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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생각한 개천, 청계천 》 백성을 생각하여 준천을 결정한 영조

Story

영조는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백년은 갈 것입니다’라고 대답 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3월 16일)

이처럼 영조는 준천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였다. 영조대에 개천 준천은 경진준천(1760년), 계사준천(1773년) 두번 진행되었는데, 1773년 공사는 개천의 양쪽 기슭에 석축을 쌓는 것으로 경진준천에서 목책으로 임시 가설한 것을 보완한 것으로 이 역시 준천 효과를 지속하기 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조는 준천을 시작한 지 근 한 달이 되어가던 때에 “준천을 위한 대책은 역시 찾기 어렵다. 이제는 그 실마리를 알 수 있겠다.”라며 준천의 전 과정을 준천당상 홍계희에게 기록하도록 하여 후대에 계승시키고자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36년 03월 16일) 홍계희는 경진준천의 의미와 준천 배경 및 경과 등 제반 사항을 기록하여 1760년에 『준천사실』을 간행하였다. 영조는 서문에서 “수백 년이 지나도 지금의 일을 생각할 것이니 후일 누구라도 개천이 막히지 않고 물이 잘 흐르도록 해야 한다”며 준천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즉, 『준천계첩』이 군신간의 기념비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준천사실』 은 후대에 준천 시행에 대한 전범을 제공하고자 준천의 전 과정과 결과를 남긴 것이다.

번암 채제공(蔡濟恭)은 조선 개국부터 준천까지의 개천 역사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며 준천을 시행한 영조를 칭송하는 준천가(濬川歌)를 남겼다. (『번암집』 9권 - 詩, 1791)

또한 영조는 준천 사업을 기념하는 표석(標石)을 세워 기준점으로 삼도록 했다. 영조는 “표석(標石)은 경진년(1760년)을 지평(地平)으로 새기고 침수되지 않게 해야 유효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경진지평’ 네 글자를 새기고 이 글자들이 모두 보이도록 늘 토사 관리에 만전을 가할 것을 지시한 것이었다. (『승정원일기』 영조 36년 0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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