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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독립 운동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 |제목= 독립 운동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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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기관/단체= 한민족,[[조선총독부]], [[임시 정부]], [[김구]], [[이봉창]], [[윤봉길]], 광복군, [[이승만]], 주미 외교위원회, [[루스벨트]], [[트루먼]] | + | |제목수정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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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함으로써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36년 동안 한민족은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민족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라 안에서, 나라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과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힘입어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함으로써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36년 동안 한민족은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민족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라 안에서, 나라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과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힘입어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 ||
− | 독립 운동은 나라 안보다는 나라 밖에서 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이다. 독립 운동은 주로 중국과 미국에서 전개되었다. 중국에는 임시 정부가 만들어졌는데 그 임시 | + | 독립 운동은 나라 안보다는 나라 밖에서 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이다. 독립 운동은 주로 중국과 미국에서 전개되었다. 중국에는 임시 정부가 만들어졌는데 그 임시 정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주역은 안창호였고 끝까지 지킨 사람은 김구였다. |
− | + | 안창호는 교육을 통하여 민족 혁신을 이룩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실력 양성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며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으로 자기 개조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중 ‘무실’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그는 점진학교·대성학교·동명학원 등 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운동을 통해서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이라는 교육 이념을 실천하며 독립 운동에 힘썼다. | |
− | + | 중국에 세워진 임시 정부는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 의거, 4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의 일본군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과 고위 관리들에게 피해를 안긴 윤봉길의 의거 등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임시 정부는 광복군을 만들고 그 힘을 길러 나라 안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려 작전을 세우기도 했다. | |
− | + | 또 중국의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서는 독립군 부대가 활약했다. 1919년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좌진 · 김규식 · 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길림성 왕청현(吉林省 汪淸縣)에 본부를 두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김좌진이 이끈 독립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의 것은 청산리 전투이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1,200여 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이는 독립군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 |
− | + | 독립 운동은 미주 지역에서도 펼쳐졌다. 해방을 전후한 때 미국과 멕시코, 쿠바 등에는 약 1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임시 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미국에서 열리는 여러 국제 회의장에 나아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한인 단체들을 연합하여 워싱턴에 주미 외교위원회를 만들었다.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도 이를 존중하여 이승만을 임시 정부의 주미 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 |
− | 전쟁이 | + |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은 임시 정부 주미 외교위원장의 자격으로 미국 국무부에 임시 정부의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온 후에 벌어질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며 소련을 막기 위해서 임시 정부의 승인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한 편에 서서 전쟁을 치르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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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5월, 일본과 한 편에 서서 전쟁하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후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만이 한반도의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8월 6일과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8월 11일 항복을 결정하였다. 한민족은 목숨을 아끼지 않은 독립군의 활약과 연합군의 승전으로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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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독립운동은 국내외가 대부분 유기적으로 연결돼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대외적인 독립운동에 대해서만 적고 있는데, 국내 계몽단체의 항일운동에 대한 내용도 보완되었으면 한다. | + |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독립운동은 국내외가 대부분 유기적으로 연결돼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대외적인 독립운동에 대해서만 적고 있는데, 국내 계몽단체의 항일운동에 대한 내용도 보완되었으면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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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대한민국 역사>으로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대한민국 역사>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대한민국 역사>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대한민국 역사>으로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대한민국 역사>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대한민국 역사>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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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0일 (일) 18:24 판
제목 | 독립 운동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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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인물/기관/단체 | 안창호, 한민족,조선총독부, 임시 정부, 김구, 이봉창, 윤봉길, 광복군, 이승만, 주미 외교위원회, 루스벨트, 트루먼 |
장소/공간 | 훙커우 공원, 상하이, 소련, 카이로, 얄타, 포츠담, 히로시마, 나가사키 |
사건 | 이봉창의 의거, 일본군 전승 기념식, 윤봉길의 의거,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히로시마 원폭 투하 |
개념용어 | 한일병합조약, 무실·역행·충의·용감, 한국의 신탁 통치 안 |
원고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함으로써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36년 동안 한민족은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민족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라 안에서, 나라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과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힘입어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독립 운동은 나라 안보다는 나라 밖에서 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이다. 독립 운동은 주로 중국과 미국에서 전개되었다. 중국에는 임시 정부가 만들어졌는데 그 임시 정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주역은 안창호였고 끝까지 지킨 사람은 김구였다.
안창호는 교육을 통하여 민족 혁신을 이룩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실력 양성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며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으로 자기 개조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중 ‘무실’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그는 점진학교·대성학교·동명학원 등 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운동을 통해서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이라는 교육 이념을 실천하며 독립 운동에 힘썼다.
중국에 세워진 임시 정부는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 의거, 4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의 일본군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과 고위 관리들에게 피해를 안긴 윤봉길의 의거 등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임시 정부는 광복군을 만들고 그 힘을 길러 나라 안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려 작전을 세우기도 했다.
또 중국의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서는 독립군 부대가 활약했다. 1919년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좌진 · 김규식 · 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길림성 왕청현(吉林省 汪淸縣)에 본부를 두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김좌진이 이끈 독립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의 것은 청산리 전투이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1,200여 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이는 독립군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독립 운동은 미주 지역에서도 펼쳐졌다. 해방을 전후한 때 미국과 멕시코, 쿠바 등에는 약 1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임시 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미국에서 열리는 여러 국제 회의장에 나아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한인 단체들을 연합하여 워싱턴에 주미 외교위원회를 만들었다.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도 이를 존중하여 이승만을 임시 정부의 주미 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은 임시 정부 주미 외교위원장의 자격으로 미국 국무부에 임시 정부의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온 후에 벌어질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며 소련을 막기 위해서 임시 정부의 승인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한 편에 서서 전쟁을 치르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1945년 5월, 일본과 한 편에 서서 전쟁하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후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만이 한반도의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8월 6일과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8월 11일 항복을 결정하였다. 한민족은 목숨을 아끼지 않은 독립군의 활약과 연합군의 승전으로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었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201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자료
- 『자료대한민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970
- 송남헌, 『해방삼십년사』Ⅰ, 한국사료연구소, 1976
-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79
- 『한국현대사』, 국사편찬위원회편, 1982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독립운동은 국내외가 대부분 유기적으로 연결돼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대외적인 독립운동에 대해서만 적고 있는데, 국내 계몽단체의 항일운동에 대한 내용도 보완되었으면 한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대한민국 역사>으로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대한민국 역사>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대한민국 역사>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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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서술했으면... 그것만으로도 분량 충분 - 독립운동의 변천 과정을 국내외 정세와 연결하여 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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