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일제강점기

Korea100
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22일 (금) 21:4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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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원고 번역본

병합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조선에 대해 1876년에 항구를 개방하도록 한 불평등한 강제 조약부터 시작하여 30년 넘게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암암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1890년대에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어 중국으로 하여금 조선과의 관계의 단절하도록 했으며, 민비를 시해하고, 대한제국을 빚더미에 올려놓았는가 하면, 밀정을 파견하여 조선 전국의 지도를 작성하도록 함으로써 병합 이후 식민지 기반 시설이 조속히 용이하게 설치될 수 있게 하였다. 한국은 1905년의 한일협상조약을 통해 일본의 피보호국으로 선포되었다. 조약은 황제인 고종이 아니라 한국의 내각 대신 5명이 죽음의 위협을 받고 서명을 강요당한 것이었다. 한국은 1910년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었는데, 이 역시 황제인 순종이 서명한 것이 아니라 친일파 총리대신이 옥쇄를 훔쳐 날인한 조약을 통해서였다.

병합을 기화로 일본은 자원 착취를 목적으로 한국을 급속히 산업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궁궐 건물과 함께 성벽과 성문 등과 같은 주요 문화 유산을 90% 이상 파괴하였다. 이같은 모독을 여실히 상징하는 것이 조선 왕조의 정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총독부 청사였다. 다른 문화 유물들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오늘날 일본에 남아 있는 것만도 30,000점이 넘는다. 산업화는 서울 주변의 도시화와 함께 인구 증가를 자극하였는데, 그에 따른 경제적 이득은 대부분 일본인들과 친일 부역자들이 차지하였다. 식민 정부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도록 강요했으며, 한국어로 발행되는 언론을 탄압하고 한국 문화를 억눌렀다. 또한 한국인들은 신사 참배도 강요당했는데, 외국인 선교사를 포함하여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강제 추방당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일본 군대의 성노예인 위안부의 경우처럼 노역에 강제 징발하였다. 한국인들은 또한 비밀 의료 실험 부대인 731부대에서 실험을 당하며 죽어갔다. 2차 대전 후 일본인들은 한국을 포기해야 했고, 한국은 위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일시적으로 미국과 소련에 분할되었다.

일본 강점 하에서 한국인들은 독립을 위한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일본에 병합되기 전만 해도 일반 시민들이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하여 일본이 한국에 안긴 부채를 상환하는 데 힘을 모았다. 가장 유명한 독립 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되었다. 그날 독립선언서에 33명의 운동가들이 서명하였고, 그 선언에 이어 200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1,500회 이상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 운동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으니, 수십만 명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거나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서대문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 후 이 망명 정부는 중국의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남은 강점 시기를 견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