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의 역사적 성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Korea100
이동: 둘러보기, 검색
(관련항목)
(낙랑군의 역사적 성격)
11번째 줄: 11번째 줄:
  
 
===낙랑군의 역사적 성격===
 
===낙랑군의 역사적 성격===
 +
[[파일:2-2.낙랑군치지.jpg|thumb|200px|center|낙랑군치지. 현재의 대동강면 토성리에 위치한 토성으로 낙랑군이 통치하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1576 낙랑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군이란 일반적으로 중국의 왕조가 중앙집권적 통치를 목적으로 설치한 행정단위이지만, [[낙랑군]]의 경우 [[고조선]] 지역을 직접 통치하거나 영토를 확대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나라]]의 일반적인 군현과는 달리 [[낙랑군]]의 정치체제는 중국 왕조의 전형적인 군현체제와 [[고조선]] 원주민들의 국읍체제(國邑體制)가 혼합된 형태였다. 국읍에는 원주민 집단의 대표인 군장이 있어 토속적인 법률에 따라 집단을 통솔하였다. 즉 현지인들의 자치를 인정한 것으로 낙랑 태수와 일부 중앙 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와 군인은 현지인들이었다. [[낙랑군]]은 중국과 한반도 남부의 소국 및 고대 일본의 소국들과의 사이에서 중계 무역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군이란 일반적으로 중국의 왕조가 중앙집권적 통치를 목적으로 설치한 행정단위이지만, [[낙랑군]]의 경우 [[고조선]] 지역을 직접 통치하거나 영토를 확대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나라]]의 일반적인 군현과는 달리 [[낙랑군]]의 정치체제는 중국 왕조의 전형적인 군현체제와 [[고조선]] 원주민들의 국읍체제(國邑體制)가 혼합된 형태였다. 국읍에는 원주민 집단의 대표인 군장이 있어 토속적인 법률에 따라 집단을 통솔하였다. 즉 현지인들의 자치를 인정한 것으로 낙랑 태수와 일부 중앙 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와 군인은 현지인들이었다. [[낙랑군]]은 중국과 한반도 남부의 소국 및 고대 일본의 소국들과의 사이에서 중계 무역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낙랑군]]을 바라보는 역사적 성격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는 정치거점설이다. 낙랑을 [[한나라]]가 지배하는 여러 군현 중 하나로 보는 것이다. 다른 시각은 [[한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무역기지로 보는 교역거점설이다. 한의 식민지가 아닌, 한반도에 존재했던 중국인의 상업중심지로 보는 것이다.  
 
[[낙랑군]]을 바라보는 역사적 성격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는 정치거점설이다. 낙랑을 [[한나라]]가 지배하는 여러 군현 중 하나로 보는 것이다. 다른 시각은 [[한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무역기지로 보는 교역거점설이다. 한의 식민지가 아닌, 한반도에 존재했던 중국인의 상업중심지로 보는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는 현재 중국의 요서 지방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체로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평양 일대에 자리하고 있던 것으로 본다. 특히 현재 북한의 평양 인근에서 [[낙랑군]]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 봉니 등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어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고분인 돌무지무덤(적석총)이나 굴식 돌방무덤과 뚜렷이 구별되는 덧널무덤(목곽분), 벽돌무덤(전축분)은 낙랑의 것으로서 [[낙랑군]]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
[[낙랑군]]의 위치는 현재 중국의 요서 지방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체로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평양 일대에 자리하고 있던 것으로 본다. 특히 현재 북한의 평양 인근에서 [[낙랑군]]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 봉니 등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어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고분인 돌무지무덤(적석총)이나 굴식 돌방무덤과 뚜렷이 구별되는 덧널무덤(목곽분), 벽돌무덤(전축분)은 낙랑의 것으로서 [[낙랑군]]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
[[파일:2-2. 봉니.jpg|thumb|200px|center|봉니(封泥)란 고대 중국에서 문서류 또는 귀중한 물품을 봉함할 때 쓴 점토이다. 낙랑군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평양 일대에서 출토되었다.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 낙랑수승(樂浪守丞) 등 낙랑의 관직명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1576 낙랑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 이야기에 담긴 진실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 이야기에 담긴 진실은?===

2017년 11월 19일 (일) 13:36 판

Eng icon.JPG


낙랑군의 역사적 성격

한사군과 낙랑군

한사군(漢四郡)이란 중국의 고대국가인 한(漢)나라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반도의 서북부지역에 설치한 낙랑(樂浪)·임둔(臨屯)·진번(眞蕃)·현도(玄菟) 등 4개의 군현을 말한다.

이 가운데 낙랑군을 제외한 3개의 군은 토착세력의 반발로 인해 25년여에 걸쳐 순차적으로 사라졌으나, 낙랑군은 약 400여년 동안 지속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왕조가 쇠퇴함에 따라 낙랑군의 역할도 점차 축소되었다. 처음에는 지배계층이었던 한나라 출신의 주민들 역시 대개는 토착화되어 갔다. 기원 후 313년에 한국의 고대 왕국인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기까지 낙랑군은 한반도의 고대인들과 중국 세력 간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에 있어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

이렇게 역사적인 변천상황이 각각 다른 4개 군을 한사군이라는 용어로 묶어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로 삼기 위해, 조선의 역사가 외부세력의 침입에 따라 진행되는 수동적인 역사였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중국 측 역사서에서도 한사군의 존재를 강조하며, 이 시기의 한반도 전역이 한나라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으며, 역사적인 성격은 어떤 것이었을까?

낙랑군의 역사적 성격

파일:2-2.낙랑군치지.jpg
낙랑군치지. 현재의 대동강면 토성리에 위치한 토성으로 낙랑군이 통치하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1]

군이란 일반적으로 중국의 왕조가 중앙집권적 통치를 목적으로 설치한 행정단위이지만, 낙랑군의 경우 고조선 지역을 직접 통치하거나 영토를 확대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나라의 일반적인 군현과는 달리 낙랑군의 정치체제는 중국 왕조의 전형적인 군현체제와 고조선 원주민들의 국읍체제(國邑體制)가 혼합된 형태였다. 국읍에는 원주민 집단의 대표인 군장이 있어 토속적인 법률에 따라 집단을 통솔하였다. 즉 현지인들의 자치를 인정한 것으로 낙랑 태수와 일부 중앙 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와 군인은 현지인들이었다. 낙랑군은 중국과 한반도 남부의 소국 및 고대 일본의 소국들과의 사이에서 중계 무역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낙랑군을 바라보는 역사적 성격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는 정치거점설이다. 낙랑을 한나라가 지배하는 여러 군현 중 하나로 보는 것이다. 다른 시각은 한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무역기지로 보는 교역거점설이다. 한의 식민지가 아닌, 한반도에 존재했던 중국인의 상업중심지로 보는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는 현재 중국의 요서 지방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체로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평양 일대에 자리하고 있던 것으로 본다. 특히 현재 북한의 평양 인근에서 낙랑군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 봉니 등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어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고분인 돌무지무덤(적석총)이나 굴식 돌방무덤과 뚜렷이 구별되는 덧널무덤(목곽분), 벽돌무덤(전축분)은 낙랑의 것으로서 낙랑군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봉니(封泥)란 고대 중국에서 문서류 또는 귀중한 물품을 봉함할 때 쓴 점토이다. 낙랑군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평양 일대에서 출토되었다.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 낙랑수승(樂浪守丞) 등 낙랑의 관직명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 이야기에 담긴 진실은?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낙랑공주호동왕자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인 호동(好童)왕자는 옥저 지방을 유람하다가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낙랑왕 최리(崔理)를 만나게 된다. 최리는 호동에게 호감을 갖고 그를 자신의 나라로 초청하였고, 자신의 딸과 혼인시킨다.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고구려와 혼인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다. 당시 낙랑에는 적병이 침입해오면 스스로 울려 이를 알리는 북과 뿔피리(自鳴鼓, 自鳴角)가 있었다. 호동낙랑공주에게 자신과 결혼하고 싶다면 보물인 북과 뿔피리를 부수어 달라고 요구한다. 호동왕자를 사랑한 낙랑공주는 몰래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여 고구려 군대가 낙랑을 멸망시킬 수 있게 도왔지만,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최리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다. 뒤이어 호동왕자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등장하기 때문에,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 이야기를 일종의 설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야기 속의 낙랑을 한(漢)나라가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이 아닌, 평양을 중심으로 한 별도의 독립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 이야기 속에, 고구려를 비롯한 한국의 고대 국가들이 낙랑군을 비롯한 한반도 내의 중국계 세력을 몰아내면서 성장해 온 역사적 시간들이 은유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믿고 있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1. "낙랑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낙랑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