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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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4년 10월 13일 (일) 16:3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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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

개국에 즈음한 당면 과제

이성계가 개창한 조선왕조는 1392년에 성립되어 약 5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성계고려 말 많은 공을 세운 명망 높았던 장군으로 ‘위화도회군’을 통해 권력을 잡은 뒤 혼란한 정세를 평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고려 말 사회 개혁을 주도했던 성리학자 집단인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정치를 주도해 나갔다.

당시 가장 주요한 관심사는 첫째, 고려왕이었던 우왕의 혈통에 대한 문제, 둘째,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토지개혁, 셋째,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권문세족들을 제거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 넷째,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 중심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 다섯째, 여러 폐단을 야기한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사회 질서를 수립하는 것 등이었다.

정도전을 축출하고 왕이 된 태종

경복궁 근정전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한때 신진사대부들은 둘로 나뉘기도 하였다. 이 때 이성계는 그 반대파들을 제거하면서 마침내 조선 건국에 찬성하는 신진사대부를 위주로 새로운 왕조 조선을 개창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신임 속에 중국의 동의를 얻어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하고 도읍을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정했으며, 왕궁인 경복궁을 짓고 새나라 조선의 여러 국가제도들을 마련해 가며 정치를 이끌어갔다.

그러자 신하인 정도전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상황에 대해 조선 건국에 공이 많았던 몇몇 왕자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왕위에 올라 태종으로 등극하였다.

태종이 다지고 세종이 꽃피운 태평성대

세종대왕 동상(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태종은 국왕이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모든 국정을 자신이 직접 관장하기 위해 ‘6조 직계제’를 시행했으며, 왕권에 방해가 되는 외척세력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때문에 그 토대 위에 등극한 세종은 다져진 왕권 위에서 찬란한 문화정치를 꽃 피울 수 있었다.

성리학이 꿈꾸는 이상정치를 실현하는 데 집중하였던 세종은 신하들이 마음껏 정치를 논의할 수 있도록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해 국왕의 권력을 신하에게 나눠주었다. 또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도록 각종 농사기술을 기록한 책들을 보급하고 측우기와 물시계 등의 발명을 장려하였다. 특히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한글을 창제하여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글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시에 북쪽으로 4군과 6진을 개척해 영토를 확장하였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줄곧 세종과 그 아들인 문종의 치세를 제일가는 태평성대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사림과 훈구의 갈등, 사화

어린 조카를 제거하고 왕이 된 세조 이래로 한동안 조선은 정치적 혼란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여러 정치적 격변 속에 성장한 공신 세력들은 자신의 위세를 이용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 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선의 지배계층에서 대두되면서 사림이 등장하였다.

훈구라 불리던 공신 세력들을 비판하며 조선의 혁신을 주장했던 사림은 여러 현안에서 그들과 자주 충돌하였다. 급기야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던 훈구세력의 반격으로 정치적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4대 사화’이다.

사림에 대한 훈구의 박해는 대략 조선 중기 명종 때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그들은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성리학 지식인들을 기르는 교육에 매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조 이후 훈구세력들이 모두 제거되면서 사림은 어느덧 조선의 정치를 주도하는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당쟁의 와중에 맞은 임진왜란

선조 즉위를 계기로 사림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성리학 사회를 만들고자 다양한 목소리들을 냈다. 하지만 각 학파들의 입장에 따라 정치적 견해에 차이가 있었고, 이것은 다시 정파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것이 곧 ‘당쟁’이다.

당쟁은 중앙정치의 혼란으로 이어졌으며, 선조 당시 직면했던 다양한 문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게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었으며, 이것은 결국 임진왜란으로 이어졌다.

임진왜란조선이 건국된 이후 겪었던 가장 큰 전란이었으며, 조선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대략 조선의 인구와 토지의 1/3이 사라졌으며, 도읍지 한양의 궁궐이 불길에 휩싸이고 각종 문서와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일본군의 침략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던 조선 정부의 무능함은 조선의 국토와 국민 모두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명군의 참전으로 전기를 마련한 조선의 관군은 이순신(李舜臣, 1545~1598)권율(權慄, 1537~1599) 등의 활약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여기에는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승병들의 활약도 대단히 컸다. 1598년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전쟁은 막을 내렸으나, 그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무너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두 번의 호란이 남긴 상처

전쟁이 끝나고 선조에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내부적으로 여러 전후 복구 사업들을 추진하였다. 밖으로는 새롭게 성장하는 여진족, 즉 후금을 의식하면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균형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중립적인 외교를 펼쳐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며 후금을 배척하는 세력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거기에 정통성 논란이 계속되다가 결국 어머니 인목대비와 동생 영창대군을 유폐하거나 죽인일로 정변이 일어났다. 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왕위를 잃고 인조가 즉위하였다. 바로 ‘인조반정’이다.

인조는 명나라 일변도의 정책을 펼치며 후금을 적대시하였다. 더욱 강성해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에 두 차례 쳐들어온다. 이른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조선은 청나라 군대를 막아내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끝내 지금의 서울 송파에 있는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청나라와 강화를 체결한다. 이때부터 조선은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외교질서에 편입되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즉 양란을 거치며 조선은 피폐해진 사회를 회복시키는 한편 무너진 질서와 기강을 다시 바로잡는 데 주력한다. 물론 이를 주도한 것은 바로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였다. 그들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걸고 조선 사회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다. 효종 대에 와서는 급기야 청나라에 대한 복수전을 기획하면서 이른바 ‘북벌’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르네상스

정조 일러스트

하지만 본격적인 부흥기는 조선 후기 숙종과 영조, 그리고 정조의 출현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숙종 이후 영조정조에 이르는 대략 120년간의 정치에서 조선은 다시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통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영조는 그를 위해 ‘탕평’이라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탕평책의 목적은 학문적 배경에 따라 정치적 견해와 입장을 달리하며 대립하던 신하들을 강력한 왕권으로 제어하는 것에 있었다. 그 결과 한동안이나마 국왕의 권력은 강화되었고 다시금 정치적인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토대 위에서 대를 이은 국왕들은 조선 사회를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정책들을 과감하게 시도하였다.

세도정치 등장

그러나 정조가 갑자기 사망한 뒤 그 아들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그러한 균형은 다시 깨지게 되었다. 순조 이후 헌종과 철종에 이르기까지 대략 3대에 걸친 60여 년 간의 조선은 다시 왕권이 약화되고 국왕의 외척 세력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세도정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세도정치는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출현한 것으로 그 폐단이 매우 극심하였다. 중요한 관직은 대부분 세도가문과 연결된 사람들에게만 돌아갔으며, 그들로부터 자행된 부정부패 역시 심각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내부적으로 분쟁과 소요가 난무하는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서양에서는 근대사회에 진입하여 놀라운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안에서의 세력 다툼에만 몰두한 나머지 아무 변화도 알지 못하였으며 조선과 서양 근대국가와의 간극은 더욱더 커져버리고 말았다.

몰락한 500년 왕조

결국 철종이 죽고 등극한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그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에야 세도정치는 종식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쇄국정책이란 이름으로 서양의 문물제도를 철저하게 막았던 탓에 조선은 여전히 변화와 개혁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고종이 장성하면서 급기야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왕비였던 민자영과 그 외척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조선은 여전히 성리학이 그리는 이상사회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한 일본이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급기야 불법과 강요로 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1910년에 이르러 조선왕조는 그 500여년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과학 강국

조선은 건국 초기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많은 문화적 업적을 이루어냈다. 해시계와 물시계, 자격루와 칠정산과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과학 기술이 동원된 업적들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새로 개창된 조선을 보다 부국강병한 나라로 키우기 위한 의지가 이러한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축적된 조선의 과학기술과 지식은 거북선비격진천뢰, 신기전과 같은 첨단 무기를 탄생시켰고, 결국 위기에서 국가를 구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때 제작된 한글은 우리 한민족이 높은 수준의 문화민족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는 한글의 위상은 디지털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에 와서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사대부 문화와 민간 예술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문화와 학문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조선의 성리학은 당대 그 어떤 나라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여 그 깊이를 더하였다. 한편에서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경향의 실용적이고 현실지향적인 학문 경향이 나타나 성행하기도 하였다.

서화와 미술을 망라한 문화 전반의 경향 역시 당시 사대부 중심으로 꽃피었고 그들이 지향하던 성리학적 관점에서 문인화와 서예, 그리고 도자기를 위주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한편 민간에서는 자유분방한 문화가 자생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민요와 판소리, 그리고 민화 등은 당시 조선의 예술과 미술이 결코 지배계층인 사대부 중심만으로 흐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아 기발하고 창의적인 소재와 주제, 자유로운 내용과 모습으로 그려진 조선 후기의 민간 예술은 조선의 사대부 중심의 예술과는 또 다른 당대 의식과 인식의 면면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조선시대 훈구와 사림의 존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의 아침, 2015.
계승범, 『중종의 시대 :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 』, 역사비평사, 2014.
김돈, 『조선중기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9.


『사화와 반정의 시대』는 조선 전기 훈구와 사림의 대립 양상과 그 결과로 벌어진 사화의 내용들을 정리한 책이다. 훈구와 사림을 전혀 다른 계통성을 지닌 정치세력으로 보고자 했던 기존의 시각에 비해 저자는 훈구와 사림 모두 사대부의 정체성을 지녔으며, 국가의 통치 조직 안에 수렴되는 과정에서 자연히 분화된 존재라는 견해를 제시하여 그 실체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중종의 시대』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가장 치열했던 중종 시대의 정국 동향과 그 내용을 상세하게 정리하였다. 특히 저자는 조선의 유교화를 한국의 민주화와 대비하면서 당시 사림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정국의 분위기는 곧 조선 전기 권력의 분산과 정치 참여 기회의 확산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울러 ‘사림의 시대’로 지칭되기도 하는 조선 전기의 분위기를 살펴보면서 사림이 지향했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조선중기 정치사 연구』는 조선의 정치사적 전개에 있어 이 시기 성격이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해 준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단순히 조선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이 중기를 넣어 구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훈구와 사림이 대립하며 공론과 여론 중심의 정치를 지향했던 이 시기가 바로 중기로서 시대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정치사적 흐름에 따라 상세한 사실 문제를 제시하는 한편 사림의 출현과 활동이 조선 역사의 한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 이해를 위한 거시적인 시야를 요구하고 있다.


  • 조선의 당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우인수, 『조선후기 영남 남인 연구』, 경인문화사, 2015.
이태진, 김백철 공저,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태학사, 2011.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아름다운날, 2007.


『조선후기 영남 남인 연구』는 조선 후기 남인 세력의 중심지였던 영남지역 사대부들에 대한 심층적 연구 성과로 제출된 책이다. 남인 세력은 숙종대 일시적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것을 제외하고 줄곧 야당의 역할을 해 왔던 세력이다. 지역적으로 영남이라는 특성과 학맥적으로 이황과 조식의 학문 경향, 정치적으로 남인으로서 가지는 그들의 정체성과 실체에 대해 정밀하게 접근하고 있다. 아울러 그 학맥과 계보 상에서 주요한 인물들에 대한 소개도 하고 있어 조선 후기의 정치 지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은 조선후기 당쟁을 완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조처로써 추진된 탕평정책을 집중 분석한 책이다. 영조에서부터 정조에 이르기까지 시행된 탕평정책에 대하여 탕평의 원리에서부터 그 정치적 동향, 사상적 기반, 탕평에 따른 왕정체제의 정비과정에 이르기까지 탕평 전반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때문에 당쟁의 연장선 상에서 탕평에 이르는 조선후기 정치적 환경을 보다 상세하게 살필 수 있는 책이다.

『조선시대 당쟁사』는 사림들의 독점적인 정치가 무르익었던 선조 즉위 이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전체 당쟁의 전개와 흐름을 충실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흔히 붕당의 폐단으로 지칭되는 당시의 당쟁 양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면서, 학맥에 근거한 정파간의 정치적 충돌로서 당쟁이 발생한 배경과 그 접점이 무엇인지를 시계열적으로 세밀하게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다. 조선시대 당쟁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충실한 도움을 제공해 줄 것이다.


  • 조선후기 사상적 흐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권오영, 『조선 성리학의 의미와 양상』, 일지사, 2011.
주자사상연구회, 『조선의 주자학과 실학』, 혜안, 2009.
한국사상사연구회, 『조선 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2.


『조선 성리학의 의미와 양상』은 조선 성리학의 이학적 핵심과 조선 유학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제시해 주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특히 사상적으로 분화와 전개가 활발하였던 조선 후기의 양상을 집중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주자성리학’이 아니라 ‘조선성리학’으로 그것을 규정하고 조선만의 성리학적 특징과 독창성의 면면들을 도출해내기에 주력하였다. 조선의 사상적 지형을 중국에서의 연장이 아닌 조선만의 심화와 독창성의 단계로 이해하고자 한 저자의 시야를 통해 거시적인 조망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의 주자학과 실학』은 조선 건국 이후 깊이 뿌리내린 주자학(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과정을 정리하면서 조선 후기 등장한 새로운 사조인 실학의 내용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실학이 주자학의 발전 과정에서 등장하는 일종의 연장선 상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 배경과 내용을 정밀하게 수록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 주자학의 내용을 매우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데, 단순한 학문의 경향을 설명하기보다는 사상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한 측면이 더 크다. 따라서 실학도 그 연장선 상에서 설명되고 있으며, 사상으로서의 주자학에 대한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독자에게는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유학의 개념들』은 조선시대 완숙해진 성리학의 발전과 분화와 관련하여 조선의 유학의 개념적인 요소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개념서이다. 조선시대가 성리학의 나라임을 말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과 개념에 대해 충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건과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독자로 하여금 기본적인 성리학의 개념과 용어의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어 조선시대의 이해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