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정도전
제목 |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정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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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이성계, 정몽주, 이인임, 동북면도지휘사, 조민수, 이방원, 정총, 이방석 |
장소/공간 | 명륜당,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 함주 막사, 경복궁, 랴오둥 |
사건 | 위화도 회군, 제1차 왕자의 난 |
개념용어 | 문신, 개국 공신, 고려,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성리학, 친원 배명 정책, 역성혁명, 학자지남도, 심문천답, 불씨잡변, 정학,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경세론, 불교, 성리학, 정학, 유교, 자작농, 산업의 공영화, 관료 정치, 주례, 병농일치, 한나라, 당나라, 부병제, 군현제, 부세제, 서리제, 명나라, 대명률, 과거 제도, 재상, 감사, 대간, 수령, 무관, 토지 균분, 10분의 1세, 고려국사, 부국강병 |
목차
1차 원고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며 새 나라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학자이다. 고려 말에는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직책을 얻어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는데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데 앞장섰다. 한때 정몽주 등 고려 구세력의 탄핵으로 유배되고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정몽주가 제거된 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우는 데 주역이 되었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공신으로 여러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넣었다. 1394년에는 한양 천도를 계획하는 데 참여한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였고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새 궁궐이 다 지어졌을 때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역성혁명에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개혁 의지가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개혁을 위해 이론을 마련하고 그 이론을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과 제도에 있어 조선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
정도전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해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펼쳤다. 그의 경세론을 요약하면 자작농을 많이 키우고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며 능력에 토대를 둔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이전에 있던 중국의 제도 가운데 좋은 제도를 골라 만든 조선의 통치 규범으로 제시한 책이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 · 군현제(郡縣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받아들였다.
≪경제문감≫에서는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에 대해 논했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도전은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의 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10분의 1세의 확립, 공업 · 상업 · 염전 · 광산 등의 국영화를 꾀하였다.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이다.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이성계가 일으킨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확실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정도전은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렸고 1396년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랴오둥[遼東] 수복 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39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 정도전의 죄명은 세자 방석(芳碩)에 당부(黨附 : 무리를 지어 가깝게 지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자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삼봉집(三峰集)』
- 「정도전사상의 연구」(한영우, 『한국문화연구총서』 15, 1973)
-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이상백, 『진단학보』 2·3, 1935)
- 「정삼봉(鄭三峰)의 유불관(儒佛觀)」(이병도, 『백성욱박사회갑기념논총』, 1959)
- 「정도전의 벽불론(闢佛論)비판」(이종익, 『불교학보』 8, 1971)
- 「정도전(鄭道傳)의 벽불(闢佛)사상과 그 논리적성격」(금장태, 『민태식박사고희논총』, 1972)
- 「고려국사의 편찬내용과 사론(史論)」(변태섭, 『학술논총』 3, 1979)
- 「정도전의 인간과 사회사상」(한영우, 『진단학보』 50, 1980)
- 「삼봉집(三峰集)에 나타난 정도전(鄭道傳)의 병제개혁안(兵制改革案)의 성격」(정두희, 『진단학보』 50, 1980)
- 「정도전 성리학의 특성과 그 평가문제」(윤사순, 『진단학보』 50, 1980)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정도전’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 |
• -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이 있는 네 번째 문단을 첫 번째 문단 뒤로 넣으면 중복된 내용은 조정할 것 - 한양 천도 시 한양의 공간 계획을 주도했던 정도전의 사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했으면. 서울의 공간을 크게 어떻게 나누었는지, 경복궁의 궁궐 및 전각의 이름을 어떻게 명명했으며 이 명칭 등을 통해 정도전이 원했던 조선의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서술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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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본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며 새 나라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학자이다. 고려 말에는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직책을 얻어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는데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역성혁명에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개혁 의지가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개혁을 위해 이론을 마련하고 그 이론을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과 제도에 있어 조선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데 앞장섰다. 한때 정몽주 등 고려 구세력의 탄핵으로 유배되고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정몽주가 제거된 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우는 데 주역이 되었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공신으로 여러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넣었다. 1394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궁궐이 다 지어졌을 때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의 빛나는 복[경복(景福)]을 빈다”라는 시구에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밝혔다. 또 백성을 다스리는 데 게으름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 정전을 근정전(勤政殿)이라 이름 지었고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 사정전(思政殿)은 생각을 많이 하여 슬기로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 지었다고 했다.
정도전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해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펼쳤다. 그의 경세론을 요약하면 자작농을 많이 키우고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며 능력에 토대를 둔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이전에 있던 중국의 제도 가운데 좋은 제도를 골라 만든 조선의 통치 규범으로 제시한 책이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 · 군현제(郡縣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받아들였다.
≪경제문감≫에서는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에 대해 논했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도전은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의 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10분의 1세의 확립, 공업 · 상업 · 염전 · 광산 등의 국영화를 꾀하였다.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이다.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이성계가 일으킨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확실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정도전은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렸고 1396년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랴오둥[遼東] 수복 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39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이복동생들을 죽인 사건이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에 공이 큰 자신은 물론 다른 형들을 제치고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 세자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데에는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 그는 유교주의적 이상 국가로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신권 정치를 지향했다. 그런데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방원이 왕이 되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우게 한 것이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도전의 죄명은 무리를 지어 세자 방석(芳碩)과 가깝게 지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교열본
백성의 삶을 보며 피워낸 개혁 의지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며 새 나라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학자이다. 고려 말에는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직책을 얻어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는데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역성혁명에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개혁 의지가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개혁을 위해 이론을 마련하고 그 이론을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과 제도에 있어 조선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
조선 개국의 1등 공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앞장섰다. 한때 정몽주 등 고려 구세력이 그를 탄핵하여 옥에 갇혔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제거한 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우는 주역이 되었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으로 여러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넣었다. 1394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의견대로 되었다. 궁궐이 다 지어졌을 때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의 빛나는 복[경복(景福)]을 빈다”라는 시구에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밝혔다. 또 백성을 다스리는 데 게으름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 정전을 근정전(勤政殿)이라 이름 지었고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 사정전(思政殿)은 생각을 많이 하여 슬기로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고 했다.
민본사상으로 다진 조선경국전
정도전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해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펼쳤다. 그의 경세론을 요약하면 자작농을 많이 키우고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며 능력에 토대를 둔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이전에 있던 중국의 제도 가운데 좋은 제도를 골라 만든 조선의 통치 규범으로 제시한 책이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 · 군현제(郡縣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받아들였다.
≪경제문감≫에서는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에 대해 논했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도전은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등 배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의 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10분의 1세의 확립, 공업 · 상업 · 염전 · 광산 등의 국영화를 꾀하였다.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이다.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이성계가 일으킨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확실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모함으로 얼룩진 평가
정도전은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렸고 1396년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랴오둥[遼東] 수복 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39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이복동생들을 죽인 사건이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에 공이 큰 자신은 물론 다른 형들을 제치고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 세자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데에는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 그는 유교주의적 이상 국가로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신권 정치를 지향했다. 그런데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방원이 왕이 되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우게 한 것이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도전의 죄명은 무리를 지어 세자 방석(芳碩)과 가깝게 지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방원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정도전을 제거한 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가 반란을 일으킨 역적이며 왕실 종친을 모함하여 해쳤다고 누명을 씌웠다. 《조선왕조실록》에 정도전이 죽기 전에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에 남긴 시를 보면 그 기록은 이방원의 의도적인 폄하로 보인다.
操存省察兩加功 / 조존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
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
三十年來勤苦業 /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
松亭一醉竟成空 / 송현방 정자 술 한 잔에 그만 허사가 되었구나.
(정도전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디자인한 전략가, 이이화의 인물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