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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2-R4-02 | 동관왕묘(東關王廟)는 무엇일까?]] 》 동관왕묘의 공간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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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2-R4-02 | 동관왕묘(東關王廟)는 무엇일까?]] 》 동관왕묘의 구조와 의미'''=
  
 
==Story==
 
==Story==
시간이 지날수록 관왕묘는 점차 한양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곳으로 다가왔을 뿐 아니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조선 후기 관왕묘의 기능이 관우가 지닌 신이력(神異力)보다 관왕묘의 공간적 위치에서 비롯하였다는 점이다. 한양의 남관왕묘와 동관왕묘는 각각 남대문과 동대문 밖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두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동관왕묘의 경우 중국 측에서는 남대문 쪽에 세울 계획이었지만 선조의 적극적인 반대와 회유를 통해 동대문 밖 현재의 위치에 세워진 것이다. 선조가 관왕묘를 동쪽에 세우려 했던 것은 도 성 동편이 빈 듯하여 건물을 세우고 못을 파 지맥을 진압해야 좋다는 풍수가의 의견을 믿었기 때문이다.(『선조실록』 권112, 선조 32년 4월 을유.) 이렇게 남대문과 동대문에 하나씩 위치한 관왕묘는 한양을 떠나는 사람에겐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고, 한양을 향해 오는 사람에겐 도착을 알려주는 종착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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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왕묘는 본래 전사청(典祀廳), 재실(齋室), 어막대(御幕臺) 등을 포함한 건물이 더 있었으나, 현재는 크게 외삼문(外三門), 내삼문(內三門), 서무(西廡), 동무(東廡), 정전(正殿)의 다섯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관왕묘는 산 자를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지나쳐 가야 할 공간 중 하나였다. 국상(國喪)의 발인 때에는 상여가 지나가는 길에 있는 주요 장소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는데 조선 후기 관왕묘도 이러한 장소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1659년(현종 즉위년)에 승하한 효종의 상여는 돈화문을 통과하여 현재의 동구릉에까지 갔다.207)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은 1659년 애초 건원릉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다가 1673년(현종 14)에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 근처로 옮겨진다. 이 여정 중에서 제사를 거행하였던 장소를 보면, 돈화문, 이석교(二石橋), 초석교(初石橋), 흥인문, 동관왕묘(別祭), 보제원(普濟院) 옛터 서쪽 노제소(路祭所), 안광동 대천(大川), 사을하리 대천, 석을곶(石乙串) 고개, 소송계중천교(小松溪中川橋), 대송계대천석교(大松溪大川石橋), 삼각산, 수락산, 태릉, 묘동(廟洞) 주정소(晝停所), 망오리현, 인장현 등이다. 이러한 장소는 특별히 노제(路祭)를 지내는 보제원 옛터 외에 상여가 통과하는 문(門), 다리, 산천에 발인의 사실을 아 뢰고 신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일을 마치려는 뜻에서 제사 지내는 대상이자 공간이었다. 문이나 다리와 같이 이쪽과 저쪽을 명확히 구별시키면서도 이어주는 인공 구조물과 산천과 같이 일정 공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신들에게 지내는 제사라 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관왕묘가 포함된 것은 현전하는 기록으로 볼 때 1632년(인조 10)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국상부터였다. 동관왕묘는 흥인문 밖, 노제가 열리는 보제원 터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망자의 영혼을 보내는 발인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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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채의 건물과 시설이 동관왕묘의 정문인 외삼문(外三門)을 거쳐 중문(中門)인 내삼문(內三門)으로 입장하면 좌우로는 서무(西廡), 동무(東廡), 정면에는 정전(正殿)이 자리하고 있다. 정전은 중국풍으로 지어져 내부에 금동관우좌상을 모시고 있다.
  
임시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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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의 요구에 부득이 들여온 동관왕묘는 왜란 이래 방치되는 상황에 놓였으나, 남대문, 동대문 인근에 위치해 있다는 남관왕묘, 동관왕묘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서울의 관왕묘는 한양 사람들에게 모종의 기능과 역할을 가진 공간으로 인식되게 된다. 한양을 떠나는 행인에게 있어 동관왕묘는 한양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공간으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망자에게도 비슷했다. 국상(國喪)의 발인 때에는 상여가 지나는 길에 위치한 주요 장소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는데 관왕묘도 이에 해당했으며, 1632년(인조 10) 인목 대비 국상 때 처음 동관왕묘가 이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전신 관우는 조선에서 길을 가는 이를 수호하는 노신(路神)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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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관왕묘에서 이루어지던 국가적 제향이 1908년 이래 끊기게 되면서 동관왕묘는 국가적 관리 대상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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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였던 1933년, 총독부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통해 1936년 5월 23일 동관왕묘 정전을 보물 237호로 지정하면서, 우리나라 곳곳의 다른 관왕묘들과 달리 훼철을 면하고 조선 관왕묘로서의 전형을 보존한 것으로 간주된다. 해방 이후 1963년 1월 21일에도 동관왕묘는 보물 제142호로 재지정되면서, 동대문·청량리 일대 포목상인들의 사교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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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6일 (금) 00:32 기준 최신판

동관왕묘(東關王廟)는 무엇일까? 》 동관왕묘의 구조와 의미

Story

동관왕묘는 본래 전사청(典祀廳), 재실(齋室), 어막대(御幕臺) 등을 포함한 건물이 더 있었으나, 현재는 크게 외삼문(外三門), 내삼문(內三門), 서무(西廡), 동무(東廡), 정전(正殿)의 다섯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채의 건물과 시설이 동관왕묘의 정문인 외삼문(外三門)을 거쳐 중문(中門)인 내삼문(內三門)으로 입장하면 좌우로는 서무(西廡), 동무(東廡)가, 정면에는 정전(正殿)이 자리하고 있다. 정전은 중국풍으로 지어져 내부에 금동관우좌상을 모시고 있다.

외세의 요구에 부득이 들여온 동관왕묘는 왜란 이래 방치되는 상황에 놓였으나, 남대문, 동대문 인근에 위치해 있다는 남관왕묘, 동관왕묘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서울의 관왕묘는 한양 사람들에게 모종의 기능과 역할을 가진 공간으로 인식되게 된다. 한양을 떠나는 행인에게 있어 동관왕묘는 한양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공간으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망자에게도 비슷했다. 국상(國喪)의 발인 때에는 상여가 지나는 길에 위치한 주요 장소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는데 관왕묘도 이에 해당했으며, 1632년(인조 10) 인목 대비 국상 때 처음 동관왕묘가 이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전신 관우는 조선에서 길을 가는 이를 수호하는 노신(路神)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관왕묘에서 이루어지던 국가적 제향이 1908년 이래 끊기게 되면서 동관왕묘는 국가적 관리 대상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일제강점기였던 1933년, 총독부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통해 1936년 5월 23일 동관왕묘 정전을 보물 237호로 지정하면서, 우리나라 곳곳의 다른 관왕묘들과 달리 훼철을 면하고 조선 관왕묘로서의 전형을 보존한 것으로 간주된다. 해방 이후 1963년 1월 21일에도 동관왕묘는 보물 제142호로 재지정되면서, 동대문·청량리 일대 포목상인들의 사교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게 된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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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4-02C Story Episode 동관왕묘의 구조와 의미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2022-R4-02C 2022:지해인

Contextu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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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4-02B 관우 isRelated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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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4-02B 동관왕묘 isRelatedTo

Web Resource

type resource title description/caption URL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왕묘(關王廟)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948
참고 우리역사넷 > 교양 우리 역사 > 한국문화사 관왕묘의 공간적 기능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07_0060_0010_0020_0010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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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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