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종묘제례
제목 |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 제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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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태조, 목조, 익조, 탁조, 환조, 순종, 이왕직,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세자, 문무백관, 종친, 영의정,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세종 |
장소/공간 | 종묘, 정전, 영녕전 |
사건 | 일제강점기, 광복 |
개념용어 | 신실, 신위, 협실, 신주, 납일, 취위, 영신, 전폐, 신관례, 진찬,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철변두, 송신, 망료, 종묘 제례악, 정대업 · 보태평,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 구장면복, 중요무형문화재,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세계무형유산 |
목차
1차 원고
종묘 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종묘의 중심 건물 정전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한 분씩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기울기가 가팔라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태조가 맨 왼쪽, 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정전 뒤편에 있는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으로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 동지 뒤의 셋째 말일)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 · 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 · 아헌관 · 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
종묘 제례는 종묘 제례악(宗廟祭禮樂)과 춤에 맞추어 진행된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정대업 ·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 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 당피리 · 축 · 편종 · 장고 · 젓대 · 방향(方響) · 해금 · 태평소 · 대금 ·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 용(龍) · 화충(華蟲 : 꿩) · 종이(宗彛 :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 조(藻 : 수초) · 화(火) · 분미(粉米 : 쌀알) · 보(黼 : 도끼) · 불(黻 :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종묘 제례는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는 종묘 제례악과 함께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연구원 1차 검토
검토의견 | |
• -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탁조가 아니고 도조입니다. - 정전 뒤편에 있는 영녕전은 → 서쪽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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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종묘 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종묘는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왼편에 두었다.
종묘의 중심 건물 정전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한 분씩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태조가 맨 왼쪽, 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정전 서편에 있는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으로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정전과 영녕전은 1836년 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 동지 뒤의 셋째 말일)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 · 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 · 아헌관 · 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
종묘 제례는 종묘 제례악(宗廟祭禮樂)과 춤에 맞추어 진행된다. 종묘 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정대업 ·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 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 당피리 · 축 · 편종 · 장고 · 젓대 · 방향(方響) · 해금 · 태평소 · 대금 ·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 용(龍) · 화충(華蟲 : 꿩) · 종이(宗彛 :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 조(藻 : 수초) · 화(火) · 분미(粉米 : 쌀알) · 보(黼 : 도끼) · 불(黻 :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종묘 제례와 종묘 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연구원 2차 검토
검토의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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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8. 종묘와 종묘제례, 종묘제례악(유네스코 화보집 원고)
종묘(宗廟)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신 왕실 사당이다. 종묘에서는 매년 종묘에 모셔져 있는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제례[종묘제례]가 행해졌다. 제례가 행해질 때 기악(器樂)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 거행되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world heritage)으로 등록되어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들 전체가 모여 종묘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에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지 않고 함께 이 장에서 함께 다룬다.)
조선의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는 성리학이었다. 고려는 불교를 지배이념으로 삼아 사원과 승려를 우대했다. 그 결과 고려 말에 이르면 사원이 거대한 농장을 소유하여 국가 재정을 잠식했고, 승려들이 타락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다. 불교의 폐해를 생생히 목격한 신진사대부들은 조선을 세우고 난 뒤 ‘억불숭유(抑佛崇儒)’를 내세웠다.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유교는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중국 송(宋)나라 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고려의 유학자들이 이를 자신들의 철학으로 받아들였다.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삼아 나라의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운영했다.
1392년 조선의 건국에 따라 왕조가 새로 개창된 만큼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수도 이전이 결정되었다. 계룡산(鷄龍山) 등 몇 몇 후보지 가운데 한양[오늘날 서울]이 새로운 수도로 정해졌고, 수도 건설사업이 추진되었다. 한양은 고려시대 남경(南京)으로 불리며 새 도읍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을 만큼 지형이 좋았다. 그리고 국토의 한 가운데 있는데다가 산세가 좋아 외적 방어에 유리하다고 판단되었다. 또한 큰 강[한강]을 끼고 있어 조운(漕運)에도 유리했다.
도성에서 맨 먼저 정해진 자리는 궁궐이었다. 그리하여 북악산(北岳山) 아래 자리 잡은 것이 경복궁(景福宮)이었다.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가 오른 쪽에 사직단(社稷壇)이 만들어졌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이었다. 또한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또한 북악산, 낙산(駱山), 남산, 인왕산(仁王山)을 잇는 성곽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4대문과 4소문도 만들어졌다.
종묘는 1394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에 착공하고 이듬해 9월에 완공하여 태조의 4대조의 신주(神主)를 모셨다. 종묘제도는 중국 주(周)나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중국의 태묘(太廟)에서는 태실(太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는 태실이 19칸이다. 종묘의 경내에는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을 비롯하여 몇 개의 부속 건물이 있다. 종묘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재건하고, 다시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영녕전 역시 처음에는 6칸의 규모였는데, 현재는 16칸이다. 현재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49위)가 모셔져 있으며, 영녕전 16실에는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34위)를 봉안하고 있다.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종묘와 관련된 것으로 묘호(廟號)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임금이 죽은 뒤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존호(尊號)였다. 세종대왕, 정조대왕 할 때 세종(世宗), 정조(正祖)가 묘호이다. 묘호로는 종(宗)과 조(祖)의 두 가지를 썼다. 묘호 사용의 최초 사례는 삼국시대 신라의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었지만, 유일한 사례로 끝났다. 이어 고려시대에는 태조만 조를 썼고, 이후 왕들에게는 종을 붙였다. 그러나 묘호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원간섭기에는 금지되었다가, 이후 조선왕조에서 부활되었다. 조나 종을 쓰는 데는 대체로, 조는 나라를 처음 일으킨 왕이나 국통(國統), 즉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 쓰고, 종은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게 붙였다. 노산군(魯山君; 이후 단종[端宗]으로 추존됨), 연산군, 광해군처럼 왕위에서 쫓겨난 왕들에게는 조, 종의 묘호를 드리는 대신에 군으로 불렀다.
종묘제례란 종묘에서 행하는 제향의식으로,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다섯 의례(五禮) 중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유교가 국가의 근본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조상에 대한 숭배를 인간의 도리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법도로 여겨 제사를 특히 중시하였다.
종묘제례는 크게 정시제(定時祭)와 임시제(臨時祭)로 나뉜다. 정시제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첫 달과 섣달에 지냈으며, 임시제는 나라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지냈다. 그밖에 계절에 따라 햇과일이나 곡식을 올리는 천신제(薦新祭)도 있었다. 현재는 전주리씨대종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이 행사를 주관하여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봉행하고 있다.
종묘제례는 제사를 지내는 예법과 예절에서 모범이 되는 의식이기 때문에 제례는 매우 엄격하고 장엄하게 진행된다. 종묘제례의 절차는 신을 맞이하는 절차, 신이 즐기도록 하는 절차, 신을 보내드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묘제례악은 종묘에서 제사를 드릴 때 의식을 장엄하게 치르기 위하여 연주하는 기악(樂)과 노래(歌)·춤(舞)을 말한다. 조선 세종 때 만들어졌던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세조10년(1464) 제례에 필요한 악곡이 첨가되면서 종묘제례악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 진다. 일무는 가로, 세로 같은 수의 인원이 열을 지어 추는 춤으로 서열에 따라 8일무(64명), 6일무(36명), 4일무(16명), 2일무(4명) 등이 있다. 그 가운데 8일무는 천자의 뜰에서 추는 춤으로 공자를 기리는 문묘 제례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문무는 역대 선왕들의 문덕을 기리는 춤으로 보태평에 맞추어 왼손에는 피리종류인 약(龠)을 오른손에는 깃털을 단 적(翟)을 들고, 무무는 선왕들의 무공을 칭송하는 춤으로 정대업에 맞추어 나무로 만든 칼과 창, 활과 화살을 들고 추는 춤이다.
궁궐이나 사원이 화려하고 장식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종묘는 검소한 양식으로 건립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건축 유형을 보인다. 종묘제례는 1462년에 정형화된 형식을 현재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신라향가나 고려가요가 오늘날 가사만 전하여 지는데 비하여 종묘제례악은 500년 전의 선율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종묘는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었다.
교열본
왕과 왕비의 영혼을 위한 곳, 종묘
1392년 조선의 건국되고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에서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하여 궁궐을 지었다. 먼저 북악산(北岳山) 아래 경복궁(景福宮)이 자리 잡고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가, 오른 쪽에 사직단(社稷壇)이 만들어졌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이었다. 또한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종묘의 중심 건물 정전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한 분씩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태조가 맨 왼쪽, 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정전 서편에 있는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으로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정전과 영녕전은 1836년 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궁궐이나 사원이 화려하고 장식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종묘는 검소한 양식으로 건립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건축 유형을 보인다.
나라의 제사, 종묘대제
종묘 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다섯 의례(五禮) 중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 동지 뒤의 셋째 말일)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 · 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
예술로서의 종묘제례
종묘 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정대업 ·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 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 당피리 · 축 · 편종 · 장고 · 젓대 · 방향(方響) · 해금 · 태평소 · 대금 ·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 진다.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 용(龍) · 화충(華蟲 : 꿩) · 종이(宗彛 :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 조(藻 : 수초) · 화(火) · 분미(粉米 : 쌀알) · 보(黼 : 도끼) · 불(黻 :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종묘제례는 그 자체로도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1462년에 만들어진 형식이 현재까지도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500년 전의 선율과 춤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