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다문화사회 외국인 거주자 2백만 시대
제목 | “같이 갑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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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신현덕 |
개념용어 | 혼혈아 향가 색목인 단일민족 쇄국정책 세계화 |
원고
다문화 사회 외국인 거주자 200만 시대 “같이 갑시다[1]
한국인은 그들이 단일민족이라는 말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들은 이 말을 순수한 혈통이라는 뜻으로 썼고, 때에 따라서는 남을 배척하는 때 이용했다. 한국에서 다문화가족은 혼혈아 국제결혼 등으로 부르며 차별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그간 다문화가족 출신은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지키는 국방의 의무에서 조차 제외되었었다.
그러다가 20세기말 한국이 세계화에 나서며 국내로 이주하는 근로자와 국제결혼 등이 늘어나면서 다문화 가족을 국가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또 하나의 동력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책은 조선 말기에 외국인을 배척했던 쇄국정책을 연상시켰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열강의 식민지 정책으로 아시아가 무너질 때 조선은 국가를 지키는 방안으로 문호를 닫아걸고 외국의 접근을 차단했다. 조선은 국가를 개방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안보정책이라고 생각, 서구의 앞선 문물 수용을 꺼렸고, 차단했던 것이다.
조선은 중국을 제외한 서구 국가를 외세라 여겼고, 그들과 교류는 덕이 될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조선은 서구열강의 문물을 중국을 통해 중국인의 눈으로 검증한 것을 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조선은 나라를 열어 통상을 하자는 프랑스 미국 등과 전쟁을 했고, 앞선 서구의 과학 문명을 받아들이는데 주변국가보다 뒤졌다.
하지만 한반도가 오래전부터 외국과 교류했다는 기록은 많다. 신라의 향가 ‘처용가’에 등장하는 남자도 외국인이며, 고려 시대 ‘쌍화점’에는 아예 색목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외국인을 받아들여 성(姓)도 내려 주고 그들에게 벼슬도 주었다. 개국공신에도 중국의 한족이 들어있다. 이뿐 아니다. 만주와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여진 말갈 몽골 등등의 다른 종족의 피가 일부에서 흐르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곧바로 한민족으로 동화되었다. 이런 상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바꾸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16개 나라가 파병해 한국 국토와 자유와 인권을 지켰다. 그 후 남북분단으로 대한민국은 섬나라처럼 외국과 단철되었다가 경제가 발전하면서 저절로 문호가 열렸다. 한국은 1980년대 문호를 활짝 열었고, 근로자, 무역상, 유학생, 서비스 산업 종사자 등이 해외로 쏟아져 나갔다. 동시에 외국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는 외국인들이 몰려 왔다. 처음에는 일제 강점기 때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쫓겨 나가 살던 동포들이 돌아왔고, 뒤이어 그 나라 사람들이 묻어 왔다. 산업연수생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한국에 정착했고, 국적까지 취득하고 있다.
외국에서 온 이주 근로자들은 어느 국가, 어느 사회에서나 그러하듯 한국인들이 꺼리던 육체노동분야로 파고들었고, 지금은 그 분야의 대세를 이루었다. 여기에 가세하여 정부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으로 외국인 근로자의 입국을 허용했다. 외국인 근로자를 연수시키는 동시에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주 외국인이 2015년 현재 불법체류자를 포함해 200만 명을 넘었다.
우리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2006년 39525명이던 것이 2015년에는 158,064명으로 대폭 늘었으며, 결혼으로 인한 경우가 가장 많다. 이는 급격한 도시화로 젊은 여성들이 도시로 대거 이주하며 일어난 2차문제이다. 농촌에 남은 미혼 남성들이 배우자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촌지역의 혼인율이 떨어졌고, 혼인의 감소는 자연스럽게 출산력의 저하를 가져와 많은 농촌 학교들이 문을 닫았다. 1990년대 들어 일부 농촌 총각들이 만혼 혹은 미혼의 문제를 국제결혼을 통해 해결하기 시작했는데,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 거주하던 여성과의 국제결혼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다문화가정이 2015년 278,036 가구로 크게 늘었다. 이들 가정에서 태어난, 특히 농촌지역에서만도 2020년이 되면 다문화 자녀가 13만 명 정도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19세 미만 농가 인구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다문화 가정 내에서는 인종, 언어, 문화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다문화 자녀가 태어나 자라면서 향후 농촌의 가족, 학교, 지역 등에 장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전통적인 단일혈통에 의한 민족주의 이념을 뛰어 넘는 민족 정체성 확립이 시급하다.
주석
- ↑ 한국은 이제 다문화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다문화 가족과 함께 살아야만 한다.
출처 및 관련자료
관련자료
- 통계청
- 표준국어대사전
- 조선왕조실록
- 산업연수생현황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이 글의 대상 독자는 외국인임을 감안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다문화 현상을 포괄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혈통주의 비판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유입과 국제결혼 등으로 급속하게 다문화 사회로 변화한 것은 불과 20여년에 지나지 않으며 현재 이들을 포용하기 위한 다양한 법과 제도를 갖추어 나가고 있으므로 이를 부각할 필요가 있다. 기사 제목으로 제시한 “같이 갑시다”는 다문화가 시작되던 초기에는 의미있게 통용될 수 있으나, 한국 사회는 오늘날 이미 다문화사회가 되었으므로 다른 기사 제목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 |
• - 단일민족 및 다문화가정에 대한 과거의 생각, 현재 생각의 변화 및 정책에 대해서도 서술 - 현재 다문화사회가 되게 된 상황을 시대 순서별 그리고 상황별로 나누어 설명했으면. 외국인 유입에 대해 표를 만들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
- 농촌 총각들이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 것이 2000년대에 들어와 확산되었나? 외국인과 결혼하는 비율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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