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敦義門)은 서울 성곽의 사대문 가운데 서쪽의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한다.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이었으며,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문이었다. 1396년(태조 5)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에 처음 세워졌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 대에 서전문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422년(세종 4)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이에 서전문은 완전히 닫힌 문(塞門)이 되어 ‘새문’으로 불리고, 새로 건립한 돈의문은 ‘새문’(新門)으로 부르면서 서대문은 별명이 ‘새문’‘신문’이 되어 오늘날에도 새문안, 신문로 등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1]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는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과 전차궤도 복선화 때문에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2] 현재까지도 돈의문과 경희궁의 복원사업이 근거자료의 부족으로 복원이 지연되고 있지만, 2019년에는 디지털 기술로 복원되어 앞으로 정동사거리,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을 통해 조선시대 돈의문 풍경을 생생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3]
이러한 돈의문에는 "의로움을 돈독히 한다." "의(義)를 북돋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유교덕목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가운데 오행의 방위에 따라 서쪽을 뜻하는 의(義)를 취하였고, 동쪽을 뜻하는 ‘인(仁)’과 대비된다. 즉,‘인’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반면, 의는 옳고 바름으로서 옳지 않음을 물리치는 절도있고 올바른 행동으로 표현되는 강함으로 나타난다. 이에 ‘인의(仁義)’로서 조화를 이룬 가치관이 실행되는 사회를 기원한 것이 흥인문과 돈의문인 것이다. 이러한 유교적 가치와 달리 계유정난과 이괄의 난, 을미사변을 겪은 역사적 현실을 되돌아보면 그 의미는 반전된다.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할 때 돈의문 밖에 거주하던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부상을 당하자, 도성 안으로 들어가 임금에게 알리고 군사를 동원하여 수양대군의 거사를 막고자 하였으나, 돈의문은 이미 수양대군의 수하에 장악되어 피살되었다. 또 이괄 난 때에는 안산(무악재)전투에서 패배한 이괄이 돈의문으로 도망하려 했으나 주민들이 문을 닫아 들어갈 수가 없어 겨우 남대문으로 입성하여 광희문을 거쳐 광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1895년 8월 20일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 때는 일제 공사관의 군인과 낭인들이 파루 종이 울리면서 돈의문을 통하여 곧바로 경복궁으로 침범해 들어간 성문이었고, 중국의 사신들이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남대문)으로 들어오기에 앞서, 이들을 맞이하는 행사가 홍제원 ․ 모화관 등에서 행해짐으로써 국왕을 비롯한 왕세자와․ 대신들이 돈의문을 통하여 왕래하였다. 또한 모화관 앞뜰에서 행해지는 군사훈련과 열병 때에도 많은 군사들이 왕래하였으며, 도성 서북으로 행하는 많은 일반 서민들은 돈의문을 통하여 왕래하면서 물자를 교환하며 생활하였으나, 경복궁 중건에 따른 재정난의 보완책으로 1867년(고종 4) 2월에 원납전(願納錢)을 거둬 들이고, 아울러 각 군영의 부족한 군수(軍需)에 충당하기 위하여 도성문에서 통과세를 징수하였는데, 과다한 징수로 민심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통과세를 거둘 때 돈의문과 소의문에서는 훈련도감이 이를 맡았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