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효의왕후의 불임으로 왕위계승자인 원자를 얻기 위해 모두 세 명의 간택 후궁을 들였다. 정조의 첫 번째 간택후궁 원빈 홍씨는 궁궐에 들어온 지 1년도 못되어 일찍 죽고, 두 번째 간택후궁 화빈 윤씨는 자녀를 낳지 못하였다. 다행히 궁인 출신 성씨가 1782년(정조 6)에 첫 아들을 낳았고, 정조는 31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비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성씨가 낳은 왕자는 3개월 후에 원자(元子)로 정호(定號)되었고, 3세에 왕세자(후일의 문효세자)로 책봉되었다. 1784년(정조 8) 문효세자를 낳은 의빈 성씨는 딸을 낳았다. 그러나 1786년(정조 10) 5월 잘 자라던 왕세자가 갑자기 열병으로 죽는 변(變)이 발생하였다. 문효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을 왕실에서는 ‘병오변상(丙午變喪)’이라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 9월 임신 중이던 의빈 성씨 또한 3살 어린 딸을 남겨두고 병으로 갑자기 죽었다.
당시 약방(藥房) 도제조(都提調)였던 홍낙성은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고, 정조는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라고 하며 후사(後嗣)에 대한 걱정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