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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정월. 왕이 원구단(圜丘壇)에서 풍작을 기원하고[祈穀] 태조(太祖)를 배향하였다." <ref>[고려사절요 권2, 성종 2년 1월 : .원구에서 풍작을 기원하고 적전을 갈다. http://db.history.go.kr/id/kj_002r_0050_0030_0010_0010]</ref><br/ 왕이 원구단에서 풍작을 기원하였다고 해서 이는 대한제국기 때의 일이 아니다. 환구단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원을 따지자면 고려시대 황제를 자칭하였던 때로 소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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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정월. 왕이 원구단(圜丘壇)에서 풍작을 기원하고[祈穀] 태조(太祖)를 배향하였다." <ref>[고려사절요 권2, 성종 2년 1월 : .원구에서 풍작을 기원하고 적전을 갈다. http://db.history.go.kr/id/kj_002r_0050_0030_0010_0010]</ref><br/ 원구단에서 풍작을 기원하였다고 해서 이는 마지막 황제가 있었던 대한제국기 때의 일이 아니다. 환구단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원을 따지자면 고려시대 황제를 자칭하였던 때로 소급된다. 하지만 조선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태조에게 명나라 황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 국왕(朝鮮國王)이여! 나는 아직도 기운이 난다. 홍무(洪武) 21년에 그대의 조그만 나라 군마(軍馬)가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장차 이 중국을 치려 하였다. 그 시절에 이() 【휘().】 가 한 번에 회군하여 지금 고려 국에 왕노릇하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고쳤으니 자연의 천도(天道), 조선 국왕의 지성인데, 지금 두 나라 사이에 수재(秀才)가 매양 농간을 부려 곧지 못하고 바르지 못하였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데는 일마다 지성을 요하며, 직직 정정(直直正正)하여야 할 것이니, 해가 어디에서 떠서 어디로 떨어지겠는가? 천하에는 한 개의 해가 있을 뿐이니, 해는 속일 없는 것이다." 이후 조선의 국왕은 500년 간 명나라에 제후국임을 자임하였다. <ref>[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3008_001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3월 8일 신유 1번째기사 : 안익·김희선·권근 등이 황제의 칙위 조서, 선유 성지, 어제시, 예부의 자문을 받들고 오다]</ref><br/> 그런데 1895년(고종 32) 고종은 환구단을 건축하도록 명령한다. <ref>[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3008_001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윤5월 20일 경신 3번째기사 : 원구단을 건축하도록 명하다]</ref><br/ 때는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 4월 17일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이 체결되고 조약의 결과 랴오동 반도를 넘겨주는 일을 가로막고 나선 삼국간섭이 일어난 다음에 일어났다. 그리고 2개월 뒤인 7월에 갑오개혁의 단행이 공포되고, 그로부터 1개월 뒤에 을미사변이 8월 20일에 발발하였다. 청일 전쟁의 패배로 청나라 세력이 물러나고 일본 세력도 삼국간섭으로 주춤하는 외적 조건 아래에서 고종이 독립과 개혁을 마음먹던 즈음 환구단을 건립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04025_002 고종실록 43년 4월 25일: 경운궁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다]</ref><br/>  고종실록 43년 4월 25일: 경운궁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다]</ref><br/> 이 일은 대한제국 때의 일이 아니다. 고려 성종 2년 1월의 일이다.
 
 
 
 
 
 
 
 
 
1906년 4월 25일, [[경운궁중건도감]] 의궤당상 [[이재극|이재극(李載克)]]이 [[조선_고종|고종]]에게  “경운궁(慶運宮) [[대안문|대안문(大安門)]]의 수리를 음력 4월 12일로 길일(吉日)을 택하여 공사를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이때 고종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되 아뢴 대로 거행하라”고 함으로써 덕수궁의 “대안문(大安門)”은 “[[대한문|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04025_002 고종실록 43년 4월 25일: 경운궁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다]</ref><br/>
 
[[경운궁중건도감의궤|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의 [[대한문_상량문|대한문(大漢門) 상량문(上樑文)]]을 보면,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양(漢陽)이 억만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고 하였다. <ref>[https://www.gogung.go.kr/ancientBooksView.do?bbsSeq=6157&bizDiv=2 대한문 상량문,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ref> [[대한문|대한문(大漢門)]]이라는 이름은 한양(漢陽)을 수도로 하여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임을 알 있다.<ref>[http://www.deoksugung.go.kr/board/view?no=533&board_id=FAQ 대한문 명칭에 대하여, 덕수궁소식]</ref><br/>
 
그런데, 세간에는 이 일이 [[배정자|배정자(裵貞子)]]라는 [[이토_히로부미|이토 히로부미]]의 내연녀와 관련이 있다는 속설이 돌았다.<br/>
 
일제강점기 대중잡지인 [[별건곤|『별건곤』]] 제33집(1933년 7월 1일자)에서 ‘문외한’이란 가명의 필자는 ‘대한문’ 관련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안(安)자가 계집 녀(女)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의 대궐 출입이 빈번해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ref>[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4080900001 이기환, "갓 쓴 여자 재수없어"…덕수궁 대안문이 대한문 된 사연, 경향신문 2020-04-08]</ref><br/>
 
배정자는 187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배지홍]]실각한 [[흥선대원군_이하응|흥선대원군]]의 추종세력이란 이유로 처형당한 후 1885년에 일본으로 보내졌다. 1887년 [[김옥균]]의 소개로 [[이토_히로부미|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게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일본의 특급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br/>
 
배정자 이외에도 러시아공사 [[카를_베베르|베베르]]의 부인과 그의 언니 [[앙트와네트_손탁|앙트와네트 손탁]]도 이 시절 대안문을 자주 드나들던, 모자 쓴 양장의 여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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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4일 (화) 14:55 판

환구단을_다시_세운_뜻

Story

"봄 정월. 왕이 원구단(圜丘壇)에서 풍작을 기원하고[祈穀] 태조(太祖)를 배향하였다." [1]<br/ 원구단에서 풍작을 기원하였다고 해서 이는 마지막 황제가 있었던 대한제국기 때의 일이 아니다. 환구단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원을 따지자면 고려시대 황제를 자칭하였던 때로 소급된다. 하지만 조선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태조에게 명나라 황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 국왕(朝鮮國王)이여! 나는 아직도 기운이 난다. 홍무(洪武) 21년에 그대의 조그만 나라 군마(軍馬)가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장차 이 중국을 치려 하였다. 그 시절에 이(李) 【휘(諱).】 가 한 번에 회군하여 지금 고려 국에 왕노릇하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고쳤으니 자연의 천도(天道)요, 조선 국왕의 지성인데, 지금 두 나라 사이에 수재(秀才)가 매양 농간을 부려 곧지 못하고 바르지 못하였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데는 일마다 지성을 요하며, 직직 정정(直直正正)하여야 할 것이니, 해가 어디에서 떠서 어디로 떨어지겠는가? 천하에는 한 개의 해가 있을 뿐이니, 해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후 조선의 국왕은 500년 간 명나라에 제후국임을 자임하였다. [2]
그런데 1895년(고종 32) 고종은 환구단을 건축하도록 명령한다. [3]<br/ 때는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 4월 17일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이 체결되고 이 조약의 결과 랴오동 반도를 넘겨주는 일을 가로막고 나선 삼국간섭이 일어난 다음에 일어났다. 그리고 2개월 뒤인 7월에 갑오개혁의 단행이 공포되고, 그로부터 1개월 뒤에 을미사변이 8월 20일에 발발하였다. 청일 전쟁의 패배로 청나라 세력이 물러나고 일본 세력도 삼국간섭으로 주춤하는 외적 조건 아래에서 고종이 독립과 개혁을 마음먹던 즈음 환구단을 건립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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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3-002 Story Episode 환구단을 다시 세운 뜻 환구단을 다시 세운 뜻 圜丘壇을 다시 세운 뜻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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