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실은 교서관 소속의 관사이며, 재계齋戒하는 신소神所라 하여 매우 중시하였다. 그 역할은 교서관에서 파견된 관원이 축문의 작성 등 축문을 담당하였으며, 내시별감이 향을 담당하였다. 향실 관원은 승지의 감독하에 향을 향합香盒에 담아 봉함하였다. 향축을 가지고 승정원에 가서 싸던 것을 향실에 싸도록 하였다. 언제부턴가는 헌관이 마주앉아 함께 하도록 하였다. 향은 자단향을 사용하였으나, 영조 7년에 친전향에는 사체가 자별하니 자단향이 아니라 침향을 봉진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친행의 경우에는 침향(沈香)을 사용하나, 섭사 때에는 자단향(紫檀香)이다. 향실에서는 백단향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빠트릴 수 없는 향을 영녕전 제11실에 빠트린 적이 있었는데, 그 담당자가 그 일로 인해 문책을 당하기도 하였다.
향실의 위치는 경복궁의 경우, 성종 12년의 기록에 홍문관 뒤에 있다고 하였다. 성종 25년에는 향실이 옛날 서연의 대청 곁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를 옛날 서연청 북쪽편에다 옮겨 설치토록 하였다. 또 연산군 10년에는 인정전의 동․서랑의 처마 밑에 담을 쌓고서 약방과 향실․도총부를 옮겨 배설하라고 하였다. 향실의 구조는 중종 7년의 기사를 보면, 위의 세 칸은 시렁을 매달아 향축을 봉안하고 아래의 두 칸은 관원들의 처소로 만들었다. 선초에는 내시별감 한 사람과 교서관 관원 한 사람이 향과 축문을 담당하였다. 그러니까 향의 전담은 내시별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세종 22년 5월에 향실 별감別監은 내시 중에서 문리文理가 밝게 통한 여섯 사람을 가리어 정원을 삼아서, 서로 교대해가면서 근무토록 하였다. 향 관련 업무가 대폭 늘어났는지, 그 담당자가 한 명에서 6명으로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