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화포와 화약
제목 | 최무선의 화약 개발, 나라를 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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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최무선, 왜구, 이원, 화통도감, 화통방사군, 태조 이성계, 태종, 세종, 화통군, 화약장, 왜인, 문종, 도회소, 성근, 김지남 |
장소/공간 | 벽란도, 금강 하구의 진포, 나세 |
사건 | 서북 방향 국경 개척 |
개념용어 | 고려, 초석 · 유황 · 분탄, 조선, 염초자취법, <신전자취염초방>, <신전자초방>, 명나라 |
목차
원고
화약과 화포가 활발하게 개발된 것은 최무선(崔茂宣) 이후의 일이다. 무관이었던 최무선은 당시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역항 벽한국에서 화약이 중요한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전반 고려 말기로 추측된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화약이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화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원료, 즉 초석 · 유황 · 분탄 중 초석(염초 : 焰硝)의 제조법이 비밀이어서 고려에서는 정부조차도 화약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화약이 필요할 때는 중국에서 얻어다 쓰곤 했다.
고려에서 화약과 화포가 활발하게 개발된 것은 최무선(崔茂宣) 이후의 일이다. 무관이었던 최무선은 당시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인들 중 초석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중국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난 최무선은 화약을 만들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흙에서 초석을 추출하는 방법을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어낼 국가의 화약제조소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설치하자고 고려 정부에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덕분에 화통도감이 만들어졌고 1377년 10월부터 화약과 화약 무기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 1378년에는 화기 발사 전문부대인 화통방사군(火㷁放射軍)이 편성되었다.
화통도감에서 만들어진, 화약을 사용한 무기는 18종에 이르렀다. 총포류나, 화포류, 불화살 등 다양한 무기가 개발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화기들은 실제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380년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왔을 때 최무선은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적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면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화기 발달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일반에게 대중화되어 새 왕조의 권력 집중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화약은 설 명절놀이의 하나였던 불꽃놀이에만 쓰였을 정도였다. 태조와 달리 태종 ‧ 세종에 이르러는 화기 발달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태종 때인 1404년에는 화약을 주로 쓰는 부대인 화통군(火㷁軍)이 증원되었고 화약을 만드는 화약장(火藥匠)의 수도 늘어났다.
세종 때에는 서북 방향 국경을 개척하면서 연간 약 8,000근이나 되는 화약을 소비하기도 했다. 이 중 약 3,000근은 지방에서 생산하였는데, 중앙 정부에서 감독관을 파견하여 엄중히 관리하였다.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등 한반도 남쪽의 세 도(下三道)에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의 감독 아래 해안에서 먼 곳을 골라서 초석을 만들게 하였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인 이유는 화약을 만드는 기술이 혹시 왜인에게 알려질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약이 늘 부족하여 화포 발사 훈련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1433년부터는 불꽃놀이에 쓰는 염초량을 종전의 1,000근에서 30근으로 대폭 줄였다.
세종의 뒤를 이른 제5대 임금 문종은 화약의 필요성과 그 제조를 위한 염초자취법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전국에 25개의 도회소를 설치하였는데, 이 도회소들에서는 나라의 인가를 받은 사람만이 염초를 제조할 수 있었다. 또 만들어낸 염초를 전부 국가에 바쳐 그 비밀이 왜인에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이렇게 조선 초기에 이르러 화기와 화약의 제조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 국가적으로 대량 생산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당시 화약의 정확한 제조 기술은 알려지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화약 제조법 관련 서적은 1635년에 쓰인 <신전자취염초방>과 1698년에 이루어진 <신전자초방>이다. <신전자취염초방>은 성근(成根)이, <신전자초방>은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중국에서 배워와 스스로 연구하여 완성한 화약 제조 방법을 기록한 책이다.
이처럼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발전을 거듭해온 화기와 화약은 외적의 침략을 방지하고 국방을 지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또 화약과 화기 만드는 기술은 중국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되었으며, 왜인들은 우리의 화약 병기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애썼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자료
- 『고려사(高麗史)』
- 『태조실록(太祖實錄)』
- 『무기와 화약』(김기웅,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 『신전자취염초방언해(新傳煮取焰硝方諺解)』
-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
- 『화약학·발파학(火藥學·發破學)』(김영달외, 문운당, 1971)
-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5)
- 『조선시대화약병기사연구(火藥兵器史硏究)』(허선도, 일조각, 1994)
- 「여말선초 화기(火器)의 전래와 발달」 상·중·하(허선도, 『역사학보』 24·25·26, 1964·1965)
- 「이조중기 화기(火器)의 발달」 상·하(허선도, 『역사학보』 30·31, 1966)
연구원 검토
1차
검토의견 | |
• 고려, 조선의 화포와 화약발전에 관한 설명하는 글이기 때문에 일본과의 비교는 불필요하다고 본다. 고려, 조선의 화포와 화약 제조 및 정책에 관한 설명이 너무 많아 내용이 지루하다. 중국의 금비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권율 장군 등은 화약무기를 사용해 승리를 이끌었는지 또는 조선의 화약무기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등의 이야기를 만들어 시각 자료와 함께 제시한다면 좀 더 흥미로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 |
• - 고려 말 최무선의 화약 개발과 사용에 대해서는 잘 설명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화포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 화약 개발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화약 제조법 서적에 대해서 정리하였는데..... 임진왜란 거북선의 경우 대형 화포가 탑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서술하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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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검토의견 | |
• - 위의 궁금증에 대한 수정 및 보완이 안 되어 있음 - 관련 영화: ‘신기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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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열본
최무선의 구국일념, 화약 제조
한국에서 화약이 중요한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전반 고려 말기로 추측된다. 중국에서는 12세기에도 이미 화약을 전쟁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원료, 즉 초석 · 유황 · 분탄 중 초석(염초 : 焰硝)의 제조법이 비밀이어서 고려에서는 정부조차도 화약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화약이 필요할 때는 중국에서 얻어다 쓰곤 했다.
고려에서 화약과 화포가 활발하게 개발된 것은 최무선(崔茂宣) 이후의 일이다. 무관이었던 최무선은 당시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인들 중 초석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중국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난 최무선은 화약을 만들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흙에서 초석을 추출하는 방법을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어낼 국가의 화약제조소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설치하자고 고려 정부에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덕분에 화통도감이 만들어졌고 1377년 10월부터 화약과 화약 무기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 1378년에는 화기 발사 전문부대인 화통방사군(火㷁放射軍)이 편성되었다.
화통도감에서 만들어진, 화약을 사용한 무기는 18종에 이르렀다. 총포류나, 화포류, 불화살 등 다양한 무기가 개발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화기들은 실제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380년 왜구가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왔을 때 최무선은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 백여 척을 이끌고 나아가 왜함 오백여 척을 무찌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대량생산으로 발전한 화약 기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면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화기 발달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일반에게 대중화되어 새 왕조의 권력 집중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화약은 설 명절놀이의 하나였던 불꽃놀이에만 쓰였을 정도였다.
태조와 달리 태종 ‧ 세종에 이르러는 화기 발달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태종 때인 1404년에는 화약을 주로 쓰는 부대인 화통군(火㷁軍)이 증원되었고 화약을 만드는 화약장(火藥匠)의 수도 늘어났다. 세종 때에는 서북 방향 국경을 개척하면서 연간 약 8,000근이나 되는 화약을 소비하기도 했다. 이 중 약 3,000근은 지방에서 생산하였는데, 중앙 정부에서 감독관을 파견하여 엄중히 관리하였다.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등 한반도 남쪽의 세 도(下三道)에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의 감독 아래 해안에서 먼 곳을 골라서 초석을 만들게 하였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인 이유는 화약을 만드는 기술이 혹시 왜인에게 알려질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약이 늘 부족하여 화포 발사 훈련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1433년부터는 불꽃놀이에 쓰는 염초량을 종전의 1,000근에서 30근으로 대폭 줄였다.
세종의 뒤를 이른 제5대 임금 문종은 화약의 필요성과 그 제조를 위한 염초자취법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전국에 25개의 도회소를 설치하였는데, 이 도회소들에서는 나라의 인가를 받은 사람만이 염초를 제조할 수 있었다. 또 만들어낸 염초를 전부 국가에 바쳐 그 비밀이 왜인에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이렇게 조선 초기에 이르러 화기와 화약의 제조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 국가적으로 대량 생산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당시 화약의 정확한 제조 기술은 알려지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화약 제조법 관련 서적은 1635년에 쓰인 <신전자취염초방>과 1698년에 이루어진 <신전자초방>이다. <신전자취염초방>은 성근(成根)이, <신전자초방>은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중국에서 배워와 스스로 연구하여 완성한 화약 제조 방법을 기록한 책이다.
거북선의 주무기, 총통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해전 승리에도 화포는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때 사용된 화포는 총통이라고 불렀는데, 천자문에서 뜻을 가져와 천자포, 지자포, 현자포, 황자포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 거북선의 용 머리에 화포를 설치하고, 입을 화포 구멍으로 활용했다. 이 때 포탄은 1.6km까지 날아가서 왜적의 전함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의 화약 화기 기술이 뒤져 있어 일본 수군은 백병전 위주의 재래식 해전전술만을 고집했던 반면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원거리 총통포격 전술과 활, 화공술 등의 재래식 해전전술을 적절히 결합한 혁신된 수군이었다.
이렇듯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발전을 거듭해온 화기와 화약은 외적의 침략을 방지하고 국방을 지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또 화약과 화기 만드는 기술은 중국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되었으며, 왜인들은 우리의 화약 병기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