서쪽 담장 밖 집으로 옮겨 정하였으니, 공역을 시작할 날짜는 이번 가을부터 내년 봄 사이에 하교를 기다려 길일을 택해서 거행하되, 이번에는 청(廳)을 설치하지 말라. 호조ㆍ공조의 당상과 낭청 각 1원을 문희묘 영건 당상과 낭청으로 삼고 이조가 그때 가서 계하하라. 입계(入啓) 및 행회(行會)할 문서로서 묘역(廟役)에 관계되는 것은 영건청(營建廳)으로 호칭하라. 작년에 이미 연석의 하교가 있었거니와 지금 경비로 볼 때 허다한 물력을 어찌 호조에 책임지울 수 있겠는가. 갑진년 책례(冊禮) 후에 상공(常供)으로서 해청(該廳)에 쌓여 있는 것이 그 수량이 필시 적지 않을 것이니, 묘역(廟役) 때 이것을 선혜청에서 가져다 쓰라고 호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命文禧廟。營建於宜嬪宮西墻外。 敎曰。文禧廟基址。初定於 景慕宮南墻外矣。昨年九月以後。揆以神理人情。就宜嬪廟近處卜地。實爲便當。戶判昨旣進往。看審廟基。以宜嬪宮西墻外家舍移定。始役日字。今秋來春間。待下敎擇吉擧行。今番勿設廳。戶工曹堂上郞廳各一員。以文禧廟營建堂上郞廳。自吏曹臨時啓下。至於入啓及行會文書之事係廟役者。以營建廳稱號。昨年不但已有筵敎。以今經費許多物力。豈可責之度支。甲辰冊禮後。常供之儲留該廳者。數必不少。廟役時。以此取用於惠廳事。分付戶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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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1년(1787) 1월 10일 기묘(己卯)



『일성록』, 정조 11년(1787) 2월 21일 기미(己未)

Quote-left blue.png 전라도 유생인 유학(幼學) 황득중(黃得中) 등 921인이 상소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상소의 대략에, “신들은 사면(赦免)을 행한다는 말을 듣고부터 마음속으로 ‘임금의 원수를 이미 갚았고 나라의 역적을 이미 제거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동경과(同慶科)에 응시하려고 공손히 도성 아래에 엎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국문하는 일을 지레 걷어치워 화란의 뿌리가 제거되지 않았음을 알았으니, 성토하고 복수하는 큰 의리가 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아 천지에 가득 찬 아픔이 끝내 풀릴 날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지난 임인년(1782, 정조6) 가을 문효세자(文孝世子)가 탄생한 이후로 영원히 이어질 나라의 무궁한 아름다움을 맡길 곳이 있음을 기뻐하였는데, 홍역을 순하게 치러 경사를 반포한 끝에 갑자기 훙서(薨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울었으나, 밤낮으로 간절히 빌었던 것은 오히려 후사(後嗣)의 탄생에 있었습니다. 9월에 의빈(宜嬪)이 졸한 상변(喪變)은 또 어찌 그리 가혹하단 말입니까. 중외(中外)가 놀라 통곡하고 모두의 말이 시끄럽게 들끓으면서 약을 잘못 쓴 역적 의관(醫官)과 젖을 끊은 요적(妖賊) 유모(乳母)에게 죄를 돌리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궐의 일은 비밀스럽고 초야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자세한 내막을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삼가 자전의 전교 가운데 ‘전후의 상변은 증상이 괴이했다.[前後喪變 症形怪底]’는 여덟 자를 본 뒤에야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들 눈물을 훔치고 이를 갈며 큰소리로 외치며 일어나 말하기를, ‘애통하다. 우리 세자의 상변은 진실로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의 짓이다. 앞으로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을 거의 시원하게 씻을 수 있겠구나.’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록 시간만 끌어 끝내 한번도 조사해 밝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극악한 역적들이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가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아, 의관으로 하여금 약을 잘못 쓰게 하고 유모로 하여금 젖을 끊게 한 자는 자연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용렬한 의원에게 맡기는 것도 오히려 불효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역적 의관에게 맡긴 자야 말할 것이 있겠으며, 약을 맛보지 않은 것도 오히려 임금을 시해했다고 하는데 더구나 독약을 투여한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여기에 있고 조사할 만한 자취도 여기에 있습니다. 심지어 ‘후일을 고려했다.’는 공초와 ‘나라의 경사를 칭송하지 않았다.’는 말은 모두 국문할 만하고 조사할 만한 증안(證案)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전하께서는 매번 ‘확실한 것이 없다.[無的]’는 두 글자로, 조사하여 밝히기 어렵다고 핑계를 대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삼사(三司)의 청을 윤허하시어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풀어 주소서.”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고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全羅道儒生幼學黃得中等九百二十一人上疏賜批 疏略曰臣等自聞赦宥之行意謂君讎已雪國賊已除今赴同慶之會祗伏輦轂之下乃知鞫事徑撤根柢未鋤竊恐討復之大義不明於此世而窮天極地之痛終無可洩之曰矣粵自壬寅秋以後億萬年無彊之休喜有所托順疹頒慶之餘遽聞薨逝之報擧國莫不犇走悲泣而日夜顒祝者猶在於彌厥之繼誕矣九月之喪又何酷也中外驚慟萬口喧騰莫不歸罪於誤藥之逆醫斷乳之妖媪而宮禁嚴秘草野隔截無由得其詳矣及伏見慈敎中前後喪變症形怪底八字然後擧國臣民莫不抆淚切齒叫號起立曰痛矣我世子喪變果非天也乃人也今而後君讎國賊庶可快雪而閱月玩時終未聞一番究覈之擧元惡大憝尙今假息古今天下寧有是哉噫使之誤藥使之停乳者自有所歸委之庸醫尙謂之不孝則況付之逆醫者乎不能嘗藥猶謂之弑君則況投之毒藥者乎可疑之端在此可覈之跡亦在於此以至顧瞻他日之招不稱邦慶之說莫非可鞫可覈之證案何殿下每以無的二字諉之於究覈之難也伏願亟允三司之請以洩神人之冤焉批以勿煩爾等退修學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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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1년(1787) 2월 21일 기미(己未)



『일성록』, 정조 11년(1787) 9월 12일 병자(丙子)

Quote-left blue.png 효창묘(孝昌墓)에는 관원을 보내 섭제(攝祭)하고 의빈묘(宜嬪墓)에는 도위(都尉)를 보내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14일에 효창묘에 관원을 보내 섭제하되, 초헌관은 보양관(輔養官)을 지냈던 사람 가운데에서 차출하고, 의빈궁의 묘에는 도위를 보내 치제할 것이니, 이러한 내용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命孝昌墓遣官攝祭宜嬪墓遣都尉致祭 敎曰十四日孝昌墓遣官攝祭初獻官曾經輔養官中爲之宜嬪宮墓遣都尉致祭以此分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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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1년(1787) 9월 12일 병자(丙子)



『일성록』, 정조 11년(1787) 9월 13일 정축(丁丑)

Quote-left blue.png 중희당(重煕堂)에서 승지 홍인호(洪仁浩)와 예문관 제학 서유린(徐有隣)을 소견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의빈궁(宜嬪宮)의 치제(致祭)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가 이미 수향(受香)하고 나갔는가?” 하니, 홍인호가 아뢰기를, “이미 전향(傳香)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상제(祥祭)의 제문은 일찍이 친히 지어 놓은 것이 있으니, 승지는 해궁(該宮)에 나아가서 충의(忠義)로 하여금 축식(祝式)대로 쓰게 하고, 효창묘(孝昌墓)의 향축(香祝) 및 의빈묘의 향축은 서제소(書題所)에 임시로 봉안하였다가 내일 새벽 묘소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을 할 때 섭제(攝祭)를 겸행(兼行)하도록 하라. 섭제 제관은 모두 곧장 나아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홍인호가 아뢰기를, “상제는 삼헌(三獻)을 하고 치제는 단헌(單獻)만 하니, 어떻게 거행해야겠습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치제는 삼헌을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인호가 아뢰기를, “효창묘의 경우 대축(大祝)을 이미 채워 차임하였는데, 제문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예문관 제학을 패초하여 지어 올리게 하라. 작년 겨울에 의빈을 장례 지낼 때에 대부분 승지가 점검하여 거행한 덕택에 분잡(紛雜)한 문제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번에도 이전대로 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본궁(本宮)에 치제할 때 승지는 작년의 규례대로 반열에 참석하고, 내일은 효창묘의 섭제에 참석하라.” 하였다. 召見承旨 洪仁浩 藝文提學 徐有隣于重熙堂 予曰宜嬪宮致祭錦城尉已受香出去耶仁浩曰已傳香矣予曰祥祭祭文曾有親撰者承旨出往該宮使忠義依祝式書之而孝昌墓香祝及宜嬪墓香祝權安於書題所待明曉出往墓所朝上食時兼行攝祭可也攝祭祭官皆令徑詣好矣仁浩曰祥祭則有三獻致祭則只單獻何以擧行乎予曰致祭行三獻可也仁浩曰孝昌墓旣已塡差大祝祭文何以爲之乎予曰藝文提學牌招製進可也昨年冬宜嬪葬禮時多賴承旨之檢擧得免紛雜之患云今亦依前爲之也予曰本宮致祭時則承旨依昨年例參班明日則參班於孝昌墓攝祭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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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1년(1787) 9월 13일 정축(丁丑)



『일성록』, 정조 11년(1787) 9월 14일 무인(戊寅)

Quote-left blue.png 중희당(重煕堂)에서 승지 홍인호(洪仁浩)를 소견하였다.

홍인호가 아뢰기를, “신이 효창묘(孝昌墓)에 나아가 반열에 참석하였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죄다 말할 필요 없다. 봉심해 보니 탈이 없고 향사(享事)는 모두 원활히 잘 이루어졌는가?”하니, 홍인호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효창묘의 상식(上食)은 으레 정자각(丁字閣)에 설행하고 별다례(別茶禮)는 상석(床石)에 배설(排設)하라고 일찍이 하교하셨는데, 이번에는 섭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상식을 겸하였지만 상설(象設)에 나아가 행하였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잘하였다. 들으니, 효창묘의 소속이 ‘의빈묘(宜嬪墓)와 경계를 나누어 정하여 애초에 서로 관섭(管攝)하지 않았는데 또 침범하여 소란을 피우는 문제가 많다.’고 하였다는데, 달리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이후로는 경계를 나누지 말고 효창묘의 소속으로 하여금 의빈묘를 겸관(兼管)하게 하라. 수호(守護)하는 일 등에 대해 만약 이전처럼 다투고 소란을 피우는 폐단이 있다면 드러나는 대로 엄중히 다스리겠다는 뜻으로 예판은 묘소에 나아가서 각별히 신칙하고 하체(下帖)를 각각 그 직소(直所)에 써서 주라. 호판도 나아가서 묘소 아래에 사들여야 할 전토(田土)를 간심하는 것이 좋겠다. 예판과 호판은 오늘 나가서 석상식(夕上食)을 지낸 뒤에 들어오라고 호조와 예조의 하리(下吏)를 불러와서 분부하고, 연교(筵敎) 1통도 적어 보내도록 하라. 하번 한림(下番翰林)도 나가서 봉심하라.” 하였다. 召見承旨 洪仁浩于重熙堂 仁浩曰臣詣孝昌墓參班矣予曰不必畢說奉審無頉享事俱利成乎仁浩曰然矣孝昌墓上食例爲設行於丁字閣別茶禮排設於床石事曾有下敎而今番則攝祭爲重故雖兼上食亦爲過行於象設矣予曰善爲之矣聞孝昌墓所屬謂與宜嬪墓分定境界初不管攝且多侵侮紛鬧之患云若知所重之有在渠輩焉敢如此此後則勿分境界令孝昌墓所屬兼管宜嬪墓守護等節若有如前爭鬧之弊隨現重繩之意禮判出往墓所各別申飭下帖書付於各其直所戶判亦爲出往看審墓下當買之田土爲好禮戶判今日出去過夕上食後入來之意招致戶禮吏分付筵敎一通亦爲錄送可也下番翰林亦爲出去奉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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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1년(1787) 9월 14일 무인(戊寅)



『일성록』, 정조 12년(1788) 7월 6일 병인(丙寅)

Quote-left blue.png 경희궁(慶熙宮)에 나아가 문희묘(文禧廟)의 별다례(別茶禮)를 친행(親行)하였다.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협양문(協陽門)을 나가 여에서 내려 교(轎)를 탔다. 엄고(嚴鼓)를 잘못 전한 사알(司謁)을 유사로 하여금 과치(科治)하게 하고, 해당 승지는 일이 끝난 뒤에 금추(禁推)하라고 명하였다. 돈화문(敦化門)을 나가 흥화문(興化門)으로 들어가서 광달문(廣達門)을 거쳐 재전(齋殿)에 들어갔다. 잠시 후 묘내(廟內)에 임하여 의주(儀註)대로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 하교하기를, “모레 효창묘(孝昌墓)에 각신(閣臣)을 보내 전작례(奠酌禮)를 대신 행하게 하되, 집사(執事)는 일찍이 궁함(宮銜)을 거친 사람으로 하라. 의빈묘(宜嬪廟)에는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詣慶熙宮親行文禧廟別茶禮 具翼善冠 袞龍袍乘輿出協陽門降輿乘轎命嚴鼓誤傳司謁令攸司科治當該承旨事過後禁推出敦化門入興化門由廣達門入齋殿少頃臨廟內行茶禮如儀○敎曰再明日孝昌墓遣閣臣替行奠酌禮執事曾經宮銜人爲之宜嬪墓遣承旨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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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2년(1788) 7월 6일 병인(丙寅)



『일성록』, 정조 12년(1788) 7월 7일 정묘(丁卯)

Quote-left blue.png 호조가, 문희묘, 효창묘(孝昌墓), 의빈궁(宜嬪宮)의 제사에 쓸 물종(物種)을 가정(加定)한 별단에 대해 아뢰었다.

별단은 다음과 같다. 문희묘와 효창묘의 사명일제(四名日祭), 사중삭제(四仲朔祭), 기신제(忌辰祭)에 쓸 물종을 가정하여 도별로 나누어 마련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소맥(小麥) 3석(石) 11두(斗) 8승(升) 6홉(合) 5작(勺) - 1두당 가미(價米) 2두 5승으로, 1석 10두는 경상도에, 1석 4두는 전라도에, 12두 8승 6홉 5작은 충청도에 분정(分定)한다. -, 청밀(淸蜜) 5승 8홉 4작 - 1승당 가미 5두로, 2두 2승은 경상도에, 1두 7승은 전라도에, 1두 1승 8홉 4작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진유(眞油) 5두 8승 3홉 7작 - 1승당 가미 3두로, 2두 4승은 경상도에, 2두는 전라도에, 1두 4승 3홉 7작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중미(中米) 1석 5두 6승 1홉 7작 - 1두당 가미 2두 5승으로, 9두는 경상도에, 7두는 전라도에, 4두 6승 1홉 7작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점미(粘米) 5두 4승 9홉 3작 - 1두당 가미 5두로, 2두 5승은 경상도에, 1두 7승은 전라도에, 1두 2승 9홉 3작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백미(白米) 2두 5승 4홉 4작 - 1두당 가미 3두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지초(芝草) 1근(斤) - 1근당 가미 10두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백자(柏子) 6두 5승 2홉 4작 - 1두당 가미 10두로, 3두 1승은 경상도에, 2두 1승은 전라도에, 1두 3승 2홉 4작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진자(榛子) 6두 2승 4홉 - 1두당 가미 12두로, 3두는 경상도에, 1두 8승은 전라도에, 1두 4승 4홉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황률(黃栗) 1두 5승 6홉 - 1승당 가미 3두로, 9두는 경상도에, 6승 6홉은 전라도에 분정한다. -, 대조(大棗) 1두 5승 6홉 - 1승당 가미 2두로, 충청도에 분정한다. -, 생강(生薑) 14냥(兩) 4전(錢) - 1승당 가미 4두 5승으로, 전라도에 분정한다. -, 녹두(菉豆) 5두 7승 3홉 2작 - 1두당 가미 2두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태(太) 5두 7승 5홉 - 1두당 가미 2두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소두(小豆) 7승 1홉 - 1승당 가미 2승으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목맥미(木麥米) 1두 1승 3홉 - 1두당 가미 5두로, 경상도에 분정한다. -, 개자(芥子) 5홉 - 1승당 가미 4두로, 충청도에 분정한다. -, 저주지(楮注紙) 5권(卷) 4장(張) - 1권당 가미 7두 5승으로, 3권은 경상도에, 2권 4장은 전라도에 분정한다. -, 표고(蔈古) 1근 8냥 6전 - 1근당 가미 8두로, 14냥은 경상도에, 10냥 6전은 전라도에 분정한다. -, 죽순(竹筍) 2승 - 1승당 가미 3두로, 전라도에 분정한다. -, 오해조(烏海藻) 6냥 - 1냥당 가미 1승 2홉으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황밀(黃蜜) 4근 14냥 - 1근당 가미 12두 5승으로, 2근 4냥은 경상도에, 1근 8냥은 전라도에, 1근 2냥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저상지(楮常紙) 19장 반 - 1권당 가미 2두 5승으로, 충청도에 분정한다. -, 염(鹽) 2승 7홉 - 1승당 가미 3승으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울금(鬱金) 1냥 2전 - 1근당 가미 2석으로, 전라도에 분정한다. -, 가사리(加士里) 7냥 5전 - 1냥당 가미 1승 8홉으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길경(䓀莄) 6근 1냥 5전 - 1근당 가미 2두로, 전라도에 분정한다. -, 이상 미(米) 70석 10두 4홉 2작 가운데 경상도가 29석 1두 7승 7홉 5작, 전라도가 23석 9승 4홉, 충청도가 15석 7두 7승 1작, 황해도가 2석 14두 6승 2홉 6작이다. 의빈궁의 사명일제, 사중삭제, 기일제에 쓸 물종을 가정하여 도별로 나누어 마련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청밀 8두 4승 6홉 9작 - 1승당 가미 5두로, 3두 6승은 경상도에, 2두 8승은 전라도에, 2두 6홉 9작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진유 7두 3승 9홉 7작 - 1승당 가미 3두로, 2두 9승은 경상도에, 2두 6승은 전라도에, 1두 8승 9홉 7작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소맥 5석 8두 5홉 - 1두당 가미 2두 5승으로, 2석 6두는 경상도에, 1석 14두는 전라도에, 1석 3두 5홉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점미 4두 2승 4홉 - 1두당 가미 5두로, 1두 6승은 경상도에, 1두 4승은 전라도에, 1두 2승 4홉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중미 1석 5두 4승 2홉 2작 - 1두당 가미 2두 5승으로, 9두는 경상도에, 6두 5승은 전라도에, 4두 9승 2홉 2작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녹두 7두 9승 3홉 3작 - 1두당 가미 2두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지초 2근 2냥 2푼(分) - 1근당 가미 10두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백미 9홉 - 1승당 가미 3승으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백자 4두 4승 8홉 8작 - 1두당 가미 10두로, 1두 8승은 경상도에, 1두 6승은 전라도에, 1두 8홉 8작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진자 4두 3승 2홉 - 1두당 가미 12두로, 1두 8승은 경상도에, 1두 5승은 전라도에, 1두 2홉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황률 1두 8홉 - 1승당 가미 3두로, 6승은 경상도에, 4승 8홉은 전라도에 분정한다. -, 대조 1두 8홉 - 1승당 가미 2두로, 충청도에 분정한다. -, 생강 1근 2전 - 1근당 가미 4두 5승으로, 전라도에 분정한다. -, 염 1승 5홉 - 1승당 가미 2승으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저주지 3권 12장 - 1권당 가미 7두 5승으로, 2권은 경상도에, 1권 12장은 전라도에 분정한다. -, 황밀 8근 7냥 - 1근당 가미 12두 5승으로, 3근 8냥은 경상도에, 2근 15냥은 전라도에, 2근은 충청도에 분정한다. -, 저상지 13장 반 - 1권당 가미 2두 5승으로, 충청도에 분정한다. -, 태 2두 - 1두당 가미 2두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표고 4냥 - 1근당 가미 8두로, 2냥 5전은 경상도에, 1냥 5전은 전라도에 분정한다. -, 죽순 2승 - 1승당 가미 3두로, 전라도에 분정한다. -, 오해조 6냥 - 1냥당 가미 1승 2홉으로, 황해도에 분정한다. -, 이상 미 84석 5두 8홉 9작 가운데 경상도가 33석 10두 1승, 전라도가 28석 2두 1승 7홉 4작 7리(里) 5호(戶), 충청도가 19석 10두 3승 9홉 7작, 황해도가 2석 12두 4승 1홉 8작이다. 戶曹以文禧廟 孝昌墓宜嬪宮祭用物種加定別單啓 別單文禧廟 孝昌墓四名日四仲朔忌辰祭用物種加定分道磨鍊小麥三石十一斗八升六合五夕每斗價米二斗五升一石十斗慶尙道一石四斗全羅道十二斗八升六合五夕忠淸道 淸蜜五升八合四夕每升價米五斗二斗二升慶尙道一斗七升全羅道一斗一升八合四夕忠淸道 眞油五斗八升三合七夕每升價米三斗二斗四升慶尙道二斗全羅道一斗四升三合七夕忠淸道 中米一石五斗六升一合七夕每斗價米二斗五升九斗慶尙道七斗全羅道四斗六升一合七夕忠淸道 粘米五斗四升九合三夕每斗價米五斗二斗五升慶尙道一斗七升全羅道一斗二升九合三夕忠淸道 白米二斗五升四合四夕每斗價米三斗黃海道 芝草一斤每斤價米十斗黃海道 柏子六斗五升二合四夕每斗價米十斗三斗一升慶尙道二斗一升全羅道一斗三升二合四夕忠淸道 榛子六斗二升四合每斗價米十二斗三斗慶尙道一斗八升全羅道一斗四升四合忠淸道 黃栗一斗五升六合每升價米三斗九斗慶尙道六升六合全羅道 大棗一斗五升六合每升價米二斗忠淸道 生薑十四兩四錢每升價米四斗五升全羅道 菉豆五斗七升三合二夕每斗價米二斗黃海道 太五斗七升五合每斗價米二斗黃海道 小豆七升一合每升價米二升黃海道 木麥米一斗一升三合每斗價米五斗慶尙道 芥子五合每升價米四斗忠淸道 楮注紙五卷四張每卷價米七斗五升三卷慶尙道二卷四張全羅道 蔈古一斤八兩六錢每斤價米八斗十四兩慶尙道十兩六錢全羅道 竹筍二升每升價米三斗全羅道 島海藻六兩每兩價米一升二合黃海道 黃蜜四斤十四兩每斤價米十二斗五升二斤四兩慶尙道一斤八兩全羅道一斤二兩忠淸道 楮常紙十九張半每卷價未二斗五升忠淸道 鹽二升七合每升價米三升黃海道 鬱金一兩二錢每斤價米二石金羅道加士里七兩五錢每兩價米一升八合黃海道 䓀莄六斤一兩五錢每斤價米二斗全羅道 已上米七十石十斗四合二夕內慶尙道二十九石一斗七升七合五夕全羅道二十三石九升四合忠淸道十五石七斗七升一夕黃海道二石十四斗六升二合六夕○宜嬪宮四名日四仲朔忌日祭用物種加定分道磨鍊淸蜜八斗四升六合九夕每升價米五斗三斗六升慶尙道二斗八升全羅道二斗六合九夕忠淸道 眞油七斗三升九合七夕每升價米三斗二斗九升慶尙道二斗六升全羅道一斗八升九合七夕忠淸道 小麥五石八斗五合每斗價米二斗五升二石六斗慶尙道一石十四斗全羅道一石三斗五合忠淸道 粘米四斗二升四合每斗價米五斗一斗六升慶尙道一斗四升全羅道一斗二升四合忠淸道 中米一石五斗四升二合二夕每斗價米二斗五升九斗慶尙道六斗五升全羅道四斗九升二合二夕忠淸 道菉豆七斗九升三合三夕每斗價米二斗黃海道 芝草二斥二兩二分每斤價米十斗黃海道 白米九合每升價米三升黃海道 柏子四斗四升八合八夕每斗價米十斗一斗八升慶尙道一斗六升全羅道一斗八合八夕忠淸道 榛子四斗三升二合每斗價米十二斗一斗八升慶尙道一斗五升全羅道一斗二合忠淸道 黃栗一斗八合每升價米三斗六升慶尙道四升八合全羅道 大棗一斗八合每升價米二斗忠淸道 生薑一斤二錢每斤價米四斗五升全羅道 鹽一升五合每升價米二升黃海道 楮注紙三卷十二張每卷價米七斗五升二卷慶尙道一卷十二張全羅道 黃蜜八斤七兩每斤價米十二斗五升三斤八兩慶尙道二斤十五兩全羅道二斤忠淸道 楮常紙十三張半每卷價米二斗五升忠淸道 太二斗每斗 價米二斗黃海道 蔈古四兩每斤價米八斗二兩五錢慶尙道一兩五錢全羅道 竹筍二升每升價米三斗全羅道 島海藻六兩每兩價米一升二合黃海道 已上米八十四石五斗八合九夕內慶尙道三十三石十斗一升全羅道二十八石二斗一升七合四夕七里五戶忠淸道十九石十斗三升九合七夕黃海道二石十二斗四升一合八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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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2년(1788) 7월 7일 정묘(丁卯)



『일성록』, 정조 12년(1788) 7월 8일 무진(戊辰)

Quote-left blue.png 각신(閣臣)을 보내어 효창묘(孝昌墓)에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게 하고, 승지를 보내어 의빈묘(宜嬪墓)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효창묘의 헌관(獻官)은 원임 제학(原任提學) 채제공(蔡濟恭)이고, 집례(執禮)는 직각 정대용(鄭大容)이고, 대축(大祝)은 검열 김조순(金祖淳)이다. 의빈묘의 헌관은 승지 홍인호(洪仁浩)이고, 대축은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 황기옥(黃基玉)이다.

遣閣臣行奠酌禮于孝昌墓承旨致祭于宜嬪墓 孝昌墓獻官原仕提學 蔡濟恭 執禮 直閣 鄭大容 大祝 檢閣 金祖淳 宜嬪墓獻官 承旨 洪仁浩 大祝 濟用判官 黃基玉 (刀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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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2년(1788) 7월 8일 무진(戊辰)



『일성록』, 정조 13년(1789) 4월 25일 신해(辛亥)

Quote-left blue.png 경희궁(慶熙宮)에 나아갔다.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교(轎)를 타고 협양문(協陽門)과 돈화문(敦化門)을 나와 운관(雲觀) 고갯길을 거쳐서 새로 건립한 문희묘(文禧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두루 나아가 묘내(廟內)를 둘러보고 이어 재실(齋室)에 나아가 영건청의 당상과 낭청을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경희궁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고 나서 묘소에 갈 것이다. 전처럼 평융복(平戎服)으로 왕래할 것이니 승지와 사관은 시복(時服)으로 하고, 백관의 지영(祗迎)과 지송(祗送), 수가(隨駕)는 그만두고 구(舊) 궁료(宮僚)들도 대령하지 말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교를 타고 묘문(廟門)을 나와 어의궁(於義宮) 앞길에 이르러 교에서 내렸다가 교를 타고 흥화문(興化門)과 숭정문(崇政門)으로 들어왔다. 문희묘에 이르러 다례를 행하였다. 평융복으로 갈아입고 교를 타고 광달문(廣達門)과 흥화문을 나와 돈의문(敦義門)을 경유하여 묘소에 이르러 재실로 들어갔다. 편여(便輿)를 타고 묘상(墓上)에 가서 다례를 행하였다. 의빈묘에 들러 다례를 행하였다. 이어 편여를 타고 국내(局內)를 두루 살펴보고 재실로 돌아왔다. 수복(守僕), 수호군(守護軍)을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해서 시상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승지를 보내 의소묘(懿昭墓)에 나아가 봉심하게 하였다. 교를 타고 재실을 나왔다. 하교하기를, “능(陵), 원(園), 묘(墓)에 나무를 심은 적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수십일 사이에 10만 그루를 넘게 심어 충분할 뿐만 아니라 뿌리가 안정되고 줄기가 가꾸어져서 모두 무성하니 보잘것없는 군영의 힘으로 이처럼 면모가 달라질 것이라고는 일찍이 생각하지 못했다. 중신(重臣)에게는 이 일이 기록할 만한 노고가 되기에 부족하겠지만 지금 두루 살펴보고는 비로소 다른 군영에서 거행한 것이 책임이나 때운 것임을 알았으니 가상히 여겨 장려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수어사(守禦使) 김종수(金鍾秀)에게 특별히 외구마(外廐馬) 1필(匹)을 사급하되 교 앞에서 직접 받게 하고 역사(役事)를 돌본 영교(營校)는 승전(承傳)하여 속히 수용하도록 병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김종수가 직접 받고 예를 행하였다. 이어 법안(法鞍)을 갖추어 타고서 수가하라고 명하였다. 돈의문을 경유하여 흥화문과 광달문으로 들어와 대내로 돌아왔다. 詣慶熙宮 具翼善冠 袞龍袍乘轎出協陽門 敦化門由雲觀峴歷臨新建文禧廟宜嬪廟周視廟內仍御齋室召見營建堂郞敎以詣慶熙宮行茶禮後當臨墓所依前以平戎服往來承史時服百官袛迎袛送隨駕置之舊宮僚亦勿待令事分付乘轎出廟門至於義宮前路降轎乘轎入興化門 崇政門臨文禧廟行茶禮訖改具平戎服乘轎出廣達門 興化門由敦義門至墓所入齋室乘便輿臨墓上行茶禮歷臨宜嬪墓行茶禮仍以便輿審視局內還齋室命守僕守護軍令該曹考例施賞遣承旨詣懿昭墓奉審乘轎出齋室敎曰陵園墓植木何限而數十日之間株數不啻過十萬有餘着根培莖無不鬱然以蕞爾營力如是改觀曾所不科於重臣此事不足爲可紀之勞而今旣遍審始知他營擧行之塞責嘉奬之擧豈容已也守禦使 金鍾秀特賜外厩馬一匹轎前親受看役營校承傳斯速收用事分付兵曹 鍾秀親受行禮仍命具法鞍乘而隨駕由敦義門入興化門 廣達門還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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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3년(1789) 4월 25일 신해(辛亥)



『일성록』, 정조 13년(1789) 4월 30일 병진(丙辰)

Quote-left blue.png 성정각(誠正閣)에서 병조 참판 유의를 소견하였다.

유의가 아뢰기를, “문희묘(文禧廟)와 의빈묘(宜嬪廟)가 봉안된 곳에 대문(大門)의 군사가 고군(雇軍) 1명인 것은 너무나 허술합니다. 본조에 유영(留營)하는 향군(鄕軍) 중에서 3명까지 정해 보내고 만일 과장(科場)을 만날 때는 2명만 사용하고 과장이 지난 뒤에 도로 수직(守直)하도록 정식을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문희묘 원역(員役)의 장표(章標)는 보고해 오면 즉시 만들어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召見兵曹參判 柳誼于誠正閣 誼啓言文禧廟宜嬪廟兩廟奉安之地大門軍士之雇軍一名極涉疏虞本曹留營鄕軍中限三名定送而若値科場之時限二名使用過場後守直事請定式從之又啓言文禧廟員役章標待報來卽爲造送似好矣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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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3년(1789) 4월 30일 병진(丙辰)



『일성록』, 정조 14년(1790) 3월 15일 을미(乙未)

Quote-left blue.png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이어 의소묘(懿昭墓) 및 선희묘(宣禧墓)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효창묘(孝昌墓)에 들러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전략)…여를 타고 묘상에 들러 전작례를 행하였다. 이어 의빈묘(宜嬪墓)에 들러 잔을 올린 뒤, 편여(便輿)를 타고 뒷동산을 순시하고 만리창(萬里倉) 후록에 이르렀다. 조금 있다 재실로 돌아와 각신과 승지를 소견하고 말을 타고 재실을 나와 숭례문으로 들어와 돈화문 밖에 이르러 수가하는 군병에게 계엄을 풀라고 명하였다. 협양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여를 타고 대내로 돌아왔다. 詣璿源殿展拜仍詣懿昭墓及宣禧墓行酌獻禮歷臨孝昌墓行奠酌禮 …(전략)…乘輿臨墓上行奠酌禮仍臨宜嬪墓奠酌訖乘便輿巡後岡至萬里倉後麓少頃還齋室召見閣臣 承旨乘馬出齋室入崇禮門至敦化門外命隨駕軍兵解嚴至協陽門下馬乘輿還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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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정조 14년(1790) 3월 15일 을미(乙未)



의빈묘지명

의빈묘지명(宜嬪墓誌銘)

Quote-left blue.png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문효가 병오(1786년) 5월에 죽고 여섯 달이 지나고 나서 9월 14일 갑신에 빈 또한 죽고 말았다. 석 달 뒤 11월 20일 경인에 율목동 문효의 묘 왼쪽 언덕 묏자리에 장사 지냈다. 빈은 자신을 잃고 문효를 따라 죽기를 늘 소원하더니 비로소 이제 문효의 무덤 곁으로 떠나가 버렸다. 빈은 장차 한을 풀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능히 이름을 구별할 줄 알고, 단정한 태도와 자세를 수양하고, 맑고 올곧고, 더욱 상서로이 화기로우며 온화했다. 열 살(영조 38년, 1762년)에 궁중에 들어왔는데 임금의 친척 집안 여인들이 모두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혈통으로 알았다. 타고난 기품이 아주 훌륭하게 뛰어나 능히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췄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용 했다. 심지어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길을 도회지에서 똑똑하게 분별하고 확고하게 지키니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내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에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마음을 느끼고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거절 했다. 이에 빈의 노비를 꾸짖고 벌을 내렸고 그러한 뒤에 비로소 내 명을 받들어 당석 했다. 그 달에 임신함으로써 임인(1782년) 9월에 세자를 낳았다. 이해 소용으로 봉해졌고 귀한 아들로 하여금 빠르게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다. 빈은 자기 의견만 옳다고 여기는 바를 더욱 스스로 억눌렀다. 내전을 대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를 갖추고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섬겼다. 시침 할 때는 "이제부터 국세를 의탁할 데가 있지만 위로 내전이 있고 또 후궁이 있습니다."라며 또 번번이 당석이 잘못 되었다며 사양하고 거절하며 피했다. 내전은 그 자식을 이미 받아들였고, 양육 할 때는 반드시 생모에게 맡겼는데 조정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규칙과 정례였다. 빈은 감히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여 처리하지 않고 내전을 따랐고 내전은 빈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고 점차 자라기를 기다렸다. 빈은 세자를 어루만질 때는 생각하여 몸과 마음가짐을 조심했고, 밤에는 반드시 아침이 밝을 때까지 밝은 촛불을 두었고, 잘 때는 옷을 벗은 적이 없었는데 5년 동안 한 결 같았다. 또 나날이 천한 일을 몸소 했고, 말을 할 때는 극진히 존중히 여기고 공경했다.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면 빈은 "왕세자는 내전의 아들입니다. 내가 낳았다고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겠습니까?"라고 했다. 빈의 거처는 겨우 비바람을 가리어 막고, 의복과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얼마 되지 않아 변변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지금 지체가 높고 귀한 신분은 이미 나에게는 과분합니다. 도리어 스스로를 자랑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다면 어찌 더욱이 몸에만 재앙이 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궁이 복을 오래 누릴 수 있도록 생활을 검소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처음 5월에 변고가 일어나고 떠나보낼 때 말과 얼굴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이 혹 괴이하게 여겨 어찌 개의치 아니하냐고 물어보니 "내 몸은 내 몸이 아닙니다. 지금 보는 나라는 위태함이 위엄이 머리카락과 같습니다. 다행히 내가 임신 했지만 늘어놓고 슬퍼하고 이와 같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내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과 같아 나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헌데 어찌하여 병이 들었단 말인가? 증세는 의술과 약으로 고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았는데 매일 세수할 때 내가 가서 보고 살폈다. 정신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사지는 움직일 수 없어도 나를 대할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고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기운을 내서 메아리처럼 응답했다. 임종하기 전날 저녁에 내가 가자 갑자기 슬퍼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며 청했다. 이에 내가 꾸짖으며 "평상시 나를 볼 때는 근심 어린 얼굴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라고 물었다. 빈이 말하기를 "앞서서 내전께 아들이 생긴 경사는 축복이었습니다. 천신이 다시 자식을 가져서 종사는 매우 다행이지만, 사심을 마음속으로 억눌러 견뎌내지 못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복이 지나치게 과분해서 끝내 병이 중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마음에 차지 않으나 오직 오래도록 지닌 소원은 죽을 고비에 임하여도 아직 얻지 못하여 근심입니다. 그러니 정전에 자주 가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하면 경사가 있을 것이니, 장차 땅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감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내가 들어가서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전(효의왕후)은 빈이 진실로 나라를 위했다며 정성스럽게 말했는데 거짓됨이 없었다. 지난날을 생각하건대 어찌 아닐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죽음을 잊지 아니하고 맛보는 일과 언행을 조심했는데 빈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성껏 임하는 태도와 마음은 매우 친밀하여 자매를 잃은 마음이었다. 온 궁 안 사람이 모두 빈의 죽음을 한탄하여 한숨 쉬고 슬퍼하며 애처로워했고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빈이 작위를 받고나서 나는 더 엄하게 단단히 단속하여 이따금 사람이 견디지 못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빈은 한 뜻을 기쁘고 좋게 웃어른의 명령을 좇았다. 일이 혹 더욱 은혜에 해당 되면 위축되어 더욱 멀리하고 견지 했으니 자못 겸손했다. 빈의 선산 터가 이롭지 못하여 의논하여 이장하자고 하자 빈이 간하여 말하기를 "천한 집안의 일에 감히 마음대로 안배하여 번잡하게 관청의 돈을 쓰는 것은 사사로운 개인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중한 바인데 네가 불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바라건대 스스로 의복을 팔아서 이장 비용에 보태라."고 일렀다. 동궁의 외가 사친은 규정에 따라 증 찬성에 추증하지만 나는 이전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5월에 문효세자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교지를 내렸는데 빈은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한 집안 사람으로서 분황을 예로서 중지 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벼슬을 더 높여서 내려주는 것은 곧 국가의 법전이 있는 바인데 감히 전하께서 내려주는 물건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뜻밖에도 어찌 감히 장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가 빈이 매양 애석해서 따뜻한 밥과 비단, 모시를 내렸으나 도리어 궁의 희빈(姬嬪)만 못하였다. 비록 자기를 굽히고 의지를 꺾어 검소함을 따랐으나 오히려 가난하고 군색함을 염려하며 궁중 사람에게 늘 너그러이 빌려줬다. 결국에 가서는 세상을 떠나자 상자에는 남은 비단이 없어서 염습할 때 모두 시장에서 가져왔고, 살아생전에는 은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염습 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림)을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 했다. 궁인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하기를 "빈이 그 청빈함을 잘 알고 지키니 마침내 이에 이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빈의 두 오라버니는 곤궁하여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으나 사심으로 관여한 적이 없었다. 내가 "조정의 관작은 진실로 부당하게 남수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남는 녹봉으로 저 배고픔과 추위를 구원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빈이 걱정하는 모양으로 대답하길 "궁방이 세워진 이후 한 물건도 제멋대로 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사가의 천인에게 재물의 은덕을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빈의 장례 때 그 친족은 다른 사람에게서 옷과 신발을 빌렸다. 궁빈의 사친은 관직명이 없는 사람은 궁중 출입을 허락을 받을 수 없으나 오래 전부터 본궁에서 접견하라고 허락했었다. 그러나 빈이 본궁에 나가 기거 하면서 사친과 여러 해 동안 격조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문 앞에 이르지 못하게 했다. 말하기를 "올 때 임금에게 여쭈고 아뢰어 뜻을 받들지 아니 하고서는 감히 불러내어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릇 형제가 몹시 가난하여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의탁하고자 하면 가족과 떨어지고자 했다. 단란함은 사람이 항상 품고 있는 심정인데 빈은 어찌 오직 다른 사람과 다르단 말인가. 내가 내린 명령은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조심히 정성껏 지켰는데, 이는 실제로 사실을 경험했다. 궁에서 산지 20여년인데 일찍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좋지 않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혹여 말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거나 의심을 접하면 반드시 자세하고 소상하게 하여 스스로 완전히 타당함에 이르게 했다. 나는 보통 때 집안 밖의 일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빈도 역시 상황을 따르며 술잔을 주고받는데 익숙하고 내명부에 대해 꺼내지 않았다. 내가 혹 처소에 도착할 때면 궁중의 계집종들은 모두 황급히 숨어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뉘우치고 경계함에 힘썼고 아랫사람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았다.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 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기예도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아, 빈의 장사(葬事)에 반드시 내가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지었다. 어찌 재주와 얼굴을 잊지 아니하겠는가. 나는 궁액을 엄히 다스리고 가까운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하는데 일을 주면 헤아려서 명령을 받드는 일이 적었다. 빈을 후궁 반열에 둔지 20년인데 단단히 타일러서 잘못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게 했다. 이에 곧 명심하고 작은 실수도 하지 않고 조심하며 응대하였는데 법도가 저절로 있었고,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마땅히 출중했다. 이것은 뛰어난 현인도 분명히 어렵다. 본분을 각별히 정성껏 지키며 신분의 엄격함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하였다. 사사로이 윗사람을 찾아가서 청탁하는 일을 경계하고 엄히 끊어내고 가득 이루어놓음에 있어서 염려하였는데 이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에 이른 것이 크고 옳고 그름이 매우 분명하지만 감히 입을 열 수 없고, 일이 되어가는 형세는 손을 댈 수 없으면 능히 오랫동안 정성을 쌓고 있는 힘을 다해 곧바로 나아가 물러서지 않았다. 가진 것의 의리로 하여금 끝내 마땅히 바른 곳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는 책을 읽은 사대부가 쉽게 갖추지 못하는 바이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일에 능하고 절개와 지조가 있다고 여기고 전하여져서 당대의 미담이 될 것이다. 후일 빈의 상론은 이와 같다. 빈의 출신은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하여 스승에게 배우지 못하고 후궁이 되었지만 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알았다. 내전을 위해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한 것은 하늘과 땅이 마땅히 알고 금석도 가히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빈은 높음과 귀함, 임금의 은덕을 입은 영광을 즐거움으로 삼기에 거듭 부족하다고 했다. 마음에 잊히지 않는 정성으로 매우 간절히 청하며 반드시 내전에게 정성을 다하겠다고 하며 더구나 장차 상심하고 슬피 울면서 평생 동안 내전을 따르겠다고 지극히 바랐다. 비록 옛날에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충정이지만 배에 칼을 꽂은 정성도 이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음을 경험 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낳은 어진 아들은 영광된 왕세자가 되고, 공을 세워서 국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하고, 경사로이 자식을 길러 왕족이 번창되어야 할 터인데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 문효세자가 죽은 변이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이에 대략 찬차 하였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 글이 길어졌다. 그대 빈은 계유년생이고 향년 34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해를 못 넘기고 죽었다. 빈의 본관은 창녕이고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시조이다. 인보의 아들은 문하시중으로 지낸 송국이다. 그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고 자는 여완이다. 여완의 큰 아들은 석린이고, 둘째 아들은 석용이며, 셋째 아들은 석인이다. 성석인은 예조판서와 대제학 직위에 올랐었고 시호는 정평인데 이 사람이 빈의 선조다. 그러나 이후 집안이 중간에 계보를 잃어버렸다. 7대조 만종은 제릉 참봉이고, 고조 성경은 군자감 정이다. 빈의 아버지는 증 찬성 윤우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임씨인데 통례원 인의 임종주의 딸이다.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하늘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말을 하면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몸은 정중하게 행동하고 입은 극진한 말을 했으나 복록이 은덕에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운명인가보다. 저 고요한 율곡의 언덕은 문효세자가 잠든 곳이니 영원토록 서로를 지켜줄 것이다. 생각하건대 멀고 오랜 세월동안 배회하며 탄식하고 근심할 것이다.

宜嬪成氏是文孝世子之母也文孝以丙午五月逝越六月甲申嬪又歿歿之越三月庚寅葬于高陽郡之栗木洞實文孝墓左岡壬坐之原也嬪自失文孝常願死則歸葬于其墓側今乃遂其願尙能紓嬪之恨而慰文孝之靈乎嗚呼悲夫嬪生而瑩慧甫周歲能卞姓名字容儀脩潔端凝祥和藹然踰十歲選入掖庭戚里家婦女之出入大內者皆認以閥閱種子天稟絶異能持謙恭而行儉約至於義理大處明辨確守不少變也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自是益自抑畏事內殿備盡誠禮侍寢則曰從今國勢有托而上有內殿且有嬪御其又敢當夕乎輒切諫而辭避焉內殿旣取其子子之若其養育之節必任於其所生母卽國朝故事也嬪惟罔敢自專而聽於內殿內殿使自養以待稍長則撫視惟謹夜必明燭達朝未嘗解衣而寢者五年如一日躬執賤役言語極其尊敬或言其太過則曰儲君也內殿之子也我何敢以己出而自尊乎居處僅蔽風雨服食務從菲薄曰我之有今日榮貴分已侈矣顧益自誇而自肆豈惟於身爲災尙可曰爲東宮惜福云乎哉及遭五月之變能以理譬遣未 嘗形于辭色人或恠其恝然則曰吾身非自有也見今宗國之危凜然如髮而幸吾有娠若任情肆悲縱吾不自恤如得罪宗國何其遘疾也症形非醫藥所治彌月沈頓而日必盥頮爲予之臨視也雖在精神迷亂四體不能運動之時對予則輒斂容作氣應答如響屬纊之前夕予臨問則忽辭致悽惋淚隨言零予責之曰平日未嘗以慽容見予今反如是何也嬪曰內殿之慶膺斯男生前至祝也賤臣之復有子雖爲宗社深幸而竊不勝私心之憂畏今果福逾分而病至革矣一死不足怛而惟以宿願之未獲爲臨死之慽焉或望頻御正殿勤求嗣續則方來之慶亦將懽忭於地下云予感而頷之及詰朝起正衣就席而訖予入視已無奈矣嬪所以爲宗國爲內殿者苟非至誠無僞則顧何能之死不忘若是其惓惓乎內殿嘗服其誠意親愛無間悼喪之懷若失同氣一宮之人皆咨嗟稱惜至於痛哭奔號焉嬪自受爵予之操切益嚴往往有人所不堪而處之怡然一意承順或事係干恩尤瑟縮斂遠愈執其謙嘗以嬪家山地之不利方議改葬嬪諫曰以賤家事至煩公費實非私意之所敢安予言其有所重而不可獲已則曰願自賣衣服以補葬需云東宮外家私親例贈贊成而予曾不許至五月喪後始降官敎嬪懼不自勝家人請行焚黃之禮嬪止之曰䝯贈卽國典所在不敢不祗受而又安敢張大乃爾予於嬪每惜其恩數饎爨絲枲之用反不如宮姬嬪雖折節從儉乎尙患艱窘輒假貸於宮中人及其歿也篋無餘帛斂襲之具皆取於市生時不造銀匙其飯含也以柳代之宮人輩瞠然相語曰固知嬪之守約而其貧乃至此乎有二娚窮窶無以自存而未嘗有私與焉予詔之曰朝家官爵固不當濫授而爾獨不以俸餘救其飢寒乎嬪蹙然而對曰設宮房以後不敢擅用一物況敢爲私家賤人沾丐之資乎故嬪之喪其親屬率借其衣靴於人云宮嬪私親之無職名者雖不通籍於禁中而許接見於本宮故事則然嬪之出寓本宮也私親之積年貽阻者使不得造門起居曰來時未敢稟承不可召見云夫兄弟之顚連欲其庇覆親懿之離闊欲其團欒此人之常情嬪豈獨異於人哉其謹守予敎令無一事自專斯足以驗也處宮闈二十有餘年未曾與人睢盱或事有難言地偪嫌疑而必委曲宛轉自至妥當予居常不以外言入內而嬪亦習於循默酬酢不出於戶庭予或臨止則所使之宮婢皆惶匿不敢前其自飭之勤而嚴於御下亦如此敏女紅善烹餁卽其餘事而筆翰亦自超凡旁通數理之學便能領會蓋其神識開悟觸處皎如非特才藝之全備而已嗚呼嬪之葬必用予銘豈爲才色之不忘乎哉予御宮掖嚴而近苛給事承令少可於意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而佩訓飭則尺寸無失愼應對則規度自有夙夜匪懈終始如一此其出類之賢固已難矣恪守常分明乎等級之嚴痛絶私謁戒其盈成之懼此其尤難者也今夫義理之關係至大是非孔彰而地處之有不敢開 口事勢之有莫可容手猶能積誠竭力直前無退使所執之義理終歸於至當至正之地者此讀書士夫之所未易辨而一有其人則指以爲能事大節傳爲當世之美談後日之尙論若嬪者出自寒微不資師承小星之女歸妹之娣初未學而知之而若其爲內殿之苦心血忱神祗可質也金石可透也一身之尊貴恩榮曾不足以爲樂而耿耿之衷懇懇之辭必欲自效於內殿乃以將死之哀鳴獲遂平生之至願雖古之尸諫之忠剚腹之誠不是過也而其執德持心純然出於本然之公有可徵矣宜其篤生賢子光承儲位功存國勢之磐泰慶毓公族之熾昌而邦運不幸神理多舛遽見今夏之喪變又未幾何與其在腹之兒一朝歸化嬪之跡其將泯沒於斯世矣其言行之卓卓可紀非予述之有孰傳之而知其爲泯沒之可惜乎此不惟爲嬪之恨而爲文孝之恨也遂撰次梗槪不覺其言之長云爾嬪以癸酉月日生得年三十有四擧一男一女男卽文孝女生未踰歲而矢嬪昌寧人昌寧之成以高麗中尹仁輔爲鼻祖中尹之子曰松國門下侍中傳三世而始入本朝曰汝完檢校政丞諡文靖文靖長子石璘次石瑢次石因禮曹判書大提學諡靖平是爲嬪之先而因中微間失譜系云七代祖萬種齊陵參奉高祖景軍資監正父曰胤祐贈贊成母曰林贈貞敬夫人引儀宗胄女也銘曰 行之循乎天者敦行言之感乎人者至言躬敦行而口至言祿之不酬德殆命焉彼窈栗阡文孝攸藏兮永言相守想百世徊徨而咨傷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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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빈묘지명(宜嬪墓誌銘)



의빈묘표

의빈묘표(宜嬪墓表)

Quote-left blue.png 내가 즉위한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일(1786년 음력 9월 14일)에 의빈 성씨가 사망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문효세자가 죽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달에 이르렀는데 죽었다.

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효의왕후가 아닌 천한 몸에서 나왔는데 병에 걸려 죽으니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효의왕후에게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지내지 못 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탄식했다. 승은을 받기 시작할 때는 감히 효의왕후를 대신 하여 당석 할 수 없다며 간절히 사양했다. 내가 잠시 틈을 타서 무언가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해도 한 결 같이 온통 매우 간절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시침하는 것을 보면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은 항상 정위(정실)가 자신을 핍박하고 근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에 정실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였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빈의 권력과 부귀는 스스로 높여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빈은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한 결 같이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 현명함이 어찌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 생이고 득년 34세다.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비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으로 시사했다. 나는 빈의 집안 맏아들이 조상이 엄습하여 세상이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가 제릉참봉 성만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시 삼대 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성정경이 군자감으로 지냈는데 곧 빈의 7대조로 고조부와 같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다. 빈의 부모는 법도에 따라 추증 되었는데 이는 문효세자의 외조부모였다. 저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워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찾아오는 사람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해 하도록 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予卽阼之十年丙午九月甲申宜嬪成氏歿是歲五月喪文孝世子嬪方有娠幾臨月而嬪遂歿矣其歿之前夕敷袵垂涕而告予曰國家螽斯之望不于正殿而于賤身賤身病且死此不稱之災也繼自今頻御正殿勤求嗣續則死無足恨蓋以內殿之未始誕育居常憂歎承恩之初苦辭不敢當夕而乘間諷切懇懇如一乃於綿綴之際猶且作氣力致宛轉言出肝膈有足感動人者予不覺改容而許之予觀從古妾御之居榮貴者常嫌正位之偪己從而有凌嫡蔑分之患其臨死之托鮮不係戀乎私屬以徼身後之寵光焉嬪則榮不以自尊死不以自慽而斷斷苦心只知有內殿必伸其志願而後已其賢豈易得哉文孝嬪之出也嬪自爲儲君母益自謙抑所處之室不加修葺被服飮食務從儉約曰我之有今日非我敢期復欲一毫侈大于前吾身之有災不暇論此豈爲東宮惜福之道哉予嚴於操切未嘗假以恩寵往往有不可堪處而略無難色謹守飭令恐恐然如有失終始罔懈處宮闈二十餘年未或與人睢盱特蒙內殿之親愛內殿哭其歿慽甚孔懷其賢於人者不亦多乎嬪生于英宗二十九年癸酉七月八日得年三十有四系籍昌寧以高麗中尹仁輔爲鼻祖中尹之子曰門下侍中松國侍中之曾孫曰檢校政丞文靖公汝完始仕我朝圭組相襲爲世望族其後中衰至齊陵參奉萬種始通仕又三世而爲軍資監正景卽嬪七世祖若高祖贈贊成胤祐贈貞敬夫人林卽嬪父母也贈秩之典以文孝外親也夫以閭巷卑微之地生此拔類之賢載誕元良寵承嬪位殆若有不偶然者而文孝之墓土未乾嬪又與在腹之子遽殞其命予所衋傷匪特爲嬪之一身而已歿越三月庚寅葬于高陽郡之栗木洞壬坐原距文孝墓百步而近以從嬪之願也死而有知庶以其孔邇爲慰也歟予以嬪之言行本末誌于壙又書其梗槪于墓石使來者惜嬪之賢而哀其命之不幸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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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빈묘표(宜嬪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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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능원묘천봉안(陵園墓遷奉案)』, 1929 ~ 194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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