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도예
제목 | 도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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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정욱 |
개념용어 | 토기,와질토기, 도질토기, 도기, 자기, 청자, 분청사기, 백자 |
1차 원고
한국은 도예의 선진국으로 각 시대마다 특색 있는 기법의 우수한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것은 소성 온도에 따라 대체로 토기, 도기, 자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삼국시대는 토기가 많이 제작되었다. 토기 중 850∼950℃에서 구워낸 와질토기는 원삼국시대의 취사와 저장 용기와 분묘 부장품, 제사 용기로 사용되었다.
1100℃ 이상에서 도질토기는 서기 3세기 후반에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여 4세기 초에 가야는 물론 백제와 신라에서도 생산되고, 이후 점진적인 기술의 발전을 맞이하면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생산되었고, 고려로 진입하면서 도기로 대체된다.
삼국시대의 토기 유물 중 기와, 치미, 벽돌 등 건축용 가공품에서 당대의 예술적 정취를 엿볼 수 있는 걸작들이 많이 발견된다.
고려시대에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청자가 생산되었다. 청자란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白土)로 만든 형태 위에 철분이 1∼3% 정도 들어 있는 장석질(長石質) 유약(釉藥)을 입혀 1,250∼1,300℃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이다.
이 때 유약의 색은 초록이 섞인 푸른색으로 비취색(翡翠色)과 흡사하고 투명에 가까우며 태토(胎土)의 색은 흐린 회색이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이 바탕이 된 녹청색이 되며 고려사람들은 이를 비색(翡色)이라 하였다.
고려청자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세계 도자사상 독보적인 상감기법이다. 그릇의 모양을 만들고 반쯤 말랐을 때 조각 칼로 음각을 하고, 음각한 부분에 백토나 자토 등을 넣어 문양을 만든 다음 말려서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청자유를 입혀서 재벌구이를 하는 방식이다.
청자의 원류인 중국에서도 고려청자의 명망은 높았다. 고려 청자의 기형은 식기, 다기, 주기, 제기, 불기, 문방구, 베게, 악기, 기와, 향합 등 다양하며, 그 시대 귀족들의 호사스런 생활상의 편린을 보여준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청자제작법의 변형인 분청사기와 백자가 함께 생산되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백자를 선호하였다. 세종시대부터 궁중의 그릇은 백자만을 사용하였다. 『세종실록』에 이미 명나라 사신이 백자를 요구한 사실이 여러 번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의 백자 제작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흥 조선의 도자기 수요는 매우 컸다. 왕실, 관아, 향교, 민가의 제기와 식기 등으로 백자가 애용되었다. 조선조 백자는 처음 경기도 광주와 관악산·북한산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광주에는 왕실에 백자를 만들어 바치는 중앙관요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 전국에 자기소 136개, 도기소 185개 등 321개의 가마가 있어 전국에 그릇을 공급했다.
상품백자는 우수한 태토와 유약을 선정하여 그릇을 빚고 이를 다시 갑(匣, 匣鉢, 개비)에 넣어 번조하여 그 형태와 질과 색이 아주 우수했다. 이를 갑번(匣燔)이라고 하였고, 왕실에서만 사용했다.
백자의 장식은 코발트(회회청)로 그림을 그려 구운 청화백자가 있고, 철사와 진사를 사용하여 검은색과 붉은색을 내기도 했다.
분청사기의 전성기에는 활달한 기법으로 장식적인 효과가 큰 걸작들을 많이 생산했으나 임진왜란 때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잡혀간 이후에는 생산이 끊어졌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 각지에서 가마를 열어 일본 도예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한국 전통도예가 담고 있는 미적인 성격과 특징이 무엇이며, 현재에는 어떻게 계승 발전되어오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의 청자는 한국의 도자산업이 도기질->자기질로 바뀌었으며 이는 생활문화의 발전을 의미한다. 청자가 당시의 생활상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구체적인 사례 또는 이미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중국에 이어 2번째의 청자 제작국이며 현재까지 청자의 종주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국과 차별화되는 한국 전통도예의 장점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도 필요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도예의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 |
• - 토기, 도기, 자기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시대적 변천과 함께 서술했으면. - 도기에 대한 설명은 없다. 자기와 도기에 대한 구분에 대한 설명을 해줄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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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한국은 도예의 선진국으로 각 시대마다 특색 있는 기법의 우수한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의 청자는 그 발생지 중국에서도 최고 품질을 인정 받을 정도로 우수했다. 오늘날 세계의 여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의 미술품 중에서는 도자기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것은 소성 온도에 따라 대체로 토기, 도기, 자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삼국시대는 토기가 많이 제작되었다. 토기 중 850∼950℃에서 구워낸 와질토기는 취사와 저장 용기와 분묘 부장품, 제사 용기로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의 토기 유물 중 기와, 치미, 벽돌 등 건축용 가공품에서 당대의 예술적 정취를 엿볼 수 있는 걸작들이 많이 발견된다.
1100℃ 이상에서 도질토기는 서기 3세기 후반에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여 4세기 초에 가야는 물론 백제와 신라에서도 생산되고, 이후 점진적인 기술의 발전을 맞이하면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생산되었고, 고려로 진입하면서 도기로 대체된다.
고려시대 들어와서 도자기는 생활용기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청자가 이 시대에 생산되었다. 청자란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白土)로 만든 형태 위에 철분이 1∼3% 정도 들어 있는 장석질(長石質) 유약(釉藥)을 입혀 1,250∼1,300℃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이다.
이 때 유약의 색은 초록이 섞인 푸른색으로 비취색(翡翠色)과 흡사하고 투명에 가까우며 태토(胎土)의 색은 흐린 회색이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이 바탕이 된 녹청색이 되며 고려사람들은 이를 비색(翡色)이라 하였다.
고려청자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세계 도자사상 독보적인 상감기법이다. 그릇의 모양을 만들고 반쯤 말랐을 때 조각 칼로 음각을 하고, 음각한 부분에 백토나 자토 등을 넣어 문양을 만든 다음 말려서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청자유를 입혀서 재벌구이를 하는 방식이다.
청자의 원류인 중국에서도 고려청자의 명망은 높았다. 고려 청자의 기형은 식기, 다기, 주기, 제기, 불기, 문방구, 베게, 악기, 기와, 향합 등 다양하며, 그 시대 귀족들의 호사스런 생활상의 편린을 보여준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청자제작법의 변형인 분청사기와 백자가 함께 생산되었다. 왕 실에서는 백자를 선호하여 세종시대부터 궁중의 그릇은 백자만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의 도자기 수요는 매우 컸다. 왕실, 관아, 향교, 민가의 제기와 식기 등으로 백자가 애용되었다. 조선조 백자는 처음 경기도 광주와 관악산·북한산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광주에는 왕실에 백자를 만들어 바치는 중앙관요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 전국에 자기소 136개, 도기소 185개 등 321개의 가마가 있어 전국에 그릇을 공급했다.
상품백자는 우수한 태토와 유약을 선정하여 그릇을 빚고 이를 다시 갑(匣, 匣鉢, 개비)에 넣어 번조하여 그 형태와 질과 색이 아주 우수했다. 이를 갑번(匣燔)이라고 하였고, 왕실에서만 사용했다.
백자의 장식은 코발트(회회청)로 그림을 그려 구운 청화백자가 있고, 철사와 진사를 사용하여 검은색과 붉은색을 내기도 했다.
분청사기의 전성기에는 활달한 기법으로 장식적인 효과가 큰 걸작들을 많이 생산했으나 임진왜란 때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잡혀간 이후에는 생산이 끊어졌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 각지에서 가마를 열어 일본 도예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