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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4일 (금) 11:12 판

제목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
집필자 주환석
인물/기관/단체 가야(加耶), 임나(任那), 야마토왜(大和倭), 진구황후(神功皇后)
장소/공간 한반도 남부 지방, 일본 긴키내(近畿內) 지방
사건 고대 일본과 한반도와의 교류
기록물 삼국사기(三國史記),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일본서기(日本書紀)
개념용어 임나일본부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식민사관, 타율성이론
물품/도구/유물 광개토대왕릉비



원고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

가야는 서기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 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가야 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하지만 가야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부족한 관계로, 가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대외관계는 명확하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특히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긴키내(近畿內)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어 오랫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 연맹 자체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20세기 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하던 시기에는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의 현재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일본서기>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391년) 기사(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는 훼손된 문자)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기사 역시, 기사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이며 훼손된 문자를 무엇이라고 가정할지에 따라 다양한 각도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며, 무엇보다 고구려인들이 세운 비석 내용의 주체는 고구려인들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측면에서 과거 일본 학자들의 해석에는 문제가 많다. 한편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야마토왜가 일본열도를 통합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6세기에 들어서야 가능했다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4세기 경에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지방을 식민지로써 경영했다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반면 연구자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여전히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 입각한 역사 서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호주나 필리핀 등 외국 교과서에서도 일본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서술한 사례가 발견된다. 이러한 교과서 왜곡 문제는 한·일 간의 외교 문제로 발전하여 미래지향적인 우호관계 조성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대의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사이의 관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점령국과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일본은 가야가 멸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645년에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명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가야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