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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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1월 20일 (월) 01:0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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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원고

고구려 및 백제와 함께 삼국의 하나인 신라는 오늘날의 경주 주변에서 진한 연맹체에 속한 작은 성읍 국가로 시작되었다. 나라는 박혁거세에 의해 세워졌지만, 통치는 대대로 주로 경주 김씨 일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라는 지역 세력을 통합하면서 성읍 국가에서 왕국으로 성장하였으며, 4세기 무렵에는 진한을 복속시켰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작고 가장 발전이 뒤쳐진 나라였음에도 국력을 신장시켜 결국에는 다른 두 왕국을 복속시키게 된다. 532년에는 이웃의 가야 연맹을 복속시켜 그 영토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과 668년에 각각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킨다. 이때로부터 신라는 한반도의 3/4 지역을 통일한 나라로서 통일 신라로 불리게 되며, 이후 북쪽에는 발해가 들어서게 된다. 10세기 초에 이르러 내전이 일어나면서 신라는 분열되었다가 최종적으로 고려로 계승된다.

삼국 가운데 중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위치로 인해 신라는 독특한 통치 체제를 발전시켰다. 그 하나가 골품제인데, 특정인만이 세습을 통해 권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 제도에서는 모계 혈통도 중시되어, 왕실 여성은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신라의 역대 왕 중에는 세 명의 여왕이 있는데, 특히 선덕여왕(?~647)은 강력한 지도력으로 유명하다. 또 하나의 독특한 신라 귀족 제도로서 일단의 귀족 청년들이 무예와 풍류와 불교를 수련하는 화랑 제도가 있었다. 불교는 삼국 중 가장 늦게 신라에 전래되었지만, 곧바로 국교로 공인되며 통치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하여 풍부한 불교 유산을 낳게 한 원천이 되었다. 오늘날 신라의 수도 경주 주변의 많은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한편 잘 보존되어 있는 많은 신라 왕릉에서 금관을 비롯한 여러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1. “경주 주변에서” → “경주 일대에서”
  * 신라는 경주 주변 국가가 아니라 경주 일대에 있던 국가였음.

2. “통치는 대대로 주로 경주 김씨 일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 “통치는 경주의 주도 세력이었던 김씨, 석씨, 박씨의 엽합으로 이루어지고, 그들 일족이 번갈아 가며 왕위에 올랐다.”

3. “진한을 복속시켰다.” → “진한의 여러 소국들을 복속시켰다.”

  * 진한은 나라가 아니고 연맹 지역임.

4. “660년과 668년에 각각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킨다.”

 → “660년과 668년에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차지하였다.” *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에 복속하지 않았음.

5. “세습을 통해 권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 “출생 신분에 따라 진출할 수 있는 관료의 등급을 제한해 두고 있었다.” * 골품제는 아버지의 관직을 그대로 세습하는 것이 아님.

6. “왕실 여성은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 → “왕실 여성은 왕위계승과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

  * 신라 왕실의 모계는 왕위계승에 중요한 요소였지만, 여왕 아닌 여성이 국정에 큰 영향을 끼친 경우는 많지 않음.
7. “불교는 ..... 곧바로 국교로 공인되며” → “불교는 ..... 우여곡절 끝에 국교로 공인되며”



수정 원고

  • 제목: 동해의 태양이 비추는 나라 신라

신라는 오늘날 경주 일대에서 진한 연맹체에 속한 성읍국가로 출발하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건국설화에 따르면 신라는 박혁거세에 의해 세워졌으나, 동시에 석탈해와 김알지 등의 출현을 전하는 설화가 있고, 이후 이들은 신라의 왕위를 번갈아 이어 받는 존재들, 또는 그 조상이 된다. 따라서 신라의 통치는 당시 경주의 주도 세력이었던 박씨와 석씨, 그리고 김씨의 연합으로 운영되었으며, 그들 일족이 번갈아 가며 왕위에 올라 통치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신라의 발전단계가 연맹체 단계의 국가임을 말해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경주에서 벗어나 낙동강을 따라 경상도 전역으로 지역 세력을 통합해 가던 신라는 대략 4세기경에서부터 왕권을 바탕으로 통치제도를 정비해가며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신라는 진한의 여러 소국들을 복속 시키며 진한 연맹체의 전 영역을 통합할 수 있었다.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 백제와 가야의 압박 속에 고구려에 의지하여 대외적 안정을 꾀하였던 신라는 한때 고구려군을 자국 내 주둔시키며 그 영향력에 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후반 이후 차츰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더니 6세기 접어들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어느덧 고구려와 백제를 압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532에는 강력한 이웃 세력이었던 가야 연맹을 복속시켜 그 영토를 차지하고 낙동강 하류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연합해 한강유역 전체를 차지해 중국과 바닷길을 통해 직접 교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 시기 신라는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고대국가 단계로 올라서는데 성공한 신라는 6세기 후반부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발전이 늦었으나,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중국의 분열을 통일하고 등장한 당나라와 연합하여 나당동맹을 체결한다. 6세기 후반 이후 신라가 전성기를 맞아 위세를 떨치자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동맹을 체결하고 외부의 돌궐과 일본까지 연계해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이들에 맞서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나당동맹군이 결성되었고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당초 대동강을 기준으로 그 남북을 당나라와 신라가 각각 분할하기로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신라는 당나라와도 일전을 치룬다. 영토와 인구의 규모가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제국 당나라와의 나당전쟁을 매소성과 기벌포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끝내 이겨 격퇴시켰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한반도 3/4에 달하는 넓은 영역을 차지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삼국 통일한 8세기 이후 통일신라로 불리우며 발전해간 신라는 이후 대동강 이북에서부터 만주지역의 옛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고 등장한 발해와 더불어 남북국 시대를 이끌었다. 10세기 초 쇠락해진 끝에 고려로 계승될 때까지 신라는 성숙하고 높은 수준의 문화를 꽃피우며 번영을 누렸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중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위치로 인해 자신만의 독특한 통치 체제와 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 고유한 제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골품제도이다. 크게 ‘골’계급과 ‘품’계급으로 구성되는 이 제도는 왕위 계승이 가능한 ‘성골’과 최상층 지배계급에 해당하는 ‘진골’ 이외에 6두품부터 1두품까지 순차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계급간 이동이 불가능하며 복식과 주택의 규모 등 다양한 측면에서 제약이 있었다.

이처럼 지배계급 안에서 그들끼리 폐쇄적인 신분제도를 마련해 운영하였다는 점은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흥미로운 모습이다. 아마도 골품제도는 신라가 정복전쟁으로 주변 나라를 복속해가는 과정에서 그 대상의 크기에 따라 신라 내 지배계층으로의 차등 편입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분제도인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바로 화랑제도이다. 귀족 청년들이 모여 무예와 풍류, 그리고 불교를 수련하던 화랑제도는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골품제도의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도 신라의 청년들은 골품의 제약을 넘어 함께 화랑으로 묶일 수 있었으며, 화랑을 통해 강조된 국가관과 상무정신은 곧바로 통일 전쟁에서 큰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1천년의 역사를 거치며 발전했던 신라는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한 많은 불교문화유산 뿐 아니라 수도였던 경주 주변에 많은 유적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왕릉으로부터 출토된 금관과 기타 다양한 유물들 또한 신라문화의 특성을 말해주면 잘 보조되고 있다.

교열본

  • 제목: 동해의 태양이 비추는 나라 신라

박·석·김의 연맹체

신라는 오늘날 경주 일대에서 진한연맹체에 속한 성읍국가로 출발하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건국설화에 따르면 신라는 박혁거세가 세웠으나, 동시에 석탈해와 김알지 등의 출현을 전하는 설화가 있고, 이후 이들은 신라의 왕위를 번갈아 이어 받는 존재들, 또는 그 조상이 된다. 따라서 신라의 통치는 당시 경주의 주도 세력이었던 박씨와 석씨, 그리고 김씨의 연합으로 운영되었으며, 그들 일족이 번갈아 가며 왕위에 올라 통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신라의 발전단계가 연맹체 단계의 국가임을 말해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경주에서 벗어나 낙동강을 따라 경상도 전역으로 지역 세력을 통합해 가던 신라는 대략 4세기경부터 왕권을 바탕으로 통치제도를 정비해가며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신라는 진한의 여러 소국들을 복속 시키며 진한연맹체의 전 영역을 통합할 수 있었다.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 백제와 가야의 압박에 신라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대외적 안정을 꾀하였다. 대규모 군을 파견하여 백제·가야·왜 동맹군을 물리친 고구려군 일부는 신라에 계속 주둔하며 내증을 간섭하였다.

최종적 승리

그러나 5세기 후반 이후 차츰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더니 6세기 접어들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어느덧 고구려와 백제를 압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532에는 강력한 이웃 세력이었던 가야 연맹을 복속시켜 그 영토를 차지하고 낙동강 하류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연합해 한강유역 전체를 차지해 중국과 바닷길을 통해 직접 교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 시기 신라는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성공적으로 고대국가 단계에 올라선 신라는 6세기 후반부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발전이 늦었으나,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당전쟁 승리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다

신라는 중국의 분열을 통일하고 등장한 당나라와 연합하여 나당동맹을 체결한다. 6세기 후반 이후 신라가 전성기를 맞아 위세를 떨치자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동맹을 체결하고 외부의 돌궐과 일본까지 연계해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이들에 맞서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나당동맹군이 결성되었고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당초 대동강을 기준으로 그 남북을 당나라와 신라가 각각 분할하기로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신라는 당나라와도 일전을 치룬다. 영토와 인구의 규모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 거대제국 당나라를 매소성과 기벌포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마침내 격퇴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한반도 3/4에 달하는 넓은 영역을 차지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신라만의 신분제 골품제도

삼국을 통일한 8세기 이후 통일신라로서 발전해간 신라와 이후 대동강 이북에서부터 만주지역의 옛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면서 등장한 발해는 한반도에서 남북국시대를 이끌었다. 10세기 초 쇠락해진 끝에 고려로 계승될 때까지 신라는 성숙하고 높은 수준의 문화를 꽃피우며 번영을 누렸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중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위치로 인해 자신만의 독특한 통치 체제와 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 고유한 제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골품제도이다. 크게 ‘골’과 ‘품’계급으로 구성되는 이 제도는 왕위 계승이 가능한 ‘성골’과 최상층 지배계급에 해당하는 ‘진골’ 이외에 6두품부터 1두품까지 순차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계급 간 이동이 불가능하며 복식과 주택의 규모 등 다양한 측면에서 제약이 있었다.

이처럼 지배계급 안에서 그들끼리 폐쇄적인 신분제도를 마련해 운영하였다는 점은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흥미로운 모습이다. 아마도 골품제도는 신라가 정복전쟁으로 주변 나라를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그 대상의 지위에 따라 신라 내 지배계층으로의 차등 편입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분제도인 것으로 보인다.

화랑 정신

또 하나는 바로 화랑제도이다. 귀족 청년들이 모여 무예와 풍류, 그리고 불교를 수련하던 화랑제도는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골품제도의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도 신라의 청년들은 신분의 제약을 넘어 함께 화랑으로 묶일 수 있었으며, 화랑을 통해 강조된 국가관과 상무정신은 곧바로 통일 전쟁에서 큰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1천년의 역사를 거치며 발전했던 신라는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한 많은 불교문화유산 뿐 아니라 수도였던 경주 주변에 많은 유적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왕릉에서 출토된 금관과 기타 다양한 유물들 또한 신라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