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이산가족찾기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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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12일 (화) 15:2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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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분단국의 이산가족찾기 캠페인
집필자 황정욱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한국방송공사



1차 원고

한국은 2차대전이 끝난 후 남북이 분단되고, 3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낸 한국전쟁(1950-1953)을 겪었다. 1945년 북위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한반도는 동서 냉전의 첨예한 대립지역이 되었다. 북쪽에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자 수백만의 한국인이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 남으로 내려왔다. 미처 남하를 못한 사람들은 한국전쟁 중 유엔군이 북진했을 때 남으로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남과 북으로 헤어진 가족, 남으로 내려왔지만 가족과 친척을 못 찾은 사람 등 약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이후 남북한은 155마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면서 오랜 세월 교통, 통신, 인적 물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왔다. 지구상에 냉전을 겪은 지역이 많지만 이런 완전한 단절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남북의 이산가족들은 나이가 들수록 고향과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지만, 냉전체제아래서 이를 실현할 길이 없었다.

남한에 정착한 피난민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운 가족이나 친척들과 연락이 끊긴 채 살고 있었다.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과는 상봉을 기대할 수 없지만, 남한에 내려온 가족 친척들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이산가족찾기 운동이 있었으나 그 실적은 미미한 것이었다.

1983년 전쟁 휴전 30주년을 맞아 한국의 국영방송 KBS는 텔레비전 전국망을 동원한 연속특별생방송으로 세계 최초, 최대 규모의 이산가족 찾아주기 운동을 벌였다. 우선 남한에 있는 이산가족만이라도 만나게 해주자는 취지였다.

6월 30일 밤 10시 15분에 시작된 캠페인은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 방송기간 138일, 방송시간 453시간 45분 동안 마라톤으로 진행된 캠페인을 통해 총 10만 건의 신청을 받고 이중 5만여 건의 사례가 방송에 소개되어 약 1만 건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캠페인 연속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국민의 호응을 얻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연일 화제들을 낳았다. 전국민이 텔레비전에 모여들어 혈육들이 눈물로 재회하여 얼싸안고 울부짖는 장면을 보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KBS본사 사옥이 있는 여의도에는 생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찾는 사람의 인적 사항을 적은 피케트를 든 사람들로 붐볐다. 방송 3일째부터는 학생·주부·일반시민들 주축으로 안내, 의료봉사, 신청서 대필 등의 자원봉사가 시작되었고, 컬러TV, 공중전화, 이동화장실, 기차표, 생수, 빵, 라면, 부채, 수건 등을 기탁하는 개인과 기업체의 후원도 줄을 이었다. 각 기업체의 이산가족 상봉신청자에게는 특별휴가가 부여되기도 하였다.

해외의 언론도 이 캠페인 방송에 큰 관심을 갖고 보도하였다. KBS 본관 중앙홀에 마련된 기자실에는 전 세계 25개국의 기자들이 상주하면서 상봉소식을 실시간으로 전달하였다. 미국 ABC는 “나이트라인(Night Line)”을 통해 생중계하기도 했다.

KBS의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동서냉전이 사람들에게 내면적으로 입힌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남북한 이산가족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캠페인이 진행되던 시기에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북한에게 “1천만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조속히 남북적십자사 회담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1983.8)에서 “남북한 간의 이념과 제도가 다르다 하더라도 이산가족 문제해결은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다”면서 이산가족 상봉에 북한이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

레이건 미국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 방문연설(1983.11)에서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의 성공을 언급하며 북한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이산가족찾기 방송 2년 후에 서울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KBS를 방문(1985.5)했고, 역사적인 남북한 이산가족의 최초상봉(1985.9)이 이루어졌다.

이후 2014년까지 남북한은 적십자사의 중개로 남북 이산가족 18,523명이 상봉했다.

연구원 1차 검토

검토의견
이산가족찾기 캠페인은 한국전쟁을 겪고 이를 극복한 한국인들이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것으로 이에 대한 내용을 추가 집필할 필요가 있다.
-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찾기’ 관련 기록물 20.522건이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기술할 것


수정 원고

한국은 2차대전이 끝난 후 남북이 분단되고, 3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낸 한국전쟁(1950-1953)을 겪었다. 1945년 북위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한반도는 동서 냉전의 첨예한 대립지역이 되었다. 북쪽에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자 수백만의 한국인이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 남으로 내려왔다. 미처 남하를 못한 사람들은 한국전쟁 중 유엔군이 북진했을 때 남으로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남과 북으로 헤어진 가족, 남으로 내려왔지만 가족과 친척을 못 찾은 사람 등 약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이후 남북한은 155마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면서 오랜 세월 교통, 통신, 인적 물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왔다. 지구상에 냉전을 겪은 지역이 많지만 이런 완전한 단절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남북의 이산가족들은 나이가 들수록 고향과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지만, 냉전체제아래서 이를 실현할 길이 없었다.

남한에 정착한 피난민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운 가족이나 친척들과 연락이 끊긴 채 살고 있었다.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과는 상봉을 기대할 수 없지만, 남한에 내려온 가족 친척들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이산가족찾기 운동이 있었으나 그 실적은 미미한 것이었다.

1983년 전쟁 휴전 30주년을 맞아 한국의 국영방송 KBS는 텔레비전 전국망을 동원한 연속특별생방송으로 세계 최초, 최대 규모의 이산가족 찾아주기 운동을 벌였다. 우선 남한에 있는 이산가족만이라도 만나게 해주자는 취지였다.

6월 30일 밤 10시 15분에 시작된 캠페인은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 방송기간 138일, 방송시간 453시간 45분 동안 마라톤으로 진행된 캠페인을 통해 총 10만 건의 신청을 받고 이중 5만여 건의 사례가 방송에 소개되어 약 1만 건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캠페인 연속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국민의 호응을 얻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연일 화제들을 낳았다. 전국민이 텔레비전에 모여들어 혈육들이 눈물로 재회하여 얼싸안고 울부짖는 장면을 보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KBS본사 사옥이 있는 여의도에는 생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찾는 사람의 인적 사항을 적은 피케트를 든 사람들로 붐볐다. 방송 3일째부터는 학생·주부·일반시민들 주축으로 안내, 의료봉사, 신청서 대필 등의 자원봉사가 시작되었고, 컬러TV, 공중전화, 이동화장실, 기차표, 생수, 빵, 라면, 부채, 수건 등을 기탁하는 개인과 기업체의 후원도 줄을 이었다. 각 기업체의 이산가족 상봉신청자에게는 특별휴가가 부여되기도 하였다.

해외의 언론도 이 캠페인 방송에 큰 관심을 갖고 보도하였다. KBS 본관 중앙홀에 마련된 기자실에는 전 세계 25개국의 기자들이 상주하면서 상봉소식을 실시간으로 전달하였다. 미국 ABC는 “나이트라인(Night Line)”을 통해 생중계하기도 했다.

KBS의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동서냉전이 사람들에게 내면적으로 입힌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남북한 이산가족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캠페인이 진행되던 시기에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북한에게 “1천만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조속히 남북적십자사 회담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1983.8)에서 “남북한 간의 이념과 제도가 다르다 하더라도 이산가족 문제해결은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다”면서 이산가족 상봉에 북한이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

레이건 미국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 방문연설(1983.11)에서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의 성공을 언급하며 북한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이산가족찾기 방송 2년 후에 서울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KBS를 방문(1985.5)했고, 역사적인 남북한 이산가족의 최초상봉(1985.9)이 이루어졌다.

이후 2014년까지 남북한은 적십자사의 중개로 남북 이산가족 18,523명이 상봉했다.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찾기’ 관련 기록물 20.522건이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연구원 2차 검토

검토의견
<기본정보> 보충 필요함.

유네스코와 유산, 세계기록유산,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교열본

전쟁이 만든 이산가족

한국은 2차대전이 끝난 후 남북이 분단되고, 3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낸 한국전쟁(1950-1953)을 겪었다. 1945년 북위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한반도는 동서 냉전의 첨예한 대립지역이 되었다. 북쪽에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자 수백만의 한국인이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 남으로 내려왔다. 미처 남하를 못한 사람들은 한국전쟁 중 북진한 유엔군을 따라 남으로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남과 북으로 헤어진 가족, 남으로 내려왔지만 가족과 친척을 못 찾은 사람 등 약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이후 남북한은 155마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면서 오랜 세월 교통, 통신, 인적·물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왔다. 지구상에 냉전을 겪은 지역이 많지만 이런 완전한 단절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남북의 이산가족들은 나이가 들수록 고향과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지만, 냉전체제 아래서 이를 실현할 길이 없었다.

남한에 정착한 피난민들끼리도 가족이나 친척들과 연락이 끊긴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소망은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과는 상봉을 기대할 수 없더라도 남한에 내려온 가족 친척들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바램을 이루어주기 위해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있었으나 그 실적은 미미한 것이었다.

전 국민이 울었던 생방송

1983년 전쟁 휴전 30주년을 맞아 한국의 국영방송 KBS는 텔레비전 전국망을 동원한 연속특별생방송으로 세계 최초·최대 규모의 이산가족 찾아주기 운동을 기획했다. 우선 남한에 있는 이산가족만이라도 만나게 해주자는 취지였다.

6월 30일 밤 10시 15분에 시작된 캠페인은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 방송기간 138일, 방송시간 453시간 45분 동안 마라톤으로 진행된 캠페인을 통해 총 10만 건의 신청을 받고 이중 5만여 건의 사례가 방송에 소개되어 약 1만 건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캠페인 연속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 국민의 호응을 얻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연일 화제를 낳았다. 전 국민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들어 혈육들이 눈물로 재회하여 얼싸안고 울부짖는 장면을 보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KBS본사 사옥이 있는 여의도에는 생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찾는 사람의 인적 사항을 적은 피켓을 든 사람들로 붐볐다. 방송 3일째부터는 학생·주부·일반시민들을 주축으로 안내, 의료봉사, 신청서 대필 등을 돕는 자원봉사가 시작되었다. 컬러TV, 공중전화, 이동화장실, 기차표, 생수, 빵, 라면, 부채, 수건 등을 기탁하는 개인과 기업체의 후원도 줄을 이었다. 각 기업체의 이산가족 상봉신청자에게는 특별휴가가 부여되기도 하였다.

해외의 언론도 이 캠페인 방송에 큰 관심을 갖고 보도하였다. KBS 본관 중앙홀에 마련된 기자실에는 전 세계 25개국의 기자들이 상주하면서 상봉소식을 실시간으로 전달하였다. 미국 ABC는 “나이트라인(Night Line)”을 통해 생중계하기도 했다.

KBS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은 국내 뿐만 아니라 동서냉전이 사람들에게 내면적으로 입힌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남북한 이산가족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남북한 이산가족의 만남

캠페인이 진행되던 시기에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북한에게 “1천만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조속히 남북적십자사 회담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1983.8)에서 “남북한 간의 이념과 제도가 다르다 하더라도 이산가족 문제해결은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다”면서 이산가족 상봉에 북한이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레이건 미국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 방문연설(1983.11)에서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의 성공을 언급하며 북한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이산가족 찾기 방송 2년 후에 서울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KBS를 방문(1985.5)했고, 역사적인 남북한 이산가족의 최초상봉(1985.9)이 이루어졌다. 이후 2014년까지 남북한은 적십자사의 중개로 남북 이산가족 18,523명이 상봉했다.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찾기’ 관련 기록물 20.522건이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출처 및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