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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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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의 3남이며, 조선의 13대 왕인 명종(明宗)의 후사로 즉위한 조선 14대 왕 선조의 안태지(安胎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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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4대 국왕 선조의 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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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그 태는 덕흥대원군 사저 후원에 매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선조 태실지에서 아기 태실비는 입석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가봉을 위해 춘천 등 여러 지역이 대상지로 거론되었으나 춘천의 태실지는 공사를 진행하던 와중 이 장소가 옛날에 태를 묻었던 장소였기에 태실 조성이 중단되고 최종적으로는 충청도 임천으로 낙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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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은 임천에 위치한 오덕사(五德寺)였다. 신성군(信城君)의 증손인 함릉군(咸陵君)의 상소에 따르면 오덕사는 중종의 아들이었던 복성군(福城君)의 원당이었다. 복성군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후에 하성군(河城君)으로 하여금 복성군의 뒤를 잇게 하였다. 이후 하성군이 명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자 신성군으로 하여금 복성군의 제사를 받들게하고, 임천에 선조의 태실을 가봉한 뒤 오덕사로 하여금 태실 수호의 임무를 맡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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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재위 초반 선조 태실의 비석에 문제가 감지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때는 숙종 37년(1711) 명종‧현종 태실을 함께 개수하면서다. 본래의 가봉비가 박락이 심해져 판독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새롭게 비석을 마련하였다. 이 때 비석의 석재 조달과 관련한 기록이 눈에 띈다. 선조 태실에 새로 비석을 마련하면서 처음에는 왕릉 비석으로 많이 사용하던 충청도 남포현에서 생산한 돌을 쓰려 하였다. 그러나 돌을 떼어내는 폐단이 많다고 하여 사가에서 소유한 돌을 구입하여 쓰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는 당시 왕릉에 비석을 건립하며 있었던 논의를 따른 것으로 왕실에서 비석을 건립하는 사업의 일면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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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태실비는 총 2기가 현존하고 있다. 하나는 오덕사 경내에 위치한 개건 태실비로 태실비의 전면에는 「선조대왕태실(宣祖大王胎室)」이라는 명문이 각자돼있다. 후면은 「숭정기원후일백이십년정묘오월초삼일립(崇禎紀元後一百二十年丁卯五月初三日立)」이라는 명문을 있어 해당 태실비가 영조 23년(1747) 5월 3일에 건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후면 명문의 좌측에는 「융경사년경오십월이십일일소립비자세구각결고개석(隆慶四年庚午十月二十一日所立碑字歲久刻缺故改石)」이라는 각자가 태실비 개수사실을 부기하고 있어 선조 재위기에 건립한 태실비가 오래되어 새롭게 해당 태실비를 건립하였다는 건립 사유 또한 확인이 가능하다. 해당 개건 태실비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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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태실비는 부여군 충화면 장자마을에 소재한 초립 태실비로 태실비의 전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는 명문이 각자돼있다. 후면은 「융경사년십월이십일일립(隆慶四年十月二十一日立)」이라는 명문이 있어 해당 태실비가 선조 3년(1570)에 건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초립 태실비는 2010년 12월 31일 부여군 향토유적 112호로 지정됐다. 2017년까지 초립 태실비는 적절한 보호가 이뤄지지 못한 채 방치되어 보존상태가 나빴으나 최근 정비를 거쳐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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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태실비 2기는 문화재 지정을 통한 보호를 받고 있으나 태실지에 대한 관리는 소흘하다. 태실지에는 개인의 민묘가 조성돼있으며 태실지 인근에는 선조 태실의 부재로 쓰였던 사방석과 귀부의 석재 일부가 흩어져 있어 신속하고 체계적인 수습이 요구된다.
  
 
=='''관련 기록'''==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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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51권, 선조 35년(1602) 6월 25일 을묘(乙卯) 4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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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관상감에서 태봉할 곳을 골라 등급을 정해 두도록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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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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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에 증고사(證考使)를 뽑아 보내 태봉(胎峯)으로 합당한 곳을 살펴보고 '''3등으로 나누어 장부를 만들어 두는데, 원자(元子)와 원손(元孫)은 1등으로, 대군(大君)과 공주(公主)는 2등으로, 왕자와 옹주(翁主)는 3등으로 태봉을 초계(抄啓)하여 낙점(落點)을 받아 태를 저장해 두는 것이 전례입니다.''' 그런데 난리 이후로는 만들어 둔 장부가 불에 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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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러 아기씨들의 저장하지 못한 태가 한둘이 아닌데 오래지 않아 태를 저장하라는 명이 계시면 상고할 만한 자료가 없으니, 지극히 민망스럽습니다. 비록 증고사를 뽑아 보내지는 못하더라도 각도 도사(都事)로 하여금 본감(本監)의 지리학 관원을 거느리고 태봉으로 합당한 곳을 미리 살펴서 등급에 따라 재가를 받아 장부를 만들어 두었다가 임시하여 아뢰어 사용할 수 있도록 승전(承傳)을 받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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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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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象監啓曰: "平時證考使, 差遣胎峯可當處看審, '''分三等置簿, 元子、元孫則一等, 大君、公主則二等, 王子、翁主則三等 胎峯抄啓受點, 藏胎前例''', 而亂離以後, 置簿閪失, 諸阿只氏未藏胎, 非止一二。 不久有藏胎之命, 則無憑可考, 極爲悶慮。 證考使雖未可差遣, 而令各道都事, 率本監地理學官員, 胎峯可合處, 預爲看審等第, 啓下置簿, 臨時啓用事, 捧承傳何如?" 傳曰: "允。"|출처=『선조실록』151권, 선조 35년(1602) 6월 25일 을묘(乙卯) 4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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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50권, 숙종 37년(1711) 10월 22일 정축(丁丑) 2번째 기사====
 
====『숙종실록』50권, 숙종 37년(1711) 10월 22일 정축(丁丑) 2번째 기사====
 
{{Blockquote|《예조 참의 송징은이 호서에 가서 삼조의 태봉 석물을 수선하고 돌아오다》
 
{{Blockquote|《예조 참의 송징은이 호서에 가서 삼조의 태봉 석물을 수선하고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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疏辭, 令該曹, 稟處。
 
疏辭, 令該曹, 稟處。
 
|출처=『승정원일기』 631책 (탈초본 34책) 영조 3년(1727) 1월 27일 기사(己巳) 31/32 기사}}
 
|출처=『승정원일기』 631책 (탈초본 34책) 영조 3년(1727) 1월 27일 기사(己巳) 31/3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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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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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별집(別集) 2권, 「사전전고(祀典典故)」장태조(藏胎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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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선조(宣祖)가 즉위하니, 조정 의논이, “조종조의 예에 의하여 땅을 가려서 임금의 태(胎)를 간직해야 한다.” 하여 잠저(潛邸)에 구하여 원북(園北) 송림(松林) 사이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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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땅을 가려 장차 강원도 춘천(春川)에다 묻으려고 하였는데 역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그 정혈(正穴)을 살펴보니, 이는 옛날에 이미 묻었던 자리였다. 이에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옮겨서 터를 닦을 때에 정혈의 수십 보 밖에 작은 항아리가 묻혀 있어 혹시 또 그것이 옛 자리가 아닌가 모두 의심스러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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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구사맹(具思孟)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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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정혈이 아니다. 작은 항아리만 있고 다른 물건은 없으니, 이로써 큰 역사를 경솔히 폐기할 수 없다.”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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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의 의심이 진정되어 공사가 또 거의 끝났는데, 조정에서 이 사실을 듣고 사헌부에서 사맹의 계품(啓稟)하지 않은 죄를 논하여 파직시켰으며 대신들이 더러운 곳에 묻는 것이 부당하다 하여 드디어 충청도 임천(林川)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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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백성들이 굶주려서 돌을 운반하기에 매우 피로하였으니 한 임금의 태를 묻는데 그 해(害)가 삼도(三道)에 두루 미쳤다.|출처=『연려실기술』별집(別集) 2권, 「사전전고(祀典典故)」장태조(藏胎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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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파노라마===
 
===파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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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100%" height="800" src="http://dh.aks.ac.kr/~ssn/pavilion/Field_PC/PC012/PC012.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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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샷 갤러리===
 
===스틸샷 갤러리===
 
<gallery>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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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SSNPC_Seonjo01.JPG|서삼릉 태실 집안지 선조 태실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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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SSNPC_Seonjo02.JPG|서삼릉 태실 집안지 선조 태실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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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Seonjo_Tashilbi_Sky_View.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주상전하태실비 공중 전경
 +
File:OGPC_Seonjo_Gabongbi01_Front.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주상전하태실비 전면
 +
File:OGPC_Seonjo_Gabongbi01_back.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주상전하태실비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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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Seonjo_Gabongbi01_Yisu_Front.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주상전하태실비 이수 전면
 +
File:OGPC_Seonjo_Gabongbi01_Yisu_back.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주상전하태실비 이수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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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Seonjo_Gabongbi01_board.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주상전하태실비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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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Seonjo_Ohdeoksa_Sky_View.jpg|부여 오덕사 선조 태실 선조대왕태실비 공중 전경
 +
File:OGPC_Seonjo_Gabongbi02_Front.JPG|부여 오덕사 선조 태실 선조대왕태실비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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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Seonjo_Gabongbi02_bisin_Front.JPG|부여 오덕사 선조 태실 선조대왕태실비 비신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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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Seonjo_Gabongbi02_bisin_back.JPG|부여 오덕사 선조 태실 선조대왕태실비 비신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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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Seonjo_Gabongbi02_Yisu_back.JPG|부여 오덕사 선조 태실 선조대왕태실비 이수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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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Seonjo_Tashil_pano.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초안지 분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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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Seonjo_Tashil_stone03.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초안지 귀부 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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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Seonjo_Tashil_stone05.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초안지 사방석 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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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
 
===가상현실===
 
====현재의 묘역====
 
*가상현실 예시 : 충주 억정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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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초장 추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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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mode="slideshow">
*가상현실 예시 : 용인 서봉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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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SSNPC_Seonjo01.JPG|서삼릉 태실 집안지 선조 태실 전면
<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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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SSNPC_Seonjo02.JPG|서삼릉 태실 집안지 선조 태실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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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Seonjo_Tashilbi_Sky_View.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주상전하태실비 공중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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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Seonjo_Tashil_stone05.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초안지 사방석 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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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지도'''==
 
=='''전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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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9일 (수) 18:32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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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태실(宣祖 胎室)
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태봉산의 선조대왕 태실 터
식별자 PC012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선조 태실
한자명 宣祖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Seonjo
피안자 명칭 선조(宣祖)
피안자 이칭 이균(李鈞)·이연(李昖)·하성군(河城君)·목릉(穆陵)
피안자 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
피안자 모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피안자 생년월일 1552.11.11
피안자 몰년월일 1608.02.01
안태 연월일 1570.10.21
안태지 기록 도정궁(都正宮) 후원 송림(松林) 『연려실기술』
안태지 기록1 임천(林川) 태봉(胎峯) 『숙종실록』
안태지 좌표(위도) 36°14'87.47"N
안태지 좌표(경도) 126°80'47.3"E
안태지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산1-17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안 연월일 1929.05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今主上殿下胎,皇明隆慶四年,十月二十一日,卯時藏
지문 찬자 조선 예조(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태실 터 인근 태실 석재 유구 2점 확인
유물1 충화 선조대왕태실비(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112호) 1570년 건립
유물2 선조대왕태실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 1747년 건립
태항아리 선조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내용[편집]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의 태실이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그 태는 덕흥대원군 사저 후원에 매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선조 태실지에서 아기 태실비는 입석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가봉을 위해 춘천 등 여러 지역이 대상지로 거론되었으나 춘천의 태실지는 공사를 진행하던 와중 이 장소가 옛날에 태를 묻었던 장소였기에 태실 조성이 중단되고 최종적으로는 충청도 임천으로 낙점되었다.

선조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은 임천에 위치한 오덕사(五德寺)였다. 신성군(信城君)의 증손인 함릉군(咸陵君)의 상소에 따르면 오덕사는 중종의 아들이었던 복성군(福城君)의 원당이었다. 복성군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후에 하성군(河城君)으로 하여금 복성군의 뒤를 잇게 하였다. 이후 하성군이 명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자 신성군으로 하여금 복성군의 제사를 받들게하고, 임천에 선조의 태실을 가봉한 뒤 오덕사로 하여금 태실 수호의 임무를 맡겼다고 한다.

숙종 재위 초반 선조 태실의 비석에 문제가 감지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때는 숙종 37년(1711) 명종‧현종 태실을 함께 개수하면서다. 본래의 가봉비가 박락이 심해져 판독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새롭게 비석을 마련하였다. 이 때 비석의 석재 조달과 관련한 기록이 눈에 띈다. 선조 태실에 새로 비석을 마련하면서 처음에는 왕릉 비석으로 많이 사용하던 충청도 남포현에서 생산한 돌을 쓰려 하였다. 그러나 돌을 떼어내는 폐단이 많다고 하여 사가에서 소유한 돌을 구입하여 쓰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는 당시 왕릉에 비석을 건립하며 있었던 논의를 따른 것으로 왕실에서 비석을 건립하는 사업의 일면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선조의 태실비는 총 2기가 현존하고 있다. 하나는 오덕사 경내에 위치한 개건 태실비로 태실비의 전면에는 「선조대왕태실(宣祖大王胎室)」이라는 명문이 각자돼있다. 후면은 「숭정기원후일백이십년정묘오월초삼일립(崇禎紀元後一百二十年丁卯五月初三日立)」이라는 명문을 있어 해당 태실비가 영조 23년(1747) 5월 3일에 건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후면 명문의 좌측에는 「융경사년경오십월이십일일소립비자세구각결고개석(隆慶四年庚午十月二十一日所立碑字歲久刻缺故改石)」이라는 각자가 태실비 개수사실을 부기하고 있어 선조 재위기에 건립한 태실비가 오래되어 새롭게 해당 태실비를 건립하였다는 건립 사유 또한 확인이 가능하다. 해당 개건 태실비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지정되어있다.

또다른 태실비는 부여군 충화면 장자마을에 소재한 초립 태실비로 태실비의 전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는 명문이 각자돼있다. 후면은 「융경사년십월이십일일립(隆慶四年十月二十一日立)」이라는 명문이 있어 해당 태실비가 선조 3년(1570)에 건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초립 태실비는 2010년 12월 31일 부여군 향토유적 112호로 지정됐다. 2017년까지 초립 태실비는 적절한 보호가 이뤄지지 못한 채 방치되어 보존상태가 나빴으나 최근 정비를 거쳐 보호되고 있다.

이처럼 태실비 2기는 문화재 지정을 통한 보호를 받고 있으나 태실지에 대한 관리는 소흘하다. 태실지에는 개인의 민묘가 조성돼있으며 태실지 인근에는 선조 태실의 부재로 쓰였던 사방석과 귀부의 석재 일부가 흩어져 있어 신속하고 체계적인 수습이 요구된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선조실록』151권, 선조 35년(1602) 6월 25일 을묘(乙卯) 4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관상감에서 태봉할 곳을 골라 등급을 정해 두도록 건의하다》

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평상시에 증고사(證考使)를 뽑아 보내 태봉(胎峯)으로 합당한 곳을 살펴보고 3등으로 나누어 장부를 만들어 두는데, 원자(元子)와 원손(元孫)은 1등으로, 대군(大君)과 공주(公主)는 2등으로, 왕자와 옹주(翁主)는 3등으로 태봉을 초계(抄啓)하여 낙점(落點)을 받아 태를 저장해 두는 것이 전례입니다. 그런데 난리 이후로는 만들어 둔 장부가 불에 타버렸습니다.

지금 여러 아기씨들의 저장하지 못한 태가 한둘이 아닌데 오래지 않아 태를 저장하라는 명이 계시면 상고할 만한 자료가 없으니, 지극히 민망스럽습니다. 비록 증고사를 뽑아 보내지는 못하더라도 각도 도사(都事)로 하여금 본감(本監)의 지리학 관원을 거느리고 태봉으로 합당한 곳을 미리 살펴서 등급에 따라 재가를 받아 장부를 만들어 두었다가 임시하여 아뢰어 사용할 수 있도록 승전(承傳)을 받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觀象監啓曰: "平時證考使, 差遣胎峯可當處看審, 分三等置簿, 元子、元孫則一等, 大君、公主則二等, 王子、翁主則三等 胎峯抄啓受點, 藏胎前例, 而亂離以後, 置簿閪失, 諸阿只氏未藏胎, 非止一二。 不久有藏胎之命, 則無憑可考, 極爲悶慮。 證考使雖未可差遣, 而令各道都事, 率本監地理學官員, 胎峯可合處, 預爲看審等第, 啓下置簿, 臨時啓用事, 捧承傳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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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선조실록』151권, 선조 35년(1602) 6월 25일 을묘(乙卯) 4번째 기사



『숙종실록』50권, 숙종 37년(1711) 10월 22일 정축(丁丑)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예조 참의 송징은이 호서에 가서 삼조의 태봉 석물을 수선하고 돌아오다》

예조 참의(禮曹參議) 송징은(宋徵殷)이 호서(湖西)에 가서 삼조(三朝)의 태봉(胎峯) 석물(石物)을 손질하여 옛모습을 고치고 돌아왔다. 명묘(明廟)의 태봉은 서산(瑞山)에 있는데 비석이 전부 손상된 까닭에 새 비를 다시 세웠고, 선묘(宣廟)의 태봉은 임천(林川)에 있는데 비석의 자획(字劃)이 마멸된 까닭에 전면(前面)을 갈아 다시 새겼고, 현묘(顯廟)의 태봉은 대흥(大興)에 있는데 상석(裳石)이 물러나서 역시 개축(改築)하였다.

禮曹參議宋徵殷往湖西, 修改三朝胎峰石物而還。 明廟胎峰在瑞山, 而碑石全傷, 故改立新碑, 宣廟胎峰在林川, 而碑石字畫剔缺, 故前面磨治改刊, 顯廟胎峰在大興, 而裳石動退, 亦改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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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숙종실록』50권, 숙종 37년(1711) 10월 22일 정축(丁丑) 2번째 기사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1747) 3월 21일 신해(辛亥)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임천군에 있는 선조 대왕 태실의 비를 새로 세우게 하다》

전 충청 감사 서종급(徐宗伋)이 임천군(林川郡)의 선조 대왕(宣祖大王) 태실(胎室) 비(碑)의 글자가 깎여서 없어졌다고 임금에게 아뢰자, 임금이 대신에게 물었다. 좌의정 정석오(鄭錫五)가 말하기를,

"비(碑)의 글자가 깎여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야 할 바가 있으니, 해조(該曹)에서 복계(覆啓)하기를 기다렸다가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뒤에 예조 참판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앞면에는 묘호(廟號)를 쓰고 뒷면에는 새로 고쳐 세우는 시(時)·월(月)·일(日)을 숭정(崇禎)의 간지(干支)로 쓰고, 그 아래에다 주석(註釋)하기를, ‘햇수가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되었기 때문에 다시 세운다.’고 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忠淸前監司徐宗伋, 以林川郡 宣祖大王胎室碑字剝缺上聞, 上詢大臣。 左議政鄭錫五曰: "碑字漫漶, 所重在焉, 待該曺覆啓處之好矣。" 後, 禮曹參判金尙魯奏: "前面書廟號, 後面從改建時月日, 書以崇禎干支, 註其下曰, ‘歲久字缺, 故改竪’ 云, 則似好矣。" 上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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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1747) 3월 21일 신해(辛亥) 2번째 기사


승정원일기[편집]

『승정원일기』 291책 (탈초본 15책) 숙종 8년(1682) 6월 23일 기해(己亥) 19/4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李師命이 입시하여 宣祖 胎峯의 碑石을 奉審하는 일에 대해 논의함》

李師命曰, 小臣, 以宣廟胎峯碑石奉審事, 當往林川地, 而以其圖形觀之, 則前頭, 必有改竪[改豎]之擧。若然, 則臣之今行, 與道臣相議, 豫爲聞見浮石之處, 以爲待農隙改造, 然後可無累次往復之患, 故敢此仰達。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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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91책 (탈초본 15책) 숙종 8년(1682) 6월 23일 기해(己亥) 19/41 기사


『승정원일기』 458책 (탈초본 24책) 숙종 37년(1711) 2월 10일 기사(己巳) 24/2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金鎭圭 등이 입시하여 과거 林川胎室의 碑石을 補畫할 때 監役한 尹鼎和와 白蠟으로 補畫한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守令의 처리 등에 대해 논의함》

鎭圭曰, 此乃忠淸監司, 以林川胎室碑石傷缺事, 啓聞者也。此狀啓, 下本曹, 而判書李墪遭服制, 臣要其出仕後回啓, 則墪, 以事體不當稽置, 使次官擧行, 故臣在外議于大臣, 而仰達矣。

此狀啓以爲, 碑石前面三字之畫傷缺, 而守護軍等招內, 壬戌年禮曹堂上奉審, 以白蠟補畫, 厥後補處剝落云, 而節錄其營上, 其時本曹回啓關文之辭以實之, 故臣取考本曹謄錄, 則當初本道監司, 因本官所報狀聞碑石之爲傷, 而以其將遞歸, 未及奉審, 遣禮官與新監司, 同審其傷處, 以紙印出以上, 則本曹與大臣相議, 以仍存舊碑, 略加磨治, 補其微缺之似便, 回啓允下後, 遣郞廳及繕工監役董役矣。

堂上奉審狀聞而已, 所謂以蠟補畫者, 非所可論, 郞廳監役, 爲董役進去。且回啓中, 使之補其微缺者, 乃磨治後補刻缺畫之謂, 非使以蠟補缺, 而果有補蠟之事, 則誠爲可駭。若問於其時郞廳監役, 可知實狀, 故考出其姓名, 則監役閔衡重, 已物故, 郞廳尹鼎和, 生存矣。下詢于大臣而處之, 何如? 宗泰曰, 鄕所石手等招辭如此, 事體爲重, 似當問之矣。

上曰, 問之, 宜矣。

鎭圭曰, 令攸司稟處乎?

上曰, 拿問, 可也。

鎭圭曰, 此狀啓, 又以爲丁亥己丑監色等, 使石手依倣壬戌用蠟之事, 私自補畫云。

兩年事, 本官知而不報監司, 則甚可駭, 若是監色等, 私自爲之, 而本官不察, 則此奉命修治而補蠟之郞廳監役, 其罪雖似爲重, 雖然事體亦不可置之, 下詢大臣, 何如?

彦綱曰, 輕重有間云者, 謂地方官, 輕耶?

鎭圭曰, 然矣。

彦綱曰, 不然。知之不知之間, 地方官, 似重矣。

宗泰曰, 其時無報知營門之事, 而鄕色輩, 私自補缺, 地方官知之, 固有罪。雖不知之, 亦難免其責。先施以罷推之罰, 似無不可, 而事體爲重, 禮郞旣被拿問, 當該守令, 似當一體施行矣。

上曰, 亦爲拿問, 可也。出擧條

鎭圭曰, 忠淸監司狀啓以爲, 林川胎室碑石之傷缺處, 比瑞山胎碑傷處, 稍淺而似闊, 瑞山碑將改, 則此碑恐無異同云, 而臣議于兩大臣, 則皆以爲, 舊石之仍用, 似合愼重之道, 臣意, 碑石若至大段傷缺, 則當改新石, 而只爲缺傷, 輒改舊時所建, 似非愼重之道。

壬戌年, 本曹與大臣請磨治補刻者, 蓋以此也。且伏見此碑後面印本, 則書以隆慶年號矣宣祖大王胎室碑石之以中朝年號刻建者, 今若改以卽今年號, 則豈無怵惕之心乎? 區區愚見如此, 下詢于大臣而下敎, 何如?

上曰, 傷缺處不至大段, 仍用舊石而磨刻, 可也。

鎭圭曰, 壬戌年林川碑役, 則禮郞及繕工監役, 下去董役, 今番瑞山石役, 以兩監提調進出定奪矣, 今此林川事, 則何以爲之乎?

宗泰曰, 胎室雖重, 而舊例則無提調下往之事云, 且改立新石, 與仍用舊石而磨刻, 事體亦別, 用壬戌例, 似宜矣。

上曰, 兩監提調之竝往, 似太重, 只送禮郞與監役, 則又似太輕, 禮曹堂上及監役, 下送, 可也。瑞山之碑, 不可磨治云耶? 若不大段傷損, 則磨補, 似好矣。

宗泰曰, 下敎誠然, 石品若堅好, 則恐不當輕改舊石矣。

上曰, 全石若不傷損, 而只字畫有缺, 則依林川例磨刻, 可也。

鎭圭曰, 此是長官所已回啓, 而允下者也, 非自下所敢更議, 而聖敎至當, 移文本道, 問碑石傷處輕重而後, 更稟矣。

上曰, 然。

鎭圭曰, 瑞山事, 前日大臣, 以待秋擧行定奪, 林川事, 亦依此爲之乎?

上曰, 依爲之。 出擧條

上曰, 頃日前水使白時耉拿來推考, 舊例則當云如此如此, 而中間謬誤, 以致襲用, 此非擧行條也, 當考前例矣, 金吾官入侍, 故下敎矣。

鎭圭曰, 小臣惶恐敢達矣。向日入侍時, 全昧事體, 有所越職冒陳, 致勤嚴旨, 卽今禁府公事, 有不敢晏然, 更當敢以辭疏自列, 不賜允許, 久爲撕捱, 冞增惶隕, 而誤事之後, 終不宜冒沒行公, 此累疏而不能已也。雖承勿辭之批, 而臣之不可行公, 與無故而祈免者有異矣。榻前非敢辭職, 而顧臣情地誠然, 前下聖敎, 分付承旨, 以文字出擧條, 何如?

上曰, 非大段事, 不當出擧條矣, 一向引嫌未安, 從速察任。

宗泰曰, 金鎭圭之言, 非矣。當初下敎之下, 宜其未安, 而旣已陳疏承批之後, 更爲陳疏, 必欲圖遞, 過矣。非敢爲辭職之言, 而以不可行公爲言, 未免太固滯矣。

上曰, 當初推考, 出於事體上, 非過自引嫌之事, 從速行公,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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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458책 (탈초본 24책) 숙종 37년(1711) 2월 10일 기사(己巳) 24/29 기사


『승정원일기』 462책 (탈초본 25책) 숙종 37년(1711) 8월 23일 경진(庚辰) 4/2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宣祖大王의 胎室을 奉審한 뒤 傷缺處를 啓聞해서 修改를 始役하게 하고, 三邑 胎室의 修改를 擇日해서 推移하여 始役하게 할 것을 청하는 禮曹의 계》

任舜元, 以禮曹言啓曰, 林川郡宣祖大王胎室碑石字劃傷缺處, 因舊石磨治改刻事, 頃已定奪, 堂上一員, 今將進去矣。參議臣吳命峻, 親聞林川郡守李有壽之言, 則碑石字劃之曾前改刻處, 頗似坎然, 今又改磨而改刻, 則勢將漸益坎然, 所見必將未安云。本曹堂上, 方爲進去, 詳細奉審後, 曾前改刻處, 今雖再磨而再刻, 若不至大段低陷, 則仍爲磨治改刻, 而若或果爲未安, 則以其所見, 具由馳啓, 更爲稟處, 而大興郡顯宗大王胎室石物修改後, 以土王用事, 不得始役於他所, 十餘日當爲空日。其間進詣林川郡宣祖大王胎室, 詳細奉審後, 或啓聞或始役, 而三邑胎室修改, 竝以前擇日, 推移始役,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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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462책 (탈초본 25책) 숙종 37년(1711) 8월 23일 경진(庚辰) 4/22 기사


『승정원일기』 587책 (탈초본 31책) 영조 1년(1725) 2월 25일 계사(癸巳) 38/3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閔鎭遠 등이 입시하여 世子 책봉은 大臣이 올라오면 稟旨하여 擧行할 것, 李重煥 등은 睦時龍과 함께 추문할 것, 柳重茂에 대해서는 결말을 기다릴 것 등에 대해 논의함》

……鎭遠啓曰, 全羅監司狀啓, 珍山地, 太祖大王胎峯, 石物動退, 塗灰剝落, 令該曹稟處事, 上年八月十六日, 啓下本曹, 而有稟定擧行事, 未及回啓。

丁巳年加平地, 中宗大王胎峯石物等, 中折破碎等處修改時, 只令觀象監官員, 與本道眼同修改。壬戌年林川地, 宣祖大王胎峯, 碑石磨治時, 本曹郞廳及繕工監役, 下去董役。辛卯年瑞山地, 明宗大王胎室, 石物折傷處, 大興地, 顯宗大王胎室, 碑石動退處, 林川地, 宣祖大王胎室, 碑石削磨改刻等, 三處修改時, 本曹堂上, 進去董役矣。動退處合縫塗灰之役, 不至大段, 而前例不一, 何以爲之?

上曰, 頃年堂上進去者, 蓋兼三處董役, 而雖其一處, 事體重大, 堂上可去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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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587책 (탈초본 31책) 영조 1년(1725) 2월 25일 계사(癸巳) 38/37 기사


『승정원일기』 631책 (탈초본 34책) 영조 3년(1727) 1월 27일 기사(己巳) 31/3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五德寺를 禮曹에 소속시켜 宣祖의 胎室을 守護하게 할 것을 청하는 李極의 상소》

咸陵君極上疏, 伏以臣於向日賜對時, 略陳宣廟胎封事, 而辭語拙訥, 未能悉其所欲言, 退以文字更籲之意仰達, 而蒙允矣。玆敢悉陳前席未畢之說, 伏願聖明, 留神省察, 而亟賜變通焉。忠淸道林川五德寺, 乃是中廟王子福城君嵋之願堂, 而後爲宣祖大王胎室守護之齋宮也。

蓋宣廟潛邸時, 出繼於福城君, 及至入承大統之後, 命臣曾祖父臣信城君珝, 乃奉福城君祀事, 故五德爲臣家之所次知, 而後因宣廟胎室, 移封於五德之傍麓, 五德又爲胎室之齋宮, 而臣家又奉承傳, 仍主此寺, 兼管守護者, 于今一百有餘年矣。

胎室事體至重, 故當初則道臣及本官, 每年奉審, 一如陵寢之規, 蠲除本寺之僧役, 使之一同山直, 專意守護, 而他鄕僧之來接本寺者, 勿許刷去, 本寺僧之移去他邑者, 卽令推來者, 俱是先朝受敎, 故緇徒來集, 寺以殷富, 而禁火禁伐等事, 從而差定, 胎峯火巢之內, 斧斤不敢入, 而松檜常蔚然矣。

挽近以來, 奉審之擧, 自爾廢閣, 致勤之道, 漸不如初, 本寺之見侵雜役, 與他寺無別, 故僧漸渙散, 寺乃凋弊, 胎峯禁護之事, 力有所不贍, 以之樹木濯濯, 殆若無主之空山, 而至於火巢之內, 有起耕者, 有作家者, 又於相望之地, 有入葬者, 故往在肅廟朝壬午年間, 臣父臣晉平君澤, 以此呈于內司, 轉以入啓, 則先王聞而驚之, 卽下判付, 仍命移報禮曹, 以爲稟處之地, 而自禮曹, 行關本道, 陳其田, 毁其家, 掘其葬, 而申禁其僧役, 而後上下諸人, 稍知胎室之爲重, 而自壬午至今, 又將爲三十年之久矣。

人心日渝, 禁令漸解, 昔之陳者, 今或復耕, 前之毁者, 後或復作, 而寺僧之因於雜役, 往而益深, 侵擾歲增, 名目多端, 將至於不能支堪之境, 則守護之不謹, 勢所必至矣。疲殘僧徒, 無所控告, 有時來言於臣家, 而自臣家, 亦無他變通, 不過有狀報春曹, 行關本道之一條路, 而春曹之聽狀報, 如聞私事, 本道之視關文, 如見弁髦, 每圖一番關文, 動費多般經營, 而末梢則歸於無效而止, 胎封之守護不實, 日甚一日, 則寺僧之受困, 固不足恤, 而事體之寒心, 爲如何哉?

惟彼本道之官, 亦豈昧胎室之體重, 而役使僧徒, 全不顧藉者, 此實無他, 特以此寺見屬臣家, 而守護胎室之義, 反有所掩故耳。

仰惟先朝之以此寺屬臣家者, 聖意蓋爲其本是福城君房願堂, 故不欲移屬, 雖作胎室齋宮, 猶使之如慮次知者也。

及今年代寢遠, 弊端層生之後, 則不可無隨時變通之道, 況伏念列聖朝胎室, 固非一二, 而未聞有私家之干預守護, 則豈獨於此, 而有所異同也哉?

臣意則從今以後, 以此寺, 屬于春曹, 使之苟管僧徒, 全責守護, 則本道之視遇, 似非臣家次知之比, 而胎室重地, 庶得永久完護之道, 故臣玆不避煩瀆之罪, 謹陳如右, 伏願聖明速賜處分, 以爲變通之地, 不勝幸甚。

答曰, 省疏具悉。

疏辭, 令該曹, 稟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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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631책 (탈초본 34책) 영조 3년(1727) 1월 27일 기사(己巳) 31/32 기사


연려실기술[편집]

『연려실기술』별집(別集) 2권, 「사전전고(祀典典故)」장태조(藏胎條)[편집]

Quote-left blue.png 선조(宣祖)가 즉위하니, 조정 의논이, “조종조의 예에 의하여 땅을 가려서 임금의 태(胎)를 간직해야 한다.” 하여 잠저(潛邸)에 구하여 원북(園北) 송림(松林) 사이에서 찾았다.

곧 땅을 가려 장차 강원도 춘천(春川)에다 묻으려고 하였는데 역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그 정혈(正穴)을 살펴보니, 이는 옛날에 이미 묻었던 자리였다. 이에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옮겨서 터를 닦을 때에 정혈의 수십 보 밖에 작은 항아리가 묻혀 있어 혹시 또 그것이 옛 자리가 아닌가 모두 의심스러워하였다.

관찰사 구사맹(具思孟)이 말하기를,

“이것은 정혈이 아니다. 작은 항아리만 있고 다른 물건은 없으니, 이로써 큰 역사를 경솔히 폐기할 수 없다.” 하여,

여러 사람의 의심이 진정되어 공사가 또 거의 끝났는데, 조정에서 이 사실을 듣고 사헌부에서 사맹의 계품(啓稟)하지 않은 죄를 논하여 파직시켰으며 대신들이 더러운 곳에 묻는 것이 부당하다 하여 드디어 충청도 임천(林川)으로 옮겼다.

이때 백성들이 굶주려서 돌을 운반하기에 매우 피로하였으니 한 임금의 태를 묻는데 그 해(害)가 삼도(三道)에 두루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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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려실기술』별집(別集) 2권, 「사전전고(祀典典故)」장태조(藏胎條)



지식 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파노라마[편집]

스틸샷 갤러리[편집]

전자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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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이규상, 『한국의 태실』, 청원문화원, 2005.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조선의 태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