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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관왕묘가 조선에 유입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국가적 차원에서 중국 무장(武將) 출신의 신(神)을 모시는 사당을 건축한 것은 무척 독특한 일이다. 실제로 관왕묘는 명(明)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은 조선이 부득이 명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처음 조선에 세워지게 되었다. 촉한을 지키지도 못하고 목숨을 다한 망국의 무장에 일국의 군주로서 어떻게 적절한 예를 표해야 하는지부터, 관왕묘와 신으로서 관우의 지위는 조선의 입장에서 대단히 까다로운 것이었다. 이러한 수동적 수용으로 인해 동관왕묘를 비롯한 관왕묘는 방치되기도 하나, 이후 몇몇 군주에 의해 각별히 여겨지기도 하며 한양 경계의 표징으로서 백성들에게 의미를 갖게 되기도 하였다. 이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선조실록』을 비롯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각종 문헌에 남아 있다. | + | 그런데 관왕묘가 조선에 유입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국가적 차원에서 중국 무장(武將) 출신의 신(神)을 모시는 사당을 건축한 것은 무척 독특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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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1일 (목) 00:47 기준 최신판
목차
동관왕묘(東關王廟)는 무엇일까?
Story
관왕묘(關王廟)는 중국 촉한의 장수 관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중국은 명나라 초기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였고, 우리나라의 경우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기점으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서울에는 남·동관왕묘가, 지방에는 강진·안동·성주·남원 등 네 곳에 관왕묘가 남아 있는데, 그중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종로구 동묘앞역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42호로 지정된 바 있다.
그런데 관왕묘가 조선에 유입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국가적 차원에서 중국 무장(武將) 출신의 신(神)을 모시는 사당을 건축한 것은 무척 독특한 일이다.
실제로 관왕묘는 명(明)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은 조선이 부득이 명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처음 조선에 세워지게 되었다. 촉한을 지키지도 못하고 목숨을 다한 망국의 무장에 일국의 군주로서 어떻게 적절한 예를 표해야 하는지부터, 관왕묘와 신으로서 관우의 지위는 조선의 입장에서 대단히 까다로운 것이었다. 이러한 수동적 수용으로 인해 동관왕묘를 비롯한 관왕묘는 방치되기도 하나, 이후 몇몇 군주에 의해 각별히 여겨지기도 하며 한양 경계의 표징으로서 백성들에게 의미를 갖게 되기도 하였다. 이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선조실록』을 비롯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각종 문헌에 남아 있다.
Semantic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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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2-R4-02 | Story | Storyline | 동관왕묘(東關王廟)는 무엇일까? | 동관왕묘는 무엇일까? |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S2022-R4-02 |
Contextual Relations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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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관왕묘(關王廟)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948 |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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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 인용전거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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