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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년의 1차 오일쇼크로 한국경제는 위기를 맞았다. 원유가격이 한꺼번에 4배나 오르자 국내 물가는 두 배로 올랐다. 국제적 경기침체로 수출이 줄자 달러 유입은 줄고 해외에 지불해야 할 원유대금은 급증하면서 외환위기마저 겪게 되었다. 반면 산유국들은 고유가에 힘입어 오일머니가 쌓이게 되자 이 돈을 경제건설과 도로, 항만, 공항 등 사회간접자본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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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에 한국 정부는 원유대금을 지급하기 위해 중동으로 빠져나간 달러를 건설시장에 진출하여 되찾아 오자는 역발상을 했다. 마침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속도로공사 2,400만 달러 계약을 체결했다. 정부 정책은 적중했고,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중동건설시장에서 벌어드린 오일머니로 한국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80년대와 90년대 고도성장을 이룰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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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건설업체는 초기에는 공사전체를 맡은 해외유명회사의 하청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신용과 기술을 축적하면서 독자적으로 대형공사들을 맡게 되었다. 정부도 적극적으로 한국건설업체의 해외 진출을 도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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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일머니로 되찾은 경제 활력=== | ||
+ | 중동 진출 첫해인 1974년 수주액은 2억6000만 달러였으나 다음해에는 그 세배인 7억5000만 달러였고, 1980년에는 다시 10배 이상으로 늘어 82억 달러가 되었다. 1975-1980 기간 한국 외화수입액의 85.3%가 중동건설에서 번 달러였다. 1981년과 1982년 해외건설 수주 총액은 각각 137억 달러와 133억 달러로 미국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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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견 근로자 수도 급증했다. 1975년 6000명이던 것이 1978년에는 10만 명에 육박했고 한때 20만 명까지 이르렀다. 성취욕이 강하고 근로기강이 엄정한 한국 근로자들은 해외 건설업체와 중동 현지인들에게 높은 신망을 받았다. 한국의 건설 업체는 공기(工期)를 맞추는 데 만족하지 않고 늘 완공 일정을 단축해 명성을 쌓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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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건설은 수입 유발 효과가 거의 없으므로 외화 가득률이 매우 높다. 당시에는 한국의 인건비가 국제적으로 낮은 축이어서 한국인 근로자를 많이 고용했기 때문에, 시공 관리 수익뿐만 아니라 노무 인건비도 고스란히 국내에 유입되었다. 중동에서 벌어온 오일머니 덕분에 오일쇼크로 위축되었던 한국 경제는 다시 활력을 찾았다. 수출입국(輸出立國)을 국가적 목표로 추진해온 한국은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경상수지 흑자까지 기록했다. 내수시장도 활성화되어 자동차 냉장고 등 고가 소비재 수요가 크게 늘었고, 주택시장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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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기업들=== | ||
+ | 중동 특수로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한 대표적 기업이 현대건설이다. 현대는 1975년 10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건설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12월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따냈다. 1976년에는 기술적으로 난공사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9억3000만 달러에 수주했다. 현대는 이런 공사에 필요한 초대형 철구조물을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하여 대형 바지선에 실어 대양을 항해하여 현지로 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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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인 리비아의 물문제 해결을 위해 동아건설이 시공한 대수로 사업은 그 공사 규모와 수주 금액 모두 전설적이었다. 동아건설은 이 사업의 1단계 1,874km를 39억 달러에, 2단계 1730km을 102억 달러에 수주하여 성공적으로 완공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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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건설시장은 1986년부터 1992년까지는 이 지역의 전쟁과 정정불안으로 침체기를 겪었다. 한국의 업체들은 동남아지역으로 진출을 모색하여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각종 공사를 수주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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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의 중동건설진출에는 한국의 건설근로자가 대거 참여했으나 90년대부터는 동남아와 서남아 지역의 근로자를 쓰고 있다. 수주내역도 초기의 단순건설에서 이제는 원자력발전소, 대형교량, 댐, 초고층빌딩, 지하철, 복합주택단지, 항만과 물류센터 등 기술적으로 고도화되고 규모도 대형화되고 있다. 그 실례로, 삼성건설은 세계 최고층 빌딩인 두바이의 부르즈할리파(높이 829m)를 시공했으며, 현대건설은 세계최장 교량인 말레이지아의 페낭대교를 건설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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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이후 중동시장의 건설경기도 서서히 회복되어 매년 수십억 달러 수준으로 수주하고 있다. 2016년 해외건설 수주액은 중동이 107억 달러, 동남아는 127억 달러로 이제는 동남아의 비중이 더 높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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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의 기적은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눈부신 한국인의 업적이다. 이 기적은 석유파동으로 잃은 돈을 산유국에 가서 다시 벌어 오자는 발상을 한 정부의 적극성과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열사의 사막에서 모래 섞인 밥을 먹으며 가족과 나라를 위해 외화벌이에 나선 국민이 힘을 합쳐 이루어낸 것이다. | ||
2017년 11월 27일 (월) 11:29 판
중동건설진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석유 파동
1973년의 1차 오일쇼크로 한국경제는 위기를 맞았다. 원유가격이 한꺼번에 4배나 오르자 국내 물가는 두 배로 올랐다. 국제적 경기침체로 수출이 줄자 달러 유입은 줄고 해외에 지불해야 할 원유대금은 급증하면서 외환위기마저 겪게 되었다. 반면 산유국들은 고유가에 힘입어 오일머니가 쌓이게 되자 이 돈을 경제건설과 도로, 항만, 공항 등 사회간접자본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원유대금을 지급하기 위해 중동으로 빠져나간 달러를 건설시장에 진출하여 되찾아 오자는 역발상을 했다. 마침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속도로공사 2,400만 달러 계약을 체결했다. 정부 정책은 적중했고,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중동건설시장에서 벌어드린 오일머니로 한국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80년대와 90년대 고도성장을 이룰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한국의 건설업체는 초기에는 공사전체를 맡은 해외유명회사의 하청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신용과 기술을 축적하면서 독자적으로 대형공사들을 맡게 되었다. 정부도 적극적으로 한국건설업체의 해외 진출을 도왔다.
오일머니로 되찾은 경제 활력
중동 진출 첫해인 1974년 수주액은 2억6000만 달러였으나 다음해에는 그 세배인 7억5000만 달러였고, 1980년에는 다시 10배 이상으로 늘어 82억 달러가 되었다. 1975-1980 기간 한국 외화수입액의 85.3%가 중동건설에서 번 달러였다. 1981년과 1982년 해외건설 수주 총액은 각각 137억 달러와 133억 달러로 미국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파견 근로자 수도 급증했다. 1975년 6000명이던 것이 1978년에는 10만 명에 육박했고 한때 20만 명까지 이르렀다. 성취욕이 강하고 근로기강이 엄정한 한국 근로자들은 해외 건설업체와 중동 현지인들에게 높은 신망을 받았다. 한국의 건설 업체는 공기(工期)를 맞추는 데 만족하지 않고 늘 완공 일정을 단축해 명성을 쌓았다.
해외건설은 수입 유발 효과가 거의 없으므로 외화 가득률이 매우 높다. 당시에는 한국의 인건비가 국제적으로 낮은 축이어서 한국인 근로자를 많이 고용했기 때문에, 시공 관리 수익뿐만 아니라 노무 인건비도 고스란히 국내에 유입되었다. 중동에서 벌어온 오일머니 덕분에 오일쇼크로 위축되었던 한국 경제는 다시 활력을 찾았다. 수출입국(輸出立國)을 국가적 목표로 추진해온 한국은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경상수지 흑자까지 기록했다. 내수시장도 활성화되어 자동차 냉장고 등 고가 소비재 수요가 크게 늘었고, 주택시장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기업들
중동 특수로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한 대표적 기업이 현대건설이다. 현대는 1975년 10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건설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12월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따냈다. 1976년에는 기술적으로 난공사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9억3000만 달러에 수주했다. 현대는 이런 공사에 필요한 초대형 철구조물을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하여 대형 바지선에 실어 대양을 항해하여 현지로 보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인 리비아의 물문제 해결을 위해 동아건설이 시공한 대수로 사업은 그 공사 규모와 수주 금액 모두 전설적이었다. 동아건설은 이 사업의 1단계 1,874km를 39억 달러에, 2단계 1730km을 102억 달러에 수주하여 성공적으로 완공했다.
중동건설시장은 1986년부터 1992년까지는 이 지역의 전쟁과 정정불안으로 침체기를 겪었다. 한국의 업체들은 동남아지역으로 진출을 모색하여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각종 공사를 수주했다.
초기의 중동건설진출에는 한국의 건설근로자가 대거 참여했으나 90년대부터는 동남아와 서남아 지역의 근로자를 쓰고 있다. 수주내역도 초기의 단순건설에서 이제는 원자력발전소, 대형교량, 댐, 초고층빌딩, 지하철, 복합주택단지, 항만과 물류센터 등 기술적으로 고도화되고 규모도 대형화되고 있다. 그 실례로, 삼성건설은 세계 최고층 빌딩인 두바이의 부르즈할리파(높이 829m)를 시공했으며, 현대건설은 세계최장 교량인 말레이지아의 페낭대교를 건설했다.
2000년 이후 중동시장의 건설경기도 서서히 회복되어 매년 수십억 달러 수준으로 수주하고 있다. 2016년 해외건설 수주액은 중동이 107억 달러, 동남아는 127억 달러로 이제는 동남아의 비중이 더 높다.
한강의 기적은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눈부신 한국인의 업적이다. 이 기적은 석유파동으로 잃은 돈을 산유국에 가서 다시 벌어 오자는 발상을 한 정부의 적극성과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열사의 사막에서 모래 섞인 밥을 먹으며 가족과 나라를 위해 외화벌이에 나선 국민이 힘을 합쳐 이루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