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lation) 1535年 安繼宗 妻 金氏 衿給文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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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작성주체 발급: 김씨(金氏) /수취: 안순(安洵) , 안씨(安氏) , 장응필(張應弼) , 안애심(安愛心) | ||
+ | :- 작성지역 안동부 / 경상북도 안동시 | ||
+ | :- 작성시기 1535년 / 가정14년 을미 5월 25일 | ||
+ | :- 형태사항 크기: 42×238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 ||
+ | :- 출판정보 : 『고문서집성 43 -안동 갈전 순흥안씨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 ||
+ | G002+AKS+KSM-XE.1535.0000-20101008.B028a_043_00103_XX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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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嘉靖14年(1535) 5월 25일, 故 天文習讀官宣務郞安繼宗(1477~?)의 처 義城金氏가 子息 男妹에게 內外 奴婢田畓을 分給한 分財記이다. 年老한데다가 百病이 연이어 발병하니 가산을 나누어 주고 주변을 정리한 것이다. 맏아들 安洵(1504~78)이 당해 32세이고 남편의 생년을 고려하면, 김씨는 당시 50대 초중반이었을 것이다. 분급한 재산의 총량은 노비 58口, 畓 322斗落과 田 449두락, 瓦家 2坐이다. 平均分給하되, 長子에게 奉祀位 몫 재산을 許給한다고 序文에서 밝히고 있다. 김씨는 3남매를 두었으나 딸 하나가 일찍 죽어, 실제 상속인은 안순과 막내딸 柳義의 처 두 명이다. 안순은 노비 33구와 논 152두락, 밭 245두락, 그리고 기와집 한 채를 받았고, 그 가운데 노비 3구와 논 30두락과 밭 48두락이 봉사위이다. 유의의 처는 노비 20구와 논 150두락, 밭 174두락, 그리고 마찬가지로 기와집 한 채를 받았다. 봉사위를 제외하고 비교하면 노비는 맏아들이 10구나 더 받았고, 전답은 논밭에 따라 상반되게 차이가 난다. 즉, 막내딸이 논은 더 받았지만 밭은 아들 몫이 더 많다. 따라서 전답이나 家舍는 평균분급에 가까우나 노비에 있어서는 아들을 우대하여 상속한 것이다. 장자몫에서 봉사위는 전답의 경우 20% 가량 차지하나 노비는 10%에 못 미치고 있다. | ||
+ | :안계종의 妻 義城金氏는 그 祖父가 金漢啓, 父가 金萬謹이다. 김만근은 金誠一의 曾祖父가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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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계종이 지동에 정착한 이후 이들은 안동의 명문가인 豊山柳氏, 安東權氏 등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안동의 유력사족으로서의 기반을 다져갔고, 繼宗→洵→景老→聃壽로 이어지는 인물이 대․소과에 합격하고 中外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一流士族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안계종은 그의 동생 承宗과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이 지방에서 명망있는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그 중심지가 葛田 인근의 淸遠亭이었다. 본래 淸遠亭은 안계종의 아버지 安建이 예천군 개포면 劍巖(검바우)에 건립한 정자였다. 뒤에 아들 계종이 안동으로 이사하면서 이곳에 移建하였다. <淸遠亭記>에 의하면 정자가 처음 창건된 시기는 己卯士禍(1519년) 직후인 1520~30년간이며, ‘淸遠’이라고 명명한 사람은 郡守 文敬仝이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退溪 李滉을 비롯하여, 崔演(1500-1549, 號:艮齋), 楊拜善(進士) 등 당대 名士들이 드나들었다. 이들의 詩文이 懸板, 또는 詩稿형태로 전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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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0일 (화) 20: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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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ese | ||
Korean(RR)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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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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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
Key Concepts | ||
Translation Info | ||
Translator(s) | Participants of 2018 Summer Hanmun Workshop (Advanced Translation Group) | |
Editor(s) | ||
Year | 2018 |
목차
- 1 Introduction
- 2 Original Script
- 3 Discussion Questions
- 4 Further Readings
- 5 References
- 6 Translation
- 6.1 (sample) : Jaeyoon Song
- 6.2 Student 1 : (Write your name)
- 6.3 Student 2 : (Write your name)
- 6.4 Student 3 : (Write your name)
- 6.5 Student 4 : (Write your name)
- 6.6 Student 5 : (Write your name)
- 6.7 Student 6 : (Write your name)
- 6.8 Student 7 : (Write your name)
- 6.9 Student 8 : (Write your name)
- 6.10 Student 9 : (Write your name)
- 6.11 Student 10 : (Write your name)
- 6.12 Student 11 : (Write your name)
- 6.13 Student 12 : (Write your name)
- 6.14 Student 13 : (Write your name)
- 6.15 Student 14 : (Write your name)
Introduction
- 개요
- - 작성주체 발급: 김씨(金氏) /수취: 안순(安洵) , 안씨(安氏) , 장응필(張應弼) , 안애심(安愛心)
- - 작성지역 안동부 / 경상북도 안동시
- - 작성시기 1535년 / 가정14년 을미 5월 25일
- - 형태사항 크기: 42×238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 - 출판정보 : 『고문서집성 43 -안동 갈전 순흥안씨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G002+AKS+KSM-XE.1535.0000-20101008.B028a_043_00103_XXX
- 嘉靖14年(1535) 5월 25일, 故 天文習讀官宣務郞安繼宗(1477~?)의 처 義城金氏가 子息 男妹에게 內外 奴婢田畓을 分給한 分財記이다. 年老한데다가 百病이 연이어 발병하니 가산을 나누어 주고 주변을 정리한 것이다. 맏아들 安洵(1504~78)이 당해 32세이고 남편의 생년을 고려하면, 김씨는 당시 50대 초중반이었을 것이다. 분급한 재산의 총량은 노비 58口, 畓 322斗落과 田 449두락, 瓦家 2坐이다. 平均分給하되, 長子에게 奉祀位 몫 재산을 許給한다고 序文에서 밝히고 있다. 김씨는 3남매를 두었으나 딸 하나가 일찍 죽어, 실제 상속인은 안순과 막내딸 柳義의 처 두 명이다. 안순은 노비 33구와 논 152두락, 밭 245두락, 그리고 기와집 한 채를 받았고, 그 가운데 노비 3구와 논 30두락과 밭 48두락이 봉사위이다. 유의의 처는 노비 20구와 논 150두락, 밭 174두락, 그리고 마찬가지로 기와집 한 채를 받았다. 봉사위를 제외하고 비교하면 노비는 맏아들이 10구나 더 받았고, 전답은 논밭에 따라 상반되게 차이가 난다. 즉, 막내딸이 논은 더 받았지만 밭은 아들 몫이 더 많다. 따라서 전답이나 家舍는 평균분급에 가까우나 노비에 있어서는 아들을 우대하여 상속한 것이다. 장자몫에서 봉사위는 전답의 경우 20% 가량 차지하나 노비는 10%에 못 미치고 있다.
- 안계종의 妻 義城金氏는 그 祖父가 金漢啓, 父가 金萬謹이다. 김만근은 金誠一의 曾祖父가 된다.
- 안계종이 지동에 정착한 이후 이들은 안동의 명문가인 豊山柳氏, 安東權氏 등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안동의 유력사족으로서의 기반을 다져갔고, 繼宗→洵→景老→聃壽로 이어지는 인물이 대․소과에 합격하고 中外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一流士族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안계종은 그의 동생 承宗과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이 지방에서 명망있는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그 중심지가 葛田 인근의 淸遠亭이었다. 본래 淸遠亭은 안계종의 아버지 安建이 예천군 개포면 劍巖(검바우)에 건립한 정자였다. 뒤에 아들 계종이 안동으로 이사하면서 이곳에 移建하였다. <淸遠亭記>에 의하면 정자가 처음 창건된 시기는 己卯士禍(1519년) 직후인 1520~30년간이며, ‘淸遠’이라고 명명한 사람은 郡守 文敬仝이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退溪 李滉을 비롯하여, 崔演(1500-1549, 號:艮齋), 楊拜善(進士) 등 당대 名士들이 드나들었다. 이들의 詩文이 懸板, 또는 詩稿형태로 전하고 있다.
Original Script
Classical Chinese | Engli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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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靖十四年乙未 五月二十五日子息二娚妹亦▣…成給爲臥乎事叱段 ▣(女)▣(矣)身亦 年老分叱▣▣(不喩)▣…年以來 百病交作▣…▣知乙仍于 女矣邊▣(及)▣(家)翁邊奴婢田畓等 各衿平均分給爲旀 長子亦中 奉祀位家舍田民亦錄許給爲去乎 後所生幷以 子孫傳持鎭長耕食使用居生爲乎事是昆▣…應弼段 義絶爲沙餘良 其妻亦 得死病▣…來到 累年辛苦爲去乙??▣…▣不顧見▣…如可 聞其將死之奇爲遣 同亡女醴泉家所藏財物等乙 其矣邊奴家良中 無遺移送後 其死日良中沙 僅及來見 略不介意 未過小祥 遽卽▣▣▣(後) 其妻所言 無不聽從 亡妻矣祭祀以 新乎大▣… 亦不顧見 情義大薄 衆所可知爲旀 女矣身▣…悲悴 累朔臥在 唯待死日爲有去乙 來見不爲分叱不喩 一不使人問安 尤爲無情爲在 女中已曾許給奴婢乙良置 全數還奪爲良可爲在果 向▣情意無窮乙用良 其矣奉祀條以 其矣新奴婢▣…等乙 許給爲去乎 後次他餘子孫 及張應弼▣…雜談爲去等 此文及亡女記上文記內貌如 告▣(官)辨正者 長子洵衿 (중략) 財主 母故天文習讀官宣務郞 安繼宗妻 金氏(着圖書) 證同生娚保功將軍行忠武衛副司直 金(着名署) 三寸姪成均生員 金(着名署) 筆 家翁同生弟 成均生員 安(着名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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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 |
Discussion Questions
Further Readings
References
Translation
(sample) : Jaeyoon Song
- Discussion Ques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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