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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7〜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7〜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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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 |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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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1=<del>“그런데 순조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였던 예순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예순대비는 정조 치하에서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던 벽파와 함께 정조의 개혁을 모두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았다.”</del> 부분은 삭제함. | |의견1=<del>“그런데 순조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였던 예순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예순대비는 정조 치하에서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던 벽파와 함께 정조의 개혁을 모두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았다.”</del> 부분은 삭제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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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 ||
− | + |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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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 |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 | ||
2017년 11월 20일 (월) 15:56 기준 최신판
제목 |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 정조 |
---|---|
집필자 | 황인희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장조,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효장세자, 노론, 규장각, 홍국영, 숙위소, 시파, 벽파, 남인, 소론, 실학자, 장용영, 순조, 영조, 예순대비 |
장소/공간 | 화성, 수원, 화산, 화성행궁, 현륭원 |
사건 | 임오화변, 화성 건설, 을묘원행 |
개념용어 | 세손, 책봉, 뒤주, 연좌제, 대리 청정, 붕당, 탕평 정치, 도승지, 외척, 사대 사상, ‘진경산수’, ‘동국진체’, 양반, 중인, 평민, ‘진경 시대’, 상왕, 수렴청정 |
목차
1차 원고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규장각은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정조는 규장각에서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재를 양성했다.
당시 조정은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 있었다. 영조 때 시작된 외척 중심의 노론은 벽파가 되고 정조의 편을 들었던 남인과 소론, 노론 일부는 시파로 뭉쳤던 것이다. 정조가 주로 등용한 사람은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었다. 당파 중심으로 인재를 등용해서가 아니라 정조의 개혁적인 통치 이념에 맞는 사람들을 찾다보니 시파 중심이 되었다. 이때 벽파는 때가 오기만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순조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였던 예순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예순대비는 정조 치하에서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던 벽파와 함께 정조의 개혁을 모두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자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영조와 정조의 나라』(박광용, 푸른역사, 1998)
- 『진경시대』(최완수 외, 돌베게, 1998)
- 『꿈의 문화유산 화성』(유봉학, 신구문화사, 1996)
- 「정조의 『교화사상」(정옥자, 『규장각』19, 1996)
- 「정조의 초계문신교육과 문체정책」(정옥자, 『규장각』6, 1982)
- 「정조의 학예사상」(정옥자, 『한국학보』11, 1978)
- 「정조의 문예부흥정책」(정형우, 『동방학지』11, 1970)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 임금(생몰연대, 즉위년도) - 르네상스보다 문예부흥 등으로 말을 바꾸었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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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7〜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규장각은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정조는 규장각에서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재를 양성했다.
당시 조정은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 있었다. 영조 때 시작된 외척 중심의 노론은 벽파가 되고 정조의 편을 들었던 남인과 소론, 노론 일부는 시파로 뭉쳤던 것이다. 정조가 주로 등용한 사람은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었다. 당파 중심으로 인재를 등용해서가 아니라 정조의 개혁적인 통치 이념에 맞는 사람들을 찾다보니 시파 중심이 되었다. 이때 벽파는 때가 오기만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
연구원 2차 검토
검토의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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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열본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