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살리기: 파독 광부와 간호원
나라 살리기: 파독 광부와 간호원
차관 대신 파견된 인력
1960년대 초, 한국은 전쟁의 피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가난한 나라였다. 1962년도 인당 GNP는 87달러로 아프리카의 가나와 비슷했고 실업률은 30%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산업화가 늦어서 수출할 물건은 없었지만 노동력은 수출할 수 있었다. 취업을 위해 독일로 간 간호원과 광부들이 노동력 수출의 문호를 열었다.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로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으나 국고 부족으로 착수를 못하고 있었다. 외지를 유치하려고 해도 남북한 간의 대치, 4.19혁명과 5.16쿠데타 등 정정불안을 겪고 있는 한국은 외국투자가들에게 그리 매력 있는 투자처가 못되었다. 이웃 일본과는 아직 국교가 정상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는 것이 어려워지자 군사정부는 같은 분단국인 서독으로 눈을 돌렸다. 서독에 파견된 한국의 차관 교섭단은 1억5천 만 마르크의 상업차관 도입에 합의했다. 이때 서독 측이 제의한 것이 한국인 광부 5천명과 간호인력 2000명을 서독에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은 노동력 부족으로 해외에서 인력을 수입하고 있었다. 특히 광부 일은 고되고 힘들어서 서독 노동자들이 꺼리기 때문에 인력부족이 더욱 심각했다.
이렇게 하여 ‘서독 파견 한국 광부 임시 고용계획’이 탄생하였고, 1963년 12월 양국 간에 협정이 이루어졌다. 이 협정은 독일이 유럽권 밖의 국가에서 노동력을 들여오는 최초의 협정이었다. 또한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첫 노동력 해외수출이었다.
광부와 간호사 모집에 몰린 지원자
당시 취업이 어려웠던 한국의 젊은이들은 서독파견 광부 모집에 대거 몰려들었다. 경쟁률이 8대1이나 되었고, 중학교졸업자 이상을 자격으로 했는데 대학교 졸업자가 20% 이상이었다. 2천명을 뽑는 첫 간호사 모집에는 2만 명이 응모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8천명의 광부가 서독으로 건너갔다.
광부들의 월급은 164달러로 당시 한국의 기준으로는 많은 편이었다. 광부들은 생활비를 아껴 쓰고 남는 돈을 고국에 송금했다. 파독 근로자들은 약 10년에 걸쳐 한국에 총 1억164만 달러를 송금하였다. 1965년 한국의 연간 총 수출액이 1억 7508만 달러였던 걸 감안하면 큰 금액이었다.
1964년 12월, 선거에 의해 민정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는 서독을 국빈으로 방문하였을 때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 그들의 노고에 깊은 사의를 표하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독일에 파견된 한국인 광부 중에는 계약기간이 끝난 후 학업을 계속하여 학위를 받은 후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가 된 사람도 있고,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도 많았다. 대부분은 은퇴하여 독일 정부가 지급하는 연금으로 살고 있다.
한국 간호사의 독일 파견은 한국 내 독일 가톨릭교회와 독일의 여러 수도회의 중개로 1950년대 말부터 소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광부협정에 상응하는 한국 간호사의 독일 파견에 관한 공식 협정이 체결되어 대량으로 파견되었다. 1966년부터 10년 동안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모두 1만1천명이다.
노동력으로 국가를 돕다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은 근면과 성실성으로 현지 업체와 병원의 인정을 받았다. 이들이 아껴서 송금한 돈은 외환이 부족한 고국의 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다.
간호사들은 대부분 고용계약이 연장되어 장기간 근무했다. 일부 간호사들은 한국인 광부들과 결혼하여 독일에 정주했다. 독일인과 결혼한 여성도 많다. 파독 한국 간호사의 절반 이상은 독일에 계속 거주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이주노동자의 대다수는 루르 지역이나 라인란트 지역에 살고 있다. 이들은 독일 최대이자 서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한국 교민사회를 이루고 있다.
광부와 간호사가 연 노동력 수출은 그 후 베트남전쟁 용역시장 진출, 중동건설시장 인력진출, 원양어업 진출 등으로 이어져 한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