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대 국왕 태조의 정비(正妃)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를 단릉으로 모신 욍비릉으로 황해북도 개풍군 대련리에 있다.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자, 그의 안위를 걱정하다가 병이 들어 1391년(고려 공양왕 3) 9월 23일에 승하하였다. 해풍군 치속촌에서 장사를 지냈고, 이듬해인 1392년에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뒤 한씨를 절비(節妃)로 추존하고, 능호를 제릉이라 하였다. 이어 1398년(태조 7)에는 절비를 신의왕후로 높이고, 1410년에 태조의 신주에 신의왕후의 신주를 부제(附祭)하여 종묘에 배향했다. 제릉은 처음에 한씨의 당시 신분에 따라 묘로 축조되었다가 이후에 능으로 격상하였으나, 태조는 처음 조성된 묘의 봉분 규모를 확장하지 않고 주변 석물과 호석(護石)의 구조만 개수하였다. 그러나 1407(태조 7)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 1357~1423)의 감독 하에 무덤을 확대하여 왕비릉의 규모를 갖추었다. 묘역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윗단에 있는 봉분에는 12지신상을 새긴 12면의 병풍석을 둘렀고, 그 주위에 난간석을 설치했다. 난간석 밖의 동·서·북 3면에 낮은 높이의 곡장(曲墻)을 쌓고 그 안에 여러 개의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배치했는데 현재 곡장은 흔적만 남아 있고, 석양(石羊)도 2개만 남았다. 무덤 앞으로는 상석·혼유석(魂遊石)·망주석 1쌍이 있다. 중간단에는 6각의 장명등을 가운데 세우고 좌우에 문인석과 석마(石馬)를 한 쌍씩 마주 세웠으며, 아랫단에는 무인석과 석마를 한 쌍씩 마주 세웠다. 묘역 앞쪽에 정자각과 비각(碑閣)이 있는데 비각 안에는 신의왕후의 행적과 그에게 추증된 시호를 밝힌 제릉비(齊陵碑, 북한 보존급문화재 제1624호)가 있다. 후릉(厚陵)과 함께 북한에 남아있는 조선왕릉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