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1906년 8월 10일 인가를 받아 1906년 9월 1일 한성신보(漢城新報)와 대동신보(大東新報)를 통합하여 창간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1938년 4월 19일 매일신보가 독립법인으로 분리될 때까지 경성일보사의 일본인 임원진이 매일신보사의 임원진을 겸하는 등 두 신문사가 통합된 하나의 신문사로 운영되었다.[1]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Additional Attributes
propertyName |
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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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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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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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경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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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京城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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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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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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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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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자 |
조선통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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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시대 |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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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일 |
1906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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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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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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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업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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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업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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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관 |
조선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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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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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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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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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xtual Relations
Spatial Data
Spactial Information Nodes
gid |
region |
label |
hanja |
latitude |
longitude |
altitue |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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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tial Relations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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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Data
Temporal Information Nodes
tid |
timeSpan |
label |
hanja |
lunarDate |
solarDate |
indexDate |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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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Relations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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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ine Reference
- type: 해설, 참고, 3D_모델, VR_영상, 도해, 사진, 동영상, 소리, 텍스트
Bibliography
author |
title |
publication |
edition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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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
『언론 조선총독부』, |
커뮤니케이션북스,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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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창규, |
『상품의 시대』, |
민음사, 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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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경성일보는 관보였음에도 가장 광고량이 많았고, 일본 상품 광고가 압도적이었다. 한국 내 일본인들(재조 일본인)과 일본어를 읽을 수 있는 한국인들을 상대했던 만큼 광고도 번역되지 않고 일본어 그대로 실렸다. 기초 일본어(기초 독해 및 일상 회화)를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비율은 1933년 7.81퍼센트에서 1941년 16.61퍼센트로 두 배가량 늘어났다.[2]
1940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같은 한글 민간지가 강제 폐간된 이후에 경성일보는 서울과 경기도를 대표하는 신문으로 남았다. 신문을 한 도에 하나만 허용한다는 1道 1紙의 원칙에 따라 경성일보는 경기도를 대표하고, 일본어 신문이었던 부산일보는 경상도를 대표하는 신문으로 남았다.
매일신보는 1937년까지 경성일보 산하에 있었으며 광고량이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보다 적었다. 하지만 기관지 성격을 띠었던 매일신보는 다른 신문에 비해 관보나 등기 광고가 많이 실렸다. 등기 광고는 조선 총독부의 경무국이 알선해서 지방법원에 냈던 광고다. 매일신보는 등기 광고를 독점적으로 유치하여 광고수입에 보탰다.[3]
References
- ↑ 매일신보의 분리독립에 관한 사항은 정진석의 책 『언론조선총독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156-169쪽 참고
- ↑ 권창규, 『상품의 시대』, 민음사, 2014, 42쪽
- ↑ 권창규, 『상품의 시대』, 민음사, 2014,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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