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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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1월 8일 (수) 09:02 판 (한국의 대표적인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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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

종교로서의 유교

유교는 ‘인(仁)’이라고 하는 덕목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확장해 나아가는 것을 인간의 도덕 규범으로 가르치는 종교이다. ‘인’은 인간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연민의 마음이다. 기독교와 달리 ‘신’이라고 하는 초월적 존재나 ‘천국’과 같은 내세를 인정하지 않지만, 인간의 태생적 도덕 가치와 그것을 실현한 성현들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기조로 하는 유교는 ‘최고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종교’의 하나로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한국 유교의 기원과 발전

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한 종교이자, 철학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외래 종교보다 먼저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유교가 언제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상징적인 이야기로, 중국 은나라(慇, B.C.1600년경~B.C.1046년경)가 멸망할 때 기자라는 인물이 고조선에 망명하면서 유교를 전파하였다고 전한다. 이것은 역사적 근거를 찾기 어려운 전설이지만, 한반도의 거주민들은 고조선으로 불리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중국문명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고,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기록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유교 발전의 뿌리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유교적인 사고와 제도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부터이다. 세 나라는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 사이에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일을 완수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교 경전에 기록된 규범들이 국가 운영의 모델로 응용되기 시작했다.

통일신라(668~935)와 고려(918~1392) 시대를 거치는 동안 유교는 국가를 경영하는 통치술로서의 기능을 굳건히 하였다. 국정을 담당할 관인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세워졌고, 이곳에서 『논어(論語)』, 『효경(孝經)』, 『예기(禮記)』 등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 의례도 국가 행사로 치뤄졌다. 하지만 이 때까지는 유교보다 불교가 더 널리 신앙되는 종교였기 때문에 유교의 종교적 기능은 제한적이었다. 종교로서의 역할보다는 지배계급의 통치술과 통치사상, 즉 ‘현실 사회를 잘 이끌어가는 지혜와 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한국 유교의 전성기

조선시대(1392~1910)가 시작되면서, 유교적 지식인이 주축이 된 새로운 지배계층은 유교를 국가의 유일한 통치 이념으로 천명하고, 지배계급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생활 양식까지도 유교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수도에 ‘성균관(成均館)’이라는 최고 교육기관을 두고, 모든 고을에 ‘항교(鄕校)’라는 지역 학교를 설치하였다. 이 모든 학교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졌고, 학생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성현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키웠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각 지역의 유교 지식인들이 사립학교 성격의 ‘서원(書院)’을 설립하였다. 향교보다 더 많이 세워진 이곳 서원에는 그 지역과 연고가 있는 선배 학자들을 제향하는 사당이 설치되어, 그들을 숭모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크고 작은 제향 의식이 끊임없이 행해졌다.

이와 같은 시스템 위에서 조선은 유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르는 예법과 풍속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시책을 펼쳤으며, 그것을 통해 500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국가의 통치 기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유학자

조선 사회를 이끈 수많은 유교적 지식인 가운데 이황(李滉, 1502~1571)과 이이(李珥, 1537~1584)라는 인물이 있다. 이들은 현대 한국의 화폐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을 정도로, 한국 지성사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는 인물들이다. 이황과 이이는 모두 우주의 원리인 리(理)가 인간의 도덕성인 인(仁)의 원천이라는 ‘성리학(性理學)’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황은 모든 인간이 주체적으로 그 인을 실천하고 확장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고, 이이는 그 인의 실현이 물질적인 기(氣)의 세계에서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그가 도덕적 행위의 주체이고, 또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임을 알게 하였다. 이것은 유교 윤리로 사회를 이끌고자 했던 조선의 통치 이념에 부합하는 교설이었고, 그 때문에 이들은 국가적 스승으로 존중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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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의 유교

종묘, 서원, 향교 등 한국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수많은 문화유산과 역사 기록은 이 나라가 오랫동안 유교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유교 국가였음을 알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인들 가운데 유교를 자신이 믿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 유교가 쇠퇴한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시대의 유교는 현세중심적인 종교로서, 그 사회의 통치제제나 예속과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신분 제도가 사라지고, 사회적 성취의 기준이 달라진 상황에서 유교는 ‘최고의 가르침’으로서의 지위를 잃을 수밖에 없었고, 외형적으로 유교를 신앙하는 모습은 더 이상 한국 사회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의 가정생활과 학교교육의 곳곳에서 이들이 전통적인 규범에 영향받는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가족, 친지, 사제, 직장 상사‧동료 사이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예의와 염치는 다분히 유교적 전통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조상에 대한 제례는 한국의 많은 가정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람직한 부모의 모습, 교사의 자세, 심지어는 정치인의 인격까지도 유교적 인간관이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유교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종교로서보다는 문화적 전통이자 국민들 대다수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삶의 규범으로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