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왕릉
제목 |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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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능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
장소/공간 | 도성, 개성 |
개념용어 | 조상신, 효, 혈통, 지위 계승의 영속성, <국조오례의>, 풍수지리 상 명당, 세계문화유산, 석물, 홍살문, 참도, 정자각, 문무석인, 강(岡), <국장도감의궤>, <빈전도감의궤>, <산릉도감의궤>, 실록, 의궤, 능지, 제례, 속절제, 기신제, 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 청명, 종묘 제례, 사직 대제 |
목차
1차 원고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그들의 사후 공간이자 왕조를 수호하는 조상신(祖上神)의 신성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또 후손 왕들에게는 효로써 마음을 다하면서 혈통과 지위 계승의 영속성을 표하는 성역으로 여겨졌다. 조선 왕릉의 기본 구조는 <국조오례의>라는 예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왕이나 왕비의 살아 있을 때, 혹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의 형편에 따라 다 그 모습이 달라졌다.
왕릉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풍수지리 상 명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왕이 있는 도성에서 약 40킬로미터 안에 위치해야 한다. 왕이 능에 참배를 해야 하는데 하루 안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의 자리가 정해지면 주변 약 10㎞ 정도에는 다른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곳에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소나무들을 심었고 그 나무를 함부로 베어서도 안 되었다.
원래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그 중 북한의 개성에 있는 두 기를 제외한 남한에 있는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은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홍살문에서 시작하는 참도와 정자각의 절제된 건축 형태, 각 능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문무석인의 조형 등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들이다. 조선 왕릉의 눈에 띠는 특징 중 하나는, 왕릉이 ‘강(岡)’이라 언덕 위에 있다는 것이다. 강은, 땅 속에 흐르는 생기의 저장 탱크라는 의미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왕권의 시각적 과시를 위한 장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풍수 이론을 적용하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조건에 구조물을 맞추어나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도 조선 왕릉의 가치를 더해준다. 왕릉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를 비롯한 왕릉 관련 기록들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새 임금이 의례를 갖추어 전왕의 국장을 치르고 능을 조성한다. 그리고 왕릉을 왕조의 성역이자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이에 관련한 다양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은 실록(實錄)과 의궤(儀軌), 능지(陵誌)이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실록에도 왕릉에 관련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지만 의궤와 능지를 별도로 만들어 왕릉 조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겨두었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장례에 관련한 <국장도감의궤>, <빈전도감의궤>, <산릉도감의궤>가 있다. <산릉도감의궤>에는 왕릉 조성을 전후로 논의된 내용, 각종 공문, 건축하는 데 소용된 물품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능지는 능역을 지키는 시행 지침 또는 규칙을 나열한 절목과 제례를 행할 때의 절차를 적어놓은 기록이다. 이는 능관(陵官)이 업무를 행하는 데 지침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책에는 능역의 위치 및 건물의 규모,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요소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조선시대의 왕실 역사는 물론 제례 문화에 대한 중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산릉도감의궤>에는 산릉을 조성하는 공정은 물론 흙을 나르는 데 참여한 단순노역자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어 이 의궤 자체만도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릉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한 왕조의 왕릉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제례 등을 통해 물리적 보존은 물론 무형적 문화 전통까지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 왕조가 망한 후 왕릉의 제례를 거행하기 어려웠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제례를 계속 이어와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왕릉에서는 매년 속절제(俗節祭)와 기신제(忌辰祭)를 지낸다. 속절제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날인 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과 청명(淸明)날에 지내는 제례이다. 또 기신제는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난 기일에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산릉 제례를 종묘 제례와 사직 대제와 같은 국가 차원의 제사로 정성껏 모셨다.
연구원 1차 검토
검토의견 | |
• - 시대에 따라, 왕이나 왕비의 살아 있을 때, 혹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의 형편에 따라 다 그 모습이 달라졌다. → 이에 대해 사례를 들어 설명했으면 흥미로울 것 같다. - 왕릉을 구성하는 홍살문, 참도, 정자각 등을 설명하기 위해서 대표적인 왕릉 지도(?)를 실었으면 한다. 왕릉의 공간, 구조에 대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으면. 왕릉이 몇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각의 공간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는지, 문무석은 왜 세워놓았는지 등을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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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조선 왕릉에는 조선 왕조의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들이 묻혀 있다. 왕릉은 그들의 사후 공간이자 왕조를 수호하는 조상신(祖上神)의 신성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또 후손 왕들에게는 효로써 마음을 다하면서 혈통과 지위 계승의 영속성을 표하는 성역으로 여겨졌다. 조선 왕릉의 기본 구조는 <국조오례의>라는 예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왕이나 왕비의 살아 있을 때, 혹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의 형편에 따라 다 그 모습이 달라졌다.
왕릉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풍수지리 상 명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왕이 있는 도성에서 약 40킬로미터 안에 위치해야 한다. 왕이 능에 참배를 해야 하는데 하루 안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의 자리가 정해지면 주변 약 10㎞ 정도에는 다른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곳에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소나무들을 심었고 그 나무를 함부로 베어서도 안 되었다.
원래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그 중 북한의 개성에 있는 두 기를 제외한 남한에 있는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은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홍살문에서 시작하는 참도와 정자각의 절제된 건축 형태, 각 능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문무석인의 조형 등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들이다. 조선 왕릉의 눈에 띠는 특징 중 하나는, 왕릉이 ‘강(岡)’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 있다는 것이다. 강은, 땅 속에 흐르는 생기의 저장 탱크라는 의미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왕권의 시각적 과시를 위한 장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릉은 왕과 왕비의 유택인 능침 공간,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 산 자들을 위한 진입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계의 능침 공간에는 3면을 곡장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 봉분을 만들고 떼를 입혔다. 봉분 하단은 화강암 병풍석과 돌난간으로 감쌌다. 봉분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 혼유석, 망주석이 자리한다. 봉분의 한 단 아래인 중계에는 중앙에 장명등이 있고 문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마주하고 있다. 다시 한 단 아래인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있다. 영조 이후에는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졌다. 제향 공간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에서 박석을 깐 참도를 통해 정자각에 이르는 공간이다. 정자각은 제수품을 진설하고 절을 올리는 건물이다. 정자각과 좌우 인접하여 비각과 수복방, 수라간 등이 있다. 진입 공간에는 금천교와 능묘 관리인이 근무하는 재실이 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설치한 인공 연못이 있다.
풍수 이론을 적용하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조건에 구조물을 맞추어나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도 조선 왕릉의 가치를 더해준다. 왕릉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를 비롯한 왕릉 관련 기록들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새 임금이 의례를 갖추어 전왕의 국장을 치르고 능을 조성한다. 그리고 왕릉을 왕조의 성역이자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이에 관련한 다양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은 실록(實錄)과 의궤(儀軌), 능지(陵誌)이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실록에도 왕릉에 관련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지만 의궤와 능지를 별도로 만들어 왕릉 조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겨두었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장례에 관련한 <국장도감의궤>, <빈전도감의궤>, <산릉도감의궤>가 있다. <산릉도감의궤>에는 왕릉 조성을 전후로 논의된 내용, 각종 공문, 건축하는 데 소용된 물품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능지는 능역을 지키는 시행 지침 또는 규칙을 나열한 절목과 제례를 행할 때의 절차를 적어놓은 기록이다. 이는 능관(陵官)이 업무를 행하는 데 지침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책에는 능역의 위치 및 건물의 규모,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요소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조선시대의 왕실 역사는 물론 제례 문화에 대한 중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산릉도감의궤>에는 산릉을 조성하는 공정은 물론 흙을 나르는 데 참여한 단순노역자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어 이 의궤 자체만도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릉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한 왕조의 왕릉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제례 등을 통해 물리적 보존은 물론 무형적 문화 전통까지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 왕조가 망한 후 왕릉의 제례를 거행하기 어려웠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제례를 계속 이어와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왕릉에서는 매년 속절제(俗節祭)와 기신제(忌辰祭)를 지낸다. 속절제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날인 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과 청명(淸明)날에 지내는 제례이다. 또 기신제는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난 기일에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산릉 제례를 종묘 제례와 사직 대제와 같은 국가 차원의 제사로 정성껏 모셨다.
연구원 2차 검토
검토의견 | |
• 내용이 너무 어려움. 조선왕릉에 대한 설명을 좀 더 풀어서 할 필요가 있고, 기록과 행사명보다는 조선왕릉이 가지는 역사적, 미술사적 가치 및 주변 국가와의 차별성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음. | |
교열본
백 리 안의 명당에 자리한 왕릉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조선 왕릉에는 조선 왕조의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들이 묻혀 있다. 왕릉은 그들의 사후 공간이자 왕조를 수호하는 조상신(祖上神)의 신성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또 후손 왕들에게는 효로써 마음을 다하면서 혈통과 지위 계승의 영속성을 표하는 성역으로 여겨졌다.
조선 왕릉의 기본 구조는 <국조오례의>라는 예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왕이나 왕비의 살아 있을 때, 혹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의 형편에 따라 다 그 모습이 달라졌다.
왕릉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풍수지리 상 명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왕이 있는 도성에서 약 40킬로미터 안에 위치해야 한다. 왕이 능에 참배를 해야 하는데 하루 안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의 자리가 정해지면 주변 약 10㎞ 정도에는 다른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곳에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소나무들을 심었고 그 나무를 함부로 베어서도 안 되었다.
신성하면서 예술적인 조형 공간
원래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그 중 북한의 개성에 있는 두 기를 제외한 남한에 있는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은 왕과 왕비의 유택인 능침 공간,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 산 자들을 위한 진입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계의 능침 공간에는 3면을 곡장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 봉분을 만들고 떼를 입혔다. 봉분 하단은 화강암 병풍석과 돌난간으로 감쌌다. 봉분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 혼유석, 망주석이 자리한다. 봉분의 한 단 아래인 중계에는 중앙에 장명등이 있고 문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마주하고 있다. 다시 한 단 아래인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있다. 영조 이후에는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졌다.
제향 공간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에서 박석을 깐 참도를 통해 정자각에 이르는 공간이다. 정자각은 제수를 진설하고 절을 올리는 건물이다. 정자각과 좌우 인접하여 비각과 수복방, 수라간 등이 있다. 진입 공간에는 금천교와 능묘 관리인이 근무하는 재실이 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설치한 인공 연못이 있다.
조선 왕릉은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검은 박석이 아름답게 놓인 길을 걸어 이르는 정자각은 절제된 건축 형태로 눈길을 끈다. 이와 함께 각 능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문무석인의 조형 등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들이다.
조선 왕릉의 특징 중 눈에 띠는 것은 왕릉이 ‘강(岡)’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 있다는 것이다. 강은 땅 속에 흐르는 생기를 모은 저장 탱크라는 의미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왕권의 시각적 과시를 위한 장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수 이론을 적용하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조건에 구조물을 맞추어나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도 조선 왕릉의 가치를 더해준다.
기록과 제례로 계승되는 문화유산
왕릉을 만드는 과정을 적은 왕릉 관련 기록들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새 임금이 의례를 갖추어 전왕의 국장을 치르고 능을 조성한다. 그리고 왕릉을 왕조의 성역이자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이에 관련한 다양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은 실록(實錄)과 의궤(儀軌), 능지(陵誌)이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실록에도 왕릉에 관련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지만 의궤와 능지를 별도로 만들어 왕릉 조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겨두었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장례에 관련한 <국장도감의궤>, <빈전도감의궤>, <산릉도감의궤>가 있다. <산릉도감의궤>에는 왕릉 조성을 전후로 논의된 내용, 각종 공문, 건축하는 데 소용된 물품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능지는 능역을 지키는 시행 지침 또는 규칙을 나열한 절목과 제례를 행할 때의 절차를 적어놓은 기록이다. 이는 능관(陵官)이 업무를 행하는 데 지침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책에는 능역의 위치 및 건물의 규모,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요소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조선시대의 왕실 역사는 물론 제례 문화에 대한 중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산릉도감의궤>에는 산릉을 조성하는 공정은 물론 흙을 나르는 데 참여한 단순노역자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어 이 의궤 자체만도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릉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한 왕조의 왕릉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제례 등을 통해 물리적 보존은 물론 무형적 문화 전통까지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 왕조가 망한 후 왕릉의 제례를 거행하기 어려웠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제례를 계속 이어와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왕릉에서는 매년 속절제(俗節祭)와 기신제(忌辰祭)를 지낸다. 속절제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날인 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과 청명(淸明)날에 지내는 제례이다. 또 기신제는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난 기일에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산릉 제례를 종묘 제례와 사직 대제와 같은 국가 차원의 제사로 정성껏 모셨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문화재청 조선왕릉 홈페이지
- 황인희, <역사가 보이는 조선왕릉기행>, 북21, 2010.
관련자료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옛무덤의 사회사』(장철수, 웅진출판사, 1995)
- 『역사가 보이는 조선왕릉기행』(황인희, 북21,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