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과 신라: 신라 문화의 독자성과 당나라의 영향
당과 신라: 신라 문화의 독자성과 당나라의 영향
한반도에 끼친 중국의 영향
고대 한반도의 정치세력은 직접 간접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동북아시아의 강자 고구려는 분열된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경쟁하였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당나라의 집중적인 견제와 공격을 받았다. 백제와 신라는 때로는 중국과 경쟁하면서 중국의 정치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였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한때의 동지였던 당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두 나라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충돌하였고 결정적인 두 차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신라는 한반도의 첫 통일국가가 되었다.
신라와 당나라
신라는 한때는 연합국으로 교류하고, 또 한때는 적으로 오랜 시간 당과 전쟁을 치르면서 중국의 정치제도를 눈여겨보았다. 통일 후 신라는 적극적으로 당의 제도를 채용하였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당의 막강한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는 강력한 왕권으로 새로운 통일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신라 왕실의 의도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당의 행정기구와 비슷하게 중앙정치제도를 정비했고, 유교 정치 이념을 강조하였다. 유학교육을 위해 ‘국학(國學)’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학생들이 익힌 유교 경전 지식에 따라 관리로 선발하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제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유학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인해 신라의 많은 인재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도 하였다.
의상대사 표준영정(손연칠作, 1991년)[1]
당나라는 이러한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과거시험을 치르고 우수한 성적을 낸 유학생은 당나라의 관리로 채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최치원(崔致遠, 857-?)으로, 그가 지은 시문집 『계원필경(桂苑筆耕)』의 글은 당나라 문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유학자뿐 아니라 승려들 중에도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왕족이었던 의상(義湘, 625-702)이 당나라에 가서 당나라 승려들과 교류하고 돌아와 신라에 ‘화엄종’을 확립한 바 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비롯한 많은 중국 도시에는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역인 ‘신라방’, 신라인을 위한 절 ‘신라원’, 신라인을 위한 숙소 ‘신라관’이 설치되어 있는데, 당시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9세기에는 한반도 남쪽 바다에 ‘청해진’이라는 해상무역의 거점이 존재할 정도였다. ‘청해진’은 해적으로부터 상선을 보호하면서 당나라와 신라뿐 아니라 일본 등 동아시아 일대의 해상 무역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당나라는 ‘비단길’을 통해 인도와 이슬람제국과도 교류하고 있었다. 신라도 당나라를 통해 이들 지역과 왕래를 하였다. 신라의 승려 혜초(慧超, 704-787)는 당나라를 넘어 인도까지 다녀와 생생한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고, 신라의 고분에서 페르시아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종종 발견되고 있다.
신라인들이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들여왔지만, 그에 대한 신라 고유의 문화적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다. 신라의 지식인 중에는 신라만의 문화를 고집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 예로 유학의 영향을 보여주는 ‘독서삼품과’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골품제는 혈연과 출생에 따라 개인의 사회활동이나 정치활동의 범위를 규제하였는데, 관료의 승진도 골품에 따라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8~9세기 최고의 신분인 ‘진골’ 귀족이 높은 관직을 차지하며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고 제2신분인 ‘6두품’은 예술과 학문, 종교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원효와 설총
신라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 승려 원효(元曉, 617-686)도 ‘6두품’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불교철학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불교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신라를 넘어서 세계 불교사에 큰 영향을 미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원효에 대해서는 수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원효가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어둠 속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모르고 마신 후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모르고 마셨을 때는 맛좋은 물이었는데 날이 밝은 후 자신이 마신 것이 해골에 담긴 물임을 알고 게워낸 후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수행을 계속하여 독자적인 불교철학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원효의 아들로 알려진 설총(薛聰, 655-?)은 대표적인 유학자인데, 한자를 이용하여 고대 한국어를 표기할 수 있는 ‘이두(吏讀)’라는 문자 표기체계를 정리하였다. 신라는 독자적인 문자를 갖지 못하여 한자를 이용하여 글을 적었지만 한국어는 어순이나 발음, 표현 방식 등이 중국어와 다르기 때문에 한자를 사용하여 표기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한자를 활용하되 한국어를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는 ‘향찰’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설총은 ‘향찰’의 표기방법을 집대성하여 ‘이두’를 만든 것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신라의 고유한 시 ‘향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표기되었다.
원효와 설총 두 부자의 이야기는 신라의 문화가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독자성을 잃지 않고 풍부한 문화를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