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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은 비디오 아트 분야를 새롭게 만들고 많은 작품을 발표한 현대 예술가이다.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 텔레비전 등의 전자 제품을 표현 매체로 활용하는 예술이다. 영화와 미술의 확장된 개념으로 여겨지는 비디오 아트가 만들어짐으로써 미술은 회화나 조각의 형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현대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백남준에게 독일의 언론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붙였다. | ||
+ |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도쿄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지만 그는 음악과 철학에 심취하였다. 1957년 독일로 간 백남준은 뮌헨대학교와 쾰른대학교,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 등에서 서양 건축과 작곡을 공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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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무렵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큰 영감을 얻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라는,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를 시작으로, 1962년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플럭서스는 일종의 급진적 미술 운동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독일에서 꽃피웠던 국제적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다. 이들은 관념보다는 행위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예술과 일상적 삶의 접목을 중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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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콜라주 기법이 유화물감을 대신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라고 공언했던 그는 비디오의 폭넓은 표현가능성을 발견하고 순수 전자음악 작곡에서 시각미술로 방향을 바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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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 ||
+ | 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라는 개인 작품전을 열어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을 선보였다. 열세 대의 실험 TV를 동원해 소리의 시각화를 예술 작품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공식적인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은 1965년에 발표되었다.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으로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 그 영상을 곧바로 ‘카페 오 고고(Cafe au Go Go)에서 공개 방영한 것이 미술사에 기록된 첫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백남준은 이 무렵 비디오 매체에서 음악과 시각을 결합해 다양한 형태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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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과 함께 ‘성인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 ‘생상스 주제에 의한 변주’ 등 음악과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뉴욕에서 공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1966년 ‘오페라 섹스트로닉’ 초연 때는 무어만이 웃옷을 벗고 첼로를 연주하다 경찰에 체포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결과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고 법이 개정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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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년부터 백남준은 TV 모니터를 여러 개 설치하고 제작된 비디오 테이프 영상을 내보내는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을 진행했다. 이 무렵 발표된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혼합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을 얻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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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굿모닝 미스터 오웰=== | ||
+ |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뉴욕 WNET 방송국에서 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1984년 1월 1일 실시한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의 퍼포먼스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전 세계 2천5백만 명이 시청하였다. 뉴욕과 프랑스의 방송국,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영된 것이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는 ‘바이바이 키플링’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손에 손잡고’라는 인공위성 쇼를 발표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서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담은 ‘칭기스칸의 복권’, ‘스키타이의 왕 단군’, ‘고대 기마 인물상’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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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년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극복하고 예술가로서 다시 일어서 독일 비디오 조각전, 바젤 국제 아트 페어에 참가했다. 또 2000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에서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의 작품으로 레이저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선보였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난 백남준의 유해는 화장 후 본인의 소망대로 한국과 미국,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한국의 서울은 백남준이 태어난 곳이고 미국의 뉴욕은 주요 활동 무대였으며 독일은 그가 평소 예술의 고향이라고 불렀던 나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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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7일 (월) 11:44 판
백남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은 비디오 아트 분야를 새롭게 만들고 많은 작품을 발표한 현대 예술가이다.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 텔레비전 등의 전자 제품을 표현 매체로 활용하는 예술이다. 영화와 미술의 확장된 개념으로 여겨지는 비디오 아트가 만들어짐으로써 미술은 회화나 조각의 형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현대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백남준에게 독일의 언론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붙였다.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도쿄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지만 그는 음악과 철학에 심취하였다. 1957년 독일로 간 백남준은 뮌헨대학교와 쾰른대학교,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 등에서 서양 건축과 작곡을 공부하였다.
이 무렵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큰 영감을 얻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라는,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를 시작으로, 1962년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플럭서스는 일종의 급진적 미술 운동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독일에서 꽃피웠던 국제적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다. 이들은 관념보다는 행위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예술과 일상적 삶의 접목을 중시하였다.
"콜라주 기법이 유화물감을 대신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라고 공언했던 그는 비디오의 폭넓은 표현가능성을 발견하고 순수 전자음악 작곡에서 시각미술로 방향을 바꿨다.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라는 개인 작품전을 열어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을 선보였다. 열세 대의 실험 TV를 동원해 소리의 시각화를 예술 작품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공식적인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은 1965년에 발표되었다.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으로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 그 영상을 곧바로 ‘카페 오 고고(Cafe au Go Go)에서 공개 방영한 것이 미술사에 기록된 첫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백남준은 이 무렵 비디오 매체에서 음악과 시각을 결합해 다양한 형태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과 함께 ‘성인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 ‘생상스 주제에 의한 변주’ 등 음악과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뉴욕에서 공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1966년 ‘오페라 섹스트로닉’ 초연 때는 무어만이 웃옷을 벗고 첼로를 연주하다 경찰에 체포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결과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고 법이 개정되기도 했다.
1974년부터 백남준은 TV 모니터를 여러 개 설치하고 제작된 비디오 테이프 영상을 내보내는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을 진행했다. 이 무렵 발표된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혼합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을 얻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뉴욕 WNET 방송국에서 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1984년 1월 1일 실시한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의 퍼포먼스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전 세계 2천5백만 명이 시청하였다. 뉴욕과 프랑스의 방송국,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영된 것이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는 ‘바이바이 키플링’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손에 손잡고’라는 인공위성 쇼를 발표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서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담은 ‘칭기스칸의 복권’, ‘스키타이의 왕 단군’, ‘고대 기마 인물상’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1996년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극복하고 예술가로서 다시 일어서 독일 비디오 조각전, 바젤 국제 아트 페어에 참가했다. 또 2000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에서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의 작품으로 레이저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선보였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난 백남준의 유해는 화장 후 본인의 소망대로 한국과 미국,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한국의 서울은 백남준이 태어난 곳이고 미국의 뉴욕은 주요 활동 무대였으며 독일은 그가 평소 예술의 고향이라고 불렀던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