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발해(한국과 중국이 공유하는 고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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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23일 (월) 21:30 판 (출처 및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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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발해 역사는 어느 나라의 것인가?
집필자 남정란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대조영, 문왕, 정혜공주, 왕건, 대도수
장소/공간 동북아시아, 연해주
사건 발해의 건국, 발해의 멸망
기록물 정효공주 묘비
개념용어 동북공정
물품/도구/유물 정효공주 묘, 발해의 고분벽화, 발해 석등



1차 원고

676년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그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는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표방하였다.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히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의 영토보다도 넓었다.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보고 있다.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이므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발해의 왕족와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 역시 고구려식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따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이 원고는 발해가 한국의 역사이며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본 원고에 다음의 내용을 포함시켰으면 한다.

① 발해가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에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을 보냈으며,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였다는 내용
② 발해가 황제와 황후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황제국임을 드러냈던 사실은 발해가 자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의 주장은 허구임을 보여준다.
③ 발해 멸망 후 발해 왕자 대광현은 수많은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

④ 유득공의 발해고 내용 : “부여씨와 고씨가 망한 다음에 김씨의 신라가 남에 있고 대씨의 발해가 북에 있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저 대씨가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이다.... 김씨와 대씨가 망한 다음 왕씨가 통합하여 차지하고는 고려라고 하였다.... 고려가 마침내 약소국이 된 것은 발해의 땅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니, 한탄스럽다.”


수정 원고

676년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그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는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의 영토보다도 넓었다.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보고 있다.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이므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발해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수많은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 역시 고구려식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따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교열본

대조영, 발해를 세우다

676년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였지만,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통일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

저항세력의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의 집안이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배경이 발해 건국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과 거란, 말갈인 등 이민족들을 함께 이끌 수 있었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발해 역사를 대하는 각 나라 주장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예전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보다도 넓었다.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데 기인한다.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지금 한국의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으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

발해는 어떤 나라였을까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당나라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황제국가의 체제 아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 형태를 보인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와 온돌 방식 역시 고구려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 따서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발해는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로서 다양한 민족의 폭넓은 교류 문화를 보여준다.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2차 교열본

대조영, 발해를 세우다

676년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였지만,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통일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

저항세력의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의 집안이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배경이 발해 건국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과 거란, 말갈인 등 이민족들을 함께 이끌 수 있었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예전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당나라와 신라는 그러한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는데, 발해는 강하게 맞서면서 세력을 키워 갔다. 그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

발해 역사를 대하는 각 나라 주장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보다도 넓었다.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데 기인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지금 한국의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으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

발해는 어떤 나라였을까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당나라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황제국가의 체제 아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 형태를 보인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와 온돌 방식 역시 고구려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 따서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 발해는 실크로드의 연장으로서 다양한 민족의 폭넓은 교류 문화가 있었던 곳이다.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출처 및 관련자료

  • 출처
    •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 『한국생활사박물관 06』, 사계절, 2002.
    •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한국사교과서』, 휴머니스트, 2010.
    • 박중현, 『청소년을 위한 동아시아사』, 두리미디어, 2012.
    • 전국역사교사모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