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윤동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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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로 독립운동을 한 윤동주 | |제목= 시로 독립운동을 한 윤동주 | ||
|집필자= 황인희 | |집필자= 황인희 | ||
+ | |제목수정안= | ||
+ | |교열자=유안리 | ||
|인물/기관/단체= 용정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광명학원, 연희전문학교, 조선일보, 경향신문, 릿쿄대학, 도시샤대학, 송몽규, 이양하, 정병욱 | |인물/기관/단체= 용정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광명학원, 연희전문학교, 조선일보, 경향신문, 릿쿄대학, 도시샤대학, 송몽규, 이양하, 정병욱 | ||
|장소/공간= 후쿠오카 형무소 | |장소/공간= 후쿠오카 형무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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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원고'''== | + | =='''1차 원고'''== |
+ |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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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다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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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창작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연희전문 시절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작품으로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경향신문>에 발표된 시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 성찰의 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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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반일 의식이 투철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택했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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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아 성찰의 의지를 나타낸 시로,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그러나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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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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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로부터 1년 후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2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송몽규는 감옥에 갇힌 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이로써 윤동주와 송몽규가 생체 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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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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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및 관련자료=== | ||
+ | ====출처==== | ||
+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 인터넷 다음백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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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련자료==== | ||
+ | * 「윤동주 시의 문학사적 의의」(김용직, 『나라사랑』 23, 1976) | ||
+ | * 「윤동주론의 행방」(김윤식, 『심상』, 1975.2.) | ||
+ | * 「선백의 생애」(윤일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74) | ||
+ | * 「한국시에 있어서의 비극적 황홀」(김종길, 『진실과 언어』, 일지사, 1974) | ||
+ | * 「윤동주론」(김흥규, 『창작과 비평』 33, 1974. 가을.) | ||
+ | * 「윤동주론」(김열규, 『국어국문학』 27, 1964) | ||
+ | |||
+ | =='''연구원 검토'''== | ||
+ | {{검토의견 | ||
+ | |의견1= - 윤동주의 출생한 지역과 가정 환경에 대해 서술할 것<br/> | ||
+ | - 윤동주가 본격적으로 시를 썼던 1935년부터 사망하는 1944년까지의 식민지 상황을 본 원고에서 적고 있는 신사참배, 창씨개명, 치안유지법 등과 연결하여 설명하면,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br/> | ||
+ | - 윤동주가 체포되었을 당시의 상황, 송몽규와의 대화 내용, 당시의 활동 등에 대해 서술하면 시인인 윤동주를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
+ | |의견3=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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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원고'''== | ||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 |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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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아 성찰의 의지를 나타낸 시로,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그러나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참회록’ 시의 전문이다. | ‘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아 성찰의 의지를 나타낸 시로,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그러나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참회록’ 시의 전문이다. | ||
+ | <poem> | ||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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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 ||
+ | </poem> | ||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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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 |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 | ||
− | + | =='''연구원 2차 검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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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토의견 | {{검토의견 | ||
|의견1=윤동주의 ‘참회록’은 원고의 본문 내용에서는 제외하고, 참고자료 형태로 제시함. | |의견1=윤동주의 ‘참회록’은 원고의 본문 내용에서는 제외하고, 참고자료 형태로 제시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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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열본'''== | =='''교열본'''== | ||
+ | ===암울한 현실에서의 자아 성찰=== | ||
+ |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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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다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 ||
+ | |||
+ |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창작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연희전문 시절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작품으로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경향신문>에 발표된 시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성찰과 사색의 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 ||
+ | |||
+ | ===징용을 피하려 선택한 일본 유학=== | ||
+ |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반일 의식이 투철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택했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 ||
+ | |||
+ | ‘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기 반성과 의지를 나타낸 시이다.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그러나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참회록’ 시의 전문이다. | ||
+ | |||
+ | <poem> | ||
+ |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
+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 ||
+ |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 ||
+ | 이다지도 욕될까. | ||
+ | |||
+ |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
+ |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 ||
+ |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 ||
+ | |||
+ |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 ||
+ |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
+ |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 ||
+ |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 ||
+ | |||
+ |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
+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 ||
+ | |||
+ |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
+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
+ |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 ||
+ | </poem> | ||
+ | |||
+ | ===치안유지법으로 시인을 죽인 일본=== | ||
+ |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 ||
+ | |||
+ | 그로부터 1년 후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2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송몽규는 감옥에 갇힌 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이로써 윤동주와 송몽규가 생체 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 ||
+ | |||
+ |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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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 + | [[분류:원고검토용]] |
2017년 11월 20일 (월) 15:58 기준 최신판
제목 | 시로 독립운동을 한 윤동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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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용정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광명학원, 연희전문학교, 조선일보, 경향신문, 릿쿄대학, 도시샤대학, 송몽규, 이양하, 정병욱 |
장소/공간 | 후쿠오카 형무소 |
사건 | 일제강점기, 민족 말살 정책,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 |
개념용어 |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참회록, 생체 실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목차
1차 원고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
중국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다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창작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연희전문 시절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작품으로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경향신문>에 발표된 시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 성찰의 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반일 의식이 투철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택했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아 성찰의 의지를 나타낸 시로,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그러나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그로부터 1년 후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2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송몽규는 감옥에 갇힌 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이로써 윤동주와 송몽규가 생체 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인터넷 다음백과
관련자료
- 「윤동주 시의 문학사적 의의」(김용직, 『나라사랑』 23, 1976)
- 「윤동주론의 행방」(김윤식, 『심상』, 1975.2.)
- 「선백의 생애」(윤일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74)
- 「한국시에 있어서의 비극적 황홀」(김종길, 『진실과 언어』, 일지사, 1974)
- 「윤동주론」(김흥규, 『창작과 비평』 33, 1974. 가을.)
- 「윤동주론」(김열규, 『국어국문학』 27, 1964)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 윤동주의 출생한 지역과 가정 환경에 대해 서술할 것 - 윤동주가 본격적으로 시를 썼던 1935년부터 사망하는 1944년까지의 식민지 상황을 본 원고에서 적고 있는 신사참배, 창씨개명, 치안유지법 등과 연결하여 설명하면,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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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
중국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다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창작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연희전문 시절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작품으로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경향신문>에 발표된 시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 성찰의 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반일 의식이 투철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택했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아 성찰의 의지를 나타낸 시로,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그러나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참회록’ 시의 전문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그로부터 1년 후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2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송몽규는 감옥에 갇힌 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이로써 윤동주와 송몽규가 생체 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
연구원 2차 검토
검토의견 | |
• 윤동주의 ‘참회록’은 원고의 본문 내용에서는 제외하고, 참고자료 형태로 제시함. | |
교열본
암울한 현실에서의 자아 성찰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
중국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다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창작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연희전문 시절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작품으로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경향신문>에 발표된 시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성찰과 사색의 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징용을 피하려 선택한 일본 유학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반일 의식이 투철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택했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기 반성과 의지를 나타낸 시이다.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그러나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참회록’ 시의 전문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치안유지법으로 시인을 죽인 일본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그로부터 1년 후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2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송몽규는 감옥에 갇힌 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이로써 윤동주와 송몽규가 생체 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