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중명전은 1897년경 황실도서관으로 탄생했다. 서양식 전각인 중명전은 근대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 있다. 원래의 이름은 수옥헌이었으나, 1904년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이란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원래 덕수궁 권역에 속해 있던 이 전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손되어 1/3 정도로 축소되었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경, 중명전에서는 치욕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중명전을 침범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여 이 늑약을 맺음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광무황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국제 사회에 알리고 주권을 회복을 위한 외교적 돌파구를 모색하였다.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원수들에게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는 친서를 보내어 지지를 호소하였다.
1907년 4월 20일에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한다. 이는 열강들이 주도하는 평화회의에서 일제의 침략주의를 폭로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고자 함이었다. 이 회의에는 46개국에서 주로 외교관과 군인들이 대표로 참석했다. 주요 의제는 전쟁법규의 제정이었다. 이는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과 미국이 각기 군비 증강에 혈안이 되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일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특사들에 대한 궐석재판을 열어 이상설에게는 교형, 이위종과 이미 순국한 이준에게는 종신징역을 선고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켰다. 이후 그들은 정미조약을 강제하고, 마침내 군대 해산령을 내려 한국군을 무력화시키고 1910년 한반도를 강제로 병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