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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賣 was a prevalent method for the impoverished commoners to obtain subsistence in the extreme situation of famine during the late Choson period. This was called 口活’ | 自賣 was a prevalent method for the impoverished commoners to obtain subsistence in the extreme situation of famine during the late Choson period. This was called 口活’ | ||
− | 한성부 향도꾼은 동내 주민 중심의 인적 구성을 벗어나 이웃 동내, 나아가 | + | 한성부 향도꾼은 동내 주민 중심의 인적 구성을 벗어나 이웃 동내, 나아가 한성부 전체를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대형 조직으로 변모하였다 했다. 또한 노비의 입계를 허락하지 않는 가문은 계원들 다수가 그 집에 쳐들어가 쌍욕을 해대는가 하면 그 집 처녀를 보쌈을 해와 형제들끼리 나누어 가질 정도였다. 이같은 무리한 행위에도 불구하도 계원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 항의조차 못할 정도였다. 향도계 계원들의 숫자는 많은 경우 수 백명에 달했고 적은 계일지라도 100 여명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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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첫째, 그들의 상전 등 주위 양반들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의 상전이나 양반들의 논밭을 경작하는 노비, 또는 하층민이라면 감히 토지소유주의 이해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 익명성이 보장되고 회합이 용이한 도회지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17세기 중엽 서울은 인구가 많을 뿐 아니라 유동 인구, 특히 도망 노비, 소작인들이 대거 이동함으로써 향도계원의 불법 혹은 도덕적 비난으로부터 일정부분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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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琉球國在東南海中。自福建梅花所開洋。七日可至。" | 2. 琉球國在東南海中。自福建梅花所開洋。七日可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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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占城古林邑。本漢象林縣。馬援置銅柱之處。至漢末。區連殺縣令稱王。唐元和初。改號占城國。在大海南。南距眞臘。西距交趾。四時常熱如夏天。無霜雪。草木長靑。俗獷悍。果于戰鬪。貴女賤男。以黑色爲美。所居茅茨。不得踰三尺。出入乘馬象。有尸頭蠻" | 4. 占城古林邑。本漢象林縣。馬援置銅柱之處。至漢末。區連殺縣令稱王。唐元和初。改號占城國。在大海南。南距眞臘。西距交趾。四時常熱如夏天。無霜雪。草木長靑。俗獷悍。果于戰鬪。貴女賤男。以黑色爲美。所居茅茨。不得踰三尺。出入乘馬象。有尸頭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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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日本一州爲一國。而陸奧州最大。管五十四郡。東西" | 7. 日本一州爲一國。而陸奧州最大。管五十四郡。東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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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日本天皇。始立於周平王之世。一姓相傳。至今不絶。天皇不預政事。惟享富貴而已。國王號關白。專管國政。以尊事天皇。豈亦周時列國之遺風歟。世謂無所事事者。爲倭皇帝。或曰倭皇姬姓。吳泰伯仲雍之後。或曰以王爲姓。未知信否。" | 9. 日本天皇。始立於周平王之世。一姓相傳。至今不絶。天皇不預政事。惟享富貴而已。國王號關白。專管國政。以尊事天皇。豈亦周時列國之遺風歟。世謂無所事事者。爲倭皇帝。或曰倭皇姬姓。吳泰伯仲雍之後。或曰以王爲姓。未知信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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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日本地暖無冰雪。而其北陸道甚寒。每冬雪深數丈。且海島皆石山戴土。故倭人專以土淺深爲饒瘠。若土淺一尺。則五穀不熟。其深七尺以上至一丈" | 12. 日本地暖無冰雪。而其北陸道甚寒。每冬雪深數丈。且海島皆石山戴土。故倭人專以土淺深爲饒瘠。若土淺一尺。則五穀不熟。其深七尺以上至一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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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百濟亡。有臨政太子乘船入日本。爲大內左京大夫。" | 16 . 百濟亡。有臨政太子乘船入日本。爲大內左京大夫。"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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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小說。眞臘國人。不飮酒比之淫。惟與妻飮房中。又西" | 19. 小說。眞臘國人。不飮酒比之淫。惟與妻飮房中。又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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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榜葛剌。東印度也。國最大。財物豐衍。甲於隣國。王及諸官。皆回回人。祝髮白布纏頭。氣候常熱如夏。陰" | 23. 榜葛剌。東印度也。國最大。財物豐衍。甲於隣國。王及諸官。皆回回人。祝髮白布纏頭。氣候常熱如夏。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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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撒馬兒罕。漢罽賓也。去嘉峪關萬里。東西相距千里。風景偉麗。土田膏腴。頗類中原。西南番賈多聚於此。俗尚回回敎。有拜天屋。靑石雕鏤極精巧。人物" | 26. 撒馬兒罕。漢罽賓也。去嘉峪關萬里。東西相距千里。風景偉麗。土田膏腴。頗類中原。西南番賈多聚於此。俗尚回回敎。有拜天屋。靑石雕鏤極精巧。人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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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哈烈。去嘉峪關萬三千里。四面大山而少雨。男髡首。衣尚白。乃喪易靑黑。人多善走。日行三百里。氣候常煖。男女瀆亂無恥。然有學舍。講習經義。省刑薄" | 31. 哈烈。去嘉峪關萬三千里。四面大山而少雨。男髡首。衣尚白。乃喪易靑黑。人多善走。日行三百里。氣候常煖。男女瀆亂無恥。然有學舍。講習經義。省刑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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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忽魯謨斯。在西南海中。土厚宜耕種。人質直。狀貌偉碩。喜作佛事。産獅子駞鷄福鹿靈羊馬哈獸。按韓" | 35. 忽魯謨斯。在西南海中。土厚宜耕種。人質直。狀貌偉碩。喜作佛事。産獅子駞鷄福鹿靈羊馬哈獸。按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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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晉書。肅愼氏。一名挹婁。在不咸山北。去扶餘可六十日。東濱大海。西接寇漫汗國。北極弱水。廣袤數千里。裨離國。在肅愼氏國西北。馬行二百日。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 | 38. 晉書。肅愼氏。一名挹婁。在不咸山北。去扶餘可六十日。東濱大海。西接寇漫汗國。北極弱水。廣袤數千里。裨離國。在肅愼氏國西北。馬行二百日。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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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稗史言回回國。事天事祖之外。無所崇。有詩曰僧言佛子在西空。道說蓬萊在海東。惟有孔門眞實事。眼前無日不春風。余謂回回在西域。而其言如此。以中華之士。而乃尚佛敎何也。回回文字。有篆草楷三樣。其曆法與中國僅差二刻。聞西南諸國。奉回回敎法者多云。蓋斥佛法而以事天爲重耳。又其俗善保養。常護外腎。使不着寒。夜臥以手握之" | 40. 稗史言回回國。事天事祖之外。無所崇。有詩曰僧言佛子在西空。道說蓬萊在海東。惟有孔門眞實事。眼前無日不春風。余謂回回在西域。而其言如此。以中華之士。而乃尚佛敎何也。回回文字。有篆草楷三樣。其曆法與中國僅差二刻。聞西南諸國。奉回回敎法者多云。蓋斥佛法而以事天爲重耳。又其俗善保養。常護外腎。使不着寒。夜臥以手握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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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南番國人。萬曆癸卯年間。隨倭舶漂抵我境。見其人。眉與上睫通爲一。髯似羊鬚。其率人面漆黑。形狀尤醜怪。蓋海鬼類也。言語不通。因倭譯問。則國在海中。距中國八萬里。倭人以地多珍寶。故往來通" | 45. 南番國人。萬曆癸卯年間。隨倭舶漂抵我境。見其人。眉與上睫通爲一。髯似羊鬚。其率人面漆黑。形狀尤醜怪。蓋海鬼類也。言語不通。因倭譯問。則國在海中。距中國八萬里。倭人以地多珍寶。故往來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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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歐羅巴國。亦名大西國。有利瑪竇者。泛海八年。越八萬里風濤。居東粤十餘年。所著天主實義二卷。首論天主始制天地。主宰安養之道。次論人魂不滅。大異禽獸。次辨輪廻六道之謬。天堂地獄善惡之報。末論人性本善而敬奉天主之意。其俗謂君曰敎" | 48. 歐羅巴國。亦名大西國。有利瑪竇者。泛海八年。越八萬里風濤。居東粤十餘年。所著天主實義二卷。首論天主始制天地。主宰安養之道。次論人魂不滅。大異禽獸。次辨輪廻六道之謬。天堂地獄善惡之報。末論人性本善而敬奉天主之意。其俗謂君曰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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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異聞志云天下無處非鬼充塞無間。獨互人國白玉城。以白玉爲之。鬼不敢入。蓋鬼陰物。喜黑而惡白耳。有人至此城得其故。歸以白石繞屋爲墻。時河間多疫癘。獨其家無染者。今人用白堊塗門。亦其遺意也。按後漢書。西域大秦國。以石爲城。列置郵" | 50. 異聞志云天下無處非鬼充塞無間。獨互人國白玉城。以白玉爲之。鬼不敢入。蓋鬼陰物。喜黑而惡白耳。有人至此城得其故。歸以白石繞屋爲墻。時河間多疫癘。獨其家無染者。今人用白堊塗門。亦其遺意也。按後漢書。西域大秦國。以石爲城。列置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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亭。皆堊墍之云。互人。疑亦西域國名。 | 亭。皆堊墍之云。互人。疑亦西域國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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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ther Readings'''== | =='''Further Reading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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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5일 (화) 00:54 기준 최신판
Primary Source | ||
---|---|---|
Title | ||
English | ||
Chinese | 芝峯類說 | |
Korean(RR) | 지봉유설(Jibongyuseol) | |
Text Details | ||
Genre | Literati Writings | |
Type | ||
Author(s) | 李睟光 | |
Year | ||
Source | ||
Key Concepts | ||
Translation Info | ||
Translator(s) | Participants of 2018 Summer Hanmun Workshop (Advanced Translation Group) | |
Editor(s) | ||
Year | 2018 |
Introduction
自賣 was a prevalent method for the impoverished commoners to obtain subsistence in the extreme situation of famine during the late Choson period. This was called 口活’
한성부 향도꾼은 동내 주민 중심의 인적 구성을 벗어나 이웃 동내, 나아가 한성부 전체를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대형 조직으로 변모하였다 했다. 또한 노비의 입계를 허락하지 않는 가문은 계원들 다수가 그 집에 쳐들어가 쌍욕을 해대는가 하면 그 집 처녀를 보쌈을 해와 형제들끼리 나누어 가질 정도였다. 이같은 무리한 행위에도 불구하도 계원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 항의조차 못할 정도였다. 향도계 계원들의 숫자는 많은 경우 수 백명에 달했고 적은 계일지라도 100 여명에 이르렀다.
첫째, 그들의 상전 등 주위 양반들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의 상전이나 양반들의 논밭을 경작하는 노비, 또는 하층민이라면 감히 토지소유주의 이해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 익명성이 보장되고 회합이 용이한 도회지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17세기 중엽 서울은 인구가 많을 뿐 아니라 유동 인구, 특히 도망 노비, 소작인들이 대거 이동함으로써 향도계원의 불법 혹은 도덕적 비난으로부터 일정부분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connection with 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