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김구

Korea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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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임시 정부의 중심 인물 김구
집필자 황인희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임시 정부, 동학 교도, 일본군 중위 쓰치다, 고종 황제, 안악 양산학교, 재령 보강학교, 이동녕, 이시영, 한국독립당, 한인애국단, 한국광복군, 학도병, 이승만, 미군정, 유엔 총회, 김규식, 김일성, 조선인민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안두희
장소/공간 안악 치하포, 해주, 상하이, 충칭, 시안, 푸양, 모스크바, 소련
사건 갑오농민운동, 을미사변, 을사조약, 3·1운동,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진주만 기습, 8.15 광복, 남북 분단, 5 ‧ 10총선거
개념용어 일제강점기, 한학, 조선 왕조, 과거 시험, 신탁 통치, 단독 정부



1차 원고

김구(金九, 1876∼1949)는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로서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했고 17세에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청년 시절 동학 교도가 되었던 김구는 갑오농민운동 때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을미사변에 충격 받은 21세의 김구는 1896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이고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갇혔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지만 집행 직전 고종 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석방이 되지 않아 다음 해 봄에 탈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계몽 운동에 나서서 1907년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우고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7년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에는 이동녕 ·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수뇌들을 직접 처치하는 일에 앞장섰다.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여 거사가 성공하도록 이끌기도 했다.

1940년 3월 임시 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같은 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였다. 항일 무장 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을 치를 태세를 갖추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시안[西安]과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 훈련반을 설치하였다. 또 미 육군과 제휴하여 비밀 특수 공작 훈련을 실시하는 등, 한반도 수복을 위한 군사 훈련을 추진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해방 전 임시 정부는 외국의 독립 운동 단체를 대표하지 못했고 그 이유로 연합국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은 해방 후 개인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한국은 극심한 혼란에 휩쓸렸다. 남북이 분단되었고 남한에서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분열되어 서로 심하게 갈등했기 때문이다.

김구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로부터 신탁 통치 방침이 전해지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더불어 남한에서 정치적 중심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김구는 반공산주의만을 외친 것이 아니고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도 두 차례나 계획했다. 그는 미국도, 소련도 아닌 한민족 스스로 통일된 독립국을 만들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47년 9월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가 결의되자 김구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또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의 선거가 될지라도 그 정부는 법적 이치로나 국제 관계로 보나 통일 정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구는 그해 12월 하순부터 남한만의 선거와 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김구에게 민족의 분단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48년 2월,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북 정치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는 편지를 북한에 보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아무런 답도 보내오지 않았다. 한 달도 더 지난 후 북한의 김일성이 남북한의 모든 정당과 사회 단체 대표들이 평양에 모여 남북 협상을 하자고 제의해왔다.

북한은 남북 협상을 제의하기 전인 2월 8일에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고 2월 1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의 초안을 발표했다. 겉으로는 통일 정부를 만들기 위해 회의하자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미 자기들만의 정부를 만든 셈이다. 김일성은 남한의 단독 정부가 민족 통일을 방해한다고 선전하기 위해 남북 협상을 이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에 가기로 했고, 김구는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며 평양으로 향했다.

서울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5 ‧ 10총선거를 거부하였다. 1948년 국회에서 치른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는 열세 표를 얻는 데 그쳐 낙선하였다. 김구는 “통일이 없는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다”라며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후에도 유엔 감시 아래서 남북한 총선거 실시할 것을 주장하던 김구는 1949년 6월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범인은 김구가 주석으로 있던 한독당 당원 안두희 소위였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201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자료

  • 『백범연구』 제1·2집(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편, 교문사, 1985·1986)
  • 『백범 김구』생애와 사상(백범전기편찬위원회, 교문사, 1984)
  •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 『백범어록』(백범사상연구소, 사상사, 1973)
  • 『위대한 한국인』백범 김구(선우진, 태극출판사, 1972)
  • 『백범주석최근언론집』(엄항섭 편, 1948)
  • 『백범일지』(김구, 국사원, 1947)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김구의 『백범일지』와 그 책에 포함되어 있는 ‘나의 소원’에 서술된 <민족국가>, <정치이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의 세 편의 글은 김구의 사상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김구의 사상과 독립운동을 연계하여 설명하면 좋겠다.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라는 문구도 제시하면서 식민지 조국의 자주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서술했으면.
- 김구가 한국 역사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를 맨 마지막 문단에 정리하여 서술하였으면 한다.



수정 원고

김구(金九, 1876∼1949)는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로서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호는 ‘백범’인데,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자를 따서 미천한 사람부터 평범한 사람까지 누구나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했고 17세에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청년 시절 동학교도가 되었던 김구는 갑오농민운동 때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을미사변에 충격 받은 21세의 김구는 1896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이고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갇혔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지만 집행 직전 고종 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석방이 되지 않아 다음 해 봄에 탈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계몽 운동에 나서서 1907년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우고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7년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에는 이동녕 ·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수뇌들을 직접 처치하는 일에 앞장섰다.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여 거사가 성공하도록 이끌기도 했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라고도 썼다. 이로써 독립에 대한 그의 간절한 염원과 강한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

1940년 3월 임시 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같은 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였다. 항일 무장 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을 치를 태세를 갖추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시안[西安]과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 훈련반을 설치하였다. 또 미 육군과 제휴하여 비밀 특수 공작 훈련을 실시하는 등, 한반도 수복을 위한 군사 훈련을 추진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해방 전 임시 정부는 외국의 독립 운동 단체를 대표하지 못했고 그 이유로 연합국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은 해방 후 개인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한국은 극심한 혼란에 휩쓸렸다. 남북이 분단되었고 남한에서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분열되어 서로 심하게 갈등했기 때문이다.

김구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로부터 신탁 통치 방침이 전해지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더불어 남한에서 정치적 중심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김구는 반공산주의만을 외친 것이 아니고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도 두 차례나 계획했다. 그는 미국도, 소련도 아닌 한민족 스스로 통일된 독립국을 만들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47년 9월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가 결의되자 김구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또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의 선거가 될지라도 그 정부는 법적 이치로나 국제 관계로 보나 통일 정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구는 그해 12월 하순부터 남한만의 선거와 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김구에게 민족의 분단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48년 2월,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북 정치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는 편지를 북한에 보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아무런 답도 보내오지 않았다. 한 달도 더 지난 후 북한의 김일성이 남북한의 모든 정당과 사회 단체 대표들이 평양에 모여 남북 협상을 하자고 제의해왔다.

북한은 남북 협상을 제의하기 전인 2월 8일에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고 2월 1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의 초안을 발표했다. 겉으로는 통일 정부를 만들기 위해 회의하자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미 자기들만의 정부를 만든 셈이다. 김일성은 남한의 단독 정부가 민족 통일을 방해한다고 선전하기 위해 남북 협상을 이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에 가기로 했고, 김구는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며 평양으로 향했다.

서울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5‧10총선거를 거부하였다. 김구는 1948년 국회에서 치른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가 되었지만 낙선하였다. 김구는 “통일이 없는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다”라며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후에도 유엔 감시 아래서 남북한 총선거 실시할 것을 주장하던 김구는 1949년 6월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범인은 김구가 주석으로 있던 한독당 당원 안두희 소위였다.

교열본

김구(金九, 1876∼1949)는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로서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호는 ‘백범’인데,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자를 따서 미천한 사람부터 평범한 사람까지 누구나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했고 17세에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청년 시절 동학교도가 되었던 김구는 갑오농민운동 때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을미사변에 충격 받은 21세의 김구는 1896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이고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갇혔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지만 집행 직전 고종 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석방이 되지 않아 다음 해 봄에 탈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계몽 운동에 나서서 1907년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우고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7년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에는 이동녕 ·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수뇌들을 직접 처치하는 일에 앞장섰다.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여 거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내 소원은 우리나라의 독립이요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라고도 썼다. 독립에 대한 그의 간절한 염원과 강한 애국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40년 3월 임시 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같은 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였다. 항일 무장 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을 치를 태세를 갖추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시안[西安]과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 훈련반을 설치하였다. 또 미 육군과 제휴하여 비밀 특수 공작 훈련을 실시하는 등, 한반도 수복을 위한 군사 훈련을 추진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한민족 스스로 통일된 독립국을...

해방 전 임시 정부는 외국의 독립 운동 단체를 대표하지 못했고 그 이유로 연합국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은 해방 후 개인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한국은 극심한 혼란에 휩쓸렸다. 남북이 분단되었고 남한에서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분열되어 서로 심하게 갈등했기 때문이다.

김구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로부터 신탁 통치 방침이 전해지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더불어 남한에서 정치적 중심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김구는 반공산주의만을 외친 것이 아니고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도 두 차례나 계획했다. 그는 미국도, 소련도 아닌 한민족 스스로 통일된 독립국을 만들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47년 9월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가 결의되자 김구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또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의 선거가 될지라도 그 정부는 법적 이치로나 국제 관계로 보나 통일 정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하순 유엔에서 남한만의 선거로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자 김구는 이를 반대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김구에게 민족의 분단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48년 2월,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북 정치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는 편지를 북한에 보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아무런 답도 보내오지 않았다. 한 달도 더 지난 후 북한의 김일성이 남북한의 모든 정당과 사회 단체들이 평양에 모여 남북 협상을 하자고 제의해왔다.

북한은 남북 협상을 제의하기 전인 2월 8일에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고 2월 1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의 초안을 발표했다. 겉으로는 통일 정부를 만들기 위해 회의하자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미 자기들만의 정부를 만든 셈이다. 김일성은 남한의 단독 정부가 민족 통일을 방해한다고 선전하기 위해 남북 협상을 이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에 가기로 했고, 김구는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며 평양으로 향했다.

서울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5‧10총선거를 거부하였다. 김구는 1948년 국회에서 치른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가 되었지만 낙선하였다. 김구는 “통일이 없는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다”라며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후에도 유엔 감시 아래서 남북한 총선거 실시할 것을 주장하던 김구는 1949년 6월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범인은 김구가 주석으로 있던 한독당 당원 안두희 소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