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태실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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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태봉산의 선조대왕 태실 터 | |사진출처=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태봉산의 선조대왕 태실 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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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내용'''== |
− | 조선 | + |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의 태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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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그 태는 덕흥대원군 사저 후원에 매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선조 태실지에서 아기 태실비는 입석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가봉을 위해 춘천 등 여러 지역이 대상지로 거론되었으나 춘천의 태실지는 공사를 진행하던 와중 이 장소가 옛날에 태를 묻었던 장소였기에 태실 조성이 중단되고 최종적으로는 충청도 임천으로 낙점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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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조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은 임천에 위치한 오덕사(五德寺)였다. 신성군(信城君)의 증손인 함릉군(咸陵君)의 상소에 따르면 오덕사는 중종의 아들이었던 복성군(福城君)의 원당이었다. 복성군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후에 하성군(河城君)으로 하여금 복성군의 뒤를 잇게 하였다. 이후 하성군이 명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자 신성군으로 하여금 복성군의 제사를 받들게하고, 임천에 선조의 태실을 가봉한 뒤 오덕사로 하여금 태실 수호의 임무를 맡겼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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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종 재위 초반 선조 태실의 비석에 문제가 감지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때는 숙종 37년(1711) 명종‧현종 태실을 함께 개수하면서다. 본래의 가봉비가 박락이 심해져 판독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새롭게 비석을 마련하였다. 이 때 비석의 석재 조달과 관련한 기록이 눈에 띈다. 선조 태실에 새로 비석을 마련하면서 처음에는 왕릉 비석으로 많이 사용하던 충청도 남포현에서 생산한 돌을 쓰려 하였다. 그러나 돌을 떼어내는 폐단이 많다고 하여 사가에서 소유한 돌을 구입하여 쓰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는 당시 왕릉에 비석을 건립하며 있었던 논의를 따른 것으로 왕실에서 비석을 건립하는 사업의 일면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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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조의 태실비는 총 2기가 현존하고 있다. 하나는 오덕사 경내에 위치한 개건 태실비로 태실비의 전면에는 「선조대왕태실(宣祖大王胎室)」이라는 명문이 각자돼있다. 후면은 「숭정기원후일백이십년정묘오월초삼일립(崇禎紀元後一百二十年丁卯五月初三日立)」이라는 명문을 있어 해당 태실비가 영조 23년(1747) 5월 3일에 건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후면 명문의 좌측에는 「융경사년경오십월이십일일소립비자세구각결고개석(隆慶四年庚午十月二十一日所立碑字歲久刻缺故改石)」이라는 각자가 태실비 개수사실을 부기하고 있어 선조 재위기에 건립한 태실비가 오래되어 새롭게 해당 태실비를 건립하였다는 건립 사유 또한 확인이 가능하다. 해당 개건 태실비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지정되어있다. | ||
+ | |||
+ | 또다른 태실비는 부여군 충화면 장자마을에 소재한 초립 태실비로 태실비의 전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는 명문이 각자돼있다. 후면은 「융경사년십월이십일일립(隆慶四年十月二十一日立)」이라는 명문이 있어 해당 태실비가 선조 3년(1570)에 건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초립 태실비는 2010년 12월 31일 부여군 향토유적 112호로 지정됐다. 2017년까지 초립 태실비는 적절한 보호가 이뤄지지 못한 채 방치되어 보존상태가 나빴으나 최근 정비를 거쳐 보호되고 있다. | ||
+ | |||
+ | 이처럼 태실비 2기는 문화재 지정을 통한 보호를 받고 있으나 태실지에 대한 관리는 소흘하다. 태실지에는 개인의 민묘가 조성돼있으며 태실지 인근에는 선조 태실의 부재로 쓰였던 사방석과 귀부의 석재 일부가 흩어져 있어 신속하고 체계적인 수습이 요구된다. | ||
=='''관련 기록'''== | =='''관련 기록'''== | ||
===조선왕조실록=== | ===조선왕조실록=== | ||
+ | |||
+ | ====『선조실록』151권, 선조 35년(1602) 6월 25일 을묘(乙卯) 4번째 기사==== | ||
+ | {{Blockquote|《관상감에서 태봉할 곳을 골라 등급을 정해 두도록 건의하다》 | ||
+ | |||
+ | 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 ||
+ | |||
+ | "평상시에 증고사(證考使)를 뽑아 보내 태봉(胎峯)으로 합당한 곳을 살펴보고 '''3등으로 나누어 장부를 만들어 두는데, 원자(元子)와 원손(元孫)은 1등으로, 대군(大君)과 공주(公主)는 2등으로, 왕자와 옹주(翁主)는 3등으로 태봉을 초계(抄啓)하여 낙점(落點)을 받아 태를 저장해 두는 것이 전례입니다.''' 그런데 난리 이후로는 만들어 둔 장부가 불에 타버렸습니다. | ||
+ | |||
+ | 지금 여러 아기씨들의 저장하지 못한 태가 한둘이 아닌데 오래지 않아 태를 저장하라는 명이 계시면 상고할 만한 자료가 없으니, 지극히 민망스럽습니다. 비록 증고사를 뽑아 보내지는 못하더라도 각도 도사(都事)로 하여금 본감(本監)의 지리학 관원을 거느리고 태봉으로 합당한 곳을 미리 살펴서 등급에 따라 재가를 받아 장부를 만들어 두었다가 임시하여 아뢰어 사용할 수 있도록 승전(承傳)을 받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
+ | |||
+ |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
+ | |||
+ | 觀象監啓曰: "平時證考使, 差遣胎峯可當處看審, '''分三等置簿, 元子、元孫則一等, 大君、公主則二等, 王子、翁主則三等 胎峯抄啓受點, 藏胎前例''', 而亂離以後, 置簿閪失, 諸阿只氏未藏胎, 非止一二。 不久有藏胎之命, 則無憑可考, 極爲悶慮。 證考使雖未可差遣, 而令各道都事, 率本監地理學官員, 胎峯可合處, 預爲看審等第, 啓下置簿, 臨時啓用事, 捧承傳何如?" 傳曰: "允。"|출처=『선조실록』151권, 선조 35년(1602) 6월 25일 을묘(乙卯) 4번째 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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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50권, 숙종 37년(1711) 10월 22일 정축(丁丑) 2번째 기사==== | ====『숙종실록』50권, 숙종 37년(1711) 10월 22일 정축(丁丑) 2번째 기사==== | ||
{{Blockquote|《예조 참의 송징은이 호서에 가서 삼조의 태봉 석물을 수선하고 돌아오다》 | {{Blockquote|《예조 참의 송징은이 호서에 가서 삼조의 태봉 석물을 수선하고 돌아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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疏辭, 令該曹, 稟處。 | 疏辭, 令該曹, 稟處。 | ||
|출처=『승정원일기』 631책 (탈초본 34책) 영조 3년(1727) 1월 27일 기사(己巳) 31/32 기사}} | |출처=『승정원일기』 631책 (탈초본 34책) 영조 3년(1727) 1월 27일 기사(己巳) 31/32 기사}} | ||
+ | |||
+ | ===연려실기술=== | ||
+ | ====『연려실기술』별집(別集) 2권, 「사전전고(祀典典故)」장태조(藏胎條)==== | ||
+ | {{Blockquote|선조(宣祖)가 즉위하니, 조정 의논이, “조종조의 예에 의하여 땅을 가려서 임금의 태(胎)를 간직해야 한다.” 하여 잠저(潛邸)에 구하여 원북(園北) 송림(松林) 사이에서 찾았다. | ||
+ | |||
+ | 곧 땅을 가려 장차 강원도 춘천(春川)에다 묻으려고 하였는데 역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그 정혈(正穴)을 살펴보니, 이는 옛날에 이미 묻었던 자리였다. 이에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옮겨서 터를 닦을 때에 정혈의 수십 보 밖에 작은 항아리가 묻혀 있어 혹시 또 그것이 옛 자리가 아닌가 모두 의심스러워하였다. | ||
+ | |||
+ | 관찰사 구사맹(具思孟)이 말하기를, | ||
+ | |||
+ | “이것은 정혈이 아니다. 작은 항아리만 있고 다른 물건은 없으니, 이로써 큰 역사를 경솔히 폐기할 수 없다.” 하여, | ||
+ | |||
+ | 여러 사람의 의심이 진정되어 공사가 또 거의 끝났는데, 조정에서 이 사실을 듣고 사헌부에서 사맹의 계품(啓稟)하지 않은 죄를 논하여 파직시켰으며 대신들이 더러운 곳에 묻는 것이 부당하다 하여 드디어 충청도 임천(林川)으로 옮겼다. | ||
+ | |||
+ | 이때 백성들이 굶주려서 돌을 운반하기에 매우 피로하였으니 한 임금의 태를 묻는데 그 해(害)가 삼도(三道)에 두루 미쳤다.|출처=『연려실기술』별집(別集) 2권, 「사전전고(祀典典故)」장태조(藏胎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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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 =='''시각자료'''== | ||
===파노라마=== | ===파노라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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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샷 갤러리=== | ===스틸샷 갤러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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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OGPC_Seonjo_Gabongbi01_Yisu_back.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주상전하태실비 이수 후면 | ||
+ | File:OGPC_Seonjo_Gabongbi01_board.JPG|부여 충화면 선조 태실 주상전하태실비 표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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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OGPC_Seonjo_Gabongbi02_Front.JPG|부여 오덕사 선조 태실 선조대왕태실비 전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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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9일 (수) 18:32 기준 최신판
선조 태실(宣祖 胎室) | |
식별자 | PC012 |
---|---|
분류 | 국왕 태실 |
한글명 | 선조 태실 |
한자명 | 宣祖 胎室 |
영문명 | Placenta Chamber of King Seonjo |
피안자 명칭 | 선조(宣祖) |
피안자 이칭 | 이균(李鈞)·이연(李昖)·하성군(河城君)·목릉(穆陵) |
피안자 부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 |
피안자 모 |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
피안자 생년월일 | 1552.11.11 |
피안자 몰년월일 | 1608.02.01 |
안태 연월일 | 1570.10.21 |
안태지 기록 | 도정궁(都正宮) 후원 송림(松林) 『연려실기술』 |
안태지 기록1 | 임천(林川) 태봉(胎峯) 『숙종실록』 |
안태지 좌표(위도) | 36°14'87.47"N |
안태지 좌표(경도) | 126°80'47.3"E |
안태지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산1-17 |
문화재 지정여부 | 미지정 |
이안 연월일 | 1929.05 추정 |
이안지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
이안지 좌표(위도) | 37°66'45.61"N, |
이안지 좌표(경도) | 126°86'06.29"E |
지문 | 今主上殿下胎,皇明隆慶四年,十月二十一日,卯時藏 |
지문 찬자 | 조선 예조(禮曹) |
지문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석물 | 태실 터 인근 태실 석재 유구 2점 확인 |
유물1 | 충화 선조대왕태실비(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112호) 1570년 건립 |
유물2 | 선조대왕태실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 1747년 건립 |
태항아리 | 선조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
태항아리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목차
- 1 내용
- 2 관련 기록
- 2.1 조선왕조실록
- 2.2 승정원일기
- 2.2.1 『승정원일기』 291책 (탈초본 15책) 숙종 8년(1682) 6월 23일 기해(己亥) 19/41 기사
- 2.2.2 『승정원일기』 458책 (탈초본 24책) 숙종 37년(1711) 2월 10일 기사(己巳) 24/29 기사
- 2.2.3 『승정원일기』 462책 (탈초본 25책) 숙종 37년(1711) 8월 23일 경진(庚辰) 4/22 기사
- 2.2.4 『승정원일기』 587책 (탈초본 31책) 영조 1년(1725) 2월 25일 계사(癸巳) 38/37 기사
- 2.2.5 『승정원일기』 631책 (탈초본 34책) 영조 3년(1727) 1월 27일 기사(己巳) 31/32 기사
- 2.3 연려실기술
- 3 지식 관계망
- 4 시각자료
- 5 전자지도
- 6 참고 자료
- 7 주석
내용[편집]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의 태실이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그 태는 덕흥대원군 사저 후원에 매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선조 태실지에서 아기 태실비는 입석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가봉을 위해 춘천 등 여러 지역이 대상지로 거론되었으나 춘천의 태실지는 공사를 진행하던 와중 이 장소가 옛날에 태를 묻었던 장소였기에 태실 조성이 중단되고 최종적으로는 충청도 임천으로 낙점되었다.
선조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은 임천에 위치한 오덕사(五德寺)였다. 신성군(信城君)의 증손인 함릉군(咸陵君)의 상소에 따르면 오덕사는 중종의 아들이었던 복성군(福城君)의 원당이었다. 복성군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후에 하성군(河城君)으로 하여금 복성군의 뒤를 잇게 하였다. 이후 하성군이 명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자 신성군으로 하여금 복성군의 제사를 받들게하고, 임천에 선조의 태실을 가봉한 뒤 오덕사로 하여금 태실 수호의 임무를 맡겼다고 한다.
숙종 재위 초반 선조 태실의 비석에 문제가 감지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때는 숙종 37년(1711) 명종‧현종 태실을 함께 개수하면서다. 본래의 가봉비가 박락이 심해져 판독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새롭게 비석을 마련하였다. 이 때 비석의 석재 조달과 관련한 기록이 눈에 띈다. 선조 태실에 새로 비석을 마련하면서 처음에는 왕릉 비석으로 많이 사용하던 충청도 남포현에서 생산한 돌을 쓰려 하였다. 그러나 돌을 떼어내는 폐단이 많다고 하여 사가에서 소유한 돌을 구입하여 쓰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는 당시 왕릉에 비석을 건립하며 있었던 논의를 따른 것으로 왕실에서 비석을 건립하는 사업의 일면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선조의 태실비는 총 2기가 현존하고 있다. 하나는 오덕사 경내에 위치한 개건 태실비로 태실비의 전면에는 「선조대왕태실(宣祖大王胎室)」이라는 명문이 각자돼있다. 후면은 「숭정기원후일백이십년정묘오월초삼일립(崇禎紀元後一百二十年丁卯五月初三日立)」이라는 명문을 있어 해당 태실비가 영조 23년(1747) 5월 3일에 건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후면 명문의 좌측에는 「융경사년경오십월이십일일소립비자세구각결고개석(隆慶四年庚午十月二十一日所立碑字歲久刻缺故改石)」이라는 각자가 태실비 개수사실을 부기하고 있어 선조 재위기에 건립한 태실비가 오래되어 새롭게 해당 태실비를 건립하였다는 건립 사유 또한 확인이 가능하다. 해당 개건 태실비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지정되어있다.
또다른 태실비는 부여군 충화면 장자마을에 소재한 초립 태실비로 태실비의 전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는 명문이 각자돼있다. 후면은 「융경사년십월이십일일립(隆慶四年十月二十一日立)」이라는 명문이 있어 해당 태실비가 선조 3년(1570)에 건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초립 태실비는 2010년 12월 31일 부여군 향토유적 112호로 지정됐다. 2017년까지 초립 태실비는 적절한 보호가 이뤄지지 못한 채 방치되어 보존상태가 나빴으나 최근 정비를 거쳐 보호되고 있다.
이처럼 태실비 2기는 문화재 지정을 통한 보호를 받고 있으나 태실지에 대한 관리는 소흘하다. 태실지에는 개인의 민묘가 조성돼있으며 태실지 인근에는 선조 태실의 부재로 쓰였던 사방석과 귀부의 석재 일부가 흩어져 있어 신속하고 체계적인 수습이 요구된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선조실록』151권, 선조 35년(1602) 6월 25일 을묘(乙卯) 4번째 기사[편집]
『숙종실록』50권, 숙종 37년(1711) 10월 22일 정축(丁丑) 2번째 기사[편집]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1747) 3월 21일 신해(辛亥) 2번째 기사[편집]
승정원일기[편집]
『승정원일기』 291책 (탈초본 15책) 숙종 8년(1682) 6월 23일 기해(己亥) 19/41 기사[편집]
『승정원일기』 458책 (탈초본 24책) 숙종 37년(1711) 2월 10일 기사(己巳) 24/29 기사[편집]
『승정원일기』 462책 (탈초본 25책) 숙종 37년(1711) 8월 23일 경진(庚辰) 4/22 기사[편집]
『승정원일기』 587책 (탈초본 31책) 영조 1년(1725) 2월 25일 계사(癸巳) 38/37 기사[편집]
『승정원일기』 631책 (탈초본 34책) 영조 3년(1727) 1월 27일 기사(己巳) 31/32 기사[편집]
연려실기술[편집]
『연려실기술』별집(別集) 2권, 「사전전고(祀典典故)」장태조(藏胎條)[편집]
지식 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파노라마[편집]
스틸샷 갤러리[편집]
전자지도[편집]
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이규상, 『한국의 태실』, 청원문화원, 2005.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조선의 태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