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G.아펜젤러는 1885년 6월 21일에 두번 째로 입국하여 7월 19일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1개월 먼저 와 있던 의사 W.B.스크랜턴의 집을 사서 방 두 칸의 벽을 허물어 교실 1칸을 만들었다. 그리고 8월 3일에 이겸라와 조종필 두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하였다.[1] 폴크 공사는 고종에게 아펜젤러가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고 또 앞으로 여러 학생들을 교육할 뜻이 있다고 아뢰었다. 이에 고종은 1886년 6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 이름을 지어 액(額)을 써 주었다.[2] 그해 10월 학생 수는 20명으로 늘었다. 영어를 배워 출세 하려는 학생이 몰려들었다. 아펜젤러는“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립 목적을 분명히 밝혀 경계하였다.[3] 배재학당을 거쳐 나온 학생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많은 졸업생 중에서 대표적인 이로 이승만, 주시경, 여운형, 지청천, 오긍선, 이길용 등을 꼽을 수 있다.[4] 이들은 독립운동가, 정치가, 한글학자, 군인, 의사, 기자 등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는 인재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는 한 가지 공통된 유사점이 있다. 이들이 배재학당에 입학하기 전 어린 시절부터 이미 유학(儒學) 공부에 진력하였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한문으로 다져진 이른바 교양, 그리고 유교 의리관이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영어 공부에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거나 미국으로 유학할 기회를 비교적 쉽게 얻었다. 그리고 배재학당에 들어온 인연으로 대개는 정동교회에 나가서 협성회에서 활동하여 후일 기독교에 입교한다.[5] 그리고 협성회에 강사로 나왔던 서재필은 독립협회, 독립신문, 만민공동회, 끝내는 신민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유하는 데, 아펜젤러는 기회를 얻는다.[6] 유학, 신식학교, 기독교, 교회, 영어, 미국유학, 선교사 등의 항목들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