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조선의 황후를 살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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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조선의 황후를 살해하다

열강들의 알력 사이에 놓인 조선

고종조선의 제26대 임금이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세워 첫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가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개항으로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였고 자주 독립을 위해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적극적인 노력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 사람들에게 살해된 사건 역시 그 시기에 일어났다.

을미사변(1895)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는 복잡다단한 세력 충돌의 배경이 있다. 당시 조선 사회가 여러 가지로 혼란해지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입김이 점점 강해졌다. 청나라 세력이 조정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에 대해 반발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각을 가진 개화당이 쿠데타 갑신정변(1884)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의 뒤처리로 일본과 청나라가 톈진조약을 맺었고 그 조약 때문에 동학농민운동(1894) 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두 나라 군대의 충돌로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났고 전쟁에 이긴 일본은 중국의 랴오둥반도를 전리품으로 챙기려 했다.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삼국이 이에 간섭을 하였고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도로 내놓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를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라고 여긴 조선은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조선에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일본은 위기를 느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공들였던 그동안의 노력이 헛일이 되고 그 공을 러시아가 대신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 을미사변

고종명성황후는 친러파 대신들을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열강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방법과 러시아의 협조 방안에 대해 의논했다. 일본은 친러 내각의 중심 인물이 명성황후라고 생각했다. 고종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명성황후만 처치하면 고종을 자신들의 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1895년 을미년 8월 20일 일본은 ‘여우사냥’이라고 이름 붙인 작전을 실천에 옮겼다.

그들은 명성황후 살해의 책임을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떠넘기려 했다. 흥선대원군명성황후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습격하러 오기 전 그들은 흥선대원군을 억지로 경복궁으로 데리고 갔다. 조선의 왕실에서 시아버지가 왕비인 며느리를 죽인 사건으로 꾸미려 한 것이다.

일본의 폭도는 잔인하게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새벽에 임금과 그 가족이 자고 있는 궁궐에 쳐들어와 왕비를 내놓으라며 이 방 저 방을 마구 뒤지고 다녔다. 그 와중에 세자는 상투를 잡히고 폭도의 칼등에 맞아 실신했다. 고종은 미처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눈앞에서 왕비가 살해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폭도는 궁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병풍 뒤에 숨은 명성황후를 찾아냈다. 그리곤 건천궁 장안당 뒤뜰로 끌어내어 칼로 찔러 죽이고 홑이불로 시신을 싸서 건청궁 옆 녹산으로 끌고 가서 석유를 붓고 불태웠다.

증언으로 드러난 참극의 범인, 일본

일본은 을미사변이 일본 정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황후시해를 획책하고 실행한 무리들은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고 일본 외교관과 일본인 신문사 사장, 일본군 고문 등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황후와 갈등 관계에 있는 흥선대원군이 조선인 훈련원과 모의하여 벌인 일로 위장하려 했다. 그러나 고종을 비롯해 러시아인 사바틴, 미국인 다이 등 목격자가 많아 사건의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이에 미국공사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의 회합 후 일본의 관여사실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발표했다. 또 이들은 일본이 뒷받침하고 있는 김홍집 내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난처해진 일본은 사건관련자를 형식적으로 처벌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일본인들을 체포하여 히로시마로 압송하는 한편, 미우라 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를 주한공사로 임명했다. 일본정부는 미우라를 비롯한 관련자 40여 명을 자국으로 소환해 재판절차를 밟게 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다.

명성황후의 장례는 을미사변으로부터 2년 후에야 제대로 치를 수 있었다. 슬픔과 암살의 두려움에 떨던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왕비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된 고종은 아내의 장례식을 황후의 예우로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그러나 훼손된 시신 대신 손가락 뼈 조각과 입었던 옷가지를 넣어 왕비릉을 조성할 수 있었을 뿐이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개화기를 전후로 당시 격변하는 시대 상황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
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2001.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로, 우리나라가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봉건적인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사회로 개혁되어 가던 시기를 개화기라고 한다. 나라 안팎으로 격변하는 시대 상황을 먼저 파악을 한 이후에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의 제1강은 개항 전후 나라 안팎의 정세와 사회변동의 내용을 서술하고 있으며, 1894년 동학농민전쟁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개항 이후 대원군의 대처 방안과 개화파 및 그들의 개화사상, 갑신정변, 갑오개혁 등의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제2강에서는 을미사변의 발발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침탈과 개혁운동, 그리고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일제의 국권침탈과 그에 대응하는 조선의 국권수호운동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는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의 공식 기록에 대원군집권기가 등장하지 않는 점에 주목하여 대원군이 어떻게 집권했는지를 살핀 연구서이다. 고종 즉위 전후로 권력구조의 변화와 권력집단의 동향을 분석하였으며, 대원군집권기 동안 서양에 대한 교섭과 항쟁, 군비증강 등 전반적인 정책 방향을 살펴보았다.

『고종시대의 재조명』은 고종 시대와 관련된 잘못된 역사인식, 그 가운데서도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연결되는 침략주의 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술된 연구서이다. 왜곡된 역사를 극복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고종 시대를 재조명한 책이다.


  • 명성황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메리 V. 팅글리 로렌스·제임스 앨런 저, 손나경·김대륜 역, 『미 외교관 부인이 만난 명성황후 · 영국 선원 앨런의 청일전쟁 비망록』, 살림, 2011.
한영우,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효형출판, 2006.


『미 외교관 부인이 만난 명성황후』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처한 나라를 지키려 온힘을 다하는 명성황후에 대한 한 서양인의 평가를 그리고 있다. 『영국 선원 앨런의 청일전쟁 비망록』은 저자인 앨런이 우연한 기회에 청나라와 무기를 밀거래하는 무역선에 탔다가, 배를 놓치는 바람에 겪게 되는 청일전쟁에 대한 기록을 담았다. 당시 서양인의 눈에 포착된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미 외교관 부인이 만난 명성황후의 외모와 성품, 둘의 우정, 당시 조선의 상황 등을 그리고 있으며, 영국 선원 앨런이 쫓기면서 관찰한 청일전쟁과 대학살의 참혹한 현장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대한제국의 성립을 연관 지은 최초의 연구로, 방대한 의궤와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명성황후의 국장 진행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2년 2개월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궁중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의궤를 통해 황후의 죽음과 대한제국 성립 사이의 인과관계를 살펴보고 있다. 또한 명성황후의 장례 절차를 하나하나 따져나가며 행적을 다시 짚어보고, 황후의 죽음이 갖는 의미와 영향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1부에서는 명성황후의 죽음에서 대한제국 성립까지의 과정 및 이모저모를 알아보고, 2부에서는 황후의 국장과 관련된 네 종류의 의궤(『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명성황후빈전혼전도감의궤』, 『명성황후홍릉산릉도감의궤』, 『명성황후홍릉석의중수도감의궤』)를 소개하고 있다.


  •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김영수, 『미쩰의 시기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경인문화사, 2012.
김영수, 『명성황후 최후의 날 : 서양인 사바찐이 목격한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억』, 말글빛냄, 2014.


『미쩰의 시기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은 을미사변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 연구서이다. 그간의 연구에서는 주로 정치세력의 대립, 즉 대원군과 명성황후라는 대립구도로 설명되어 왔다. 그 배경에는 국내외 연구가 대체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일본측 사료에 기초하여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자료에 근거한 일부 연구자들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의 본질을 단순한 정권 쟁탈전으로 간주하였다. 이 책의 1부에서는 그동안의 연구에 대한 의문과 논쟁을 중심으로 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2부에서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하였던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를 적극 활용하였다. 그 결과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이란 소재를 통하여 한·러·일 삼국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조명하였다.

그동안 명성황후의 암살과정과 시해인물 등의 논란은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그 논란은 일본정부의 조선 식민지정책 및 왕비 살해 책임 등의 본질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한국인조차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여우사냥’으로 풍자하려는 일본의 의도에 말려들었다. 그러나 어느 때와 무슨 일을 물을 것 없이 진실은 살아남고 거짓은 소멸하였다. 『명성황후 최후의 날 : 서양인 사바찐이 목격한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억』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45분경 명성황후 시해 당시 유일한 서양인 목격자로 알려진 러시아 건축사 사바찐이 써 내려간 그 마지막 날 24시간의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