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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9일 (금) 00:49 판
목차
종묘제례악에 가수가 있었다 》 목조의 공덕을 칭송하는 기명
Story
기명은 목조가 경흥으로 옮길 때 귀부하는 사람이 많아 천명으로 터 잡게 되었음을 칭송한 악장이다. 가사의 내용은 “아! 위대하고 거룩한 목조시여, 바다 건너 경흥으로 옮기시도다. 귀부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져, 우리 영원한 천명으로 터잡았도다.” 하였다. 목조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이다. 이성계의 가계가 역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170년(의종 24) 경부터이다. 이 때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의 동생 이린(李隣)이 이색(李穡)이 지은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에 나오는 이성계의 6대조로 보이므로, 전주 이씨 일족은 적어도 무신란 직전부터 무반직에 올라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뒤 1174년(명종 4) 이의방이 피살되자 이인은 낙향했는데, 손자 이안사에 이르러 역사적 인물로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전주의 토호였던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를 둘러싸고 지주(知州) 및 산성별감(山城別監)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처벌을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해 가솔과 토착인 170여 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 이 곳에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다투었던 산성별감이었다. 이에 1253년(고종 40)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덕원부(德源府), 즉 의주(宜州)로 옮겼다. 이 때 휘하에는 전주에서부터 따라 온 170여 호뿐만 아니라 삼척과 덕원에서도 따르는 사람이 많아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다. 고려 정부는 이안사를 회유하기 위해 의주병마에 임명하고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당시 의주(宜州)에서 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쌍성(쌍성: 지금의 永興)에 원(元)의 침략군 장수 산길(散吉)이 주둔하고 있었다. 1254년 산길은 이 곳에서 점차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이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회유하여, 의주에서 개원로 난징[南京]의 오동[斡東]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안사는 고려의 관직을 버리고 투항해 원나라의 관직을 받은 셈이 되었다. 그 뒤 1258년에 동북면으로 침입하는 몽고군과 대항해 싸우던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이 무리한 입도작전(入島作戰)으로 주민의 반감을 사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용진현인(龍津縣人) 조휘(趙暉)와 정주인(定州人) 탁청(卓靑)이 신집평을 살해한 뒤 몽고에 투항하였다. 몽고는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결국 이안사는 쌍성에서 고려를 배반한 조휘·탁청과 같은 무리가 되었다. 그 뒤 20여 년간 오동에 거주하면서 여진족까지 다스리다가 세력 기반을 아들 이행리(李行里)에게 넘겼다. 능호는 덕릉(德陵)으로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함흥 서북쪽으로 옮겼다.
Semantic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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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3-15A | Story | Episode | 목조의 공덕을 칭송하는 기명 | 목조의 공덕을 칭송하는 기명 |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2022-R3-15A | 2022:임민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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