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종묘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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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1일 (화) 03:44 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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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 제례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태조, 목조, 익조, 탁조, 환조, 순종, 이왕직,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세자, 문무백관, 종친, 영의정,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세종
장소/공간 종묘, 정전, 영녕전
사건 일제강점기, 광복
개념용어 신실, 신위, 협실, 신주, 납일, 취위, 영신, 전폐, 신관례, 진찬,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철변두, 송신, 망료, 종묘 제례악, 정대업 · 보태평,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 구장면복, 중요무형문화재,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세계무형유산



원고

종묘 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종묘는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왼편에 두었다. 
종묘의 중심 건물 정전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한 분씩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태조가 맨 왼쪽, 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정전 서편에 있는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으로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정전과 영녕전은 1836년 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 동지 뒤의 셋째 말일)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 · 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 · 아헌관 · 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

종묘 제례는 종묘 제례악(宗廟祭禮樂)과 춤에 맞추어 진행된다. 종묘 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정대업 ·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 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 당피리 · 축 · 편종 · 장고 · 젓대 · 방향(方響) · 해금 · 태평소 · 대금 ·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 용(龍) · 화충(華蟲 : 꿩) · 종이(宗彛 :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 조(藻 : 수초) · 화(火) · 분미(粉米 : 쌀알) · 보(黼 : 도끼) · 불(黻 :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종묘 제례와 종묘 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度’자는 ‘헤아릴 탁’이라는 음도 있어 탁조라고도 함. ● 영녕전 1991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가 모셔져서 총 34위임.(종묘 홈피 참조)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위키백과

관련자료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밑 줄 친 부분은 종묘 제례를 설명할 때 필요한 내용이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개설]부분의 내용과 일치한다. 게다가 집필된 원고의 전체 내용은 종묘제례를 이해하는데 도움은 되지만 종묘제례를 설명하는 세부 내용과 글의 전개 방식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종묘제례의 설명과 차별성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일부 내용을 발췌 또는 인용하였을 경우 이에 대한 출처 표시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종묘제례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
-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탁조가 아니고 도조입니다.

- 정전 뒤편에 있는 영녕전은 → 서쪽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듯
- 기울기가 가팔라 → 다른 표현 없을까요? 기울기가 심해서?
- 조선의 왕은 총 27명인데, 정전에는 19명의 왕과 30명의 왕비, 영녕전에는 16명의 왕과 17명의 왕비가 모셔졌는데, 각각 다른 전에 구별하여 모신 기준을 정리해주세요. 그리고 4대 선조는 어디에 모셨는지?
- 종묘 건축의 특징은 계속 증축되었다는 것, 그럼 언제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인지도 간략히 적어주었으면.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
① 황인희의 글은 영녕전에 33명의 신주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황정욱 글에는 34명의 신주가 있다고 합니다. 확인해서 수정해주세요.
②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서거하면 먼저 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③ 종묘의 위치 : 종묘의 건축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왼편에 두었다.
④ 황인희는 종묘제례의 순서를 자세히 썼는데, 황정욱은 이를 간략하게 3절차로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이것 중 어느 것이 좋은지 다시 생각해서 정리하였으면 한다.

⑤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이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